[625] 6.25를 넘어서 민족의 화해를
본문
먼저 6. 25를 겪은 감용태 권찰(전 초등학교 교장)의 증언을 듣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따라서 6. 25에 대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원수가 아니니까요. 6. 25를 넘어 화해를 이룬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증오(미워)하고, 갈라서자(분단고착) 하고 도와주지 말라 하면 우익인 거 같은데 주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 같고, 사랑하고 이해하며 도와주고 하나되자고 하면 좌익같은데 주님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일 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국민장 애도 기간에 핵폭탄 실험이나 하는 북한. 눈치와 매너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 어쩔 때는 부끄럽습니다. 서울이 50km라고 위협할 때마다 강조하는 그들, 그들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오늘은 6. 25 59주년이자 민족화해주일입니다. 동족상잔 50년을 넘기면서 6. 25를 상기하며 이제까지 미워하고 갈등하던 남북문제를 깊이 고민하면서 6. 25를 넘어서 이제는 민족이 하나되는 통일을 향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 겨레는 38선을 가운데 두고 극한으로 대치해 왔습니다. 우리 같은 한 민족, 같은 언어와 문화를 지닌 한 형제, 자매들인데 왜들 그렇게 싸웁니까? 세상에 이 같은 원수가 어디 있을까? 동서독도 통일이 되었고,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과 민주주의 종주국이랄 수 있는 미국도 화해되었는데 왜 우리 나라 통일은 안됩니까?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김일성 이가 죽으면 될 줄 알았는데도 통일의 그 날은 멀고, 그 길은 험합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99년 6월에 ‘민족화해주일’ 관련한 입장을 발표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먼저 민족상잔의 죄를 고백하고, 남북이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서 공생 공영의 길을 모색해야 함을 지적했습니다. 이에 구체적 방안으로 남측 교회가 북한동포돕기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인도주의적 동포애의 실천을 요청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복음은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고, 이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의 막힌 담을 허물어 화해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을 체험한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했고, 선교는 먹거리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에서 결실을 거두었습니다(행 2:37~47).
예수님의 첫 설교인 산상수훈(눅 4:18~19)으로 시작되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1988년)’이 선포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는 그리스도의 평화보다는 로마제국의 평화가 우선시 되고, 비폭력과 평화의 가치가 무력과 탐욕의 세력에 의해 간과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현실이 남북을 또 다시 경색국면으로 몰아가고, 한반도의 평화정착 과정에 난항을 겪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평화는 역사의 변두리에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나눔을 통해서 시작되었기에, 올 3월에 중국 북경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조선그리스도련맹(KCF)의 대표단은 북한 어린이 식량지원사업에 의견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북측은 현재 매년 최소한 100만톤 정도의 식량이 부족한데, 작년 이후 남북 당국의 경색국면으로 인해 식량을 비롯한 인도적 지원이 전면 중단된 상태이며, 세계식량기구를 포함한 해외지원이 감소하여 자체 조달마저도 원활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는 정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를 맺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을 따라, 남북 간의 민간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틈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2009년 민족화해주일을 맞이하여, 북녘의 어린 생명들이 처한 식량난에 대한 안타까운 현실을 전해들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의 손길을 모으고자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 그리고 모금운동은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화하고 드러내는 일임을 확신합니다.
인류를 사랑의 띠로 묶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령의 역사가 민족화해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남과 북 사이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통일과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요?
1. 겸손과 온유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2절)
이 말씀은 부르심 받은 성도가 지녀야 할 구체적인 덕목을 말씀하는 것인데.
(1) 겸손은 -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입니다(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당시 '겸손'은 비열한 마음과 노예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미덕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낮아지시는 모범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빌 2:6-11)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미덕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2) 온유는 '이해심 깊음'이라는 말로서 '정중함'(gentleness)이라고도 번역되었습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의 성품이며(고후 10:1) 성령의 열매로서(갈 5:22, 23)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첫째) '중용'(中庸)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할 때 사용되며 둘째)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 등을 스스로 자제하는 덕성을 말합니다(약 3:3-8).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는 물론 온유해야 하지만 교회 밖에서도 당연히 온유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모두가 온유하셔서 여러분이 크게 되시고 땅을 차지하시는 축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2절하)
오래 참음은 죄인을 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이며(롬2:4;9:22; 벧전3:20; 벧후 3:15) 그리스도인들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성령의 열매로서(고전 13:4; 고후 6:6; 갈 5:22; 골 3:12),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는 정신(Lightfoot, Lincoln)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앞서 말한 '오래 참음'을 확대한 미덕인데 바울은 골3:13에서 단순히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했는데 본절에서는 '사랑 가운데서' 라는 단어를 더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 공급되어지는(롬 5:5)새 시대의 능력으로(고전 13장; 갈 5:14, 22), 어떤 보상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은 자기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이며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약함과 결점까지를 포함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6)
우리 국민의 정서는 남인, 북인, 노론, 소론, 사색당파로 싸워온 이씨 조선 500년의 정서입니다. 이러한 정서 때문에 6. 25도 생겼고, 그 비극은 오늘까지 계속됩니다. 가족 중 하나가 권력을 잡으면 다른 가족에서 인물이 날 수 없도록 씨를 말립니다. 이렇게 하여 당하는 사람들은 한이 맺힙니다. 이들에게 또 기회가 주어지면 철저히 복수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이 같은 국민정서를 정화하고, 바꾸기 전에는 통일이란 어렵습니다. 나는 죽고 너를 살리는 것이 곧 내가 살고, 우리가 사는 길임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러면 이 같은 정서의 본을 보인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철저히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는 철저히 남을 섬겼습니다.
그는 철저히 남을 위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남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잘 사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정서를 예수의 정서로 바꾸어야 합니다. 누구부터 해야할까요? 나부터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부터요, 우리 노회, 우리 교단, 우리 한국교회가 먼저 철저하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고, 예수님의 십자가 지는 자기희생으로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명박 정권과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바른 역사인식을 하고 남북관계가 회복되어 민족의 화해와 통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원수가 아니니까요. 6. 25를 넘어 화해를 이룬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증오(미워)하고, 갈라서자(분단고착) 하고 도와주지 말라 하면 우익인 거 같은데 주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 같고, 사랑하고 이해하며 도와주고 하나되자고 하면 좌익같은데 주님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일 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국민장 애도 기간에 핵폭탄 실험이나 하는 북한. 눈치와 매너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 어쩔 때는 부끄럽습니다. 서울이 50km라고 위협할 때마다 강조하는 그들, 그들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오늘은 6. 25 59주년이자 민족화해주일입니다. 동족상잔 50년을 넘기면서 6. 25를 상기하며 이제까지 미워하고 갈등하던 남북문제를 깊이 고민하면서 6. 25를 넘어서 이제는 민족이 하나되는 통일을 향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 겨레는 38선을 가운데 두고 극한으로 대치해 왔습니다. 우리 같은 한 민족, 같은 언어와 문화를 지닌 한 형제, 자매들인데 왜들 그렇게 싸웁니까? 세상에 이 같은 원수가 어디 있을까? 동서독도 통일이 되었고,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과 민주주의 종주국이랄 수 있는 미국도 화해되었는데 왜 우리 나라 통일은 안됩니까?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김일성 이가 죽으면 될 줄 알았는데도 통일의 그 날은 멀고, 그 길은 험합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99년 6월에 ‘민족화해주일’ 관련한 입장을 발표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먼저 민족상잔의 죄를 고백하고, 남북이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서 공생 공영의 길을 모색해야 함을 지적했습니다. 이에 구체적 방안으로 남측 교회가 북한동포돕기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인도주의적 동포애의 실천을 요청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복음은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고, 이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의 막힌 담을 허물어 화해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을 체험한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했고, 선교는 먹거리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에서 결실을 거두었습니다(행 2:37~47).
예수님의 첫 설교인 산상수훈(눅 4:18~19)으로 시작되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1988년)’이 선포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는 그리스도의 평화보다는 로마제국의 평화가 우선시 되고, 비폭력과 평화의 가치가 무력과 탐욕의 세력에 의해 간과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현실이 남북을 또 다시 경색국면으로 몰아가고, 한반도의 평화정착 과정에 난항을 겪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평화는 역사의 변두리에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나눔을 통해서 시작되었기에, 올 3월에 중국 북경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조선그리스도련맹(KCF)의 대표단은 북한 어린이 식량지원사업에 의견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북측은 현재 매년 최소한 100만톤 정도의 식량이 부족한데, 작년 이후 남북 당국의 경색국면으로 인해 식량을 비롯한 인도적 지원이 전면 중단된 상태이며, 세계식량기구를 포함한 해외지원이 감소하여 자체 조달마저도 원활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는 정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를 맺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을 따라, 남북 간의 민간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틈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2009년 민족화해주일을 맞이하여, 북녘의 어린 생명들이 처한 식량난에 대한 안타까운 현실을 전해들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의 손길을 모으고자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 그리고 모금운동은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화하고 드러내는 일임을 확신합니다.
인류를 사랑의 띠로 묶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령의 역사가 민족화해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남과 북 사이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통일과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요?
1. 겸손과 온유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2절)
이 말씀은 부르심 받은 성도가 지녀야 할 구체적인 덕목을 말씀하는 것인데.
(1) 겸손은 -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입니다(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당시 '겸손'은 비열한 마음과 노예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미덕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낮아지시는 모범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빌 2:6-11)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미덕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2) 온유는 '이해심 깊음'이라는 말로서 '정중함'(gentleness)이라고도 번역되었습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의 성품이며(고후 10:1) 성령의 열매로서(갈 5:22, 23)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첫째) '중용'(中庸)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할 때 사용되며 둘째)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 등을 스스로 자제하는 덕성을 말합니다(약 3:3-8).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는 물론 온유해야 하지만 교회 밖에서도 당연히 온유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모두가 온유하셔서 여러분이 크게 되시고 땅을 차지하시는 축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2절하)
오래 참음은 죄인을 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이며(롬2:4;9:22; 벧전3:20; 벧후 3:15) 그리스도인들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성령의 열매로서(고전 13:4; 고후 6:6; 갈 5:22; 골 3:12),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는 정신(Lightfoot, Lincoln)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앞서 말한 '오래 참음'을 확대한 미덕인데 바울은 골3:13에서 단순히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했는데 본절에서는 '사랑 가운데서' 라는 단어를 더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 공급되어지는(롬 5:5)새 시대의 능력으로(고전 13장; 갈 5:14, 22), 어떤 보상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은 자기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이며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약함과 결점까지를 포함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6)
우리 국민의 정서는 남인, 북인, 노론, 소론, 사색당파로 싸워온 이씨 조선 500년의 정서입니다. 이러한 정서 때문에 6. 25도 생겼고, 그 비극은 오늘까지 계속됩니다. 가족 중 하나가 권력을 잡으면 다른 가족에서 인물이 날 수 없도록 씨를 말립니다. 이렇게 하여 당하는 사람들은 한이 맺힙니다. 이들에게 또 기회가 주어지면 철저히 복수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이 같은 국민정서를 정화하고, 바꾸기 전에는 통일이란 어렵습니다. 나는 죽고 너를 살리는 것이 곧 내가 살고, 우리가 사는 길임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러면 이 같은 정서의 본을 보인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철저히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는 철저히 남을 섬겼습니다.
그는 철저히 남을 위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남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잘 사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정서를 예수의 정서로 바꾸어야 합니다. 누구부터 해야할까요? 나부터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부터요, 우리 노회, 우리 교단, 우리 한국교회가 먼저 철저하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고, 예수님의 십자가 지는 자기희생으로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명박 정권과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바른 역사인식을 하고 남북관계가 회복되어 민족의 화해와 통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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