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환경보호에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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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창세기 1장 28절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 말씀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 말씀 다 같이 시작.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장에서 한 절 또 읽겠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 말씀입니다. 2장 15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아멘. 저는 이 밝아온 새로운 천 년의 새 시대를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토픽들을 가지고 이 새해 초에 좀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환경 보호에 대해서 좀 같이 성경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환경보호, 그런 제목으로 성경공부를 해 보신 일이 있는 사람 한 번 손 들어 보세요. 환경보호. 예 놀라운 사실입니다. 한 사람도 없네요.
미래 학자인 탐 사인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은 "21세기 그리고 새로운 천 년에 크리스찬들이 직면해야 할 최대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환경문제가 될 것이다" 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침례교들의 연합기관인 침례교 세계연맹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BWA라고 그러는데요, BAPTIST WORLD ALLIANCE라고 그러는데요, 기구의 사무총장으로 계시는 덴튼 로츠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저하고 친한 그런 분이신데 그 분이 쓰신 글에 보니까 이런 얘기가 있어요.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함께 자연을 구원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시대의 소명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받은 영혼이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의미있는 삶을 누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 라는 말을 했습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메세지는 우리가 많이 들었지만 자연구원 이런 말씀은 우리에게 생소한 토픽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덴튼 로츠 박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진정한 복음 전도자는 진정한 생태 회복 운동가이어야만 한다. "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태계, 혹은 생태학이라는 단어를 요즘 우리가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그 단어를 접근하게 됩니다. 생태학, ecology라고 그러는데 여기서는 생물과, 살아 있는 생물과 환경,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켜서 우리가 생태학이다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최근의 복음주의적 선교학자들은 복음 전도의 명령과 함께, 크리스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명령은 전도 명령이지요. 지상명령,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족속들 가운데 증거하여 예수를 모르고 믿지 않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하는 일, 이 전도명령, 이것은 크리스찬들이 물론 양보될 수 없는 변할 수 없는 첫 번째 사명, 가장 중요한 사명, 소위 priority, 우선 순위적 명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전도 명령과 함께 우리는 새롭게 문화명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문화명령. 전도의 명령과 함께 우리에게는 문화적 명령이 주어져 있다. 오늘 생각하려고 하는 제목과 관련이 있는데 이 문화명령 가운데에서도 새 천년에 가장 중요한 과제가 바로 환경보호, 혹은 자연 보호의 과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계 일각에서 특별히 복음전도자이면서 기독교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라는 분이 있는데 캄폴로 박사는 새 쳔년의 그리스도인의 상을 말하면서, "새 천년에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린 크리스찬이 되어야 한다" 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린 크리스찬. 그런 소리 들어 보셨어요 그린 크리스찬. 녹색 그리스도인. 따라서 해 보세요. "그린 크리스찬" 예, 환경을 아낄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 얘기지요.
오늘 우리는 왜 우리가 환경보호가 필요한가 환경보호, 자연 보호 운동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또 어떻게 우리는 환경보호를 할 수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성경의 말씀을 한 번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가 왜 이 환경보호에, 혹은 자연 보호에 힘써야 할까요 왜요 그 대답은 첫째로 환경보호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명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명령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창세기 1장 28절에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처음 사람 아담에게- 복을 주시며,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접근하면 이 말씀을 인간에게만 주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중심으로, 사람 마음대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그런 명령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상당히 많습니다. 모든 성경말씀은 문맥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을 제대로 균형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 전체의 그 맥락 속에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어야 하고 또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 1장 11절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어요. 창세기 1장 11절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1장 11절 말씀 다 같이 시작.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하나가, 땅이여 땅은 풀과 씨를 맺는 채소를 내라 이게 여호와 하나님 명령이에요. 땅을 향해서 명령하신 것이에요. 땅은 씨를 맺는 채소를 내라.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인데 땅이 채소를 잘못 내면 어떻게 돼요 땅이 채소를 제대로 가꾸지 못하고 또 산출하지 못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겠지요.
또 20절 말씀 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 20절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1장20절 시작.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물 속에는 생물들이 번성하는 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까 뜻이에요, 아니에요 그거 대답하기 어려워요 그냥 “예” 하기만 하면 정답이 나오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그러니까 물, 하천 가운데 시내 가운데 강들 가운데 생물이 번성케 하라. 그런데 강 속에서 시내 속에서 생물들이 번성하지 못하고 고기들이 죽어 간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닐까요 아니지요. 자, 여기 또 보면 같은 20절 말씀에,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공간, 이 스페이스, 이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여호와 하나님은 새가 날라다니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는 말이에요.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고 그래서 우주를 창조하시면서 궁창 가운데 아름다운 새들이, 각종각양의 다양한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보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새들이 날아갈 수 없는 하늘, 새들이 자꾸만 대기오염 때문에 한국의 하늘에서 쫓겨가고 자꾸만 어디론가 가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자,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가 28절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어요. 28절에 도달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은 인간입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을 만드시고, 사람을 축복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런데 이게 사람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생육하고 번성하라가 이미 본 것처럼 어디에도 적용되었어요 자연들에게도, 자연들에게도. 22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물고기, 새, 짐승에게도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의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이 생육하고 번성하라가 인간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게. 우리가 그것만 딱 떼어놓고 보면 사람에게만 주신 말씀같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 아무 때나 어디에서나 모든 것을 다 잡아 먹을 수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닐까요 아니에요. 생물도 번성해야 돼요. 생물도 번성해야 돼요. 하늘에는 새가 날고 바다 속에는 아름다운 고기떼들이 헤엄을 치는 이런 세계를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명령이에요. 소위 Creation Mandate.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명령이에요.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이러한 모든 자연이 사람과 더불어, 인간이 이런 자연과 더불어 이 우주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셨다. 믿습니까 여러분 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이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노아의 홍수 사건 때도 보면 노아의 홍수심판 때, 자, 이 죄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면서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방주를 만드셨을 때, 방주 속에 사람만 들어가게 하셨습니까 아니지요. 방주 속에 무엇을 들어가게 하셨습니까 혈육 있는 모든 생물, 생명이 있는 생물, 혈육이 있는 모든 생물을 암수를 함께 방주 안에 보존케 하신 것.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어떤 기대가 있겠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자연을 보호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인간과 더불어, 사람과 더불어서 이런 아름다운 생물들이, 생명있는 자연들이, 만물들이 함께 보존되기를 원하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사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자연 운동에 상당히 무관심해 왔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역사적 기독교는 환경파괴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소위 서구 문명이 발달하는 과정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이 상당히 컸는데, 저는 그런 과정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매우 오해한 말씀 중의 하나가 단어 하나때문에 그래요. 오늘 이 1장 28절에 보시면 여기 ‘땅에 충만하라’ 그 다음에 땅을 뭐라고 그랬어요 ‘정복하라’ 이 정복하라는 단어를 잘못 이해해서 그래요. 그래서 마구잡이로 땅을 개간하고 정복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한 것이에요. 인간중심으로 사람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희생될 수 있다. 짐승도 자연도 마음대로 희생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그 정복주의, 이것을 정복주의라고 말하는데, 정복주의적 윤리를 가지고 계속 세계와 만물을 착취하는 일에 기독교인들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편승했던 책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복하라는 뜻이 뭐냐 땅을 정복하라는 의미가 뭐냐 땅을 마음대로 파헤쳐도 좋다는 의미일까 그게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정복’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영어의 culture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문화’ 잘 개발한다는 뜻이에요. 잘 가꾸고 돌본다는 뜻이에요. 사실은 창세기 2장에 보면 명백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지요 자, 아까 우리가 읽었던 창세기 2장 15절을 다시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즉 처음 사람 아담을 이끌어서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다음에 그것을, 에덴동산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스리며, 여기도 다스리라는 말이 나와요. 그런데 그 다음에 첨부된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다스리며 그 다음에 뭐에요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에덴의 동산을 처음 사람으로 하여금 잘 다스려 지키게 하시고. 그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에요. 정복하라는 말이 파괴해도 좋다는 그런 의미의 말이 아니고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잘 다스릴 청지기적 책임을 강조한 단어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 단어를 잘못 이해했던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보호, 환경보호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자,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자연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사역은 완성됩니다. 그런데 그 사역의 한 단계, 단계마다 하루이틀이 지날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 보시면 어떤 여호와 하나님의 소감이 붙어 있습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다” 라고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참 좋다. 참 좋다. 보시기에 좋았다. 여러분, 얼마나 좋아요. 뜨는 해, 새 천년의 밝아오는 태양, 우리는 비록 체육관 안에서 우리의 태양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지만 동해안 간 사람들 결국은 못 보았잖아요. 내가 예언한 그대로. 그러나 사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감격, 지는 해 석양을 바라보는 감격,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좋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자연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자연을 자연되게 하는 것, 그리스도인들의 책임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왜 우리는 크리스찬들이 환경보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 첫째로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명령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명령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두 번째 이유는 왜 그리스도인들이 환경보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 둘째로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이다. 자, 창세기 1장 28절. 우리가 읽었던 말씀 다시 돌아가보시면 이 말씀이 어떤 말로 시작이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처음 창조한 아담과 하와에게 뭐를 주시며 그랬어요 복을 주시면서 축복을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땅을 잘 다스려라 땅을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보호, 자연관리는 우리의 축복을 위한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해야 돼요. 우리의 축복을 위한 것이다. 자, 그러니까 이 땅과 자연은 인간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지요.
사람이 언제 지음을 받았습니까 대답이 어렵습니까 예, 엿새 동안 여호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몇째 날 지으셨습니까 그 대답이 어려워요 엿새 날, 마지막 날. 그런데 사람이 한 셋째 날이나 넷째 날 지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생존 그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다른 것을 다 지어 놓으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지으셨어요. 인간이 지어졌을 때 보니까 모든 것은 완벽하게 모두 이루어져 있었어요. 그러니까 만물은, 자연은 인간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뭡니까 선물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선물로 다 주신 거예요. 우리에게. 선물로. 그러나 선물이니까, 내가 받은 선물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까 이 선물 관리가 중요하지요. 여러분이 어떤 아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선물을 받으셨다면 그 선물을 어떻게 할까요 소중하게 관리하겠지요. 소중하게 관리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나는 가고 싶다고도 그러지 않았는데 묘향산을 가자고 끌고 가더라고요. 그래서 묘향산을 가 보았어요. 왜 끌고 갔나 그래도 금강산은 못 보지만 묘향산이라도 보게 되어서 다행이다. 가자고 그래서 갔어요. 산을 보러 가는 줄 알고 갔더니 산을 보여주려고 끌고 간 게 아니라 그 묘향산의 거기 뭐냐면 김일성이 받은, 세계 각국에서 받은 모든 선물을 전시해 놓은 김일성 위대하신 아바이 수령님의 선물 전시관이 있어요. 선물 전시관. 그거 보여주려고 거기까지 끌고 간 거예요. 이만큼 좋은 선물을 많이 받았다.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거기까지 끌고 갔더라고.
뭐 어쨌든 우리가 소중한 선물을 받으면 그것을 소중하게 관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이 자연이, 만물이 인간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이라면 지금 인류는 이 선물을 소중하게 관리하고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인들은 어떨까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자연을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습니까 날로 심각해 가는 대기오염 현상, 대기의 스모그 현상들, 강물 오염, 우리 흙 속에 침투되고 있는 유독, 케미컬한 여러가지 화학적 요소들로 말미암아서 더 이상 생물을 배태할 수 없는 우리의 흙의 오염들. 그리고 강물, 산천마다 넘쳐 흐르고 있는 오염된 쓰레기들. 하늘에서는 산성의 비가 내리고 오존층은 파괴되고 지구의 온난화 현상은 날로 촉진되고. 누구의 책임이에요 누구의 책임 누구의 책임입니까 대답하세요. 누구 책임입니까 나의 책임. 자수해서 광명찾아요. 나도 책임이 있어요. 저도 책임이 있어요. 그것은 인류의 책임이고, 그것은 우리들의 책임이고, 그리고 그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 같은 데 산비탈에 뛰어 놀다 보면 ‘바위옷’이라고 그러나 나무둥지 같은 데에 파란 이끼가 낀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었어요. 그렇지요 요즘 없더라고요. 파란 이끼, 바위가 옷을 입고 있는, 파란 이끼로 뒤덮여 있는 딱딱한 모습들. 그런데 그것이 대기가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신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에요. 요즘 볼 수가 없어요. 다 파괴된 것이에요. 나쁜 물, 나쁜 공기, 또 나쁜 음식, 모든 것이 다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최근에 와서 호흡기 계통의 질환이 급속도로 증가되고 있다는 그런 보도를 접합니다. 호흡기 질환이 왜 생겨요 나쁜 물하고 공기 때문에 생겨요. 우리가 나쁜 음식을 먹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설사, 감기, 결코 대기 오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년 중에 여러분, 사람들이 제일 많이 돌아가시는 달이 어떤 달인 줄 아세요 통계적으로 12월과 1월이래요. 12월과 1월. 왜 그럴까요 한 해를 보내면서 한 해와 더불어 인생을 마감하기 위해서 12월에 돌아가실까요 왜 1월에 돌아가실까요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서 새해와 함께 출발하기 위해서 1월에 돌아가실까요 그렇지 않아요. 12월과 1월에 공기가 제일 나쁘답니다. 1년 중에 제일 공기가 나쁠 때가 12월하고 1월이래요. 그래서 많이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지진과 기근 현상, 또 홍수와 가뭄의 현상들, 자연파괴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의 재앙이 아니에요. 사람이 만들어 낸 인재에요. 사람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에요. 그리고 하늘을 원망하지요 나무 다 베어 놓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다 파괴해 놓고 홍수 난다고, 여호와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니에요. 여호와 하나님 책임 아니에요. 우리 책임이에요. 인적 재앙이에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다 거절하고 축복을 파괴해 놓고 우리는 하늘을 원망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지 못할 때 자연은 우리를 더 이상 보호할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 자연을 주셨느냐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이에요. 따라서 우리에게 자연보호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로 왜 그리스도인들이 자연보호에 대해서 책임을 가져야 하느냐 세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일한 목적은 아닐지 몰라요. 그러나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 가운데 포함되어있어요. 자, 여러분, 자연 파괴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사람들이 자연을 파괴합니까 욕심때문에 그래요. 내 집 더 많이 짓기 위해서, 또 아파트 지어서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지금도 자연을 막 파괴하고 있잖아요. 사람의 욕심이에요. 사람의 욕심. 욕심의 배후에는 뭐가 있습니까 죄입니다. 죄. 사실 처음부터 이 자연이 저주를 받기 시작한 원인도 인간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의 죄가 아니라면 자연은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었어요. 창세기 3장을 찾아보세요. 창세기 3장이 무슨 장입니까 창세기 3장을 무슨 장이라고 부릅니까 타락장, 타락장이에요. 3장의 첫 부분에서 우리는 처음 사람의 범죄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17절, 17절. 창세기 3장 17절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다 같이 시작.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여기 땅이 저주를 받는다는 단어가 처음 나와요. 그런데 땅의 저주는 무엇 다음에 온 결과입니까 사람의 죄 다음에 온 결과에요. 인간의 범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게 된 것이란 말이지요. 사람의 범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게되었어요.
(테이프 교체 누락부분)
왜 오셨어요 이 땅에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 사람의 죄때문에 자연과 만물이 땅이 저주를 받았다면 자,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어요. 자, 우리가 그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자, 구원을 받으면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되면 어떤 결과가 또 와야 될까요 사람의 죄 때문에 자연이 저주를 받았다면 사람들이 구원받고 죄 짓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죄를 덜 짓는 세상이 온다면 자연도 어떻게 되어야 돼요 당연히 회복이 되어야지요. 자연은 자기 책임이 아닌 사람 때문에 괜히 피 본 거예요. 자연은 사람 때문에. 혹시 이런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몰라요. 잘 들어보시면 자연이 울고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연이 통곡하고 있는 소리가, 자연이 신음하고 있는 소리를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여러분, 막 지나가다가 산을 헐고 있는 데에 가보면 “아파, 아파, 나는 너무너무 아프다. ” 울고 있는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몰라요. 감동이 안 되시네, 무감각해 져 가지고. 이 죄에 익숙해지면 사람이 무감각해 지는 거예요.
자,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의 구속이, 구원이 완성이 되면 어떤 결과가 오느냐 구원의 완성, 구원의 완성의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 재림의 때에요. 예수님 다시 오시고 사람들의 구원이 완성이 되고 또 이 땅에서 죄가 완전히 심판되고 쫓겨나고 추방되는 마지막 결과를 보여줄 때 로마서 8장 20절 한 번 보세요. 로마서 8장 20절 찾아보세요. 로마서 8장 20절입니다. 오늘 이건 아주 특별 성경공부에요. 나도 처음하는 거예요. 사실은. 로마서 8장 20절. 새 천년에 우리가 어떤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할까 제가 생각하다가 이런 크리스찬들의 윤리 문제를 좀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요일날 오시는 분들은 이런 특별한 것을 공부했다고 절대로 주일날만 나오는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 20절부터 보시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 자연이 허무한 데에 굴복해요. 자연도 썩고 병들고 그러지요. 자연이. 자연 자체의 뜻이 아니다. 굴복하게 하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절 다 같이 읽습니다. 21절 시작.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도달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이 완성될 때, 우리의 몸까지 썩지 아니할 부활의 몸을 입고 완성될 때 그때에 피조물도 그때에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에서 뭐 된다 해방되어 자연도 자연으로써 완전히 회복되고 완성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서 그때까지 22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뭐 하며 그랬어요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그러니까 인간이 고통하고 탄식할 때 누구도 고통한다고요 자연도 고통하며 탄식한다. 그러니까 자연이 탄식한다는 말이 성경적입니까 아닙니까 성경적이지요. 그래서 제가 물어본 거예요. 자연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자연이 울고 있는 소리, 자연이 탄식하고 있는 소리, 우리는 자연의 통곡 소리, 자연의 탄식 소리를 좀 들어야 돼요. 그리고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좀 바꾸어야 돼요. 이제부터 정말 진지하게. 우리가 성경을 따라 살기를 원한다면 이런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자, 이렇게 완성이 돼요.
저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예수님은 이러한 자연, 이런 자연을 아파하시면서 자연을 돌보려는 의지를 가지셨다고 생각해요.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우리가 산상수훈에 보시면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하늘의 새를 보라 좀 봐요. 그냥 지나가지 말고. 오늘 날씨 좋다. 나쁘다. 이러지 말고 새가 있나, 없나를 좀 보시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 보래요. 길쌈도 안하고 돌봐 주는 사람도 없지만 잘 자라고 있지 않느냐 누가 돌보신다고 그랬어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돌보신다. 그럼 자연을 누가 돌보고 있다는 얘기에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가 자연을 돌보고 있다는 얘기에요. 여호와 하나님은 자연에 관심이 계십니까 없습니까 당신이 만드신 작품인 자연에 왜 관심이 없겠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자연을 너무 파괴하면 뭐에요 야, 너 안되겠다.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은 자연에 관심이 있었어요. 자, 우리가 만약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적 삶을 추구하고 주님의 제자로서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이 자연친화적 삶을 사셨다면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돼요. 자연을 감상하고 또 자연을 보호할줄 알고 이런 삶을 살아야 하지요.
대표적인 크리스찬, 이런 면에 있어서 역사 속에 살았던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자연친화적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아시스의 성자였던 프란시스코 같은 사람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카톨릭이었지만 그러나 굉장히 복음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프란시스코의 일생에 보면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번 그가 살고 있던 동네의 가축들이, 그리고 양들이 자꾸만 죽어 없어져요. 목축지였고 또 농부들이 많았는데 가축들이 자꾸만 죽어 없어지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산에서 늑대가 내려와서 계속 잡아 먹어요.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안 되겠다. 늑대를 죽이자 늑대 죽일 계획을 세웠어요. 그래서 그 산에 있는 늑대들을 완전히 없애자 계획을 세우고 늑대 죽일 계획을 세웠는데 아시스의 성자였던 프란시스코가 그것을 반대합니다. "죽이기 전에 나에게 기회를 달라 나한테 맡겨 달라. 그래서 내가 뭘 해 볼 테니까 잘 안 되면 그때 여러분들이 죽이라. " 그리고 그가 기도하고 나서 산으로 올라갔어요. 언덕 위로 올라갔어요. 며칠 후에, 얼마 지나간 후에 프란시스코가 산에서 내려오는데 보니까 늑대를 데리고 내려와요. 늑대를 데리고 내려와. 그런데 아주 양같이 순해 졌어요 늑대가. 그래서 그때 이래로 늑대를 마치 자기의 애완용 동물처럼 데리고 프란시스코가 살았다는 거예요. 늑대를 향해서 "내 친구여, 내 형제여" 부르면서 살았다는 거예요. 사실인지 아닌지 뭐 증명할 수는 없지만 또 여러분이 이것을 실험해 보려고 ‘나도 한 번 그렇게 해 보자’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책임질 수는 없어요.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은 들어요. 우리가 거의 성화에 가까워요. 성화가 완성에 가까우면서 이런 일도 일어날 수가 있다. 이런 일들이 우리들에게 일어날 수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마지막 궁극적인 천국의 광경을 묘사할 때 성경에 이런 묘사가 나오잖아요. 이사야 11장 찾아보세요. 이사야 11장에 보시면 어떤 사람은 이것을 천년왕국에 대한 묘사, 어떤 사람은 이것을 어떤 궁극적인 천국의 묘사라고 말하지만 어쨌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완성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한 모습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사야 11장 6절부터 보시면,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괜찮은 나라’ 믿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천국인 것을 믿습니까 그 천국에 갈 것이 기대가 되지 않으십니까 기대가 되세요
진짜 마지막 천국의 모습을 한 번 보세요. 계시록 21장을 한 번 찾아보세요.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을 한 번 찾아보세요. 22장 제일 마지막 장 1절부터 보시면 이 새 하늘, 새 땅 이 완성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면서 요한계시록의 기자인 사도 요한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 이하.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여호와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러니까 천국은 어떤 나라에요 오염이 없는 나라. 완벽한 자연이 회복된 나라, 그 푸른 강, 푸른 나무, 푸른 숲, 다시 저주와 병이 없는 그 세계, 그 세계에서 살게 되는 데에 대한 희망을 여러분 갖습니까 그러면 그 천국이 이 땅에 오게 해야 할 책임이 있는 우리들이라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땅에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면 우리에게 환경보호의 책임이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어떻게, 어떻게 환경보호에 우리가 참여할 수가 있는가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가 극단적 환경론자가 되어서는 안 돼요. 극단적 환경론자. 극단적 환경론자들이 있어요. 크리스찬들이 환경운동을 기피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세계에서 환경운동을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하면 NEW AGE 운동가들이에요. NEW AGE 운동가. NEW AGE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강력한 금세기 최고의 이단 운동입니다. 이단 운동. 그런데 그들이 환경운동을 열심히 해요. 그들은 뭐냐면 이 환경이나 자연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자연을 신으로 봅니다. 자연을 신으로 봐요. 자연 그 자체가 신이라 그 말이에요. 범신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연을 신으로 봅니다. 자연 앞에 기도하고 자연을 숭배하는 거예요. 그리고 땅을 향해서 "오, 나의 어머니이신 대지시여! Mother Earth!" 뭐 그러고 기도하고 그래요. NEW AGE 운동가들은. 그러나 우리는 뭐냐면 자연은 신이 아니에요. 자연은 신의 피조물입니다. 자연은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또 우리는 자연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뭐에요 자연을 관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NEW AGE 운동가들은 자연과 하나됨을 추구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우리는 잘 돌보고 또 자연을 enjoy 할 그런 특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결정적으로 NEW AGE 운동가들과 크리스찬 환경론자가 다른 이유중의 하나는 뭐냐면, 우리는 자연의 등급적 가치를 믿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등급적 가치, 피조물의 등급적 가치,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NEW AGE 운동가들은 자연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요. 자연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자연이 아니이에요. 최고의 가치는 여전히 인간이에요. 인간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어요. 인간이 가장 소중해요. 인간보다 조금 못한 것이 동물이에요. 동물보다 조금 못한 것이 식물이에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등급적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적 가치관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참새 얘기를 하면서 야, 너희가 참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러니까 우리가 참새보다 귀해요, 안 귀해요 귀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살 것이 없으면 참새를 잡아 먹을 수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괜찮아요. 먹고 살 것이 없으면. 그러나 심심풀이로 재미로 참새를 잡는 것, 저는 그것은 죄라고 생각해요. 저는 기독교인들이 사냥을 즐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말씀을 제가 공부하면서 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배고픈 사람들이 참새 잡아 먹는 것은 괜찮아요. 그러니까 죽느냐 사느냐 위기에 있는 사람들이 개를 잡아 먹는 것은 괜찮아요. 그러나 취미로 잡아 먹는 것, 그것은 절대로 안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크리스찬들은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크리스찬들이 보신탕을 즐길 수가 있느냐 그건 여러분들 스스로가 한 번 기도해 보고 한 번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을 구해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괜찮다. 실컷 돌아다니면서 잡아 먹어라 그러실까, 안 그러실까 전에 보니까 어떤 목사가 밀렵을 하다가 붙들렸어요. 밀렵을 하다가.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돈을 위해서 그러면 안 돼요. 재미를 위해서 그러면 안 돼요. 뭐 NEW AGE 운동가들은 아예 채식주의자들이 많아요. 저는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스도인들이 좀 고기를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해요.
등급적 가치가 있어요. 분명히 등급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되도록 자연과 만물을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이것을 청지기, 크리스찬들의 자연에 대한 책임은 한 마디로 말하면 청지기적 책임이에요. 청지기적 책임. 우리는 청지기다. 이 말이에요. 자연이 주인이 아니에요. 우리는 자연에 대한 청지기에요.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세요. 우리는 자연을 맡아서 관리할 청지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달란트의 비유를 자연에도 적용할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 먼 나라로 가면서 주인이 달란트를 맡겨 주셨어요. 맡겨 주신 것 가운데 뭐도 있어요 자연도 맡겨주셨어요. 그럼 주님이 다시 오셨을 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까 주님 우리가 맡겨 주신 자연을 다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이것도 책임을 져야 돼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에요 주님이 주신 자연을 더 풍성하게 가꾸어서 5달란트, 10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라는 말이에요. 더욱 풍성한 자연을 가꾸고 우리의 후손에게, 다음 세대에게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자연을 물려 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이것이 크리스찬의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몇 가지 제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환경친화적 과학기술을 개발해야 돼요. 환경친화적 과학기술. 극단적 환경론자 가운데에는 과학 자체를 배격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과학은 상당히 중립적 가치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잘못된 과학은, 잘못된 기술은 자연을 파괴합니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필요한데 어떤 과학자들이 필요하느냐 하면 자연을 보호하는 과학자, 자연을 보호하는 기술을 발달시키는 과학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환경친화적 기술. 두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크리스찬들은 환경친화적 자연보호 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을 서야 한다. 저는 장차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자연보호 목장을 좀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교회 소그룹 가운데 자연보호 목장, 그래서 자연보호에 대해서 연구하고 교회 안에서 캠페인을 벌이고 또 이런 것 도와달라고 그러면 저는 우리 교회의 재정의 일정한 부분들을 이런 운동에 지원할 용의가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그 일도 해야 되거든요. 자연보호 운동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또 우리가 이런 운동을 한다는 데에는 이런 의미도 있어요. 우리가 새로 앞으로 5월달이면 선거할 텐데 뭐. 저 사람 보니까 얼굴이, 인상이 나쁘다. 그래서 안 찍고 이런 유치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돼요. 또 나와 고향이 같으니까 찍어 주자, 언제까지 이런 유치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까 우리가 선거가 가까워 투표를 할 때도 정책을 보아야 돼요. 정책. 그 사람의 정책이 환경친화적 정책을 가지고 있는가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에 앞장서고 있는가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뽑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에요. 이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 환경친화적 삶을 우리 개개인이 살아야 되지요. 어떻게 살 수가 있습니까 쓰레기를 덜 방출하고, 음식 조금 덜 먹고. 식당에 가서 이따가 점심 타 올 때도 먹지 않으면서 괜히 왕창 타 가지고 왕창 남겨 가지고 쓰레기를 발생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안 기뻐하실까 매우 안 좋아하실 거예요. 아주 안 좋아하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인상을 쓰시면서 여러분이 밥을 뜰 때 뚫어지게 나를 꿰뚫어 지켜보시고 있는 불꽃 같은 안목을 지니신 여호와 하나님, 밥 조금만 가져 와요. 조금만. 조금만 가져오고 먹을 수 있을 만큼 조금만 가지고 와서 다 없애요. 깨끗이 없애요. 쓰레기를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자연을 보호하는 운동이에요. 그리고 요즘 느끼는 것인데, 한국 사람들이 자동차도 되도록 조그만 차를 타고, 되도록이면 또 걸어 다니고, 또 교회버스로 올 수 있는데도 자기 차 가지고 다 오지 말고, 여럿이서 같이 차를 타고 카풀해서 다니는 훈련, 저는 앞으로 그래서 3월달이면 이사오려고 그럽니다. 걸어 다니려고. 차 안 타고 다니려고.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가 환경을 보호하고 아끼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목적은 그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자연이 더불어 자연의 회복의 영광 속에서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는 그 날을 위하여.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한 구절 보겠습니다. 시편 148편, 한 번 다 같이 찾아보세요. 시편 148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교인들 가운데 이런 환경보호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들에 가서 우리가 그것을 억제하고 그것을 줄이기 위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 크리스찬의 삶이에요. 우리가 전도하는 것만이 크리스찬의 삶이 아니에요. 이것도 매우 중요한 크리스찬들의 소명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지요. 시편 148편은 아름다운 시편입니다. 우리가 교독을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폐치 못할 명을 정하셨도다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 할렐루야' 아멘.
하늘과 별과 나무와 땅들과 또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는 그 날을 위해서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하신 질서와 아름다움 안에서 주님을 지금 이 순간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가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을 보호하고 쓰레기를 줍고 산에서 나무를 꺽지 않고 또 꽃을 아끼는 마음,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신앙 생활의 한 모습이고 새로운 천 년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첫 번째 스페셜 윤리 시리즈 스터디의 첫 번째로 환경보호를 할 줄 아는 크리스찬이 되자. 이런 것은 은혜가 안 되십니까 은혜가 돼요 그래서 결론은 그린 크리스찬이 되자. 다 같이 "그린 크리스찬이 되자. "
미래 학자인 탐 사인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은 "21세기 그리고 새로운 천 년에 크리스찬들이 직면해야 할 최대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환경문제가 될 것이다" 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침례교들의 연합기관인 침례교 세계연맹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BWA라고 그러는데요, BAPTIST WORLD ALLIANCE라고 그러는데요, 기구의 사무총장으로 계시는 덴튼 로츠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저하고 친한 그런 분이신데 그 분이 쓰신 글에 보니까 이런 얘기가 있어요.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함께 자연을 구원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시대의 소명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받은 영혼이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의미있는 삶을 누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 라는 말을 했습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메세지는 우리가 많이 들었지만 자연구원 이런 말씀은 우리에게 생소한 토픽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덴튼 로츠 박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진정한 복음 전도자는 진정한 생태 회복 운동가이어야만 한다. "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태계, 혹은 생태학이라는 단어를 요즘 우리가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그 단어를 접근하게 됩니다. 생태학, ecology라고 그러는데 여기서는 생물과, 살아 있는 생물과 환경,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켜서 우리가 생태학이다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최근의 복음주의적 선교학자들은 복음 전도의 명령과 함께, 크리스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명령은 전도 명령이지요. 지상명령,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족속들 가운데 증거하여 예수를 모르고 믿지 않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하는 일, 이 전도명령, 이것은 크리스찬들이 물론 양보될 수 없는 변할 수 없는 첫 번째 사명, 가장 중요한 사명, 소위 priority, 우선 순위적 명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전도 명령과 함께 우리는 새롭게 문화명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문화명령. 전도의 명령과 함께 우리에게는 문화적 명령이 주어져 있다. 오늘 생각하려고 하는 제목과 관련이 있는데 이 문화명령 가운데에서도 새 천년에 가장 중요한 과제가 바로 환경보호, 혹은 자연 보호의 과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계 일각에서 특별히 복음전도자이면서 기독교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라는 분이 있는데 캄폴로 박사는 새 쳔년의 그리스도인의 상을 말하면서, "새 천년에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린 크리스찬이 되어야 한다" 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린 크리스찬. 그런 소리 들어 보셨어요 그린 크리스찬. 녹색 그리스도인. 따라서 해 보세요. "그린 크리스찬" 예, 환경을 아낄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 얘기지요.
오늘 우리는 왜 우리가 환경보호가 필요한가 환경보호, 자연 보호 운동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또 어떻게 우리는 환경보호를 할 수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성경의 말씀을 한 번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가 왜 이 환경보호에, 혹은 자연 보호에 힘써야 할까요 왜요 그 대답은 첫째로 환경보호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명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명령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창세기 1장 28절에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처음 사람 아담에게- 복을 주시며,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접근하면 이 말씀을 인간에게만 주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중심으로, 사람 마음대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그런 명령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상당히 많습니다. 모든 성경말씀은 문맥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을 제대로 균형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 전체의 그 맥락 속에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어야 하고 또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 1장 11절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어요. 창세기 1장 11절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1장 11절 말씀 다 같이 시작.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하나가, 땅이여 땅은 풀과 씨를 맺는 채소를 내라 이게 여호와 하나님 명령이에요. 땅을 향해서 명령하신 것이에요. 땅은 씨를 맺는 채소를 내라.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인데 땅이 채소를 잘못 내면 어떻게 돼요 땅이 채소를 제대로 가꾸지 못하고 또 산출하지 못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겠지요.
또 20절 말씀 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 20절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1장20절 시작.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물 속에는 생물들이 번성하는 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까 뜻이에요, 아니에요 그거 대답하기 어려워요 그냥 “예” 하기만 하면 정답이 나오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그러니까 물, 하천 가운데 시내 가운데 강들 가운데 생물이 번성케 하라. 그런데 강 속에서 시내 속에서 생물들이 번성하지 못하고 고기들이 죽어 간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닐까요 아니지요. 자, 여기 또 보면 같은 20절 말씀에,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공간, 이 스페이스, 이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여호와 하나님은 새가 날라다니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는 말이에요.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고 그래서 우주를 창조하시면서 궁창 가운데 아름다운 새들이, 각종각양의 다양한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보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새들이 날아갈 수 없는 하늘, 새들이 자꾸만 대기오염 때문에 한국의 하늘에서 쫓겨가고 자꾸만 어디론가 가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자,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가 28절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어요. 28절에 도달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은 인간입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을 만드시고, 사람을 축복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런데 이게 사람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생육하고 번성하라가 이미 본 것처럼 어디에도 적용되었어요 자연들에게도, 자연들에게도. 22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물고기, 새, 짐승에게도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의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이 생육하고 번성하라가 인간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게. 우리가 그것만 딱 떼어놓고 보면 사람에게만 주신 말씀같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 아무 때나 어디에서나 모든 것을 다 잡아 먹을 수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닐까요 아니에요. 생물도 번성해야 돼요. 생물도 번성해야 돼요. 하늘에는 새가 날고 바다 속에는 아름다운 고기떼들이 헤엄을 치는 이런 세계를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명령이에요. 소위 Creation Mandate.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명령이에요.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이러한 모든 자연이 사람과 더불어, 인간이 이런 자연과 더불어 이 우주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셨다. 믿습니까 여러분 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이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노아의 홍수 사건 때도 보면 노아의 홍수심판 때, 자, 이 죄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면서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방주를 만드셨을 때, 방주 속에 사람만 들어가게 하셨습니까 아니지요. 방주 속에 무엇을 들어가게 하셨습니까 혈육 있는 모든 생물, 생명이 있는 생물, 혈육이 있는 모든 생물을 암수를 함께 방주 안에 보존케 하신 것.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어떤 기대가 있겠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자연을 보호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인간과 더불어, 사람과 더불어서 이런 아름다운 생물들이, 생명있는 자연들이, 만물들이 함께 보존되기를 원하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사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자연 운동에 상당히 무관심해 왔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역사적 기독교는 환경파괴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소위 서구 문명이 발달하는 과정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이 상당히 컸는데, 저는 그런 과정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매우 오해한 말씀 중의 하나가 단어 하나때문에 그래요. 오늘 이 1장 28절에 보시면 여기 ‘땅에 충만하라’ 그 다음에 땅을 뭐라고 그랬어요 ‘정복하라’ 이 정복하라는 단어를 잘못 이해해서 그래요. 그래서 마구잡이로 땅을 개간하고 정복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한 것이에요. 인간중심으로 사람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희생될 수 있다. 짐승도 자연도 마음대로 희생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그 정복주의, 이것을 정복주의라고 말하는데, 정복주의적 윤리를 가지고 계속 세계와 만물을 착취하는 일에 기독교인들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편승했던 책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복하라는 뜻이 뭐냐 땅을 정복하라는 의미가 뭐냐 땅을 마음대로 파헤쳐도 좋다는 의미일까 그게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정복’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영어의 culture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문화’ 잘 개발한다는 뜻이에요. 잘 가꾸고 돌본다는 뜻이에요. 사실은 창세기 2장에 보면 명백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지요 자, 아까 우리가 읽었던 창세기 2장 15절을 다시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즉 처음 사람 아담을 이끌어서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다음에 그것을, 에덴동산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스리며, 여기도 다스리라는 말이 나와요. 그런데 그 다음에 첨부된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다스리며 그 다음에 뭐에요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에덴의 동산을 처음 사람으로 하여금 잘 다스려 지키게 하시고. 그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에요. 정복하라는 말이 파괴해도 좋다는 그런 의미의 말이 아니고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잘 다스릴 청지기적 책임을 강조한 단어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 단어를 잘못 이해했던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보호, 환경보호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자,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자연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사역은 완성됩니다. 그런데 그 사역의 한 단계, 단계마다 하루이틀이 지날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 보시면 어떤 여호와 하나님의 소감이 붙어 있습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다” 라고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참 좋다. 참 좋다. 보시기에 좋았다. 여러분, 얼마나 좋아요. 뜨는 해, 새 천년의 밝아오는 태양, 우리는 비록 체육관 안에서 우리의 태양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지만 동해안 간 사람들 결국은 못 보았잖아요. 내가 예언한 그대로. 그러나 사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감격, 지는 해 석양을 바라보는 감격,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좋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자연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자연을 자연되게 하는 것, 그리스도인들의 책임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왜 우리는 크리스찬들이 환경보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 첫째로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명령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명령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두 번째 이유는 왜 그리스도인들이 환경보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 둘째로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이다. 자, 창세기 1장 28절. 우리가 읽었던 말씀 다시 돌아가보시면 이 말씀이 어떤 말로 시작이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처음 창조한 아담과 하와에게 뭐를 주시며 그랬어요 복을 주시면서 축복을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땅을 잘 다스려라 땅을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보호, 자연관리는 우리의 축복을 위한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해야 돼요. 우리의 축복을 위한 것이다. 자, 그러니까 이 땅과 자연은 인간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지요.
사람이 언제 지음을 받았습니까 대답이 어렵습니까 예, 엿새 동안 여호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몇째 날 지으셨습니까 그 대답이 어려워요 엿새 날, 마지막 날. 그런데 사람이 한 셋째 날이나 넷째 날 지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생존 그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다른 것을 다 지어 놓으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지으셨어요. 인간이 지어졌을 때 보니까 모든 것은 완벽하게 모두 이루어져 있었어요. 그러니까 만물은, 자연은 인간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뭡니까 선물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선물로 다 주신 거예요. 우리에게. 선물로. 그러나 선물이니까, 내가 받은 선물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까 이 선물 관리가 중요하지요. 여러분이 어떤 아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선물을 받으셨다면 그 선물을 어떻게 할까요 소중하게 관리하겠지요. 소중하게 관리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나는 가고 싶다고도 그러지 않았는데 묘향산을 가자고 끌고 가더라고요. 그래서 묘향산을 가 보았어요. 왜 끌고 갔나 그래도 금강산은 못 보지만 묘향산이라도 보게 되어서 다행이다. 가자고 그래서 갔어요. 산을 보러 가는 줄 알고 갔더니 산을 보여주려고 끌고 간 게 아니라 그 묘향산의 거기 뭐냐면 김일성이 받은, 세계 각국에서 받은 모든 선물을 전시해 놓은 김일성 위대하신 아바이 수령님의 선물 전시관이 있어요. 선물 전시관. 그거 보여주려고 거기까지 끌고 간 거예요. 이만큼 좋은 선물을 많이 받았다.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거기까지 끌고 갔더라고.
뭐 어쨌든 우리가 소중한 선물을 받으면 그것을 소중하게 관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이 자연이, 만물이 인간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이라면 지금 인류는 이 선물을 소중하게 관리하고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인들은 어떨까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자연을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습니까 날로 심각해 가는 대기오염 현상, 대기의 스모그 현상들, 강물 오염, 우리 흙 속에 침투되고 있는 유독, 케미컬한 여러가지 화학적 요소들로 말미암아서 더 이상 생물을 배태할 수 없는 우리의 흙의 오염들. 그리고 강물, 산천마다 넘쳐 흐르고 있는 오염된 쓰레기들. 하늘에서는 산성의 비가 내리고 오존층은 파괴되고 지구의 온난화 현상은 날로 촉진되고. 누구의 책임이에요 누구의 책임 누구의 책임입니까 대답하세요. 누구 책임입니까 나의 책임. 자수해서 광명찾아요. 나도 책임이 있어요. 저도 책임이 있어요. 그것은 인류의 책임이고, 그것은 우리들의 책임이고, 그리고 그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 같은 데 산비탈에 뛰어 놀다 보면 ‘바위옷’이라고 그러나 나무둥지 같은 데에 파란 이끼가 낀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었어요. 그렇지요 요즘 없더라고요. 파란 이끼, 바위가 옷을 입고 있는, 파란 이끼로 뒤덮여 있는 딱딱한 모습들. 그런데 그것이 대기가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신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에요. 요즘 볼 수가 없어요. 다 파괴된 것이에요. 나쁜 물, 나쁜 공기, 또 나쁜 음식, 모든 것이 다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최근에 와서 호흡기 계통의 질환이 급속도로 증가되고 있다는 그런 보도를 접합니다. 호흡기 질환이 왜 생겨요 나쁜 물하고 공기 때문에 생겨요. 우리가 나쁜 음식을 먹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설사, 감기, 결코 대기 오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년 중에 여러분, 사람들이 제일 많이 돌아가시는 달이 어떤 달인 줄 아세요 통계적으로 12월과 1월이래요. 12월과 1월. 왜 그럴까요 한 해를 보내면서 한 해와 더불어 인생을 마감하기 위해서 12월에 돌아가실까요 왜 1월에 돌아가실까요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서 새해와 함께 출발하기 위해서 1월에 돌아가실까요 그렇지 않아요. 12월과 1월에 공기가 제일 나쁘답니다. 1년 중에 제일 공기가 나쁠 때가 12월하고 1월이래요. 그래서 많이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지진과 기근 현상, 또 홍수와 가뭄의 현상들, 자연파괴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의 재앙이 아니에요. 사람이 만들어 낸 인재에요. 사람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에요. 그리고 하늘을 원망하지요 나무 다 베어 놓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다 파괴해 놓고 홍수 난다고, 여호와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니에요. 여호와 하나님 책임 아니에요. 우리 책임이에요. 인적 재앙이에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다 거절하고 축복을 파괴해 놓고 우리는 하늘을 원망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지 못할 때 자연은 우리를 더 이상 보호할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 자연을 주셨느냐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이에요. 따라서 우리에게 자연보호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로 왜 그리스도인들이 자연보호에 대해서 책임을 가져야 하느냐 세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일한 목적은 아닐지 몰라요. 그러나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 가운데 포함되어있어요. 자, 여러분, 자연 파괴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사람들이 자연을 파괴합니까 욕심때문에 그래요. 내 집 더 많이 짓기 위해서, 또 아파트 지어서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지금도 자연을 막 파괴하고 있잖아요. 사람의 욕심이에요. 사람의 욕심. 욕심의 배후에는 뭐가 있습니까 죄입니다. 죄. 사실 처음부터 이 자연이 저주를 받기 시작한 원인도 인간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의 죄가 아니라면 자연은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었어요. 창세기 3장을 찾아보세요. 창세기 3장이 무슨 장입니까 창세기 3장을 무슨 장이라고 부릅니까 타락장, 타락장이에요. 3장의 첫 부분에서 우리는 처음 사람의 범죄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17절, 17절. 창세기 3장 17절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다 같이 시작.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여기 땅이 저주를 받는다는 단어가 처음 나와요. 그런데 땅의 저주는 무엇 다음에 온 결과입니까 사람의 죄 다음에 온 결과에요. 인간의 범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게 된 것이란 말이지요. 사람의 범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게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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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셨어요 이 땅에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 사람의 죄때문에 자연과 만물이 땅이 저주를 받았다면 자,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어요. 자, 우리가 그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자, 구원을 받으면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되면 어떤 결과가 또 와야 될까요 사람의 죄 때문에 자연이 저주를 받았다면 사람들이 구원받고 죄 짓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죄를 덜 짓는 세상이 온다면 자연도 어떻게 되어야 돼요 당연히 회복이 되어야지요. 자연은 자기 책임이 아닌 사람 때문에 괜히 피 본 거예요. 자연은 사람 때문에. 혹시 이런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몰라요. 잘 들어보시면 자연이 울고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연이 통곡하고 있는 소리가, 자연이 신음하고 있는 소리를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여러분, 막 지나가다가 산을 헐고 있는 데에 가보면 “아파, 아파, 나는 너무너무 아프다. ” 울고 있는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몰라요. 감동이 안 되시네, 무감각해 져 가지고. 이 죄에 익숙해지면 사람이 무감각해 지는 거예요.
자,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의 구속이, 구원이 완성이 되면 어떤 결과가 오느냐 구원의 완성, 구원의 완성의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 재림의 때에요. 예수님 다시 오시고 사람들의 구원이 완성이 되고 또 이 땅에서 죄가 완전히 심판되고 쫓겨나고 추방되는 마지막 결과를 보여줄 때 로마서 8장 20절 한 번 보세요. 로마서 8장 20절 찾아보세요. 로마서 8장 20절입니다. 오늘 이건 아주 특별 성경공부에요. 나도 처음하는 거예요. 사실은. 로마서 8장 20절. 새 천년에 우리가 어떤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할까 제가 생각하다가 이런 크리스찬들의 윤리 문제를 좀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요일날 오시는 분들은 이런 특별한 것을 공부했다고 절대로 주일날만 나오는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 20절부터 보시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 자연이 허무한 데에 굴복해요. 자연도 썩고 병들고 그러지요. 자연이. 자연 자체의 뜻이 아니다. 굴복하게 하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절 다 같이 읽습니다. 21절 시작.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도달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이 완성될 때, 우리의 몸까지 썩지 아니할 부활의 몸을 입고 완성될 때 그때에 피조물도 그때에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에서 뭐 된다 해방되어 자연도 자연으로써 완전히 회복되고 완성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서 그때까지 22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뭐 하며 그랬어요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그러니까 인간이 고통하고 탄식할 때 누구도 고통한다고요 자연도 고통하며 탄식한다. 그러니까 자연이 탄식한다는 말이 성경적입니까 아닙니까 성경적이지요. 그래서 제가 물어본 거예요. 자연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자연이 울고 있는 소리, 자연이 탄식하고 있는 소리, 우리는 자연의 통곡 소리, 자연의 탄식 소리를 좀 들어야 돼요. 그리고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좀 바꾸어야 돼요. 이제부터 정말 진지하게. 우리가 성경을 따라 살기를 원한다면 이런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자, 이렇게 완성이 돼요.
저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예수님은 이러한 자연, 이런 자연을 아파하시면서 자연을 돌보려는 의지를 가지셨다고 생각해요.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우리가 산상수훈에 보시면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하늘의 새를 보라 좀 봐요. 그냥 지나가지 말고. 오늘 날씨 좋다. 나쁘다. 이러지 말고 새가 있나, 없나를 좀 보시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 보래요. 길쌈도 안하고 돌봐 주는 사람도 없지만 잘 자라고 있지 않느냐 누가 돌보신다고 그랬어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돌보신다. 그럼 자연을 누가 돌보고 있다는 얘기에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가 자연을 돌보고 있다는 얘기에요. 여호와 하나님은 자연에 관심이 계십니까 없습니까 당신이 만드신 작품인 자연에 왜 관심이 없겠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자연을 너무 파괴하면 뭐에요 야, 너 안되겠다.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은 자연에 관심이 있었어요. 자, 우리가 만약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적 삶을 추구하고 주님의 제자로서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이 자연친화적 삶을 사셨다면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돼요. 자연을 감상하고 또 자연을 보호할줄 알고 이런 삶을 살아야 하지요.
대표적인 크리스찬, 이런 면에 있어서 역사 속에 살았던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자연친화적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아시스의 성자였던 프란시스코 같은 사람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카톨릭이었지만 그러나 굉장히 복음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프란시스코의 일생에 보면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번 그가 살고 있던 동네의 가축들이, 그리고 양들이 자꾸만 죽어 없어져요. 목축지였고 또 농부들이 많았는데 가축들이 자꾸만 죽어 없어지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산에서 늑대가 내려와서 계속 잡아 먹어요.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안 되겠다. 늑대를 죽이자 늑대 죽일 계획을 세웠어요. 그래서 그 산에 있는 늑대들을 완전히 없애자 계획을 세우고 늑대 죽일 계획을 세웠는데 아시스의 성자였던 프란시스코가 그것을 반대합니다. "죽이기 전에 나에게 기회를 달라 나한테 맡겨 달라. 그래서 내가 뭘 해 볼 테니까 잘 안 되면 그때 여러분들이 죽이라. " 그리고 그가 기도하고 나서 산으로 올라갔어요. 언덕 위로 올라갔어요. 며칠 후에, 얼마 지나간 후에 프란시스코가 산에서 내려오는데 보니까 늑대를 데리고 내려와요. 늑대를 데리고 내려와. 그런데 아주 양같이 순해 졌어요 늑대가. 그래서 그때 이래로 늑대를 마치 자기의 애완용 동물처럼 데리고 프란시스코가 살았다는 거예요. 늑대를 향해서 "내 친구여, 내 형제여" 부르면서 살았다는 거예요. 사실인지 아닌지 뭐 증명할 수는 없지만 또 여러분이 이것을 실험해 보려고 ‘나도 한 번 그렇게 해 보자’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책임질 수는 없어요.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은 들어요. 우리가 거의 성화에 가까워요. 성화가 완성에 가까우면서 이런 일도 일어날 수가 있다. 이런 일들이 우리들에게 일어날 수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마지막 궁극적인 천국의 광경을 묘사할 때 성경에 이런 묘사가 나오잖아요. 이사야 11장 찾아보세요. 이사야 11장에 보시면 어떤 사람은 이것을 천년왕국에 대한 묘사, 어떤 사람은 이것을 어떤 궁극적인 천국의 묘사라고 말하지만 어쨌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완성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한 모습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사야 11장 6절부터 보시면,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괜찮은 나라’ 믿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천국인 것을 믿습니까 그 천국에 갈 것이 기대가 되지 않으십니까 기대가 되세요
진짜 마지막 천국의 모습을 한 번 보세요. 계시록 21장을 한 번 찾아보세요.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을 한 번 찾아보세요. 22장 제일 마지막 장 1절부터 보시면 이 새 하늘, 새 땅 이 완성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면서 요한계시록의 기자인 사도 요한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 이하.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여호와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러니까 천국은 어떤 나라에요 오염이 없는 나라. 완벽한 자연이 회복된 나라, 그 푸른 강, 푸른 나무, 푸른 숲, 다시 저주와 병이 없는 그 세계, 그 세계에서 살게 되는 데에 대한 희망을 여러분 갖습니까 그러면 그 천국이 이 땅에 오게 해야 할 책임이 있는 우리들이라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땅에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면 우리에게 환경보호의 책임이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어떻게, 어떻게 환경보호에 우리가 참여할 수가 있는가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가 극단적 환경론자가 되어서는 안 돼요. 극단적 환경론자. 극단적 환경론자들이 있어요. 크리스찬들이 환경운동을 기피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세계에서 환경운동을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하면 NEW AGE 운동가들이에요. NEW AGE 운동가. NEW AGE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강력한 금세기 최고의 이단 운동입니다. 이단 운동. 그런데 그들이 환경운동을 열심히 해요. 그들은 뭐냐면 이 환경이나 자연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자연을 신으로 봅니다. 자연을 신으로 봐요. 자연 그 자체가 신이라 그 말이에요. 범신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연을 신으로 봅니다. 자연 앞에 기도하고 자연을 숭배하는 거예요. 그리고 땅을 향해서 "오, 나의 어머니이신 대지시여! Mother Earth!" 뭐 그러고 기도하고 그래요. NEW AGE 운동가들은. 그러나 우리는 뭐냐면 자연은 신이 아니에요. 자연은 신의 피조물입니다. 자연은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또 우리는 자연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뭐에요 자연을 관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NEW AGE 운동가들은 자연과 하나됨을 추구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우리는 잘 돌보고 또 자연을 enjoy 할 그런 특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결정적으로 NEW AGE 운동가들과 크리스찬 환경론자가 다른 이유중의 하나는 뭐냐면, 우리는 자연의 등급적 가치를 믿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등급적 가치, 피조물의 등급적 가치,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NEW AGE 운동가들은 자연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요. 자연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자연이 아니이에요. 최고의 가치는 여전히 인간이에요. 인간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어요. 인간이 가장 소중해요. 인간보다 조금 못한 것이 동물이에요. 동물보다 조금 못한 것이 식물이에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등급적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적 가치관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참새 얘기를 하면서 야, 너희가 참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러니까 우리가 참새보다 귀해요, 안 귀해요 귀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살 것이 없으면 참새를 잡아 먹을 수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괜찮아요. 먹고 살 것이 없으면. 그러나 심심풀이로 재미로 참새를 잡는 것, 저는 그것은 죄라고 생각해요. 저는 기독교인들이 사냥을 즐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말씀을 제가 공부하면서 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배고픈 사람들이 참새 잡아 먹는 것은 괜찮아요. 그러니까 죽느냐 사느냐 위기에 있는 사람들이 개를 잡아 먹는 것은 괜찮아요. 그러나 취미로 잡아 먹는 것, 그것은 절대로 안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크리스찬들은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크리스찬들이 보신탕을 즐길 수가 있느냐 그건 여러분들 스스로가 한 번 기도해 보고 한 번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을 구해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괜찮다. 실컷 돌아다니면서 잡아 먹어라 그러실까, 안 그러실까 전에 보니까 어떤 목사가 밀렵을 하다가 붙들렸어요. 밀렵을 하다가.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돈을 위해서 그러면 안 돼요. 재미를 위해서 그러면 안 돼요. 뭐 NEW AGE 운동가들은 아예 채식주의자들이 많아요. 저는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스도인들이 좀 고기를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해요.
등급적 가치가 있어요. 분명히 등급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되도록 자연과 만물을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이것을 청지기, 크리스찬들의 자연에 대한 책임은 한 마디로 말하면 청지기적 책임이에요. 청지기적 책임. 우리는 청지기다. 이 말이에요. 자연이 주인이 아니에요. 우리는 자연에 대한 청지기에요.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세요. 우리는 자연을 맡아서 관리할 청지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달란트의 비유를 자연에도 적용할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 먼 나라로 가면서 주인이 달란트를 맡겨 주셨어요. 맡겨 주신 것 가운데 뭐도 있어요 자연도 맡겨주셨어요. 그럼 주님이 다시 오셨을 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까 주님 우리가 맡겨 주신 자연을 다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이것도 책임을 져야 돼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에요 주님이 주신 자연을 더 풍성하게 가꾸어서 5달란트, 10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라는 말이에요. 더욱 풍성한 자연을 가꾸고 우리의 후손에게, 다음 세대에게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자연을 물려 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이것이 크리스찬의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몇 가지 제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환경친화적 과학기술을 개발해야 돼요. 환경친화적 과학기술. 극단적 환경론자 가운데에는 과학 자체를 배격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과학은 상당히 중립적 가치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잘못된 과학은, 잘못된 기술은 자연을 파괴합니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필요한데 어떤 과학자들이 필요하느냐 하면 자연을 보호하는 과학자, 자연을 보호하는 기술을 발달시키는 과학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환경친화적 기술. 두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크리스찬들은 환경친화적 자연보호 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을 서야 한다. 저는 장차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자연보호 목장을 좀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교회 소그룹 가운데 자연보호 목장, 그래서 자연보호에 대해서 연구하고 교회 안에서 캠페인을 벌이고 또 이런 것 도와달라고 그러면 저는 우리 교회의 재정의 일정한 부분들을 이런 운동에 지원할 용의가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그 일도 해야 되거든요. 자연보호 운동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또 우리가 이런 운동을 한다는 데에는 이런 의미도 있어요. 우리가 새로 앞으로 5월달이면 선거할 텐데 뭐. 저 사람 보니까 얼굴이, 인상이 나쁘다. 그래서 안 찍고 이런 유치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돼요. 또 나와 고향이 같으니까 찍어 주자, 언제까지 이런 유치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까 우리가 선거가 가까워 투표를 할 때도 정책을 보아야 돼요. 정책. 그 사람의 정책이 환경친화적 정책을 가지고 있는가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에 앞장서고 있는가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뽑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에요. 이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 환경친화적 삶을 우리 개개인이 살아야 되지요. 어떻게 살 수가 있습니까 쓰레기를 덜 방출하고, 음식 조금 덜 먹고. 식당에 가서 이따가 점심 타 올 때도 먹지 않으면서 괜히 왕창 타 가지고 왕창 남겨 가지고 쓰레기를 발생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안 기뻐하실까 매우 안 좋아하실 거예요. 아주 안 좋아하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인상을 쓰시면서 여러분이 밥을 뜰 때 뚫어지게 나를 꿰뚫어 지켜보시고 있는 불꽃 같은 안목을 지니신 여호와 하나님, 밥 조금만 가져 와요. 조금만. 조금만 가져오고 먹을 수 있을 만큼 조금만 가지고 와서 다 없애요. 깨끗이 없애요. 쓰레기를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자연을 보호하는 운동이에요. 그리고 요즘 느끼는 것인데, 한국 사람들이 자동차도 되도록 조그만 차를 타고, 되도록이면 또 걸어 다니고, 또 교회버스로 올 수 있는데도 자기 차 가지고 다 오지 말고, 여럿이서 같이 차를 타고 카풀해서 다니는 훈련, 저는 앞으로 그래서 3월달이면 이사오려고 그럽니다. 걸어 다니려고. 차 안 타고 다니려고.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가 환경을 보호하고 아끼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목적은 그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자연이 더불어 자연의 회복의 영광 속에서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는 그 날을 위하여.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한 구절 보겠습니다. 시편 148편, 한 번 다 같이 찾아보세요. 시편 148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교인들 가운데 이런 환경보호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들에 가서 우리가 그것을 억제하고 그것을 줄이기 위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 크리스찬의 삶이에요. 우리가 전도하는 것만이 크리스찬의 삶이 아니에요. 이것도 매우 중요한 크리스찬들의 소명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지요. 시편 148편은 아름다운 시편입니다. 우리가 교독을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폐치 못할 명을 정하셨도다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 할렐루야' 아멘.
하늘과 별과 나무와 땅들과 또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는 그 날을 위해서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하신 질서와 아름다움 안에서 주님을 지금 이 순간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가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을 보호하고 쓰레기를 줍고 산에서 나무를 꺽지 않고 또 꽃을 아끼는 마음,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신앙 생활의 한 모습이고 새로운 천 년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첫 번째 스페셜 윤리 시리즈 스터디의 첫 번째로 환경보호를 할 줄 아는 크리스찬이 되자. 이런 것은 은혜가 안 되십니까 은혜가 돼요 그래서 결론은 그린 크리스찬이 되자. 다 같이 "그린 크리스찬이 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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