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기독교와 삼일절의 의미
본문
3. 1절 기념주일로 지키면서,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국민의 도리를 다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다. 3. 1절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민족적인 수난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 ‘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는가?’ 를 반성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다.
일본은 한국에 대해 우호적으로 나오다가도 태도를 돌변하여 망언을 일삼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일본이 과거 우리나라에 대하여 사죄나 반성을 도외시한 채 오히려 왜곡된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일본 시네마현 스미타 노부요시 지사가 2월27일(2001년) 독도를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한국이 독도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 고 주장했다.
스미타 지사는 이 날 “시네마현 의회에서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으로나 우리(일본)의 영토이며 시네마현 5개 촌에 속해 있다.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해 일본이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은 진정으로 유감이다” 라는 망언을 했다.
이러한 때에 다시 우리가 일본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반성과 민족적 단결이 필요하다. 우리가 일본에게 당했던 그 이유를 살펴보고 다시는 불행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국경일 중에서도 3. 1절과 광복절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특히 3. 1운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한국교회와 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교회가 애국의 선봉에 서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고문과 죽음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열 여섯분으로 가장 많았다. 기독교는 내 나라(민족)이 처한 비극적인 역사를 가슴으로 끌어안고, 애국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 두 국경일이 자유와 해방이라는 기독교 교리와 관계 있다는 것이다. 3. 1운동은 민족의식과 신앙이 맞물려 있다. 예배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지, 일본의 천왕이 아니며,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나라를 사랑하는 종교이다. 신앙의 선조들은 뜨거운 애국심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며 불의의 세력과 싸우며 자유를 얻기 위하여 항거했다.
그 당시에는 일본만 물러가면, 자유가 성취되고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성경을 보면, 자유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하는 것을 본다. 눅4장에 나사렛회당에 들렸을 때 이사야서 성경을 읽으셨다.
J께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며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며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말씀을 읽고, 이 일이 오늘 너희에게 성취되었다고 하셨다. 3. 1절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참된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 보자.
1 속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찬송가에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를 얻었네” 를 노래한 구절이 있다. 즉 겉사람은 부자유하나, 속사람은 자유하다는 말이다. 이 속사람은 그 누구도 속박할 수 없고, 스스로 자유를 누리게 되어 있다.
성도는 죄와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그 속사람이 자유하게 된다. J께서 자기를 믿고 따르면 진리를 알게 되며, 그 진리가 자유케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자유한데 무슨 자유를 또 주느냐?” 고 반발하는 유대인에게 직설적으로 말씀을 하셨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또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자유케 해야 참으로 자유한다” 고 말씀하셨다.
옛날 이스라엘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엄한 율법을 받으면, 죄를 안 짓고 의롭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바울은 롬7:9~10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다.
오늘날도 법이 물러서 죄가 많다고 해서 법이 강화되면, 죄가 없어질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율법을 주시면서 동시에 속죄제사 제도를 주셨다.
요1서 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라” 고 했다.
성도는 양심의 자유를 누림으로, 그 속사람이 자유케 된다. 그러나 이 양심이 죄를 물리치거나, 이겨내는 능력은 미약하다. 그러므로 J께서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우리가 연약함으로 죄에서 넘어지는 것을 면케 하셨다.
성도는 육신을 좇아 사는 자가 아니오, 성령을 따라 살게 되고, 그 때 비로소 양심의 자유를 얻는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죽을 죄의 몸에서 건져 줄까?” 하는 탄식했다. 결국 성도는 성령을 따라 행할 때 그 양심도 자유를 누리게 된다.
2 그 겉사람도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갈 5:13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하신다.
우리 몸이 자유를 누리는 생활을 하려면, 사랑으로 자원하여 섬기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본문은 블레셋과의 전쟁 중 다윗의 군대는 산성에 진쳤고, 적군은 베들레헴에 진을 쳤다. 다윗은 자기 고향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누구가 내 고향 저 성문 곁의 우물물을 내게 마시게 할까?” 라고 했다.
얼마 후에 왕의 심복 중 3인의 용사가 많은 상처를 입고 기진한 채 한 병의 물을 가져왔다. ‘산성에 물이 떨어져 진중이 목마른데 웬 물인가?’ 하고 반색하였다.
“왕의 말씀을 듣고 적진을 격돌하여 베들레헴 성문 옆 우물물을 길어 온 것입니다” 라고 했다.
왕은 떨리는 손으로 그 물병을 받아 들고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악한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물이 아니오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갔던 3인의 피입니다” 라고 했다.
그리고 그 물을 여호와 하나님의 단에 다 쏟아 부었다. 이 광경을 보는 모든 군인들은 사기가 진작되고 격려를 받았다. 참으로 그 임금에 그 신하였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바꾸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만약 왕이 3인의 용사에게 물을 떠오라고 명령하였다면, 그리고 만약 3명의 용사가 생명을 걸고 떠온 물을 왕이 혼자 다 마셔 버렸다면 어떠했을까?
사람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보다 자발적으로 봉사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자발적인 봉사를 높이 사주고 자기 욕심이나 주장을 거둘 때 참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
한 마디로 우리가 이기적인 생각에 매어 있을 때, 우리의 생활은 부자유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먼저 위해주고 나는 희생 봉사할 마음이면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3. 1절 기념주일을 지키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명심하기를 바란다. 진정한 자유는 남과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오, 먼저 나를 속박하고 있는 죄와 율법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진실한 회개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의 자유가 없이는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는데, 기도하며 성령 충만히 받으므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생활을 통해 율법이 못 이룬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자유인의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종된 자세가 되어 남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 양보하고 희생하는 생활은 뺏고 손해 끼치는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역설적인 자유이다.
일본은 한국에 대해 우호적으로 나오다가도 태도를 돌변하여 망언을 일삼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일본이 과거 우리나라에 대하여 사죄나 반성을 도외시한 채 오히려 왜곡된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일본 시네마현 스미타 노부요시 지사가 2월27일(2001년) 독도를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한국이 독도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 고 주장했다.
스미타 지사는 이 날 “시네마현 의회에서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으로나 우리(일본)의 영토이며 시네마현 5개 촌에 속해 있다.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해 일본이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은 진정으로 유감이다” 라는 망언을 했다.
이러한 때에 다시 우리가 일본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반성과 민족적 단결이 필요하다. 우리가 일본에게 당했던 그 이유를 살펴보고 다시는 불행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국경일 중에서도 3. 1절과 광복절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특히 3. 1운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한국교회와 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교회가 애국의 선봉에 서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고문과 죽음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열 여섯분으로 가장 많았다. 기독교는 내 나라(민족)이 처한 비극적인 역사를 가슴으로 끌어안고, 애국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 두 국경일이 자유와 해방이라는 기독교 교리와 관계 있다는 것이다. 3. 1운동은 민족의식과 신앙이 맞물려 있다. 예배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지, 일본의 천왕이 아니며,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나라를 사랑하는 종교이다. 신앙의 선조들은 뜨거운 애국심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며 불의의 세력과 싸우며 자유를 얻기 위하여 항거했다.
그 당시에는 일본만 물러가면, 자유가 성취되고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성경을 보면, 자유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하는 것을 본다. 눅4장에 나사렛회당에 들렸을 때 이사야서 성경을 읽으셨다.
J께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며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며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말씀을 읽고, 이 일이 오늘 너희에게 성취되었다고 하셨다. 3. 1절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참된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 보자.
1 속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찬송가에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를 얻었네” 를 노래한 구절이 있다. 즉 겉사람은 부자유하나, 속사람은 자유하다는 말이다. 이 속사람은 그 누구도 속박할 수 없고, 스스로 자유를 누리게 되어 있다.
성도는 죄와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그 속사람이 자유하게 된다. J께서 자기를 믿고 따르면 진리를 알게 되며, 그 진리가 자유케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자유한데 무슨 자유를 또 주느냐?” 고 반발하는 유대인에게 직설적으로 말씀을 하셨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또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자유케 해야 참으로 자유한다” 고 말씀하셨다.
옛날 이스라엘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엄한 율법을 받으면, 죄를 안 짓고 의롭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바울은 롬7:9~10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다.
오늘날도 법이 물러서 죄가 많다고 해서 법이 강화되면, 죄가 없어질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율법을 주시면서 동시에 속죄제사 제도를 주셨다.
요1서 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라” 고 했다.
성도는 양심의 자유를 누림으로, 그 속사람이 자유케 된다. 그러나 이 양심이 죄를 물리치거나, 이겨내는 능력은 미약하다. 그러므로 J께서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우리가 연약함으로 죄에서 넘어지는 것을 면케 하셨다.
성도는 육신을 좇아 사는 자가 아니오, 성령을 따라 살게 되고, 그 때 비로소 양심의 자유를 얻는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죽을 죄의 몸에서 건져 줄까?” 하는 탄식했다. 결국 성도는 성령을 따라 행할 때 그 양심도 자유를 누리게 된다.
2 그 겉사람도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갈 5:13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하신다.
우리 몸이 자유를 누리는 생활을 하려면, 사랑으로 자원하여 섬기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본문은 블레셋과의 전쟁 중 다윗의 군대는 산성에 진쳤고, 적군은 베들레헴에 진을 쳤다. 다윗은 자기 고향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누구가 내 고향 저 성문 곁의 우물물을 내게 마시게 할까?” 라고 했다.
얼마 후에 왕의 심복 중 3인의 용사가 많은 상처를 입고 기진한 채 한 병의 물을 가져왔다. ‘산성에 물이 떨어져 진중이 목마른데 웬 물인가?’ 하고 반색하였다.
“왕의 말씀을 듣고 적진을 격돌하여 베들레헴 성문 옆 우물물을 길어 온 것입니다” 라고 했다.
왕은 떨리는 손으로 그 물병을 받아 들고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악한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물이 아니오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갔던 3인의 피입니다” 라고 했다.
그리고 그 물을 여호와 하나님의 단에 다 쏟아 부었다. 이 광경을 보는 모든 군인들은 사기가 진작되고 격려를 받았다. 참으로 그 임금에 그 신하였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바꾸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만약 왕이 3인의 용사에게 물을 떠오라고 명령하였다면, 그리고 만약 3명의 용사가 생명을 걸고 떠온 물을 왕이 혼자 다 마셔 버렸다면 어떠했을까?
사람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보다 자발적으로 봉사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자발적인 봉사를 높이 사주고 자기 욕심이나 주장을 거둘 때 참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
한 마디로 우리가 이기적인 생각에 매어 있을 때, 우리의 생활은 부자유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먼저 위해주고 나는 희생 봉사할 마음이면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3. 1절 기념주일을 지키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명심하기를 바란다. 진정한 자유는 남과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오, 먼저 나를 속박하고 있는 죄와 율법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진실한 회개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의 자유가 없이는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는데, 기도하며 성령 충만히 받으므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생활을 통해 율법이 못 이룬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자유인의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종된 자세가 되어 남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 양보하고 희생하는 생활은 뺏고 손해 끼치는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역설적인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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