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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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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 교회가 함께 지키는 삼일절 기념주일이 됩니다. 1919년 3월 1일에 우리 민족은 독립을 선언하는 민족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 성격과 철학이 성서적이었고 그 일을 주도한 민족 지도자 33인의 절반이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가 이를 높이 평가하고 삼일절은 교회 절기로 결정해서 매년 지켜오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축복 가운데 가장 귀중한 선물이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며 그 형상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대의 가치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됨의 기쁨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것이 자유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바로 인간을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오늘 성경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고 얻은 가장 큰 기쁨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여호와 하나님 백성에로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의 희생을 통하여 모든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신 것이고 그것이 자유함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얻은 몇 가지 자유함이 있는데, 그
 첫번째가 죄로부터 자유함입니다. 본래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은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죄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 아래로 떨어진 인간을 본래의 모습대로 만들려고 인간이 지은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도록 회복시키신 것이 죄로부터 자유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우리가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양심의 고통으로부터의 자유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 여기 죄를 지은 한 죄수가 재판을 받는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재판관이 재판의 최종 결정을 “너는 죄가 없다. 석방이다. ” 그러면 그 죄는 끝난 것입니다. OJ 심슨이 두 사람을 죽인 살인용의자로 재판을 받을 때 신문에 논평이 많이 났습니다. 미국 국민들은 1년 넘게 긴 재판을 TV로 지켜보면서 그가 살인자라고 믿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부족하다고 논평이 되었습니다. 결과는 마지막 재판관이 너는 죄 없다고 판결한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죄가 있다 하여도 최종 재판관이 죄 없다고 선언하면 죄는 없어진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풀려나서 여행 다니며 자유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실시하는 죄수에 대한 특례법이 있습니다. 성탄절이나 대통령 취임식 같은 때 특별 사면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죄는 많이 있지만 죄 값은 사면하여 주는 일입니다. “너는 오늘부터 자유의 몸이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과거에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상관없이 자유를 그대로 받아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의 사면령을 받은 고로 양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죄가 있든 그 죄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면령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에 따라서 죄와 죄 아닌 것이 결정되어서 아무리 죄가 많지만 재판관이 나가라고 하면 나와서 누리면 그 뿐입니다. 그 이상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공포, 즉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 생명 불멸의 진리, 영생을 약속 받았기 때문에 최소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음의 관계를 초월하는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날마다 두려우면 어떡하겠습니까? 자유함이 주어져서 영생을 약속받았고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최종 목표는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니.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설교가 종말적 교훈에 초점을 맞춘 것을 예수님의 설교를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아니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영원성을 강조하셨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세상을 살아가는 행복이 있습니다.
제가 장례식 때 하는 예화가 하나 있는데, 한 종합 병원의 간호사가 자기가 맡은 분야가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확인하고 처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오랜 자기의 업무 가운데서 매우 이상한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의 차이가 그의 마음에 갈등을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괴로워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주 초연한 자세로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한 일은 마치 나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한 그런 사람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래 그 일을 하면서 그러한 시간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들의 종교를 조사했습니다. 더 세밀하게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예수를 믿지 않던 그는 그때부터 이것은 틀림없이 초월적 어떤 힘이 있는 것이라고 판단을 하여서 교회에 나가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그로부터 일을 그만두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되겠다. ’고 생각해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외국 유학까지 잘 다녀와서 모국에 돌아와서 평생을 그 진리를 가르치는 신학자로 생을 마쳤습니다. 저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함입니다.
그 다음의 자유함은 인간성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 환자를 보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고 하셨습니다. 병만 나으면 됐지 왜 제사장에게 보이라 하느냐? 제사장이 병이 낫다고 확인 도장을 찍어주어야만 그 사람은 사회에서 정상인의 삶을 살 수 있는 자격을 얻도록 율법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인격 대우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그토록 충성을 다한 것은 자기와 같은 죄인을 인간으로 인격 대우 해 주신 주님의 사랑 때문이었고, 삭개오 같이 돈 많은 사람이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는 파격적 선언을 한 것은 자기에 대한 예수님의 인간 대우 즉, 사랑의 감동 때문에 마음이 움직여서 그런 선언을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누구냐?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형상대로 회복시키는 인간성의 회복!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함의 축복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지키고 있는 이 삼일절의 성격은 어떤 민족이 또 다른 민족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함을 빼앗고 노예화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역행이라는 판단이 삼일운동에 거족적 참여라는 기독교 정신이 반영되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회 참여는 삼일운동이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인 지도자들이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이 일을 하였다는데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율법주의로 만들어서 이방 민족을 절대 배타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의 유언적 교훈을 하실 때, 그들이 그토록 배타하고 있는 사마리아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 복음을 확산시키라. ” 제자들의 마음에는 사마리아는 제외해 놓았습니다. 땅끝까지 가는 것도 제자들은 생각이 없습니다. 히브리 민족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잘못하면 배타주의가 되기 쉬운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불교 지도자, 천도교 지도자들과 밤을 새워 독립 선언문을 같이 만들고 민족 구원은 우리 모두의 똑같은 사명이라는 공동체 의식과 피차를 인격 존중했을 때 거기에서 아름다운 삼일절이라고 하는 민족 역사가 탄생하였다는 것이 훌륭한 사회 참여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영혼구원의 교리가 다르다고 하여도 사회악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일은 모든 종교가 하나의 길을 가고 있음을 삼일절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에는 이때 참여하고 나선 민족 지도자들은 누가 선출한 적도 없고 나를 뽑아달라고 선거운동을 한 일도 없습니다. 스스로 나선 지도자들입니다. 왜 스스로 나섰는가? 아무도 나서지 않는 길이기 때문에 나섰고 그것은 곧 죽음의 길이기 때문에, 그들은 위대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에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정치 정당이 목사들 중심으로 생긴다는 발표가 된 기사를 읽었습니다. 저는 반대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현직 국회의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종교인이 기독교 신자들입니다. 이미 대한민국 국회는 기독교 정당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곳에서 기독교 정신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목사들은 더욱 안 된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실제로 목사들은 정치를 모릅니다. 잘못한다고 바깥에서 비판하기는 쉬워도 내가 잘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국회라고 하는 기관이 입법 기관인데 전문적 법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법을 만들겠습니까?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국회를 책망할 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개신교 교단이 100개 이상으로 갈라졌습니다. 장로교 하나에서만 해도 수십 개 교파로 갈라졌습니다. 총회만 100개 이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파문을 조성한 교회가 국회에 들어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제 생각에는, 기독교 정당은 한국사회에서 절대 성공하지 못합니다. 나는 정몽주 어머니가 아들을 보고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가 생각납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초기 기독교 역사 지도자들의 권위를 배우는게 일이라고 봅니다. 목사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길보다 죽음이 기다리는 현장에 지도자로 나설 수 있었던 삼일절의 지도자 모습이 그리울 뿐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한때 가장 큰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나라를 생각해 볼 이유를 가집니다. 바로 러시아입니다. 그 땅에 임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계산해 보면 러시아는 1015년의 기독교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200년 밖에 안 되었습니다. 러시아 국민의 90%이상이 절대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이러한 퍼센트는 아브라함의 후손도 못 따르는 수치입니다. 러시아가 가장 번성할 때 10만개 이상의 교회가 존재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 재산의 80%가 교회 소유였습니다. 나라의 국왕도 교회 지도자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지상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을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았습니다. 유럽의 그 많은 나라 땅을 다 합쳐도 구소련 한나라 땅만 못할 만큼의 큰 땅을 받았습니다. 외모적 인종의 우수성은 세계에서 제일입니다. 우리가 보는 천사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죠? 화가들이 천사를 그릴 때 러시아 여자를 보고 그린 것입니다. 세계에서 외모적으로 가장 예쁘고 잘생긴 여자와 남자는 백러시아 계통의 사람들입니다. LA에서 저와 함께 오랫동안 목회하신 목사님 한 분은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선교를 하러 열심히 다니시다가 그 나라 여인들이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지 ‘나는 때가 늦었지만 우리 아들만은 여기 처녀를 데려다 며느리를 삼아줘야 되겠다. ’ 마음먹고 기도하셔서 성공했어요. 그래서 그 목사님은 예쁜 며느리를 데려오신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지하자원이나 지상자원이 세계 제일입니다. 여러분, 알래스카는 우리나라 남북한 합친 땅의 10배도 넘습니다. 오래 전에 미국이 720달러에 샀습니다. 지금 그곳에는 무진장의 석유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소련 땅이 거기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렇습니다. 한때 여호와 하나님이 이 나라에 영적, 육적인 큰 복을 내리셨던 것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성서적으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당 건축, 붉은 광장에 있는 바실리 성당입니다. 그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국왕이 그것을 바라보고 너무나 황홀해서 “이 성전을 설계한 설계사를 데려 오라!” 이 설계사는 큰 상급을 내리는 줄 알고 너무나도 기뻐서 국왕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네가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이 지상에 또 건축할 수 있느냐?” 그는 너무나도 좋아서 “네,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성전도 제가 만들 수 있습니다. ” 그때 국왕은 “이놈의 눈을 뽑아라!” 뽑았습니다. 왜 그랬는가?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성전은 세상에 없도록 하라” 그게 바실리 성당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성당을 만들었어요. 그렇던 러시아의 기독교가 왜 망하고 공산당 세상이 되었는가? 러시아의 기독교는 복음의 정신을 망각하고 딴 길로 갔기 때문에 그 잘못 가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심판해 버리신 것입니다.
46년 걸려 건축한 그 웅장한 성전의 규모를 예수님에게 자랑할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 왜 예수님이 하루아침에 성전을 무너뜨리는 예언을 하십니까? 그게 무슨 의미인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사용이 되지 아니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진 것이라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아주 분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무엇을 주십니다. 그 주심은 나누어주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멀고도 먼 길을 가게 하셨는가? 당시 가나안 땅은 남쪽으로는 애굽으로 연결된 길목 역할을 했고, 동쪽으로는 끝없는 대륙의 끝 지점으로 지중해 해상교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서쪽으로는 로마 유럽을 연결하는 바다 끝이요, 북쪽으로는 소아시아와 앗시리아 제국으로 통하는 지점으로 온 세계인이 오고가는 시장의 복판이 바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창세기에도 애굽에서 왔던 장사꾼이 그곳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요셉을 은 20에 사 가지고 돌아가는 그런 모습이 기록으로 나타나 있고, 신약 시대에도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마차를 타고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빌립을 만나서 길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 여호와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아브라함을 살게 하시므로 오고가는 수없이 많은 세계인에게 그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나누어주라는 뜻이요, 유대 백성을 택한 백성으로 삼으신 뜻이 똑같은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러시아 같은 나라를 그렇게 영적, 육적으로 부요케 하신 것은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뜻을 잘못 이해해서 그 반대의 길을 갈 때 여호와 하나님은 유대인에게서도 러시아인에게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촛대를 옮겨 버리신 역사를 우리가 봅니다.
지금은 아주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영적 축복을 받은 때입니다. 거리에 밤하늘은 온통 붉은 십자가로 반짝이고 있는데 세계 어디를 가도 볼 수 없는 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독교 목사들이 이제 정치 정당을 만들만큼 교회의 힘이 커졌습니다. 21세기는 한국교회 장래에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여겨집니다. 이때 잘못하면 대한민국 교회도 마찬가지가 됩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마지막 관심사를 물었습니다. 그때 관심사는 지극히 정치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그것은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너희는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 예수님이 그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의 역대 대통령 중에 절반이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이미 대한민국은 기독교 영향권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정신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목사나 대통령이 될 때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역사에 보면 기독교의 빛이 가장 훌륭하게 나타났던 때는 박해의 시대였고 가장 타락했을 때는 정치와 교회가 사이좋게 손을 잡을 때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한국 교계에 유능한 지도자였다가 국회의원이 되신 어떤 분에 대한 뉴스를 안타깝게 본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비판은 쉬워도 실제는 어렵습니다. 대한민국이 이만큼 된 것도 나는 큰 발전이라고 봅니다. 삼일운동 때 성직자들을 바라보면 오늘의 성직자들은 부끄러울 뿐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모스크바 클레믈린 박물관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러시아 교회가 몰락한 이유를 박물관에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최고의 성직자 한 사람이 가운을 입고 성경책 한 권을 들고 설교를 하러 나갈 때 그 옷과 모자와 성경책을 장식한 비용이 얼마인가? 우리 화폐 단위로 계산하면 수십 억원이 됩니다. 모두 최고품질의 다이아몬드로 장식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책은 겉표지가 다 다이아몬드로 되었는데 다이아도 최고의 품질 좋은 것으로만 장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답게 꾸민 성경책을 자물쇠로 굳게 잠가 놓은 것을 볼 수가 있게 됩니다. 일반 성도들은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빨리 나누어주라는 것을 혼자 갖는 기독교 문화가 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교회마저도 없애 버립니다.
오래 전에 제가 모스크바 교역자 수련회 인도를 하러 갔을 때 구소련에서 독립한 15개국 중에서 8개국의 120명 목회자가 저희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한국계 목사가 온다는데 왜 그들이 그렇게 먼 길에서 찾아왔는가?” 물었더니, 그 동안 공산권 치하에서 공산당 말만 들었지 기독교에 대해 들은 소리가 전혀 없어서 왔다고 합니다. 전에 제가 한번 말씀 드렸죠? 강의 마지막 시간에 저는 이제 강의 끝내고 비행기 타고 LA로 가야 합니다. 끝나기 직전에 몰다비아에서 온 목회자 한 사람이 강대상 위로 무자비하게 뛰어 올라와서 나한테 시간 1분만 달라고 해서 제가 물러나며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말은 “여러분! 들었지? 우리는 속은 거야. 70년 공산당에게 속은 거야. ”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영적인 것이나 지상적인 것 모두 내가 네게 주었으니 지혜스럽게 나누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라 거기에 뜻이 있습니다. 있는 자가 나누지 아니하면 빼앗깁니다. 있는 교회가 구제하지 않으면 내가 구제의 대상이 됩니다. 있는 나라가 분배하지 않으면 침략군이 들어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섬겨야 합니다. 섬기지 않으면 노예가 됩니다. 나누고 섬기는 자유인, 그것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주님은 “나는 그것을 위해서 그 자유를 누리게끔 여기 왔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밤늦은 시간에 저는 MBC TV 방송국의 한 기자에게서 전화를 받았어요. “갈보리 교회죠?” “네. ” 나더러 “이재필 목사님이시죠?” “아니요. 이필재입니다. ” “어이쿠, 미안합니다. 내일 갈보리 교회 예배드리는 장면을 잠시 녹화해서 MBC에서 방영하려고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유가 뭐죠?” “이유는 갈보리교회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게 너무나도 소박하고 훌륭한 나눔을 실천하는 분이 계셔서 그분에게 소개하려고 하는데 그분의 작은 정성의 빛을 알리고 싶어서 그분이 나가는 교회의 예배 장면을 잠깐 우리가 방영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분은 절대 이런 일은 사양하고 있어서 목사님이 좀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 “네, 그런데 문제는 저도 그분이 누군지 모르거든요?” 그렇게 해서 “아이고, 이거 큰일났네. 어떡해야 될까요?”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분이 누군지 모릅니다. 모르면서 하는 일은 그대로 두십시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
이 삼일절 정신이란 무엇이냐?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인 자유함의 축복을 위해서 내가 수고할 수 있는 작은 희생과 섬김의 정신입니다. 그런 지도자들이 계셨기 때문에 오늘의 행복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일은 못해도 아주 소박하게 우리 교회의 사명, 즉 죄사함의 자유함, 양심고통에서의 자유함, 죽음으로부터 자유함, 인간성 회복에의 자유를 아직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어두움의 자리에 있는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계속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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