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부모공경'이란
본문
전북 부안군 시외버스터미널에 있는 한 식당에 80대 시어머니와 50대 며느리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도가니탕을 맛있게 먹고 있었지만, 며느리는 목이 메어 식사를 한 숟갈도 못 먹고 있습니다.
이유는 이 시어머니를 이제 두고 갈 작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며느리는 서울의 17평 아파트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남편과 남편의 계모인 시 어머니 그리고 아들, 딸과 함께 궁색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61세 된 남편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 집안 살림은 엉망이 되었고, 자신은 남편 병수발에 생계를 위한 막노동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시 어머니는 자신이 계모라는 생각에 이 집에 짐만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며느리에게 자기를 고향 땅인 부안에 데려다주면 누군가 돌봐주지 않겠냐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식구들이 결사반대 하였지만, 어머니의 계속되는 성화를 이기지 못한 가족들은 부안시외버스터미널에 모셔다 두고 경찰에 '노인이 버려져있다' 고 신고하고 와서 모시고 가는 것까지 보고 돌아오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부안군청에서 노인을 보호하며 계속 추궁하여 이 사정을 알게 된 다음 서울 강남 경찰서에 연락을 하였고 며느리는 '존속유기혐의'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아들 부부에게 짐이 되는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고려장을 자처한 이 어머니는 결국 존속유기죄를 며느리에게 씌우게 되었습니다.
지난 4월 12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에는 충격적인 실태 고발이 있었습니다.
최 아무개 씨 노부부는 캐나다로 먼저 이민을 간 두 딸의 초청을 받고 남은여생을 쾌적하고 살기 좋은 곳에서 살겠다는 생각으로 전 재산을 정리하고 자식들에게 보낸 뒤 캐나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자식과 지내는 시간은 두 노인의 비자가 만료되는 시점 까지만이었습니다.
비자가 만료될 무렵 자식들은 연락을 끊고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믿었던 자식들에게 재산 다 빼앗기고 버림받은 두 노인은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되어서 길에서 깡통을 주우며 비참하게 생활을 하다가 교민사회의 도움으로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복지시설에 수용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배신감의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방송을 본 이들이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뉴스거리가 되는 사연들은 특수한 경우이겠지만,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까지 극도의 이기주의적인 상태에 이르렀지는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키울 때 아무리 힘이 들어도 "짐스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를 모실 때 아니 모시지도 못하면서 '짐스럽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노인문제의 출발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 하라" 이것은 아주 엄중한 명령입니다.
너무나 확실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묵상하여 보면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부모를 섬기지 않아도 될 사람은 없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될 구실은 없다' 가정사나 경제여건이나 사회적 이유나 정치적 변명이나 그 어느 것으로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 종교가 다르더라도 나에게 부모노릇을 잘 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잘 섬기기 위하여 부모를 소홀히 하여도 된다는 생각 자체도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3절을 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부모공경이라는 영원불변의 계명 위에 '자기 현실' '자기 입장' '자기 고집' '자기 판단'을 앞세우는 자들에 대하여 진노하는 음성을 말하시는 것입니다.
계명은 어떻게 선언되어 있습니까 신명기 21장 18절~21절을 읽어 봅시다.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자기 부모의 말을 분순종하고 도무지 말을 듣지도 않거든 그 부모가 잡아다가 그 성내의 지도자들에게 말하기를 ‘내 자식은 완악하고 불순종하여 이렇게 방탕한 자식입니다. ’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자식을 돌로 쳐 죽임으로 모든 자녀들이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함부로 하는 일을 결코 하지 못하도록 본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본래 계명입니다.
즉 누구든지 자기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함부로 하는 자는 이렇게 된다하면서 감히 부모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에는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 하였습니다.
이러한 패륜행위를 아예 뿌리 뽑겠다는 얘기입니다.
자식이 오죽하면 부모를 때렸겠느냐 하는 정상참작의 여지도 없습니다.
출애굽기 21장 7절에는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하였고, 오늘 본문에는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친히 인용하실 정도로 부모 공경에 관한 계명은 확고합니다.
여러분!
계명에 따른다면 우리시대에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자식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공경한다”는 말은 일반적은 사랑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말에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베풀고자 하는 마음 다시 말해 “위에서 아래로 가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공경”은 높이 우러르는 마음 아래서 위로 가는 마음입니다.
내리 사랑은 의례 있는 일이고 순리적이지만 공경하며 높이며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공경 스승공경은 계명의 차원에 두는 것입니다.
공경은 자신이 받은 긍휼에 대한 응답의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받은 사랑에 대하여 감사와 고마움과 경건한 심정으로 응답하는 사랑이 공경입니다.
이 사랑은 이것을 통하여 복을 받겠다거나 무슨 의도를 이루겠다는 계산이 있을 수 없다.
부모 공경은 응답의 사랑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치는 ‘대요리문답 교리서’에는 네 종류의 부모가 있습니다.
첫째는 낳아준 부모입니다.
둘째는 영적부모입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사제나 신부를 “Father"라고 부르는 것은 교역자를 영적어버이로 알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의 바른길과 마땅히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도하는 이들입니다.
셋째는 지적부모입니다.
가르치는 스승을 말합니다.
넷째는 국가의 지도자 공동체 의 지도자를 부모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부모“를 공경합니까 아니 어떻게 공경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효도"란 무엇인가 하는 설문조사에 60%의 답이 ”부모님 마음 편하게 해드리는 게 효도이다“로 나왔습니다.
‘부모님을 극진히 섬기는 게 효도다’라고 공경의 의미 적극적의미의 효도를 말한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6. 2%밖에 안되었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할까 하는 것 보다는 ‘그저 속이나 안썩이고 나하나 잘 살면 그게 효도다’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성경은 결코 그 정도를 효도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존재를 인정하고 감사하고 그 크신 은혜와 희생과 수고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노인들의 가장 염려되는 부분은 자신이 자식에게나 가정에나 사회에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짐스러운 사람", "잔소리만 하는 사람", "귀찮은 사람", "있으나마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매우 서운하고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른들의 기쁨은 그 반대를 생각하면 됩니다.
‘부모님은 저희들을 위하여 꼭 살아계시고 오래오래 사시면서 기도해 주실 분입니다.
부모님 살아 계시니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것은 말로나 태도로 나타내 보여드려야 합니다.
부모님이 가장 서운해 하는 것은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특별히 자녀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일은 부모님의 선하심을 인정해 드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비록 자신은 악하게 살았더라도 자식만큼은 선하게 살기 바라고, 비록 자신은 실패자라고 할지라도 자식만은 진실하게 살아주길 바랍니다.
그 부모의 진실 된 마음, 간절한 마음을 알고 감사와 존경과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그것이 효도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녀는 자기 부모가 실패자요 온전치 못하게 산 것에 대하여 늘 그것을 원망하고 부끄럽게만 생각합니다.
그것은 부모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는 행동입니다.
노아가 취하여 벌거벗고 누운 모습을 제일 먼저 발견한 함은 얼른 형제들에게 가서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드러나게 하고 흉보았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그 아버지 수치를 덮어드리줄 아는 마음자세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어떤 아들이 불효한 것이고 어떤 아들들이 효를 실천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효는 '나 자신이 그 분의 자녀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두고 자녀가 면박을 주거나, 무시하거나, 상종조차 하지 않는 것은 불효충 큰 불효입니다.
늙었어도 했던 말 자꾸 하여도 냄새가 나더라도 살수가 있더라도 그 분은 나의 부모이십니다.
적어도 내가 그 분을 부끄럽게 여기면 안 됩니다.
그 분이 오늘날 노망이 들었다 할지라도 누구를 위하여 살아오시다가 그리된 분인가 하는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의로운 자식, 지혜로운 자식으로 살게 되길 바랍니다.
시부모 흉보고, 장인장모 흉보고 불평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8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할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 효의 원리가 담겨있습니다.
한 가지 더 효의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형제우애가 필수적 입니다.
내 형제가 나와 맞지 않아도 부모님께는 둘 다 똑같이 소중한 자녀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탕자가 불효했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 거의 형의 태도가 아비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였는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형제간 사랑하고 서로 돕고 살아가는 것도 큰 효도입니다.
성경적 효가 실청되시길 축원합니다.
어머니는 도가니탕을 맛있게 먹고 있었지만, 며느리는 목이 메어 식사를 한 숟갈도 못 먹고 있습니다.
이유는 이 시어머니를 이제 두고 갈 작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며느리는 서울의 17평 아파트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남편과 남편의 계모인 시 어머니 그리고 아들, 딸과 함께 궁색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61세 된 남편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 집안 살림은 엉망이 되었고, 자신은 남편 병수발에 생계를 위한 막노동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시 어머니는 자신이 계모라는 생각에 이 집에 짐만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며느리에게 자기를 고향 땅인 부안에 데려다주면 누군가 돌봐주지 않겠냐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식구들이 결사반대 하였지만, 어머니의 계속되는 성화를 이기지 못한 가족들은 부안시외버스터미널에 모셔다 두고 경찰에 '노인이 버려져있다' 고 신고하고 와서 모시고 가는 것까지 보고 돌아오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부안군청에서 노인을 보호하며 계속 추궁하여 이 사정을 알게 된 다음 서울 강남 경찰서에 연락을 하였고 며느리는 '존속유기혐의'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아들 부부에게 짐이 되는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고려장을 자처한 이 어머니는 결국 존속유기죄를 며느리에게 씌우게 되었습니다.
지난 4월 12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에는 충격적인 실태 고발이 있었습니다.
최 아무개 씨 노부부는 캐나다로 먼저 이민을 간 두 딸의 초청을 받고 남은여생을 쾌적하고 살기 좋은 곳에서 살겠다는 생각으로 전 재산을 정리하고 자식들에게 보낸 뒤 캐나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자식과 지내는 시간은 두 노인의 비자가 만료되는 시점 까지만이었습니다.
비자가 만료될 무렵 자식들은 연락을 끊고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믿었던 자식들에게 재산 다 빼앗기고 버림받은 두 노인은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되어서 길에서 깡통을 주우며 비참하게 생활을 하다가 교민사회의 도움으로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복지시설에 수용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배신감의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방송을 본 이들이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뉴스거리가 되는 사연들은 특수한 경우이겠지만,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까지 극도의 이기주의적인 상태에 이르렀지는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키울 때 아무리 힘이 들어도 "짐스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를 모실 때 아니 모시지도 못하면서 '짐스럽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노인문제의 출발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 하라" 이것은 아주 엄중한 명령입니다.
너무나 확실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묵상하여 보면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부모를 섬기지 않아도 될 사람은 없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될 구실은 없다' 가정사나 경제여건이나 사회적 이유나 정치적 변명이나 그 어느 것으로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 종교가 다르더라도 나에게 부모노릇을 잘 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잘 섬기기 위하여 부모를 소홀히 하여도 된다는 생각 자체도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3절을 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부모공경이라는 영원불변의 계명 위에 '자기 현실' '자기 입장' '자기 고집' '자기 판단'을 앞세우는 자들에 대하여 진노하는 음성을 말하시는 것입니다.
계명은 어떻게 선언되어 있습니까 신명기 21장 18절~21절을 읽어 봅시다.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자기 부모의 말을 분순종하고 도무지 말을 듣지도 않거든 그 부모가 잡아다가 그 성내의 지도자들에게 말하기를 ‘내 자식은 완악하고 불순종하여 이렇게 방탕한 자식입니다. ’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자식을 돌로 쳐 죽임으로 모든 자녀들이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함부로 하는 일을 결코 하지 못하도록 본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본래 계명입니다.
즉 누구든지 자기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함부로 하는 자는 이렇게 된다하면서 감히 부모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에는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 하였습니다.
이러한 패륜행위를 아예 뿌리 뽑겠다는 얘기입니다.
자식이 오죽하면 부모를 때렸겠느냐 하는 정상참작의 여지도 없습니다.
출애굽기 21장 7절에는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하였고, 오늘 본문에는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친히 인용하실 정도로 부모 공경에 관한 계명은 확고합니다.
여러분!
계명에 따른다면 우리시대에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자식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공경한다”는 말은 일반적은 사랑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말에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베풀고자 하는 마음 다시 말해 “위에서 아래로 가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공경”은 높이 우러르는 마음 아래서 위로 가는 마음입니다.
내리 사랑은 의례 있는 일이고 순리적이지만 공경하며 높이며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공경 스승공경은 계명의 차원에 두는 것입니다.
공경은 자신이 받은 긍휼에 대한 응답의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받은 사랑에 대하여 감사와 고마움과 경건한 심정으로 응답하는 사랑이 공경입니다.
이 사랑은 이것을 통하여 복을 받겠다거나 무슨 의도를 이루겠다는 계산이 있을 수 없다.
부모 공경은 응답의 사랑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치는 ‘대요리문답 교리서’에는 네 종류의 부모가 있습니다.
첫째는 낳아준 부모입니다.
둘째는 영적부모입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사제나 신부를 “Father"라고 부르는 것은 교역자를 영적어버이로 알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의 바른길과 마땅히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도하는 이들입니다.
셋째는 지적부모입니다.
가르치는 스승을 말합니다.
넷째는 국가의 지도자 공동체 의 지도자를 부모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부모“를 공경합니까 아니 어떻게 공경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효도"란 무엇인가 하는 설문조사에 60%의 답이 ”부모님 마음 편하게 해드리는 게 효도이다“로 나왔습니다.
‘부모님을 극진히 섬기는 게 효도다’라고 공경의 의미 적극적의미의 효도를 말한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6. 2%밖에 안되었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할까 하는 것 보다는 ‘그저 속이나 안썩이고 나하나 잘 살면 그게 효도다’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성경은 결코 그 정도를 효도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존재를 인정하고 감사하고 그 크신 은혜와 희생과 수고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노인들의 가장 염려되는 부분은 자신이 자식에게나 가정에나 사회에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짐스러운 사람", "잔소리만 하는 사람", "귀찮은 사람", "있으나마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매우 서운하고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른들의 기쁨은 그 반대를 생각하면 됩니다.
‘부모님은 저희들을 위하여 꼭 살아계시고 오래오래 사시면서 기도해 주실 분입니다.
부모님 살아 계시니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것은 말로나 태도로 나타내 보여드려야 합니다.
부모님이 가장 서운해 하는 것은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특별히 자녀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일은 부모님의 선하심을 인정해 드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비록 자신은 악하게 살았더라도 자식만큼은 선하게 살기 바라고, 비록 자신은 실패자라고 할지라도 자식만은 진실하게 살아주길 바랍니다.
그 부모의 진실 된 마음, 간절한 마음을 알고 감사와 존경과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그것이 효도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녀는 자기 부모가 실패자요 온전치 못하게 산 것에 대하여 늘 그것을 원망하고 부끄럽게만 생각합니다.
그것은 부모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는 행동입니다.
노아가 취하여 벌거벗고 누운 모습을 제일 먼저 발견한 함은 얼른 형제들에게 가서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드러나게 하고 흉보았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그 아버지 수치를 덮어드리줄 아는 마음자세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어떤 아들이 불효한 것이고 어떤 아들들이 효를 실천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효는 '나 자신이 그 분의 자녀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두고 자녀가 면박을 주거나, 무시하거나, 상종조차 하지 않는 것은 불효충 큰 불효입니다.
늙었어도 했던 말 자꾸 하여도 냄새가 나더라도 살수가 있더라도 그 분은 나의 부모이십니다.
적어도 내가 그 분을 부끄럽게 여기면 안 됩니다.
그 분이 오늘날 노망이 들었다 할지라도 누구를 위하여 살아오시다가 그리된 분인가 하는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의로운 자식, 지혜로운 자식으로 살게 되길 바랍니다.
시부모 흉보고, 장인장모 흉보고 불평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8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할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 효의 원리가 담겨있습니다.
한 가지 더 효의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형제우애가 필수적 입니다.
내 형제가 나와 맞지 않아도 부모님께는 둘 다 똑같이 소중한 자녀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탕자가 불효했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 거의 형의 태도가 아비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였는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형제간 사랑하고 서로 돕고 살아가는 것도 큰 효도입니다.
성경적 효가 실청되시길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