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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환경과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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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설교라기 보다는 환경문제에 대한 신학특강으로 들으시면 고맙겠다. 1968년 스위스에서 순수한 민간단체로 창설된 '로마클럽'은 1970년 인류의 생태학적 파국을 예언하는 충격적인 보고서 '성장의 한계'를 출간하였다. 그후 1972년 6월 스록홀롬에서 120개국이 모여 유엔인간환경회의(The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he Human Environment), 1989년 1월에 발효된 '몬트리올 의정서', 그리고 1992년 5월 발효된 바젤 협약과 1992년 6월 리우데 자네이로(브라질)에서 열린 유엔 환경개발회의(UNCED), 또한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밴쿠버(캐나다)에서 현금 세계가 생태학적 위기를 이미 넘어서서 완전히 죽음의 멸망에로 치닫고 있는 세계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1990년 3월 서울에서 JPIC(Justice Peace and the Integrity of Creation)를 열고,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WCC 제7차 총회에서 전세계 교회는 창조질서를 보전하기 위한 입장과 구체적 행동지침을 마련한 바 있다.
오늘날 자연과학은 서구의 희랍적 인간상을 표상하고 있다. 그것은 몸(Body) 즉 영혼의 지배와 몸(신체)의 수단화와 훈련표상이다. 본래적 인간됨이란 영혼에 있고 몸에 있지 않으며, 의식에 있고 무의식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됨의 중심에 대한 표상은 역사 속에서 변천되어 왔다. 우선 고대에는 인간의 생명이 공기의 나들이(호흡)에 있다고 보았다. 그런 면에 있어서 생명의 중심은 횡경막에 있었다. 호흡은 생명의 기운이다. 따라서 죽음이란 호흡의 중지이다. 17세기에는 인간의 생명 중심이 뇌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됨은 오성과 의지의 주체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뇌사가 인간죽음의 기준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몸을 이루는 신장, 심장, 콩팥, 팔, 다리 등은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대체 가동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영혼, 몸에 대한 역사적 변천은 영혼의 정신화와 몸의 물질화의 이분법을 그려낸 육체로부터 영혼의 해방이라는 플라톤의 사상에서, 영혼을 통한 몸(신체)의 형성이라는 아스호텔레스적 관념에서, 신체의 도구에 대하여 이를 지배하는 의식적인 영의 힘을 중요시하며 세계를 정신과 물질, 주체와 대상을 나눈 데카르트적 영혼 우위적인 근대정신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현대 철학이 낳은 자연과학의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 역사와 비인간적 자연 사이의 분리를 수용하여 인간은 '주체'이고 자연은 '대상'으로 전락시켜 과학기술을 발전시킨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의 정신·신체적인 위기는 이러한 영혼과 몸의 분리사상에서 영혼의 우위 -몸의 경시 경향에 의하여 인간 우위- 자연의 경시 경향에 이른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 자연과학은 연구의 대상 곧 자연을 객관화시키고 분석하며, 개체화시키고 가장 작은 부분으로 환원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대상에 대한 '지배'와 대상의 '이용'을 그 목적으로 가진다. 자연과학의 공통된 원리는 어떤 대상이나 사태를 대상화시키고 분석하고 최소의 부분으로 환원시키고 그것을 재구성함으로써 그 대상이나 사태를 지배하여 인간의 삶을 위하여 이용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고대 로마의 통치원리, 곧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는 원리가 자연의 지배를 목적으로 삼는 근대의 자연과학적 방법을 형성한다. 이렇듯 자연과학은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은 '사귐'과'관계'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서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주체와 대상이 분리될 때라야 '객관적'인식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이리하여 대상에 대한 주체의 참여는 철저히 배제된다.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를 일으키고 있는 자연과학 내지 과학기술은 이렇게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 주체와 대상의 이원론에 그 철학적 배경을 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분법적 철학에 근거한 자연과학 내지 과학기술문명은 필연적으로 생태계 파괴를 일으키는 주범이 될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 그 자체가 생태계에 위기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원론적 사상체계를 만들어 온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이분법적 사상이 어디서 나왔는가 근대정신과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이 발전된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가능한 한 많이 소유하여 그 소유를 통하여 자기를 확장하려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 때문이다. 인간 본성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이분법적 사상의 근본은 소비와 향락과 힘의 소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현대인의 욕망의 자기 실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경는 이것을 죄라 부른다.
그러면 자연이란 무엇인가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이라는 말보다 창조세계 또는 피조세계라는 단어가 훨씬더 성서적이다. 그러나 편의상 우리가 익숙한 단어인 자연으로 설명하겠다. 일반적으로자연이란 인간의 사유에 대하여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리켜 '자연'이라 부른다. 그리고 인간을 자연에 대칭시킨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둘이 아니라 하나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에 한 자연이다. 그는 자연'위에' 있는 존재라기 보다 자연 '안에'있는 존재요, 자연과 '함께'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성경의 예를 하나 들겠다. 기독교의 창조신앙의 근거가 되는 구약성경의 맨 처음 이야기인 창세기 1-2장에 보면 인간은 어디까지나 신의 피조물이요 동시에 자연의 한 일부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을 아담이라 부른다. 아담(adam)은 '땅(adama)의 먼지 혹은 흙(apar)'로 부터 만들어 졌다. 따라서 인간은 '흙먼지'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을 뿐아니라 또한 흙먼지 자체가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의 신이 만든 피조물(유한한 한계성을 지닌 존재라는 뜻)인 자연의 한 부분, 땅으로부터와서 땅으로 돌아가는 '땅에 속한 존재'로서 결코 자연과 마주 대하여(against) 있는 존재가 아님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땅이며 땅이 곧 인간이며 인간이 자연이고 자연이 곧 인간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을 볼때 인간을 보듯 보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이 병들면 자연도 병들고 자연이 병들면 인간도 병든다는 말이다. "땅은 너(아담) 인하여 저주를 받고"(창 3:7)
생명으로서의 인간
그러면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구별이 없는가 인간도 그냥 삼라만상의 모든 자연과 동일한 것인가 인간이 갖는 생명의 생명됨에 대한 차이가 없다는 것인가
이점에 대해서는 많은 고등종교와 자연종교, 그리고 철학이 서로 다양하게 설명하겠지만 필자가 믿는 기독교의(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보면서 동시에 그 인간을 또한 동일 본질의 자연을 여호와 하나님의 위임에 따라 관리(통치)하는 자(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로 본다(창 1,2장). 세계 문명이 '히브리적 사유'와 '희랍적 사유'라는 양대 기둥에서 발전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과학의 일부를 이루는 히브리사유의 근거인 성경에서 표현된 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과다스리라 정복하라는 용어의 그릇된 해석때문에 서구신학은 오늘날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일정정도 방관내지 동조해 온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창세기 2:15은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아바드섬기다) 지키는 일을 맡겼다고 했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 철저히 '관리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동산(자연)을 볼보도록 했다는 것은 그가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에덴의 낙원에 부여된 인간의 가장 행복한 삶이 단지 동산을 다스리고(섬기고) 지키는 '노동의 삶'으로 묘사되어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또한 낙원에 사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단독자'에서 찾지 않고 남자와 여자(이쉬, 이솨)가 더불어 책임적인 사회적 존재에서 찾았다는 사실에서도 인간실존 자체와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함께 사는 의무와 다스리고 지키는 의무 없이는 의미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책임적인 사회적 존재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할 운명을 지녔고, 동시에 자연에 대해서도 보전하고 지키는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부여받는 것이다. 성서는 토지(땅)를 재산으로 보지 않는다. 땅과 인간 모두는 신의 것이므로 그 아무개가 다른 아무개를 소유할(굴종시키거나 지배할)수도 없다. 인간은 땅을 소유할 수도 없으며 다만 관리와 보전과 이용의 권한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자연을 파손시키고 이용을 목적으로 공해를 유발하여 생태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자연정복의 행위는를 결코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일, 즉 자연을 '다스리고 지키는 일'은 결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의 다른 생명들과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고 지키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창 1:26)에 근거하여 신의 다스림을 대리하는 '대리인'으로 또는 신의 관리 대신하는 '관리인 또는 지배인'으로서의 역할이 가능할 때라야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의 생명됨'이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자'로 세웠다는 표현은 인간이 자연의 통치자로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으나 다스리다(radah)의 본래적 의미는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자의 행복을 위하여 '돌본다'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이 단어는 고대 이집트와 바벨론의 궁중언어인데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등을 구부린 사람들의 모양이 새겨진 의자 위에 그의 발을 올려놓는 행위를 두고 표시한 용어인데, 이는 그 땅과 주민들이 파라오에게 속한다는 상징이다. 그런데 파라오의 이런 행위는 그 땅과 주민을 짓밟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의 통치 영역에 속하기에 그는 그 땅과 주민들의 행복을 위하여 그들을 돌보아야 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의 통치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은 자연을 짓밟고 파괴해도 좋은 폭군이 아니라 자연의 행복과 평화를 위하여 자연을 돌보고 가꾸어야 할 사명(과제)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스림'또는 '통치'는 '섬김'(service)의 한 다른 형식이다. 이것은 성경 속에 나타난 '정복'이라는 말의 개념과도 통한다. 정복은 인간이 자연을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피조물들의 평화스러운 공생,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의 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한다 하겠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통치자, 지배자를 폭군으로 생각한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파괴할 수 있고 억압할 수 있으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지배자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경험과 관계되어 있으며, 대부분 자연 종교들은 이러한 지배사상을 종교적으로 정당화시켜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참 지배자는 '섬기는 자' '함께 고난을 받는 자'로 나타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자'로써 철저하게 섬기는 종으로 나타난다. 성경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가 10:42-44).
여기서 신의 지배 형식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정복'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억압과 파괴와 착취가 아니라 자연을 위한 인간의 '섬김'과 '고난'을 뜻한다. 인간은 에덴동산(자연)을 섬기고 그것을 위하여 땀을 흘리며 노동해야 한다. 따라서 자연은 인간의 대상이 아니라 '친구'이며, 단순히 인간을 위한 '환경'이 아니라 인간이 그곳에 포함되어 있는 '공세계'이며 인간의 '본향'이다.
그러면 창조질서 보전 운동, 또는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그 복음, 그리고 구원을 위하여 이라고 벌이고 있는 구원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창조질서보전이란 흔히 말하는 환경운동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의 환경운동은 단순히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해 하는 운동이지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교회의 환경운동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창조주의 의도대로 이 세계가 창조주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도록하는 회복운동이다. 그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정원을 맡은 인간이 해야할 청지기 운동이다. 그런 으미에서 창조질서 보전 운동이란 넓은 의미의 구원운동이다. 창조질서 보전 운동이란 단순히 자연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벗어나 죽어가는 이 땅에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롸로 바꾸는 일이며, 거짓과 부정의에 대항하는 저으이 운동이요, 전쟁과 투쟁의 문화에서 평화와 안식을 위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교회가 벌여왔던 영혼구원이라는 단순도식적인 운동이 아니라 영과 혼과 몸을 하나로 묶고 어우러지게 하는 포괄적인 운동이 바로 구원운동이요, 창조질서보전 운동이요, 복음운동인 것이다.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생명문화의 회복운동이요, 더 나아가 인간성 회복운동으로 접맥될 때라야 생명운동이 성공을 거둘 것으로 믿는다. 즉 생태계를 보호하고 보전하는 실천적 프로그램과 운동도 필요하지만, 이와 동시에 생명운동에 대한 가치관과 의식이 변하지 않으면 이를 위한 모든 노력은 악순환을 거듭할 것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이웃과 자연, 이 세계 자체가 커다란 생명체임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인간태도가 중요하다 하겠다.
이리하여 환경과 생명의 문제는 정의와 평화문제가 포함되어야 하며 경제정의에 대한 문제를 함께 놓고 생각할 수 있어야 생태계 문제가 있는 자들의 사치스로운 운동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며,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자기 자신을 의식할 수 있는 자연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인간의 생명이 보전되어야 한다. 세계의 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현실을 보면서 자연의 보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모든 불의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관계가 국제적 차원에서 계속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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