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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다음 세대를 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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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교육 신학자인 존 웨스터 호프 3세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이런 책을 썼습니다. 사실은 꽤 오래 전에 썼는데 우리의 아이들이 믿음을 가질 것인가 하는 책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교회의 신앙교육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신앙교육"이라는 제목 밑에 부제를 "다음 세대에 신앙계승이 가능한가"라고 달았습니다. 사실은 이 부제가 원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음 세대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21세기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기를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과연 무엇을 대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것을 이야기할 때마다 컴퓨터, 정보, 사이버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제가 가장 기본적으로 간단하게 물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 속에서 "과연 21세기를 어떻게 대비할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말씀드린 그대로 "내 아이들이 과연 믿음을 가질 것인가 내 아이들에게 믿음은 계승될 수 있겠는가"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로서 장로, 권사, 집사. 이런 일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다음 세대 우리 아들 딸들과 함께 교회에서 믿음의 동반자, 혹은 믿음의 동역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은 고사하고 지금 주일이나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걱정입니까 개인적이든지, 교회적이든지,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되어야 하는데, 만일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불안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두드러진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일을 하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어린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여성과 관계된 것입니다. 어린이와 여성 두 계층은 대표적인 소외 계층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는 물론이거니와, 동양권에서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공통적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어린아이와 여성들이 소외를 당했습니다. 미국이 굉장히 여성을 위하는 나라처럼 생각되지만, 처음에는 여성에게 투표권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투표권을 달라고 데모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미국이 자유를 말하는 것 같지만, 흑인들에게는 투표권도 주지 않다가, 1960년대가 지나서야 투표권을 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린이와 여성들은 언제나 소외 계층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유명한 철학자라고 얘기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도 "여자는 동물보다 조금 낫다. "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부인에게 편지를 쓰는데 "내가 전쟁터로 나올 때 당신이 임신한 것을 보았소. 애를 낳아서 혹시 딸이면 죽이고 아들이면 살리시오. " 하는 편지가 문헌 가운데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성과 아이들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여성과 아이들은 숫자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들을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귀한 신분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굉장히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다음 세대를 위한 놀라운 역사로 이어집니다. 오늘 교회도 복음의 다음 세대를 품어야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이 다음 세대를 품어서 우리의 미래를 대비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말씀 가운데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이들이 예수님 앞에 올 때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은 "용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납이라고 하는 것은 "허락받다", "받아들이다", "수용하다. " 등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말씀 가운데는 "가게 하다", "떠나보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격적으로,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음 세대를 용납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정하고, 그 가치를 그대로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어린이든지, 청년이든지 누구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들은 창조의 본질에서는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사람들이 자기 소유에 따라서, 권위에 따라서, 계층에 따라서 인간의 존엄과 인격이 다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별 대우를 받기 원합니다. 우리는 "내가 누군 줄 알았으면 좀 다르게 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합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레이건이 주지사 시절에 식당에서 줄을 섰습니다. 우리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 그런데 그날 따라 손님이 많았습니다. 자기 차례까지는 한참 걸리니까 투덜댔답니다. 식당 종업원에게 "내가 누군 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압니다. "라고 대답만 하고, 다른 어떤 대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내가 누군 줄 아느냐" 하고 물었더니 "손님이시죠.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누구보다 자신의 생명이 다른 생명과 다르고, 자신의 인격이 다른 인격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생명과 인격과, 존엄에 있어서 누구나 선은 같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이의 생명이나, 어른의 생명이나, 어떤 생명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 생명권과 생존권과 생명의 가치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세대를 잘 수용하고 용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천국의 시민으로 그 인격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음을 이어갈 성장 세대에게 그 자격과 가치와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 용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젊은 세대에게는 실패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좌절의 위험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애의 위기에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자격과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교육심리학에서는 어린아이에게는 적어도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 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젊은 세대나 성장 세대에게 있어서 누군가가 믿어 주는 사람, 세워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어린아이도, 어른도, 노인도, 문둥병자도, 소경도 모두가 다 용납되었습니다. 강도도, 귀신들린 사람도 무시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의 교회도 이렇게 다음 세대를 무시하지 않고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에 청소년 문제가 많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위한 고등학교가 몇 군데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이런 학교를 세운 분이 있는데, 학생 모집광고 맨 윗줄에 "공부하기 싫은 사람은 다 오라. "고 했습니다. 그 학교를 운영하려면 그런 태도를 품은 선생님들이 있어야 합니다. 꼴 봐 주는 선생님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 아이들의 꼴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선생님들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정말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젊은 세대의 꼴 봐 주기가 눈꼴 사나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교회에 드나드는 젊은이들의 머리가 노랗든 빨갛든, 짧든 길든 우리는 그들을 다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음 세대를 품기 위해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용납하면 금하는 것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금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 사람들이 자신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가까이 옵니다. 예수님에게 기도를 받기 위해 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금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금하는 것에 대해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에게,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은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습니다. 기도해 주는 것은 금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다 해주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며, 어떻게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생존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입니다. 주님을 바라고 나아가는 일입니다. 즉, 이 신성에 관한 관심과, 영적에 관한 관심의 행위를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르든 찬송을 부르면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기도를 한다면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저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갖는 비전을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미국에서 크게 성장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성장하지 못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학교는 어린이가 줄고, 청년이 줄고, 교인들이 줄어드는데, 이대로 가다가 정말 몇십 년 후에는 교회 문을 닫게 되겠기에 염려하였습니다. 어느 교인이 "우리는 참견하지 말고 저희들끼리 무엇을 하든지 놔두자. "고 제안을 하고, 모두 이에 찬성하였습니다.
교회 청년들이 모인다고 하니까 자꾸 교역자들이 "아니, 목사님 어떻게 청년들이 모입니까" 하고 질문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난 아무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는 게 있는데, 그냥 걔네들이 하는 것을 내버려두십시오. 범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데, 그렇게 하는 대로 내버려두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처럼 어른은 어른처럼, 청년은 청년처럼, 노인은 노인처럼 하게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이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드럼치고, 기타치고, 찬양하고, 난리들이길래 어른들이 불러서 한 마디 했답니다. "다 해도 좋은데 하와이안 훌라 춤만 빼고 다 해라. "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청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여러분, 기타나 드럼을 치게 했기 때문에 모여든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존재의 이유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돼"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까이 오기 원하고, 주님께 찬양하기를 원하고, 주님의 손길에 자신의 영혼이 치유되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하는 그 무엇이라도 범죄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금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다음 세대의 비전과 정체성을 무시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그들은 동시에 금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하지 않으면 저들은 스스로 금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주 금합니다. 저도 구세대가 되어 가서 그러는지 용납하지 못하고 자꾸만 금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는 이 점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갖는 자유보다는 자기의 엄격성으로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신앙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엄격성으로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준이 아닙니다. 이미 굳어지고 제도화되어 있는 자기 틀에 그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금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기준을 없앴습니다. 주님은 그 기준을 깨시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무한함을 생각할 때 자신의 엄격성과 정통과 인습으로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의 기성세대가 자기 중심의 기준과 틀로 신세대들을 계속 금하기만 한다면 다음 세대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땅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위선과 거짓의 나라가 됩니다. 지옥 같은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좀더 신앙적인 입장에서 다음 세대를 품는 것보다 적극적인 모습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저희 위에 안수하셨다. "고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용납하여야 합니다. 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들을 진정으로 품는 적극적인 신앙의 모습은 저들을 품고,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족장들은 하나같이 자식들을 축복했습니다.
미래 세대를 품는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품었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품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품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품었습니다. 여기서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그냥 잘 되라고, 좋은 사람 되라고, 출세하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다음 세대를 품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저들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너 이상의 절대적인 힘이 있다. "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용기와 믿음과 격려를 주는 것입니다.
내일의 미래가 있기 때문에 오늘의 현재에 화목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지금 현재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에 미래가 있고, 내 미래가 있기에 현재가 바르고, 분명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축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이 내 맘대로 됩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저들을 위해 기도하고 품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용납하고 축복해야 됩니다. 금하기보다는 축복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의지하고, 그 미래 세대를 품어야 합니다. 만일 품지 못한다면 그들은 방랑자가 되고, 불신자가 되고, 회의론자가 됩니다. 우리 자신과 그들의 미래까지도 멍들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품으므로 믿음이 이어집니다. 이삭이 야곱을 품음으로 이스라엘이 됩니다. 야곱이 요셉을 품음으로 흉년을 이기고, 은혜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요셉이 형들을 품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룹니다.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품으시고, 여인을 품으시고, 죄인을 품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었습니다.
그 소망과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슴으로 다음 세대를 품을 때 주님은 저들과 함께하십니다. 저들 안에 역사하십니다. 저들 앞에 계시고, 뒤에 계시고, 둘러싸시고,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녀와 우리의 젊은이들,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주어질 축복입니다.
이 희망과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바로 우리들의 가슴 속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의 가슴 속에 다음 세대를 품으십시다. 은혜가 넘치고, 변화가 가능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 저 젊은이들을 사랑으로 품을 때 아름다워지고, 충만해지고, 쓸모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슴 깊이 젊은이와 어린이를 품읍시다. 희망으로, 축복으로, 충만으로 승리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버린다면 우리의 축복도 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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