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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세상적인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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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은 83주년이 되는 삼일절이었습니다. 그 날, 남선교회와 여전도회 연합으로 등반대회를 가졌는데 110명이나 참석함으로 우리 교회 사상 가장 많이 등산을 간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날도 말씀 드렸지만, 70년대, 80년대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등반대회가 열렸고, 90년대에는 남선교회를 통해서 열리더니, 2000년대 들어서는 남녀전도회를 통해서 열리므로 이렇게 많은 인원이 참석하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그 날, 정상까지는 못 갔으나 산등성이에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통성기도하는 시간을 가졌고 만세삼창도 하는 등,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삼일절 즈음에 맞추어 우리 기독교인의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이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지 4년이 지나고 2월 25일을 기준해서 꼭 1년이 남았습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우리 국민들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바가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IMF라는 경제적인 외환위기를 벗어나는 것과, 지역감정이 해소하는 것과 남북의 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1년 남은 시점에서 국민의 정부를 결산해 본다면 어떻습니까? 잘 한 것이 있다면, 외환위기를 앞당겨 극복하고 금융과 기업구조조정에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는 점에서 경제분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습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햇볕정책은, 일방적 대북 퍼주기와 남남갈등(南南葛藤)을 유발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기는 하지만, 한반도의 긴장을 크게 완화시키고 남북 관계 개선의 초석을 닦았다는 긍정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왔더라면 남북 상호간에 협력할 수 있는 길이 열림으로 남한도 중국이나 러시아, 더 나가서는 유럽까지 철도를 통한 무역이 활발해 짐으로 경제성장의 큰 효과를 가져올 것이요, 북한의 경제도 극한 위기 벗어날 뿐 아니라, 세계적인 관광지로 부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인데 너무나 아쉽기만 합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야말로 지역감정의 골을 메울 수 있는 가장 적임자임에도 가신(家臣)들 탓인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골만 더 깊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더 나가서는 의약분업, 교육개혁 등 사회개혁에 대해서도 너무 서둔 결과 부작용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연일 신문 방송이 크게 보도하고 있는 각종 게이트와 대통령 일가들이 연결되고 있다는 소식은, 국민들로 하여금 “역대 대통령과 별다른 것이 없다. ”는 실망감을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5년 단임제로 이런 여러 가지 업적을 기대를 한다는 것부터가 너무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10명 이상 나와서 너나없이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훌륭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큰소리 내고 있으나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별로 없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지금의 정치제도나 국민의 수준으로는 크게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되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까? 제가 언제나 말씀드리는 바이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이 바로 서는 길이 한국이 바로 사는 길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활짝 열어주시는 첩경이라는 사실입니다. 삼일절 등반대회 때도 말씀드렸지만, 나라가 바로 되는 길은 경제성장과 아울러 정신적인 수준도 높아져야 합니다.
정신적인 수준이라는 것은 지식수준, 교육수준이 높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덕적인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 주간에, 여러분들도 뉴스 시간에 보셨을 줄 압니다. 경기도내 고등학교에 배정 받은 학생들의 부모들이 새학기 서울시내 고교 전학신청 접수를 위해 수백 명이 며칠 동안 서울시교육청 앞 노상에서 밤을 새우는 모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 또 볼 수 있을까 싶은 기막힌 광경입니다.
아예, 어느 부모들은 이불을 가지고 와서 잠을 자기도 하고, 어느 가정은 할머니까지 동원되어 교대하는 등 온 가정이 총동원되기도 합니다. 너무 한심한 교육정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교육열이 불타는 나라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많은 가정들이 남편과 별거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외국에 조기유학을 떠나기도 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가히 세계적입니다. 그러나 교육수준과 도덕적인 수준은 전혀 다릅니다. 교육수준이 높다고 도덕적인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도덕적인 수준이 높아지는 길은 우리 종교인들, 특히 한국의 종교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기독교인이 각자의 위치에서 사회적인 책임을 다한다면 그만큼 도덕적인 수준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에게 사회적인 책임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상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교회가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 바라보고 계신 대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과 동떨어진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방주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언제 어디서든 이 세상을 구원하는 그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이 기능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에 충격을 주는 존재들이며,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복음의 혁명,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여부스 사람의 땅'을 ‘다윗성'으로 변화시켰듯이, 바울이 가는 곳마다 염병처럼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켰듯이 그리스도인들 또한 가는 곳마다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 이웃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두 가지로 표현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소금의 책임, 빛의 책임을 다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너희는 다만 “소금이라, 빛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분명히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단서를 부치셨습니다. 또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싫든 좋든 관계없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1. 성도들의 소금으로서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1)소금의 책임은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소금은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무역을 하던 대상들이 꼭 가지고 다니던 물품은 옷감과 소금이라고 합니다. 소금은 값이 대단히 싸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물품입니다. 음식을 할 때도 소금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요리, 좋은 고기라도 소금을 넣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양을 먹이는 유목민들에도 소금은 중요합니다. 양들은 소금을 먹지 못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은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이웃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십시오.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책임한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배우고 물질을 많이 가졌다고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금은 가장 싸고 볼품이 없어도 가장 필요한 존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없다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아쉬워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금은 자기를 희생함으로 짠맛을 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정에서나 직장, 이웃들에게 희생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 이웃을 위해서 묵묵히 희생하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갔을 때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죽었는데 많은 성도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다비다는 살아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힘썼고 불우한 과부들을 위해서 옷을 지어주는 등, 희생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이 별로 아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힘썼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한 모습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짠맛을 내는 자가 아닙니다. 어느 가정에 기독교인이 있다고 하면서 그 가정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 가정이 변화 받지 못할까요? 그 기독교인이 희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우는 잘 따지고 설교는 잘 하는데, 여전히 자기 욕심으로 움켜만 쥐려고 할 뿐, 희생하지 않기 때문에 식구들이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희생을 나타내야 식구들이 변화합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군대에 갔을 때 같은 소대, 저보다 고참인 어느 병사 때문에 기독교인의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다 온 병사인데 별로 말이 없고 언제나 빙긋이 웃는 모습이 멋있었습니다. 틈틈이 성경을 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고참들로부터 놀림이나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참들도 그 병사를 어려워했습니다. 무슨 사역병을 모집하면 자기보다 졸병이 많은데도 언제나 앞장서서 나갑니다.
내무반 청소도 솔선하여 하고 누가 어려움을 당하면 희생적으로 나서서 도와줍니다. 그런 희생적인 모습 앞에 고참들이나 많은 병사들이 감동을 받게 되었고 또 주일날 믿는 병사들이 교회 가는데도 감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 병사의 영향 때문에 제가 신학교를 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의 가정이나 직장, 이웃을 위해서 몸과 물질과 시간을 희생하는 자가 됨으로 꼭 필요한 존재가 될 뿐 아니라 그 가정과 직장도 변화되는 역사를 만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소금의 책임은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지낼 때 소금을 사용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사의식 중 소제나 번제에서 소금을 뿌려서 제사를 드렸으며 향을 쓸 때에도 소금과 함께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전에서 소금을 귀하게 사용했는데 거기에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는 데 두 가지를 사용했는데, 하나는 짐승의 피요, 하나는 소금이었습니다. 또한 소금을 사용하는 것은 잡귀를 몰아내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소금물로 목욕시키는 데 잡귀가 손을 못 대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나라도 셈족인 탓인지 정월 초하룻날은 집 주위에 소금을 뿌리고, 달갑지 않은 손님이 왔다 가면 대문에 소금을 뿌립니다. 열하2:19-22에 보면 독이 있는 여리고의 샘물에 엘리사가 소금을 뿌리므로 마음놓고 먹는 물이 되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처럼 소금은 위생적으로 영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여러분이 있는 곳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지금은 믿지 않지만,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어려운 일 당할 때는 여러분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여러분이 위치하는 곳에는 마치 요셉이 있던 곳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어느 교회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 권사님은 나이가 아무 연노하시지만, 자녀들이 서로 모셔가려고 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시는지, 그 권사님이 가는 가정마다 은혜와 복이 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믿는 처녀가 비록 믿지 않는 가정에 시집을 가더라도 그 가정 위에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3)소금의 책임은 방부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그 당시 지중해 연안만 해도 온도가 꽤 높은 지역이지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냉장고도 없던 시절, 식품을 오래 보관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금만 넣어 놓으면 적어도 한두 달은 신선하게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늘의 태양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소금이다. '하는 말을 할 정도로 소금을 무척 아끼고 귀히 여겼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소금의 가장 큰 책임은 썩지 않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있는 곳에는 부패가 침투하지 않아야 합니다. 소금은 남에게 썩지 말라고 외치지 않아도 썩는 것은 막아줍니다. 가정도, 부인 하나가 바른 신앙이라면 그 남편이나 자녀들이 부정이나 음란으로부터 썩지 않고 순수를 지킬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온갖 죄가 관영하여 썩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우리 기독교인이 있는 곳에는 썩음이 막아져야 합니다.
썩음을 막기 위해서는 짠맛을 내야 하는데, 그것은 자기 희생과 손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느 때는 썩음을 막기 위해서 직장에서도 왕따를 당하거나 손해와 핍박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의를 위해서 끝까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의의 짠맛을 나타내야 합니다. 어느 때는 의롭고 정직하게 사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의의 좁은 길을 가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더 좋은 길을 주실 것입니다.
6․25사변 때 한 목사님이 피난을 갔는데 가는 곳마다 먹을 것이 없어 곤란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여호와 하나님, 어떠한 경우든 거짓말을 말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작정을 하고 난 뒤 피난을 가다가 공산당에게 붙들렸습니다. 조사를 받던 중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그는 목사라고 말을 할까 말까 얼마동안 망설였습니다. 목사라고 하면 당장에 죽일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작정했던 것을 기억하고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으로 자신이 목사임을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할 줄 알았으나 공산당들은 그대로 한 쪽에 묶어둔 채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밤중에 자신을 조사하던 인민군 대위가 다가오더니 "목사님, 저도 기독교인입니다. "라고 말하고는 그를 풀어주었고 그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이 위치한 어떠한 자리, 어떠한 직장에서 어떠한 희생이나 손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부패나 음란, 불의가 침범하지 않도록 힘쓰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요셉이나 다니엘처럼 지켜 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성도들의 빛으로서의 책임을 무엇입니까?
빛은 무엇을 말합니까? 빛은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빛은 착한 행실 즉, 사랑의 행실을 말합니다. 요1서2:9 “빛 가운데 있다 하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며“라 했습니다.
즉, 사랑이 없는 행위는 어두운 행위요, 사랑이 있는 행위는 빛의 행위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빛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금과 빛이라 하심은 공의의 책임과 동시에 사랑의 책임을 지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디 가든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동시에 사랑의 수고의 삶을 나타내야 합니다. 소금도 희생 위에서 짠맛을 낼 수 있는 것처럼 빛도 희생이 없이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초가 자기를 녹이는 희생 위에서만 빛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친척들이나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어느 기독교인들은 경우는 알고 따지는데 사랑의 수고나 사랑의 나누어줌에는 너무나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먼저 녹아집시다. 어떠한 욕심이나 혈기가 일어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생각하면서 꿀꺽 삼켜버리고 다시 낮아집시다. 다시 희생으로 녹아집시다. 그러면 그 가정, 그 직장은 변화 받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는 3․1절 때처럼 불의를 향해서 공의의 횃불을 높이 드는 동시에 사랑의 수고도 멈추지 않았던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한국교회는 많은 학교를 세워서 배움을 주었습니다. 1910년 인가 받은 사립학교가 1402개교였는데 그 중에 교회 계통이 무려 823개교였습니다. 1885년 초부터 고아원을 경영하고 많은 병원을 세워서 환자를 치료했는데 1905년도 1년만도 9천명이 치료의 혜택을 받았던 것입니다. 1910년도 한국의 총인구는 1500만이었고 기독교인들은 20만으로 80명의 한 명이 기독교인이었으나 엄청난 소금의 역할과 빛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에 비한다면 오늘 한국은 4명당 1명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데 사회의 부패와 어둠은 극에 달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디 그 뿐 입니까? 사회를 향해 소금과 빛의 책임은커녕, 비리와 부정에 연루되어 검찰에 끌려가는 인물들 중에 한국교회의 중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나 백성들 앞에서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됩니다. 이제부터 한국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날로날로 썩어져 가는 세상을 향해 소금의 책임을 다할 뿐 아니라 빛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아니, 한국교회 전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교회, 우리 자신부터가 그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재정을 다섯으로 나누어, 5분지 1은 목회비, 5분지 1은 교육비, 5분지 1은 운영비, 5분지 1은 선교비, 5분지 1은 구제봉사비에 사용하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교육관 구입비를 충당한 후에 이렇게 재정을 편성하여 선교와 사회봉사에 힘쓰므로 빛을 높이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각자는 각각의 위치에서 어떠한 불의와 음란, 낭비와 사치를 거절하고 경건과 절제의 생활, 즉 소금의 역할을 다할 뿐 아니라, 우리의 물질과 지식, 우리의 시간과 건강을 필요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빛의 삶을 다해야 합니다.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남강 이승훈 장로님은 일제의 불의에 맞서 항거했던 죽대 같은 인물인 동시에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오산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힘쓰는 때에 어느 때는 운영비가 떨어져서 교사들의 봉급을 줄 돈이 없습니다. 그 때에 선생님들을 굶겨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쌀독에서 쌀을 퍼내었고, 학교건물이 낡아서 비가 샌다고 하자, 자기 집기와를 벗겨다 이었다고 합니다. 요즈음 이사장들이 학교에서 막대한 돈을 빼돌려 착복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는 땅을 팔아서 학교 운영비에 쓰다가 그것도 부족하여 자기 집마저 팔려고 하자, 가족들이 불평했습니다. 그 때 그 장로님은 말하기를 “다 팔아 학교에 부치고 우리는 학교에 가서 나는 소사노릇을 하고 당신은 식모 노릇을 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과연, 그는 학교에 가서 청소를 하고 변소를 치는 일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과연 소금과 빛의 책임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희생으로 이루어진 오산학교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많은 인재가 배출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성도들은 3․1절을 즈음하여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 이웃에 나가 진정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책임을 희생적인 삶을 통해서 나타내기로 결단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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