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환경을 보호한다구요?
본문
지금부터 142년 전인 1864년에, 어느 인디언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소개하겠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시애틀에 사는 인디언 부족에게, 그들의 땅을 정부가 매입하고 새로운 보호구역을 마련해 주겠노라고 제안했는데, 인디언 추장이 거부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 보낸 편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이 편지가 위서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느 인디언 추장의 편지
어떻게 감히 하늘의 푸르름과 땅의 따스함을 사고 팔 수 있습니까
우리의 소유가 아닌 신선한 공기와 햇빛에 반짝이는 냇물을
당신들이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 땅의 모든 부분은 우리 민족에게 거룩한 곳입니다.
아침 이슬에 반짝이는 솔잎 하나도, 냇물의 모래밭도, 빽빽한 숲의 이끼도,
모든 언덕과 곤충들의 윙윙거리는 소리도,
우리 민족의 경험에 따르면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입니다.
향기로운 꽃들은 우리의 형제이고
사슴과 말, 커다란 독수리까지 모두 우리의 형제입니다.
그리고 거친 바위산과, 초원의 푸르름, 망아지의 따스함,
그리고 사람은 모두 한가족입니다.
산과 들판을 반짝이며 흐르는 물은 우리에게 그냥 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백인들이 우리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어머니인 땅과 형제인 하늘을
마치 보석이나 가죽처럼 사고파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욕심은 땅을 모두 삼켜버릴 것이고
우리에게는 결국 사막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손들에게 가르쳤듯이
당신들도 당신들의 자손에게 가르치십시오.
대지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모든 좋은 것은 어머니인 땅으로부터 나오고,
그 자식들에게 미치는 것이라고.
생명의 실타래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 중 하나의 실가닥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생명의 실타래에 끼치는 영향은 곧 자신에게 끼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들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도 이 사실을 조만간 깨닫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땅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땅을 더럽히는 일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모독하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없이 살육당하는 들소와 길들여지는 말들,
백인에게 잘려 나가는 울창한 숲과
말하는 전깃줄 때문에 짓밟히는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
당신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숲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모두 사라졌습니다.
독수리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삶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싸움밖에 없습니다.
‘환경’이라는 용어, 적절한가
지난 6월 5일이 UN이 정한 ‘세계 환경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환경’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지만, 정작 환경 문제에 깊은 관심과 위기를 느끼고 있는 분들은 환경이란 용어를 잘 쓰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환경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환경이라는 말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그 주변, 혹은 배경으로 자연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전체 안에서 부분을 이루고, 부분으로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주인공이고, 엑스트라로 자연이 존재하는 게 아니구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는,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모든 피조물들이 서로 연관되고 서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종이 한 장에서도 우리는 구름을 볼 수 있고, 물소리, 새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종이는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무는 비가 없으면 자랄 수 없습니다. 비는 구름이 없으면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이 한 장에서 구름도, 비도, 물방울도, 나무도 볼 수 있고, 또한 물소리도, 나무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이 한 장 속에 흙도, 햇빛도, 공기도, 달빛도, 이슬도,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 모습에서, 그리고 걸음걸이에서, 우리 부모님은 자신의 모습, 자신의 걸음걸이를 보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친형제자매의 얼굴과 걸음걸이에서 부모님의 얼굴을, 걸음걸이를, 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자식을 두신 교우님은 그 아이들의 얼굴과 행동거지에서 어렸을 적 자신을 보실 때가 꽤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속에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부모님을 있게 해 주신 부모님의 부모님도 계시고 조상들이 다 계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속에는 이런 모든 분들을 있게 해 주신 존재의 근원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렇게 세계를, 그리고 우주를, 모두가 서로 어울려 있고 더불어 있는 공동체로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품 안에, 우리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미생물까지 포함해서 모든 자연이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오로지 인간 중심적인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정복할 대상으로만 보던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허락해 주신 이웃들을 경쟁과 이용의 대상으로 보던 이기적이고 탐욕에 찬 인간관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의 보호자인가
그리고 우리가 ‘환경보호’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쓰는데, 이 ‘보호’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누가 누굴 보호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자연을 해치지만 않으면 자연은 스스로 조화를 이루며 존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섭리 안에서요.
이 세상의 존재 양태는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게 아닙니다. 자연이 인간을 보호하고 품어주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보호를 인간이 거절하고 제 멋대로 훼손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연의 보호를 인간이 거절하면 결국 자연은 인간을 내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환경’이라든가 ‘보호’라는 용어 자체가 도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 ‘생태’, 혹은 ‘생태계’ 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생태라는 말도 도전을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생태, 즉 동물이나 식물 뿐 아니라 미생물까지 포함해서,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활 양태를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명체만이 아니라 무생물까지도 포함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 심지어는 돌맹이 하나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기에 있게 하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이나 ‘생태’라는 말보다 그냥 ‘자연’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자연 보호’가 아니라 ‘자연 보존’, 혹은 ‘자연 보전’이라고 해야 적절한 표현이 된다는 것입니다. ‘보존’ 혹은 ‘보전’이라는 단어에도 ‘보호한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자연에 함부로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보호’라는 말보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나서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환경보호 문제, 자연보전 문제와 관련해서 이 말씀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연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주셨습니다. 들에 핀 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입히신다고 말씀하셨고, 공중의 새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하셨습니다. 풀잎 하나, 작은 새 한 마리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고 기르시는 소중한 생명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자연관을 생각하면, 먹고 남은 것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말씀으로 오병이어 사건을 마무리하신 것은 너무도 예수님다운 처신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환경보호, 혹은 자연보전이라는 말도 쓰지만, 신학적인 용어로 ‘창조질서회복’이라는 표현도 씁니다. 창조질서회복, 저는 이 용어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용어 속에는,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해치는 것인데, 그 훼손된 창조질서를 우리가 회복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질서회복’이라는 용어는, 여호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제를 단지 환경 문제, 자연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사실도 일깨워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제 멋대로 파헤치고 훼손하는 행위는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을 제 멋대로 파괴하는 신앙적 범죄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존중하지 않고 제 멋대로 해치면 자연은 정확하게 그 결과를 우리에게 되돌려줄 것입니다.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 이 문제가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의 불편과도 바꾸지 못하는 작은 문제로 인식되는 형편이지만, 지금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에 가서는 죽느냐 사느냐는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인디언 추장의 편지
어떻게 감히 하늘의 푸르름과 땅의 따스함을 사고 팔 수 있습니까
우리의 소유가 아닌 신선한 공기와 햇빛에 반짝이는 냇물을
당신들이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 땅의 모든 부분은 우리 민족에게 거룩한 곳입니다.
아침 이슬에 반짝이는 솔잎 하나도, 냇물의 모래밭도, 빽빽한 숲의 이끼도,
모든 언덕과 곤충들의 윙윙거리는 소리도,
우리 민족의 경험에 따르면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입니다.
향기로운 꽃들은 우리의 형제이고
사슴과 말, 커다란 독수리까지 모두 우리의 형제입니다.
그리고 거친 바위산과, 초원의 푸르름, 망아지의 따스함,
그리고 사람은 모두 한가족입니다.
산과 들판을 반짝이며 흐르는 물은 우리에게 그냥 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백인들이 우리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어머니인 땅과 형제인 하늘을
마치 보석이나 가죽처럼 사고파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욕심은 땅을 모두 삼켜버릴 것이고
우리에게는 결국 사막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손들에게 가르쳤듯이
당신들도 당신들의 자손에게 가르치십시오.
대지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모든 좋은 것은 어머니인 땅으로부터 나오고,
그 자식들에게 미치는 것이라고.
생명의 실타래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 중 하나의 실가닥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생명의 실타래에 끼치는 영향은 곧 자신에게 끼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들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도 이 사실을 조만간 깨닫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땅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땅을 더럽히는 일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모독하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없이 살육당하는 들소와 길들여지는 말들,
백인에게 잘려 나가는 울창한 숲과
말하는 전깃줄 때문에 짓밟히는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
당신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숲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모두 사라졌습니다.
독수리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삶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싸움밖에 없습니다.
‘환경’이라는 용어, 적절한가
지난 6월 5일이 UN이 정한 ‘세계 환경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환경’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지만, 정작 환경 문제에 깊은 관심과 위기를 느끼고 있는 분들은 환경이란 용어를 잘 쓰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환경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환경이라는 말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그 주변, 혹은 배경으로 자연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전체 안에서 부분을 이루고, 부분으로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주인공이고, 엑스트라로 자연이 존재하는 게 아니구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는,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모든 피조물들이 서로 연관되고 서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종이 한 장에서도 우리는 구름을 볼 수 있고, 물소리, 새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종이는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무는 비가 없으면 자랄 수 없습니다. 비는 구름이 없으면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이 한 장에서 구름도, 비도, 물방울도, 나무도 볼 수 있고, 또한 물소리도, 나무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이 한 장 속에 흙도, 햇빛도, 공기도, 달빛도, 이슬도,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 모습에서, 그리고 걸음걸이에서, 우리 부모님은 자신의 모습, 자신의 걸음걸이를 보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친형제자매의 얼굴과 걸음걸이에서 부모님의 얼굴을, 걸음걸이를, 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자식을 두신 교우님은 그 아이들의 얼굴과 행동거지에서 어렸을 적 자신을 보실 때가 꽤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속에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부모님을 있게 해 주신 부모님의 부모님도 계시고 조상들이 다 계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속에는 이런 모든 분들을 있게 해 주신 존재의 근원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렇게 세계를, 그리고 우주를, 모두가 서로 어울려 있고 더불어 있는 공동체로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품 안에, 우리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미생물까지 포함해서 모든 자연이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오로지 인간 중심적인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정복할 대상으로만 보던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허락해 주신 이웃들을 경쟁과 이용의 대상으로 보던 이기적이고 탐욕에 찬 인간관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의 보호자인가
그리고 우리가 ‘환경보호’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쓰는데, 이 ‘보호’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누가 누굴 보호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자연을 해치지만 않으면 자연은 스스로 조화를 이루며 존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섭리 안에서요.
이 세상의 존재 양태는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게 아닙니다. 자연이 인간을 보호하고 품어주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보호를 인간이 거절하고 제 멋대로 훼손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연의 보호를 인간이 거절하면 결국 자연은 인간을 내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환경’이라든가 ‘보호’라는 용어 자체가 도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 ‘생태’, 혹은 ‘생태계’ 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생태라는 말도 도전을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생태, 즉 동물이나 식물 뿐 아니라 미생물까지 포함해서,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활 양태를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명체만이 아니라 무생물까지도 포함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 심지어는 돌맹이 하나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기에 있게 하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이나 ‘생태’라는 말보다 그냥 ‘자연’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자연 보호’가 아니라 ‘자연 보존’, 혹은 ‘자연 보전’이라고 해야 적절한 표현이 된다는 것입니다. ‘보존’ 혹은 ‘보전’이라는 단어에도 ‘보호한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자연에 함부로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보호’라는 말보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나서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환경보호 문제, 자연보전 문제와 관련해서 이 말씀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연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주셨습니다. 들에 핀 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입히신다고 말씀하셨고, 공중의 새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하셨습니다. 풀잎 하나, 작은 새 한 마리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고 기르시는 소중한 생명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자연관을 생각하면, 먹고 남은 것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말씀으로 오병이어 사건을 마무리하신 것은 너무도 예수님다운 처신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환경보호, 혹은 자연보전이라는 말도 쓰지만, 신학적인 용어로 ‘창조질서회복’이라는 표현도 씁니다. 창조질서회복, 저는 이 용어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용어 속에는,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해치는 것인데, 그 훼손된 창조질서를 우리가 회복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질서회복’이라는 용어는, 여호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제를 단지 환경 문제, 자연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사실도 일깨워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제 멋대로 파헤치고 훼손하는 행위는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을 제 멋대로 파괴하는 신앙적 범죄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존중하지 않고 제 멋대로 해치면 자연은 정확하게 그 결과를 우리에게 되돌려줄 것입니다.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 이 문제가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의 불편과도 바꾸지 못하는 작은 문제로 인식되는 형편이지만, 지금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에 가서는 죽느냐 사느냐는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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