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어떤 아버지
본문
제가 '아버지 학교' 사역을 섬긴지 3년이 넘었습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 가정의 영적리더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건강한 가정을 세워가도록,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돕고, 신실한 크리스찬의 가정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이 일의 목표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벌써 40여명이 수료를 하였고, 앞으로도 많은 분들이 이 좋은 프로그램에 동참하여 자신과 가정이 더욱 건강하여 질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성들을 자주 대하면서 그들 속에 '아픔'이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남긴 상처에서 비롯되고 있었습니다.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순박하고 성실한 아버지, 존경받을 만한 아버지들도 있지만 적지 않은 아버지들이 아들과 딸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자기 상처와 고통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한 남자가 결혼을 하고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는데 자기 아픔에 몸부림치고, 방황하느라 죄 없는 아내와 아이들을 너무 힘들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허구헌날 술에 찌들어 살던 아버지,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어서 집에서는 왕으로 군림하려 하는 아버지, 가정 경제를 책임질 줄 모르고 한강으로 지내는 무능한 아버지, 결코 가정의 기둥도 되어 주질 모하고, 바람 막이도 되어주질 못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질 못하는 아버지, 이런 아버지 밑에 태어나 "사랑" 못받아 보고 자란 아들들이 또 다시 그런 아버지가 되는 악순환, 이 악순환의 아픈 고리가 우리 가정들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능력일까요 돈 잘 벌어다 주는 능력일까요
출세하는 능력, 권위주의적으로 집안 분위기를 압도하는 능력일까요
아닙니다.
아버지에게 가장 필요한 아버지 다움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버지의 아버지다움을 증거하는 기준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아,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이만큼 사랑하시는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사명입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모습의 아버지들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시작인 아담은 큰아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쳐죽이는, 즉 아들 하나는 살인자가 되고, 아들 하나는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였습니다.
노아는 자기 아들에게 자기의 수치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아버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무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 이삭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받고 그 아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려했던 아버지 였습니다.
이삭은 늙어서 눈이 어두웠을 때 자신이 행사할 축복권을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물려준 아버지였습니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를 이용한 값을 치루느라고 애지중지하던 아들 요셉을 잃고 인생의 기쁨을 상실한 채 살아가던 가슴에 큰 한을 품은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서 한 아버지를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계십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을 둘 둔 아버지인데 큰 아들은 착실하게 아버지 곁에 머물면서 아버지와 함께 하고, 둘째는 '돈'과 '재미'에만 관심이 있어서 아버지 유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세상으로 나간 아들입니다.
이 둘째가 돈을 다 탕진하고, 죄인 중에 큰 죄인의 심정으로 아버지께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벌써부터 이 아들 '돌아와주기만' 기다리다가 저만치 아들을 발견하고는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잘 왔다', '잘 돌아왔다' 벌써 다 용서하시고, 아들의 자리를 회복시키는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시고 싶은 것이었을까요
"너희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이냐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아버지이냐.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아버지이냐. 너희는 성경에서 어떤 아버지를 보았느냐. 상처 많은 아버지, 부끄러운 아버지, 믿음 좋은 아버지, 무책임한 아버지, 한이 많은 아버를 보았느냐" 여기 이런 아버지도 계십니다.
이 아버지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품어 용서하시는 아버지 이십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보여주고 싶은 아버지는 따로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일까요"
그 아버지는 아들을 내어 주신 아버지, 그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절규하시면서 우리를 대신 아들 삼으신 아버지 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아버지의 아버지다움의 초고봉은 권위가 아니라 능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
만일 여러분이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자기희생의 사랑을 맛본 적이 없으시다면, 죄송하지만 아직도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는 누구이십니까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충분히 증명해 보이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기꺼이 포기하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종려주일, 세상 사람들은 나귀타고 예수살렘 성에 오르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쳐대고 있지만, 그 아들을 예루살렘으로 들여보내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하는 아들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을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
대답은 하면서 가슴속으로 까맣게 타들어가고 울부짖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들아 네가 어린양이란다. 네가 어린양이란다. '
여러분, 이 아버지 마음을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오래전 제 친구 목사님 사모님이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실력 있고 신실한 주의 종이요 그 남편을 사랑하고 사역의 길 가시밭길 고난의 길에 들어서니 말없이 사역을 수발들던 사모님은 33세 나이에 6살 4살 두 아들을 남겨두고 6개월 투병생활끝에 천국으로 훌쩍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고 남편과 아이들에게는 꼭 곁에 있어 주어야 했던 젊은 아내요 엄마였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교회성도들도 함께 동역했던 동역자들도 그 장례식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슬픔의 순간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은 이 장면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이 가정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면 지금 이 고통 이 눈물과 울부짖음에 무감각하실 수 있겠는가. 저는 그 순간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며 울부짖으시는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 아파서 너무나 슬퍼서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사랑하지 않으면 함께 아파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우리가 무언가를 잃었을 때 슬퍼하는 것은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선택은 사랑하기에 허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시는 고통을 선택하시고는 아파하고 계십니다.
아이가 아플 때 무보는 더 아파합니다.
왜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고통을 외면하고 피하려고만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을 끌어안으시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남에게 무엇을 줄 때 나에게 필요치 않은 것이나 별로 의미 없는 것을 준다면 우리에게는 별 아픔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을 포기하여야 했을 대 아버지는 얼마나 아팠을까
'진정으로 주는 것'에는 반드시 '포기'가 따릅니다.
그리고 그 포기의 선택은 언제나 아픈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로 내어 놓으신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들이 누구인가 .
아들을 포기하는 아픈 선택을 한 아버지로 인하여 살아난 생명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그 아버지의 절규 그 아버지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인생날인지 생각좀 해봐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어린아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아버지 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 함께 있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은 기차가 지나는 철교를 올리고 내리며 철교 밑으로 지나가게 해 주고 시간이 되면 철교를 내려 기차가 지나가게 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아이가 철교 밑에서 낚시를 하도록 하고 아버지는 자기 일을 하러 높은 '조종실 탑'으로 올라갔습니다.
배가 지나간다는 연락을 받고 철교를 들어 올려 배가 통과할 무렵 예정보다 너무 일찍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낚시하던 어린 아들은 이 상황을 먼저 알고 아버지에게 기차가 오고 있다고 소리치지 만 아버지는 그 소릴 못 듣습니다.
아들은 급한 김에 철교로 뛰어가 철교밑 비상손잡이를 움직여 다리를 내리려고 하다가 그 기계틈바구니로 떨어집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아들이 그 속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차는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오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부르며 울부짖습니다.
지금 철교를 내리도록 기계를 작동하면 사랑하는 아들은 죽게 됩니다.
하지만 아들 때문에 철교 작동을 안하면 수많은 승객이 죽게 됩니다.
그 순간 아버지는 울부짖으면서 기계가 작동하도록 손잡이를 당깁니다.
그리고 뛰어 내려가 비참하게 죽은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부짖습니다.
기차 승객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무표정하게 창밖에서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울부짖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 속에서 여러분 얼굴을 찾아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 가정의 영적리더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건강한 가정을 세워가도록,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돕고, 신실한 크리스찬의 가정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이 일의 목표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벌써 40여명이 수료를 하였고, 앞으로도 많은 분들이 이 좋은 프로그램에 동참하여 자신과 가정이 더욱 건강하여 질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성들을 자주 대하면서 그들 속에 '아픔'이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남긴 상처에서 비롯되고 있었습니다.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순박하고 성실한 아버지, 존경받을 만한 아버지들도 있지만 적지 않은 아버지들이 아들과 딸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자기 상처와 고통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한 남자가 결혼을 하고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는데 자기 아픔에 몸부림치고, 방황하느라 죄 없는 아내와 아이들을 너무 힘들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허구헌날 술에 찌들어 살던 아버지,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어서 집에서는 왕으로 군림하려 하는 아버지, 가정 경제를 책임질 줄 모르고 한강으로 지내는 무능한 아버지, 결코 가정의 기둥도 되어 주질 모하고, 바람 막이도 되어주질 못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질 못하는 아버지, 이런 아버지 밑에 태어나 "사랑" 못받아 보고 자란 아들들이 또 다시 그런 아버지가 되는 악순환, 이 악순환의 아픈 고리가 우리 가정들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능력일까요 돈 잘 벌어다 주는 능력일까요
출세하는 능력, 권위주의적으로 집안 분위기를 압도하는 능력일까요
아닙니다.
아버지에게 가장 필요한 아버지 다움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버지의 아버지다움을 증거하는 기준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아,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이만큼 사랑하시는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사명입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모습의 아버지들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시작인 아담은 큰아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쳐죽이는, 즉 아들 하나는 살인자가 되고, 아들 하나는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였습니다.
노아는 자기 아들에게 자기의 수치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아버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무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 이삭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받고 그 아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려했던 아버지 였습니다.
이삭은 늙어서 눈이 어두웠을 때 자신이 행사할 축복권을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물려준 아버지였습니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를 이용한 값을 치루느라고 애지중지하던 아들 요셉을 잃고 인생의 기쁨을 상실한 채 살아가던 가슴에 큰 한을 품은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서 한 아버지를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계십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을 둘 둔 아버지인데 큰 아들은 착실하게 아버지 곁에 머물면서 아버지와 함께 하고, 둘째는 '돈'과 '재미'에만 관심이 있어서 아버지 유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세상으로 나간 아들입니다.
이 둘째가 돈을 다 탕진하고, 죄인 중에 큰 죄인의 심정으로 아버지께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벌써부터 이 아들 '돌아와주기만' 기다리다가 저만치 아들을 발견하고는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잘 왔다', '잘 돌아왔다' 벌써 다 용서하시고, 아들의 자리를 회복시키는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시고 싶은 것이었을까요
"너희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이냐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아버지이냐.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아버지이냐. 너희는 성경에서 어떤 아버지를 보았느냐. 상처 많은 아버지, 부끄러운 아버지, 믿음 좋은 아버지, 무책임한 아버지, 한이 많은 아버를 보았느냐" 여기 이런 아버지도 계십니다.
이 아버지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품어 용서하시는 아버지 이십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보여주고 싶은 아버지는 따로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일까요"
그 아버지는 아들을 내어 주신 아버지, 그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절규하시면서 우리를 대신 아들 삼으신 아버지 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아버지의 아버지다움의 초고봉은 권위가 아니라 능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
만일 여러분이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자기희생의 사랑을 맛본 적이 없으시다면, 죄송하지만 아직도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는 누구이십니까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충분히 증명해 보이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기꺼이 포기하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종려주일, 세상 사람들은 나귀타고 예수살렘 성에 오르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쳐대고 있지만, 그 아들을 예루살렘으로 들여보내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하는 아들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을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
대답은 하면서 가슴속으로 까맣게 타들어가고 울부짖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들아 네가 어린양이란다. 네가 어린양이란다. '
여러분, 이 아버지 마음을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오래전 제 친구 목사님 사모님이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실력 있고 신실한 주의 종이요 그 남편을 사랑하고 사역의 길 가시밭길 고난의 길에 들어서니 말없이 사역을 수발들던 사모님은 33세 나이에 6살 4살 두 아들을 남겨두고 6개월 투병생활끝에 천국으로 훌쩍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고 남편과 아이들에게는 꼭 곁에 있어 주어야 했던 젊은 아내요 엄마였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교회성도들도 함께 동역했던 동역자들도 그 장례식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슬픔의 순간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은 이 장면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이 가정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면 지금 이 고통 이 눈물과 울부짖음에 무감각하실 수 있겠는가. 저는 그 순간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며 울부짖으시는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 아파서 너무나 슬퍼서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사랑하지 않으면 함께 아파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우리가 무언가를 잃었을 때 슬퍼하는 것은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선택은 사랑하기에 허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시는 고통을 선택하시고는 아파하고 계십니다.
아이가 아플 때 무보는 더 아파합니다.
왜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고통을 외면하고 피하려고만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을 끌어안으시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남에게 무엇을 줄 때 나에게 필요치 않은 것이나 별로 의미 없는 것을 준다면 우리에게는 별 아픔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을 포기하여야 했을 대 아버지는 얼마나 아팠을까
'진정으로 주는 것'에는 반드시 '포기'가 따릅니다.
그리고 그 포기의 선택은 언제나 아픈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로 내어 놓으신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들이 누구인가 .
아들을 포기하는 아픈 선택을 한 아버지로 인하여 살아난 생명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그 아버지의 절규 그 아버지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인생날인지 생각좀 해봐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어린아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아버지 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 함께 있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은 기차가 지나는 철교를 올리고 내리며 철교 밑으로 지나가게 해 주고 시간이 되면 철교를 내려 기차가 지나가게 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아이가 철교 밑에서 낚시를 하도록 하고 아버지는 자기 일을 하러 높은 '조종실 탑'으로 올라갔습니다.
배가 지나간다는 연락을 받고 철교를 들어 올려 배가 통과할 무렵 예정보다 너무 일찍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낚시하던 어린 아들은 이 상황을 먼저 알고 아버지에게 기차가 오고 있다고 소리치지 만 아버지는 그 소릴 못 듣습니다.
아들은 급한 김에 철교로 뛰어가 철교밑 비상손잡이를 움직여 다리를 내리려고 하다가 그 기계틈바구니로 떨어집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아들이 그 속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차는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오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부르며 울부짖습니다.
지금 철교를 내리도록 기계를 작동하면 사랑하는 아들은 죽게 됩니다.
하지만 아들 때문에 철교 작동을 안하면 수많은 승객이 죽게 됩니다.
그 순간 아버지는 울부짖으면서 기계가 작동하도록 손잡이를 당깁니다.
그리고 뛰어 내려가 비참하게 죽은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부짖습니다.
기차 승객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무표정하게 창밖에서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울부짖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 속에서 여러분 얼굴을 찾아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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