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거라사인의 청년
본문
오늘 본문 말씀은 귀신들린 한 청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을 먼저 언급하기 전에 이 청년이 살았든 거라사인 지방에 대해서 좀 알아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 거라사인 지방은 요단 동편과 갈릴리 사해의 중간에 있는 도시입니다.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이며 그리고 물이 잘 흐르는 계곡이 많이 있어서 농업도 아주 발달한 도시입니다. 특히 옥수수재배는 인근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도시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시리아, 알랙산더 왕,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항상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넘보는 도시었습니다. 로마의 품페이는 데카폴리스라고 열 개의 대 도시를 선정했는데 이 거라사인 지방이 들어갈 정도로 큰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주후 1세기 때 로마가 도시계획 속에서 재건축을 할 때 거라사인 지방을 도시 가운데로 포장된 도로를 내고 대장간과 제우스 신전을 두었으며, 대 극장이 두 개, 그리고 도시 외곽에는 성으로 둘러쌓았습니다. 그러니까 거라사인 지방은 인구나 문화시설 산업발달 면에서 거대한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예루살렘과 갈릴리 두 지방을 여행했는데 즉, 요단 서편만 여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편은 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 땅이라고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 땅은 구원에서 제외되었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쪽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마리아지방을 피하고 평소에 가지 않으셨든 거라사인 지방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런 갑작스러운 행동은 분명히 귀한 메시지와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귀신들린 청년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귀신들린 청년은 증세가 아주 특이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귀신을 많이 소개하는데 귀신이 들리면 눈이 멀고, 말을 못하고, 병을 앓거나 거품을 내고 쓰러지거나 하는 정세를 기록하고 있는데 마가복음 5장에 기록되어있는 이 청년은 좀 다릅니다. 15절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그러니까 정신이 온전해졌다는 것은 재 정신이 들었다는 것인데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이 청년은 귀신들린 정도가 정신질환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은 정신질환에 대해서 좀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정신질환자가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이 정신질환이란 정신병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정신질환은 정신세계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뇌 기능손상이지요.
정신세계의 기능 손상에 따라 때로는 노이로제, 인격장애, 성기능 장애, 정신병, 약물중독, 이렇게 구분해서 부르는데 이것을 전체적으로 포함해서 정신절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신질환을 구체적으로 나열한다면 먼저 신경증이 있습니다.
이 신경증에는 우울증, 불안증, 신경쇠약, 공안 장애, 건강염려증들이 있고 정신병에는 정신분열병, 뇌기능 고장의 침해, 등의 뇌 손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격장애는 편집적 인격장애 즉, 히스테리, 도치적 인격장애, 강박증인격장애 등 가지각색의 인격장애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정신질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신질환의 범주를 알면 누구도 여기서 제외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 할 수 없습니다.
이 부정한 도시, 공해 그리고 스트레스 또한 사람과 사람사이에 상처들 이런 것으로 인해 정신질환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리스도인이라고 제외된다는 말은 없습니다. 문명의 흐름은 도시로부터 나타났기에 사람들은 도시로 모이고 모입니다. 그리고 도시 속에서 깨어지고, 상처받고, 긴장하고, 생존경쟁에 두려움을 느끼고 하는 정신적 문제가 고질화되고 악해 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말씀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입니다.
대전도 자꾸 대 도시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큰 매장이 생기고, 한군데로 사람들이 모이고 그 가운데 생존경쟁에 시달리며 깨어지고 상처받고 스트레스와 긴장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이 정신질환에 허덕이는 사람이 자꾸 늘어가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평화, 영광, 부기, 권력, 질서의 상징 이였습니다. 세계의 중심이요 일종의 유토피아였습니다. 이 청년도 대 도시인 거라사인 지방에서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고 절망 속에 괴로워하다가 정신질환 환자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 청년이 살고 있는 곳이 무덤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심지에서 안 살고 사람들이 찾지 안는 무덤가로 왔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 까요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고 실패를 맛보고 또 사람들 사이에서 이용당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무덤가로 왔다는
결론
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사람들 사이에 깨어지고 치이고 하면 아무도 없는 곳에 가고 싶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 불끄고 혼자 있고 싶습니다. 저가 일전에 말씀드렸지만 부모를 살해한 이은상군도 혼자 자기 방에서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군에서까지 부하에게 왕따를 당하는 그의 삶은 그를 혼자 두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다가 부모들까지 그를 이해 못하고 계속해서 상처를 주게되어 결국 정신질환을 알고 부모를 살해 했습니다 . 이번에도 아버지와 할머니를 죽여 시체를 불에 태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상처받고 외로이 혼자 있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미 방에서 불을 꺼놓고 혼자 있다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쇠사슬을 끊고'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것은 제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입니다. 이 힘은 억압된 에너지가 밖으로 표출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힘은 다른 사람들이 제어할 수 없는 힘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상시 조용하다가 화가 나면 폭발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 폭발이 겉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억압된 것이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칼로 찔려 죽였습니다.
그 사건만 보면 남편을 죽어 마땅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 내성적이거나 평소에는 말이 없었든 사람들입니다. 억압된 것이 갑자기 폭발할 때는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한 순간이지요. 이것을 영적으로는 한 순간에 어두움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배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것, 이런 경우를 우리는 많이 체험했을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소리지른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조용하다가 그리고 말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가끔 산에 올라가서 큰 소리를 지르지요.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가끔씩 소리지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차안에서 가끔씩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억압된 것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고함을 질려댑니다. 그러니까 이런 억압이 심해지면 정신질환을 앓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는 이 청년의 증세 중 하나는 자기 몸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학대받은 사람이 학대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이 학대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에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인과 대화를 하다가 말이 안 통하면 벽에 머리를 박는답니다.
주먹으로 벽을 친다든지 가슴을 친다든지 그런 식으로 자기를 학대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자기학대가 심한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칼이나 담뱃불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흠하게 산 사람들 보면 몸에 상처가 많지요 이런 상처는 대부분 다른 사람에 의해서 난 상처가 아니라 자기가 낸 상처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신경체계의 끈이 끊어지면 이런 현상이 심하게 두더려지게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술취해 방황하며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상처를 내는 사람, 괜히 때리고 소리지르고 벽을 박고 치고 하는 사람들 참 많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거라사인 사람이 들어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라사인이 나오는 그런 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하고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우리 주위의 삶이, 도시의 삶이 그런 사람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우리도시가 건강한 도시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밖에 딸을 마음대로 내어 보낼 수가 없어서 따라 나간다면 이 도시는 건강한 도시가 아닙니다. 택시 타는 것이 두렵다 그러면 이 사회와 도시는 건강한 도시와 사회가 되지 못합니다. 신문을 볼 때마다 화가 나면 이 도시는 건강한 도시가 아닙니다.
카드 빚 700만원 때문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생각할 때 '700만원 때문에 사람을 죽여!'라고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돈의 액수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벌써 이런 사람은 내면세계에 물질에 대한 박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별력 없는 삶도 문제입니다. 향락을 부추기는 삶이 이 사회와 도시에 얼마나 만연되어있습니까 구미가 당기고 구매력을 가질 수 있도록 충동질하는 광고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내면세계에서는 분별력 없는 삶과 물질에 대한 박탈감이 쌓이면 살인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와 도시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병든 사회와 도시에서 우리는 반응하고 성격이 형성됩니다. 이런 병들고 불안한 도시에서 심리적으로 범죄 할 가능성과 정신질환을 앓을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스스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분노가 있습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가 있습니까 아니면 남들보다 못사는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자신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까 무능력, 자책감, 미움 이런 것들이 내면세계에 있기에 우리는 정신질환을 앓을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사회가 권력형비리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무슨 게이트니하는 것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들의 심리상태는 상대적인 허탈감에 따른 정신적 고통과 질환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런 권력형비리가 사람들에게 첫째, 소외감을 주게됩니다. 남들은 억, 억 하는데 나는 10만원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참여할 수 없는 소외감 이런 것들이 병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두 번째로 박탈감입니다. 저들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저 돈이 나에게 돌아올 것인데 나에게 올 것이 안 왔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세 번쩨는 환상의 삶을 만들어 냅니다. 억, 억 하니까 억이 별것 아니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현실에는 그렇지 않지요 이런 결과로 이 도시에서 적응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자살도 합니다. 소외와 허탈감과 무능력으로 인해 마음으로 도시와 문을 닫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정신적 질환을 앓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개혁으로 나타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의 분노가 세상을 바꾸어야된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래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찾게되지요. 찾지 못하면 허탈감과 소외감을 가지고 세상을 비난하면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과 방황으로 치닫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다음 법을 믿을 수 없고 정부를 믿을 수 없고 이런 기타의 병든 사회와 도시 때문에 우리는 정신질환에서 해방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사실 알게 모르게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지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그리스도께서 호수동편에서 가르치신 적이 그의 없습니다. 막 4: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여기서 특별히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간 것은 그 사람의 외침 다시 말하면 귀신들린 청년의 외침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4장 끝에 보면 건너 갈 때 폭풍우를 만납니다. 4:37절을 보면 폭풍과 한 영혼의 울부짖음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푹풍 속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는 것은 정말 폭풍 속에 있는 한 영혼을 발견한 것의 비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폭풍 넘어의 한 가느다란 외침을 들었습니다. 마가복음의 의도는 아무리 푹풍이 치고 비가와도 아이의 작은 소리도 어머니는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으로 호수를 건너가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귀신에 붙들린 한 영혼에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귀신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귀신 쪽에서 설교를 하지 않고 한 영혼 쪽에 비중을 두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을 전체적인 맥략에서는 귀신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두움의 문제이며,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드는 악한 영의 문제이지만 그러나 이 청년에게 주님은 초점이 가 있습니다. 이 폭풍우를 잠재우고 난 후 제자들의 반응에 대한보고는 없습니다. 무덤 가에 제자들을 동참시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오직 이 한 영혼에 관심을 직중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귀신 들린 청년은 주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정신질환에서 귀신과 어두움과 악한 세력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어두운 세상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믿을 수 없는 도시에서 현실의 참 지도자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이 땅에서 무너진 도덕적 정신적 질환에서 해방되며 치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을 알면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그 분을 만나지 못하면, 그 분이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교회는 다녀도 정신 질환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병들어 심음하고 언젠가 폭발하고 정신질환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는 세상적으로 행복을 누려가기를 원합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적으로 행복을 보장하십니다. 문제는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입니다. 그리하면 이라는 우선순위가 성적적 맥략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 그런데 우선순위가 세상적 행복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많지요. 말씀으로 살아가야 할지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가야 할지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이런 딜레마에서 빨리 헤어나지 못하면 '이 모든 것'에 대한 축복도 누리지 못하고 정신적 딜레마에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정신적세계속에 이중성이 있습니다. 세상 것도 갖고 싶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도 갖고싶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서 초월하고도 싶고 소유하고도 싶습니다. 분명히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를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반된 딜레마에 빠진 사람들이 또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세상으로 빠져서 여호와 하나님말씀과 상반되는 행동을 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잣대로 보면 우리를 다 심판할 것 같습니다.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면 무슨 불의한 일이 있더라도 다 품어 주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이 둘 속에서도 혼란을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신앙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늘 갈등만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잘 들으세요.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과공의 그리고 사랑 이 두 가지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십니다.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과공의 그리고 사랑이 만나는 곳입니다.
우리가 병든 도시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심판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바른 사람이, 다시 말하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라 이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십자가의 방법으로 불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예수그리스도 보혈과 십자가가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가 없고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로 심판받아 죽어야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 이유가 '나'로 집약되지 않는다면 그 십자가에 내 죄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구원의 원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정신 질환에서 빠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성경은 세상과 짝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되고 여호와 하나님과 짝하면 세상과 원수가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공의로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과 짝해보십시오. 이 말씀을 행위로가 아니라 존재로 이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짝하면 그렇게 불편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어두움이 지배하게되고 세상의 원리와 방법을 동원해서 살아야하니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정신적 질환으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알아야합니다. 그 분이 왜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여 외롭고 쓸쓸하게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는가를 알아야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사랑하심이라는 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이 땅의 소망으로가 아니라 저 천국의 소망으로 이 땅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알면 우리가 변화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로새서 13:10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한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라'는 말씀은 인격이 바뀌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바뀌는 능력이 있습니다. 행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생각과 감정, 의지, 행동이 바뀌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인격적인 삶으로 표출됩니다. 새사람의 인격은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바뀌야할 목표는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내 인격은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고 있는가 이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은 생각, 가치관, 윤리관, 신앙관, 재물관이 바뀌고 있는가 말입니다.
당연히 주일날 교회가야 하는 문제를 상황에 따라 교회 가는 것은 신앙관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 해봅시다.
지금 청년 안에 들어있는 군대귀신을 어디로 보냈습니까 돼지 때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이 기적에 대한 반응이 '이 동네를 떠나 주십시오'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재산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 재산이 물에 빠져 다 잃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거라사인 지방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대 도시 사람들은 한 영혼을 보지 않고 돈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본 이 청년은 예수님과 함께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9절에 '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큰일을 행한 것, 불쌍히 여긴 것을 친족에게 고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베풀 때만큼 큰일은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왜 큰일입니까 애굽에서 구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회복시키고 구원했습니다. 이 큰일을 가지고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청년의 친척, 가족, 친구와 이웃에 가서 정상적인 삶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고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를 받아 가정과 이웃으로 가야합니다. 그들의 삶이 정신질환적 삶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삶 속에 가서 예수그리스도의 큰일을 보여야합니다. 이 사람은 복음서에서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서가 기록되었을 때는 이 사건이 일어난지 30-40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이 사람의 사건은 아는데 이름을 모를 정도라면 이 사람은 정말로 가족에게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이름이 남지 않는다고 해도 주님이 불쌍히 여기면 이것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결론
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상에는 정신질환자가 많습니다. 특히 도시에는 더 고통 속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줄로 압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 우리도 제외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한 귀신들린 청년의 울부짖음을 들었습니다. 변화된 우리가 이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변화된 사람이 많다는 것은 도시라 할지라도 점점 정신질환에서 해방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된 사람은 누구나 정신질환자를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는, 곁에 있는 사람이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그룹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통받은 사람과 돕는 사람이 한 대 묶여서 교회의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돕는 사람은 희생과 헌신이 따르는 것이지만 도움을 받는 사람은 사랑과 기쁨과 치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주위에 정신적 질환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시길 원합니다. 변화를 받은 사람이 해야할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세상과 성도는 병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에서 주는 어두움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천국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이며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사람을 찾아가서 사람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그들을 통해 섬기는 것이며 그들의 작은 신음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감당해야할 사명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자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시리아, 알랙산더 왕,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항상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넘보는 도시었습니다. 로마의 품페이는 데카폴리스라고 열 개의 대 도시를 선정했는데 이 거라사인 지방이 들어갈 정도로 큰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주후 1세기 때 로마가 도시계획 속에서 재건축을 할 때 거라사인 지방을 도시 가운데로 포장된 도로를 내고 대장간과 제우스 신전을 두었으며, 대 극장이 두 개, 그리고 도시 외곽에는 성으로 둘러쌓았습니다. 그러니까 거라사인 지방은 인구나 문화시설 산업발달 면에서 거대한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예루살렘과 갈릴리 두 지방을 여행했는데 즉, 요단 서편만 여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편은 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 땅이라고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 땅은 구원에서 제외되었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쪽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마리아지방을 피하고 평소에 가지 않으셨든 거라사인 지방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런 갑작스러운 행동은 분명히 귀한 메시지와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귀신들린 청년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귀신들린 청년은 증세가 아주 특이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귀신을 많이 소개하는데 귀신이 들리면 눈이 멀고, 말을 못하고, 병을 앓거나 거품을 내고 쓰러지거나 하는 정세를 기록하고 있는데 마가복음 5장에 기록되어있는 이 청년은 좀 다릅니다. 15절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그러니까 정신이 온전해졌다는 것은 재 정신이 들었다는 것인데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이 청년은 귀신들린 정도가 정신질환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은 정신질환에 대해서 좀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정신질환자가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이 정신질환이란 정신병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정신질환은 정신세계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뇌 기능손상이지요.
정신세계의 기능 손상에 따라 때로는 노이로제, 인격장애, 성기능 장애, 정신병, 약물중독, 이렇게 구분해서 부르는데 이것을 전체적으로 포함해서 정신절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신질환을 구체적으로 나열한다면 먼저 신경증이 있습니다.
이 신경증에는 우울증, 불안증, 신경쇠약, 공안 장애, 건강염려증들이 있고 정신병에는 정신분열병, 뇌기능 고장의 침해, 등의 뇌 손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격장애는 편집적 인격장애 즉, 히스테리, 도치적 인격장애, 강박증인격장애 등 가지각색의 인격장애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정신질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신질환의 범주를 알면 누구도 여기서 제외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 할 수 없습니다.
이 부정한 도시, 공해 그리고 스트레스 또한 사람과 사람사이에 상처들 이런 것으로 인해 정신질환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리스도인이라고 제외된다는 말은 없습니다. 문명의 흐름은 도시로부터 나타났기에 사람들은 도시로 모이고 모입니다. 그리고 도시 속에서 깨어지고, 상처받고, 긴장하고, 생존경쟁에 두려움을 느끼고 하는 정신적 문제가 고질화되고 악해 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말씀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입니다.
대전도 자꾸 대 도시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큰 매장이 생기고, 한군데로 사람들이 모이고 그 가운데 생존경쟁에 시달리며 깨어지고 상처받고 스트레스와 긴장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이 정신질환에 허덕이는 사람이 자꾸 늘어가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평화, 영광, 부기, 권력, 질서의 상징 이였습니다. 세계의 중심이요 일종의 유토피아였습니다. 이 청년도 대 도시인 거라사인 지방에서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고 절망 속에 괴로워하다가 정신질환 환자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 청년이 살고 있는 곳이 무덤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심지에서 안 살고 사람들이 찾지 안는 무덤가로 왔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 까요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고 실패를 맛보고 또 사람들 사이에서 이용당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무덤가로 왔다는
결론
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사람들 사이에 깨어지고 치이고 하면 아무도 없는 곳에 가고 싶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 불끄고 혼자 있고 싶습니다. 저가 일전에 말씀드렸지만 부모를 살해한 이은상군도 혼자 자기 방에서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군에서까지 부하에게 왕따를 당하는 그의 삶은 그를 혼자 두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다가 부모들까지 그를 이해 못하고 계속해서 상처를 주게되어 결국 정신질환을 알고 부모를 살해 했습니다 . 이번에도 아버지와 할머니를 죽여 시체를 불에 태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상처받고 외로이 혼자 있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미 방에서 불을 꺼놓고 혼자 있다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쇠사슬을 끊고'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것은 제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입니다. 이 힘은 억압된 에너지가 밖으로 표출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힘은 다른 사람들이 제어할 수 없는 힘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상시 조용하다가 화가 나면 폭발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 폭발이 겉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억압된 것이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칼로 찔려 죽였습니다.
그 사건만 보면 남편을 죽어 마땅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 내성적이거나 평소에는 말이 없었든 사람들입니다. 억압된 것이 갑자기 폭발할 때는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한 순간이지요. 이것을 영적으로는 한 순간에 어두움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배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것, 이런 경우를 우리는 많이 체험했을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소리지른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조용하다가 그리고 말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가끔 산에 올라가서 큰 소리를 지르지요.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가끔씩 소리지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차안에서 가끔씩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억압된 것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고함을 질려댑니다. 그러니까 이런 억압이 심해지면 정신질환을 앓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는 이 청년의 증세 중 하나는 자기 몸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학대받은 사람이 학대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이 학대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에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인과 대화를 하다가 말이 안 통하면 벽에 머리를 박는답니다.
주먹으로 벽을 친다든지 가슴을 친다든지 그런 식으로 자기를 학대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자기학대가 심한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칼이나 담뱃불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흠하게 산 사람들 보면 몸에 상처가 많지요 이런 상처는 대부분 다른 사람에 의해서 난 상처가 아니라 자기가 낸 상처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신경체계의 끈이 끊어지면 이런 현상이 심하게 두더려지게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술취해 방황하며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상처를 내는 사람, 괜히 때리고 소리지르고 벽을 박고 치고 하는 사람들 참 많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거라사인 사람이 들어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라사인이 나오는 그런 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하고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우리 주위의 삶이, 도시의 삶이 그런 사람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우리도시가 건강한 도시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밖에 딸을 마음대로 내어 보낼 수가 없어서 따라 나간다면 이 도시는 건강한 도시가 아닙니다. 택시 타는 것이 두렵다 그러면 이 사회와 도시는 건강한 도시와 사회가 되지 못합니다. 신문을 볼 때마다 화가 나면 이 도시는 건강한 도시가 아닙니다.
카드 빚 700만원 때문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생각할 때 '700만원 때문에 사람을 죽여!'라고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돈의 액수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벌써 이런 사람은 내면세계에 물질에 대한 박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별력 없는 삶도 문제입니다. 향락을 부추기는 삶이 이 사회와 도시에 얼마나 만연되어있습니까 구미가 당기고 구매력을 가질 수 있도록 충동질하는 광고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내면세계에서는 분별력 없는 삶과 물질에 대한 박탈감이 쌓이면 살인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와 도시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병든 사회와 도시에서 우리는 반응하고 성격이 형성됩니다. 이런 병들고 불안한 도시에서 심리적으로 범죄 할 가능성과 정신질환을 앓을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스스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분노가 있습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가 있습니까 아니면 남들보다 못사는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자신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까 무능력, 자책감, 미움 이런 것들이 내면세계에 있기에 우리는 정신질환을 앓을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사회가 권력형비리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무슨 게이트니하는 것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들의 심리상태는 상대적인 허탈감에 따른 정신적 고통과 질환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런 권력형비리가 사람들에게 첫째, 소외감을 주게됩니다. 남들은 억, 억 하는데 나는 10만원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참여할 수 없는 소외감 이런 것들이 병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두 번째로 박탈감입니다. 저들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저 돈이 나에게 돌아올 것인데 나에게 올 것이 안 왔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세 번쩨는 환상의 삶을 만들어 냅니다. 억, 억 하니까 억이 별것 아니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현실에는 그렇지 않지요 이런 결과로 이 도시에서 적응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자살도 합니다. 소외와 허탈감과 무능력으로 인해 마음으로 도시와 문을 닫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정신적 질환을 앓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개혁으로 나타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의 분노가 세상을 바꾸어야된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래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찾게되지요. 찾지 못하면 허탈감과 소외감을 가지고 세상을 비난하면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과 방황으로 치닫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다음 법을 믿을 수 없고 정부를 믿을 수 없고 이런 기타의 병든 사회와 도시 때문에 우리는 정신질환에서 해방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사실 알게 모르게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지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그리스도께서 호수동편에서 가르치신 적이 그의 없습니다. 막 4: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여기서 특별히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간 것은 그 사람의 외침 다시 말하면 귀신들린 청년의 외침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4장 끝에 보면 건너 갈 때 폭풍우를 만납니다. 4:37절을 보면 폭풍과 한 영혼의 울부짖음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푹풍 속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는 것은 정말 폭풍 속에 있는 한 영혼을 발견한 것의 비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폭풍 넘어의 한 가느다란 외침을 들었습니다. 마가복음의 의도는 아무리 푹풍이 치고 비가와도 아이의 작은 소리도 어머니는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으로 호수를 건너가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귀신에 붙들린 한 영혼에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귀신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귀신 쪽에서 설교를 하지 않고 한 영혼 쪽에 비중을 두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을 전체적인 맥략에서는 귀신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두움의 문제이며,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드는 악한 영의 문제이지만 그러나 이 청년에게 주님은 초점이 가 있습니다. 이 폭풍우를 잠재우고 난 후 제자들의 반응에 대한보고는 없습니다. 무덤 가에 제자들을 동참시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오직 이 한 영혼에 관심을 직중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귀신 들린 청년은 주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정신질환에서 귀신과 어두움과 악한 세력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어두운 세상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믿을 수 없는 도시에서 현실의 참 지도자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이 땅에서 무너진 도덕적 정신적 질환에서 해방되며 치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을 알면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그 분을 만나지 못하면, 그 분이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교회는 다녀도 정신 질환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병들어 심음하고 언젠가 폭발하고 정신질환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는 세상적으로 행복을 누려가기를 원합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적으로 행복을 보장하십니다. 문제는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입니다. 그리하면 이라는 우선순위가 성적적 맥략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 그런데 우선순위가 세상적 행복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많지요. 말씀으로 살아가야 할지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가야 할지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이런 딜레마에서 빨리 헤어나지 못하면 '이 모든 것'에 대한 축복도 누리지 못하고 정신적 딜레마에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정신적세계속에 이중성이 있습니다. 세상 것도 갖고 싶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도 갖고싶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서 초월하고도 싶고 소유하고도 싶습니다. 분명히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를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반된 딜레마에 빠진 사람들이 또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세상으로 빠져서 여호와 하나님말씀과 상반되는 행동을 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잣대로 보면 우리를 다 심판할 것 같습니다.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면 무슨 불의한 일이 있더라도 다 품어 주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이 둘 속에서도 혼란을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신앙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늘 갈등만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잘 들으세요.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과공의 그리고 사랑 이 두 가지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십니다.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과공의 그리고 사랑이 만나는 곳입니다.
우리가 병든 도시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심판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바른 사람이, 다시 말하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라 이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십자가의 방법으로 불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예수그리스도 보혈과 십자가가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가 없고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로 심판받아 죽어야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 이유가 '나'로 집약되지 않는다면 그 십자가에 내 죄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구원의 원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정신 질환에서 빠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성경은 세상과 짝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되고 여호와 하나님과 짝하면 세상과 원수가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공의로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과 짝해보십시오. 이 말씀을 행위로가 아니라 존재로 이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짝하면 그렇게 불편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어두움이 지배하게되고 세상의 원리와 방법을 동원해서 살아야하니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정신적 질환으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알아야합니다. 그 분이 왜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여 외롭고 쓸쓸하게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는가를 알아야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사랑하심이라는 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이 땅의 소망으로가 아니라 저 천국의 소망으로 이 땅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알면 우리가 변화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로새서 13:10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한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라'는 말씀은 인격이 바뀌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바뀌는 능력이 있습니다. 행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생각과 감정, 의지, 행동이 바뀌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인격적인 삶으로 표출됩니다. 새사람의 인격은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바뀌야할 목표는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내 인격은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고 있는가 이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은 생각, 가치관, 윤리관, 신앙관, 재물관이 바뀌고 있는가 말입니다.
당연히 주일날 교회가야 하는 문제를 상황에 따라 교회 가는 것은 신앙관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 해봅시다.
지금 청년 안에 들어있는 군대귀신을 어디로 보냈습니까 돼지 때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이 기적에 대한 반응이 '이 동네를 떠나 주십시오'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재산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 재산이 물에 빠져 다 잃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거라사인 지방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대 도시 사람들은 한 영혼을 보지 않고 돈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본 이 청년은 예수님과 함께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9절에 '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큰일을 행한 것, 불쌍히 여긴 것을 친족에게 고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베풀 때만큼 큰일은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왜 큰일입니까 애굽에서 구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회복시키고 구원했습니다. 이 큰일을 가지고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청년의 친척, 가족, 친구와 이웃에 가서 정상적인 삶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고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를 받아 가정과 이웃으로 가야합니다. 그들의 삶이 정신질환적 삶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삶 속에 가서 예수그리스도의 큰일을 보여야합니다. 이 사람은 복음서에서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서가 기록되었을 때는 이 사건이 일어난지 30-40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이 사람의 사건은 아는데 이름을 모를 정도라면 이 사람은 정말로 가족에게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이름이 남지 않는다고 해도 주님이 불쌍히 여기면 이것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결론
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상에는 정신질환자가 많습니다. 특히 도시에는 더 고통 속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줄로 압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 우리도 제외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한 귀신들린 청년의 울부짖음을 들었습니다. 변화된 우리가 이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변화된 사람이 많다는 것은 도시라 할지라도 점점 정신질환에서 해방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된 사람은 누구나 정신질환자를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는, 곁에 있는 사람이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그룹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통받은 사람과 돕는 사람이 한 대 묶여서 교회의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돕는 사람은 희생과 헌신이 따르는 것이지만 도움을 받는 사람은 사랑과 기쁨과 치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주위에 정신적 질환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시길 원합니다. 변화를 받은 사람이 해야할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세상과 성도는 병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에서 주는 어두움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천국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이며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사람을 찾아가서 사람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그들을 통해 섬기는 것이며 그들의 작은 신음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감당해야할 사명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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