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적극적인 성도가 되라
본문
몇 년전에 우리교회에서 멜 깁슨의 The passion of Christ 영화를 극장에 가서 함께 본적이 있다. 그 영화는 저의 삶에 있어서 정말 충격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시는 장면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잔인한 장면이었다.
끝에 납이 달린 가죽채찍에 의해 예수님의 몸이 이리저리 찢어지고, 갈라지고, 뜯겨지고 피로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충격의 장면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랬다. 아마 거기 나오는 장면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예수님은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
당시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감안하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 끔찍한 고난을 피할 수도 있으셨다. 그분의 능력으로 자신을 대적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을 한방에 끝내버릴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조롱과 비아냥에 아무런 말씀도 안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당당히 지셨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
그렇게 하신 뜻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함이셨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와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다. 당당히 맞서 싸우셨다.
이렇게 예수님의 삶은 한마디로 적극적인 삶을 사신 것이다.
조금도 회피함이 없이 고난과 당당히 맞서는 공격적인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진리라고 생각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셨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으셨다.
어떤 불의와 불신앙앞에서도, 심지어는 죽음앞에서도 당당하게 공격적으로 사셨다.
아마 예수님이 십자가앞에서 공격적으로 적극적으로 고난당하시지 않으시고, 소극적으로 죽음을 피하셨더라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적극적이며 공격적이다. 다이나믹하다.
기독교 신앙이 사랑과 겸손을 말하기 때문에, 나약해 보이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어느 종교보다도 강하다. 기독교는 약한 자를 위한 종교이지만, 절대 약한 종교는 아니다.
오늘은 3. 1을 기념하는 삼일절이다.
3. 1운동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일제탄압에 항거한 거국적인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고 온 기독교인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적극적으로 민족을 구하려 하였다. 나라가 위태로울때, 뒤로 물러서 있지 않고 공격적으로 정의를 위하여 앞장선 한국교회는 정말 자랑스러웠다.
주님은 마귀와 대적하여 지지말고, 반드시 이기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마귀와 싸워 져서 어깨가 축쳐져 있거나, 마귀와 타협하면서 적당히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주님은 마귀와 정면으로 공격하라고 하시고 절대 피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벧전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성경은 인생을 전투로 보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싸워야 할 죄악의 세상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과 죄에 오염되어 멸망당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마귀를 대적하고 세상과 싸우고 죄와 싸우는 전투기술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엡6:11-17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절대로 나약하게 키우지 않으신다. 온실에서 편안하게 키우지 않으신다. 때로는 물속에도 집어 넣으시고, 불속에도 집어 넣으신다.
때로는 환난도 겪게 하시고 시련도 겪게 하신다.
때로는 우리가 광야를 지나가게도 하시고, 사망에 음침한 골짜지로 지날찌라도 과감히 지나가라고 하신다.
그렇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뜻은 적극적으로 공격적으로 세상을 살아야, 악한 세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은 악하고 패역한데, 나약한 몸으로 나약한 정신으로는 이세상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성도들을 환난과 시련가운데 두시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세상은 소극적으로 살면 절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적극적이며 공격적으로 살아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삶이 적극적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공격적으로 대처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그렇게 죽음앞에서도, 시련앞에서도, 핍박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당당하게 적극적으로 살았던 이유는, 오직 한가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과 동행하고 계심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당당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강하게 만든 것이다.
1)아브라함은 75세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여호와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가나안 땅으로 갔다.
떠날 때는 갈 바도 알지 못하고 떠났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서 개척정신을 가지고 살았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떠한 환경에서도 도우실 거라고 믿었기에 그는 과감히 떠날 수 있었다.
그는 고향을 의지하고 부모와 친척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한 용기있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그래서 그는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음을 믿으라.
2)여호수아와 갈렙도 적극적인 신앙의 사람들이었다.
가나안 정탐을 한후에, 10명의 대부분의 정탐군들은 소극적이었다.
가나안 족속들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 그러나 그들은 나타난 현상만을 보고 겁먹은 것이다. 그들의 보고는 사실이었지만, 사실뒤에 역사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적극적인 보고를 했다.
민14:8-9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적극적 신앙의 보고였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이런 보고는 있을 수 없다. 비록 메뚜기같은 우리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들을 능히 이기리라”는 믿음이다.
얼마나 적극적인가? 그들의 자세에는 현실이 불리하다고, 피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다윗은 어떠했는가?
장수들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골리앗을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적으로 골리앗과 맞서서 그를 무너뜨렸다.
삼상17:45-4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얼마나 도전적이며 적극적인 신앙인가?
세상이치로 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하겠다는 자체가 우습고 터무니없는 어리석은 일이지만, 다윗은 그 터무니 없고 우스운 일을 한방에 엎어버리고, 그는 골리앗앞에 당당히 섰고, 또 그를 물리쳤다.
그를 그토록 적극적이며 용기있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 무얼 믿고 그는 그렇게 당당했는가?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그분의 능력을 믿고 그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심을 굳게 믿었기에 그는 용기있게 나가 싸운 것이다.
4)그밖에 엘리야는 바알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불의 대결에서, 850:1의 싸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당당하게 증명해 보였다.
에스더의“죽으면 죽으리라”의 믿음,
죽음앞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꺽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한 다니엘,
“그리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한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생명을 건 싸움은 정말 멋있고 위대하다.
그들이 그토록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대한 믿음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 버틸 수 있었다.
성경에 많은 신앙의 인물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믿음으로 가지고 문제를 풀어나갔다.
절대 좌절하거나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정면으로 승부를 걸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이었다. 일같은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았다.
예수님은 70인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너희를 세상에 보냄은 어린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다.
눅10:3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렇다. 지금 세상은 이리같이 무섭고 사납다.
사람들이 점점 사나와져서 사람만나기가 두렵다. 사람대하기가 제일 두려워진다.
밤에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기가 쉽지 않다. 무슨 일을 해도 이거 속는 것 아닌가? 사기당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이렇게 죄가 판치고 불법이 난무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런 이리같은 세상에 양같은 우리들이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양 혼자 이세상에서 살 수 있는 길은 없다. 세상에 나가자 마자 찢기고 물리고 뜯기고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직 사는 길은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면 산다.
주님이 나의 목자로 삼으면 이리같은 세상도 두렵지 않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무섭지 않다.
오히려 원수의 목전(눈앞)에서도 나의 잔이 넘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성도여러분,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여러분,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고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라. 여호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고 맞서 싸워 이기라.
뒤로 물러서지 말라. 피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이 여러분보다 앞서 행하심을 믿고 당당히 주님의 뒤를 따라가라.
성도여러분, 이리같은 세상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믿는 길 밖에 없다.
여호와 하나님을 정말 믿으면 세상은 그리 무섭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 내 욕심대로 살면, 삶은 편해지는 것 같으나 점점 더 힘들어진다.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힘든 것 같고, 부담스러울 것 같고, 부자유스러울 것 같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우리의 삶은 점점 가벼워지고, 평안해 지고, 감사가 넘친다.
우리교회는 더 강해져야 한다. 강한 교회, 어떤 시련속에서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는 부흥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교회사를 보더라도,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한 시기는 다 핍박받고 죽고 감옥에 갇히는 기독교 수난시대에 더 부흥했다.
그때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믿음으로 우상숭배와 핍박하는 자들과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죽음을 자처하면서까지, 복음을 위해, 의를 위하여 적극적이었다.
오늘 말씀을 다시 읽어보자. 고후4:8-10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방으로 우겨 쌈. 답답한 일을 당함. 핍박을 받음. 거꾸러뜨림을 당함. 죽음에 넘겨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말씀속에는 당당함이 있다. 굽혀지지 않는 용기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보배가 있었기에, 절망의 상황속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었다.
바라기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은 강한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 사역에 적극적인 자세로 감당하기를 바란다.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이 사역을 감당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주시리라.
피하거나 물러서 있거나 뒷짐지고 서 있지 말고, 모든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바란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믿음을 가지면 사람이 적극적이 된다. 나는 약하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분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 적극적인 사람이 될 것이고, 모든 것을 능히 할 수 있으리라.
1. 할수 있다 하면된다 해보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리라.
나는 부족해도 나는 약해도 주님 도와주시니. 의심말고 두려워말라 기적이 일어난다
말씀안에서 믿음안에서 할수 있다 해보자. 말씀안에서 믿음안에서 할수 있다 해보자
2. 할수 있다 하면된다 해보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리라.
믿음가지고 꿈을 가지고 주님 바라보아라. 성령님이 도와주신다 좋은일 일어난다.
말씀안에서 믿음안에서 할수 있다 해보자. 말씀안에서 믿음안에서 할수 있다 해보자
나는 부족하고 약하여도 주님이 도와주시면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안에서 믿음안에서 우리는 한번 해보는 것이다. 우리의 꿈을 도전해 보는 것이다.
올해 여러분의 삶속에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믿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일을 시작하라.
세상이 아무리 여러분을위협하고 어렵게 하여도, 절대굽히지 말고,여호와 하나님자녀답게 당당해 져라.
세상이 아무리 여러분을 공격한다하여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이길 세력은 없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넉넉히 이기게 하리라. 능히 이기리라.
올해는 분명히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시는 장면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잔인한 장면이었다.
끝에 납이 달린 가죽채찍에 의해 예수님의 몸이 이리저리 찢어지고, 갈라지고, 뜯겨지고 피로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충격의 장면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랬다. 아마 거기 나오는 장면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예수님은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
당시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감안하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 끔찍한 고난을 피할 수도 있으셨다. 그분의 능력으로 자신을 대적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을 한방에 끝내버릴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조롱과 비아냥에 아무런 말씀도 안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당당히 지셨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
그렇게 하신 뜻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함이셨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와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다. 당당히 맞서 싸우셨다.
이렇게 예수님의 삶은 한마디로 적극적인 삶을 사신 것이다.
조금도 회피함이 없이 고난과 당당히 맞서는 공격적인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진리라고 생각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셨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으셨다.
어떤 불의와 불신앙앞에서도, 심지어는 죽음앞에서도 당당하게 공격적으로 사셨다.
아마 예수님이 십자가앞에서 공격적으로 적극적으로 고난당하시지 않으시고, 소극적으로 죽음을 피하셨더라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적극적이며 공격적이다. 다이나믹하다.
기독교 신앙이 사랑과 겸손을 말하기 때문에, 나약해 보이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어느 종교보다도 강하다. 기독교는 약한 자를 위한 종교이지만, 절대 약한 종교는 아니다.
오늘은 3. 1을 기념하는 삼일절이다.
3. 1운동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일제탄압에 항거한 거국적인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고 온 기독교인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적극적으로 민족을 구하려 하였다. 나라가 위태로울때, 뒤로 물러서 있지 않고 공격적으로 정의를 위하여 앞장선 한국교회는 정말 자랑스러웠다.
주님은 마귀와 대적하여 지지말고, 반드시 이기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마귀와 싸워 져서 어깨가 축쳐져 있거나, 마귀와 타협하면서 적당히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주님은 마귀와 정면으로 공격하라고 하시고 절대 피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벧전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성경은 인생을 전투로 보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싸워야 할 죄악의 세상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과 죄에 오염되어 멸망당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마귀를 대적하고 세상과 싸우고 죄와 싸우는 전투기술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엡6:11-17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절대로 나약하게 키우지 않으신다. 온실에서 편안하게 키우지 않으신다. 때로는 물속에도 집어 넣으시고, 불속에도 집어 넣으신다.
때로는 환난도 겪게 하시고 시련도 겪게 하신다.
때로는 우리가 광야를 지나가게도 하시고, 사망에 음침한 골짜지로 지날찌라도 과감히 지나가라고 하신다.
그렇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뜻은 적극적으로 공격적으로 세상을 살아야, 악한 세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은 악하고 패역한데, 나약한 몸으로 나약한 정신으로는 이세상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성도들을 환난과 시련가운데 두시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세상은 소극적으로 살면 절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적극적이며 공격적으로 살아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삶이 적극적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공격적으로 대처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그렇게 죽음앞에서도, 시련앞에서도, 핍박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당당하게 적극적으로 살았던 이유는, 오직 한가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과 동행하고 계심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당당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강하게 만든 것이다.
1)아브라함은 75세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여호와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가나안 땅으로 갔다.
떠날 때는 갈 바도 알지 못하고 떠났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서 개척정신을 가지고 살았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떠한 환경에서도 도우실 거라고 믿었기에 그는 과감히 떠날 수 있었다.
그는 고향을 의지하고 부모와 친척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한 용기있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그래서 그는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음을 믿으라.
2)여호수아와 갈렙도 적극적인 신앙의 사람들이었다.
가나안 정탐을 한후에, 10명의 대부분의 정탐군들은 소극적이었다.
가나안 족속들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 그러나 그들은 나타난 현상만을 보고 겁먹은 것이다. 그들의 보고는 사실이었지만, 사실뒤에 역사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적극적인 보고를 했다.
민14:8-9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적극적 신앙의 보고였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이런 보고는 있을 수 없다. 비록 메뚜기같은 우리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들을 능히 이기리라”는 믿음이다.
얼마나 적극적인가? 그들의 자세에는 현실이 불리하다고, 피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다윗은 어떠했는가?
장수들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골리앗을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적으로 골리앗과 맞서서 그를 무너뜨렸다.
삼상17:45-4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얼마나 도전적이며 적극적인 신앙인가?
세상이치로 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하겠다는 자체가 우습고 터무니없는 어리석은 일이지만, 다윗은 그 터무니 없고 우스운 일을 한방에 엎어버리고, 그는 골리앗앞에 당당히 섰고, 또 그를 물리쳤다.
그를 그토록 적극적이며 용기있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 무얼 믿고 그는 그렇게 당당했는가?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그분의 능력을 믿고 그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심을 굳게 믿었기에 그는 용기있게 나가 싸운 것이다.
4)그밖에 엘리야는 바알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불의 대결에서, 850:1의 싸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당당하게 증명해 보였다.
에스더의“죽으면 죽으리라”의 믿음,
죽음앞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꺽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한 다니엘,
“그리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한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생명을 건 싸움은 정말 멋있고 위대하다.
그들이 그토록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대한 믿음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 버틸 수 있었다.
성경에 많은 신앙의 인물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믿음으로 가지고 문제를 풀어나갔다.
절대 좌절하거나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정면으로 승부를 걸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이었다. 일같은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았다.
예수님은 70인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너희를 세상에 보냄은 어린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다.
눅10:3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렇다. 지금 세상은 이리같이 무섭고 사납다.
사람들이 점점 사나와져서 사람만나기가 두렵다. 사람대하기가 제일 두려워진다.
밤에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기가 쉽지 않다. 무슨 일을 해도 이거 속는 것 아닌가? 사기당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이렇게 죄가 판치고 불법이 난무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런 이리같은 세상에 양같은 우리들이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양 혼자 이세상에서 살 수 있는 길은 없다. 세상에 나가자 마자 찢기고 물리고 뜯기고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직 사는 길은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면 산다.
주님이 나의 목자로 삼으면 이리같은 세상도 두렵지 않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무섭지 않다.
오히려 원수의 목전(눈앞)에서도 나의 잔이 넘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성도여러분,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여러분,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고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라. 여호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고 맞서 싸워 이기라.
뒤로 물러서지 말라. 피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이 여러분보다 앞서 행하심을 믿고 당당히 주님의 뒤를 따라가라.
성도여러분, 이리같은 세상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믿는 길 밖에 없다.
여호와 하나님을 정말 믿으면 세상은 그리 무섭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 내 욕심대로 살면, 삶은 편해지는 것 같으나 점점 더 힘들어진다.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힘든 것 같고, 부담스러울 것 같고, 부자유스러울 것 같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우리의 삶은 점점 가벼워지고, 평안해 지고, 감사가 넘친다.
우리교회는 더 강해져야 한다. 강한 교회, 어떤 시련속에서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는 부흥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교회사를 보더라도,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한 시기는 다 핍박받고 죽고 감옥에 갇히는 기독교 수난시대에 더 부흥했다.
그때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믿음으로 우상숭배와 핍박하는 자들과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죽음을 자처하면서까지, 복음을 위해, 의를 위하여 적극적이었다.
오늘 말씀을 다시 읽어보자. 고후4:8-10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방으로 우겨 쌈. 답답한 일을 당함. 핍박을 받음. 거꾸러뜨림을 당함. 죽음에 넘겨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말씀속에는 당당함이 있다. 굽혀지지 않는 용기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보배가 있었기에, 절망의 상황속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었다.
바라기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은 강한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 사역에 적극적인 자세로 감당하기를 바란다.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이 사역을 감당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주시리라.
피하거나 물러서 있거나 뒷짐지고 서 있지 말고, 모든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바란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믿음을 가지면 사람이 적극적이 된다. 나는 약하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분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 적극적인 사람이 될 것이고, 모든 것을 능히 할 수 있으리라.
1. 할수 있다 하면된다 해보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리라.
나는 부족해도 나는 약해도 주님 도와주시니. 의심말고 두려워말라 기적이 일어난다
말씀안에서 믿음안에서 할수 있다 해보자. 말씀안에서 믿음안에서 할수 있다 해보자
2. 할수 있다 하면된다 해보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리라.
믿음가지고 꿈을 가지고 주님 바라보아라. 성령님이 도와주신다 좋은일 일어난다.
말씀안에서 믿음안에서 할수 있다 해보자. 말씀안에서 믿음안에서 할수 있다 해보자
나는 부족하고 약하여도 주님이 도와주시면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안에서 믿음안에서 우리는 한번 해보는 것이다. 우리의 꿈을 도전해 보는 것이다.
올해 여러분의 삶속에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믿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일을 시작하라.
세상이 아무리 여러분을위협하고 어렵게 하여도, 절대굽히지 말고,여호와 하나님자녀답게 당당해 져라.
세상이 아무리 여러분을 공격한다하여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이길 세력은 없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넉넉히 이기게 하리라. 능히 이기리라.
올해는 분명히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