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자녀들아
본문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에베소서 6장은 5장과 연결되어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5:15-6:9까지 한 단락으로 보아야 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에 실질적인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가슴이 뜨겁거나 마음이 벅차거나 하는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벅찬 감격이 나를 어디로 인도하는가에 대한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이 어디에서 드러나야 하는가 하면 곧 부부관계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그리고 상사와 직원의 관계에서 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부모와 자녀관계를 계속 이어서 말씀드립니다.
보십시오. 성령 충만의 그 실천 강령이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라’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자녀들아 부모에게 복종하라, 종들아 상전들에게 복종하라. ’ 이렇게 복종하는 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군림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자녀들아 보무에게 복종하라’를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서 대표적인 성경이 가르침들을 배워나가야 하고 이것으로 여러분들의 가정을 다스려야하고 또 나아가서는 교회를 섬겨야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그런데 오늘날 유별나게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아이들이 어른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8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악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여호와 하나님의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여기에 분명히 악의 대표적인 목록 속에 등장하는 것이 ‘부모를 거역하는 것’ 이것은 악한 일에 있어서 대표적인 것입니다.
‘불효가 악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악한 일의 대표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디모데후서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이것이 남의 이야기로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이 부분에서 마음이 좀 찔려야합니다.
사실 부모와 자식관계에 효를 하지 못하는 것 중의 가장 큰 문제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2-5절까지 계속 보면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 나타나는 대표적인 악들에게서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까 교만하고 훼방하고 여기에 똑같은 비중으로 ‘부모를 거역하고’가 나옵니다. 교회가 분명히 갖추어야할 예의 중에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해야된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냥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닙니다.
‘나이’란 아주 중요한 질서입니다. 이 질서가 파괴되면 혼란이 옵니다. 교회의 질서 가정의 질서 사회의 질서 나아가서는 국가의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지요. 가정과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른이 고집을 부리면 따르십시오. 바꾸어 말하면 이 마음을 잦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부모님께 효하는 것은 효도할 마음이 생긴 것으로도 이미 복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부모님과 친하십니까 아니면 싸우며 살고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 부모가 잘했느니 자식이 잘했느니 따지면 평안이 없습니다. 저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모시고 계실 때는 몰랐는데 없으니까 그 공백을 매우는 데는 참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어가 있지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고 그렇습니다. 어버이날 꽃을 꼽아 줄 부모가 없다는 것,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는 부모가 없을 때 알게 된다는 것이 참 불행입니다.
제 친구 중에 어머니를 일찍 잃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도 일찍 잃었습니다. 나를 만날 때마다 부모가 살아계신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된다고 누차 강조했는데 그 때는 사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가 어머니 산소에 저를 꼭 데리고 갔는데 산소에 가면 담배를 꼽아 놓고 술을 따르고 그러고는 저한데 노래를 불러날라고 했습니다. ‘불효자는 웁니다’ 이 노래를 이 친구가 들으면서 항상 울었습니다. 우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노래를 너무 은혜롭게 불렀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부모님 납골당에 가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그 친구의 마음을 알겠습디다.
그러니까 부모님 앞에 내가 잘했다 잘못했다 따지거나 싸우면 평안이 없습니다. 그냥 계신 것만으로 감사하세요. 이상한 것은 부모에게 따지면 평안이 없다는 것을 저는 실질적으로 느낀 사람입니다. 무조건 지기로 하면 평안이 있습니다. 이것이 참 이상합니다. 내가 옳은데 그냥 지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그 실천 사항이 부모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기로 하면 평안이 있다는 것은 극히 성경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죄란 대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자존심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마저도 참지 못하는 자존심입니다. 그래서 죄란 내가 옳다는 고집입니다. 윗사람이나 아무리 높은 사람일지라도 나의 부모이든,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일지라도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을 못 참습니다. 언제나 내가 옳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저 사람은 왜 바보 같은 일을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거든 우리는 지금 죄를 짓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치매 걸린 어머니가 소 사오라 거르면 소사오고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소 팔아라 그러면 팔고 그 판돈을 뿌리며 다녀도 ‘당신의 행동에 아무런 미움이 나오지 않는 것’ 이것이 효 아닐까요 부시대통령이 아침 6시에 평소에 하든대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부모님과 소파에 앉아서 소파위에 다리를 올려놓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자세는 흔한 일입니다. 순간 어머니가 ‘소파에서 발 좀 내려’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아버지 부시가 ‘여보 그래도 아들은 현직 대통령인데’하며 은근히 나무랐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대통령이라도 그렇지요 아들이 어머니 앞에 다리를 올려서는 안되지요. ’하며 응수를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부시대통령은 신속하게 발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미국 현지 대통령이지만 그는 어머니의 한 아들이고 자녀가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 멀고 실제로 안 보이십니다. 신앙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장 잘 가다듬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목사일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를 여호와 하나님이 세웠음을 알고 성도들이 듣는 자세가 참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이러하고 저렇게 하되 요렇게는 말라’라고 하는 것을 성도들은 성의 있게 들어야합니다.
안타까움과 아픔을 가지고 ‘이 길로 가라’그러면 그것이 돌아서 가는 길일지라도 돌아가면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마음들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서양교육을 받고, 전자계산기를 두들기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고, 핸드폰으로 모든 업무를 다 보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인간성이 점점 사라지고, 용서하며, 따뜻하게 받으며, 존경하며, 사랑하던 것들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모도 부모 같지 않게 여기며 무식하도고 고리타분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로마서 1:18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을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자에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꼭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면 불의해 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불의한 일, 즉 죄 짓은 일은 불경한일의 열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른 채 세상을 향해 깨끗하게 살고 착하게 산다는 것은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잘 들으세요. 우리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불의한 행동을 한다면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존재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심령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불의를 행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오늘의 젊은 세대가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 젊은이들의 불행입니다. 여러분 존경하는 대상을 찾기 이전에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조급하고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존경하기로 결심하고 찾아야 됩니다. 존경할 대상이 나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존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배고플 때 밥 사주고 심심하면 놀아주고 내 편이 되어서 상담하고 이런 사람 찾으려면 없습니다. 여러분의 욕심을 채우는 사람을 찾으니까 없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존경할만한 사람들 많습니다. 존경할만한 사람이란 성실하게 살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충분히 존경할 만합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하느냐하면 우리는 바로 이런 권위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 속에 떠밀러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님을 공경하라’ 이 말씀 속에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할, 그리스도를 드러내어야할 부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부모님을 공양하며 높이며 존경하며 순종하는 것에,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내하고 오래 참음에 대해 상 주시는 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순종하십시오. 어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정을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같이, 그 분께 순종하는 것같이 귀한 가정을 만들어야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자녀들은 어떠한 문제에서도 부모를 원망하거나 반대하거나 대등하게 싸워서는 안 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모와 자녀관계를 허락하신 것은 분명히 그 속에 부모가 가지는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하나의 상징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를 순종하며 어른을 공경한다면 바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순종하며 경외하는 일의 한 표현이 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순종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어린 소자에게 내 이름으로 물 한 그릇 준 것도 내게 한 것이다’그랬습니다. 하물며 부모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지요.
우리 신앙이 좀 우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사문제는 목숨을 겁니다. 주일성수도 목숨을 걸고 잘합니다. 그 좋아하는 술, 담배도 끊습니다. 아주 대단합니다. 그런데 삶 속에서 복종의 관계는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왜 예수 믿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웁니까 시어머니는 권사이고, 며느리는 집사인데도 싸울 때만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없습니다.
보세요. 새벽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기도하고, 산기도 수시로 가고, 이것이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삶 속에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여정에서 남을 사랑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무례히 행치 않고 이런 것으로 가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난 후 우리 집에 절대로 제사 않지 낸다. 술 담배 끊고 살겠다’ 이런 결심으로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상전과 하인이 복종하는 결단을 하시란 말입니다.
성경에는 일반법칙과 특별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특별법칙이 더 중요할 것으로 인식합니다. ‘특’자가 들어가면 모든 것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은 특별한 경우에 주사를 맞는 것과 같습니다. 주사를 맞는 것은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것이 일차적인 법칙이지요. 일차적인 법칙이란 성경에 있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질서로 허락한 법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부모를 만나고 우연히 자녀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내가 정한 아내 내가 정한 아내가 아닙니다. 이미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화가 날 때 ‘당신 같은 사람 만나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아휴 내 남편 아니면 누가 나 같은 것을 데리고 살겠나’ 차라리 이것이 솔직한 마음 아닙니까 그래서 천생연분입니다. 서로 잘 만났습니다. 오죽 여호와 하나님께서 짝을 잘 만나게 했을 까요 어찌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시며 다스리시는 인생이 우연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일차법칙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십계명에도 나오는 법칙이지요. 그래서 예외 없이 자식들이 그 일반법칙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정확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신 이 일반 법칙을 거스르지 말라는 명령을 일반법칙의 권위로 요구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내신 일반법칙에 의하여 부모는 자식에게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그 법칙 때문에 ‘예수 믿지마!’라고 하는 것만은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법칙을 주신 분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지을 것을 요구하거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만큼은 지킬 수 없습니다. 그것을 요구하는 자체가 그 일반 법칙을 세운 그 분의 신분과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닌 다음에는 다 들어야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자녀들이 믿지 않는 부모들 밑에서 이런 충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는 자녀들이 결혼식을 기독교식으로 하겠다고 주장하면 부모님들은 ‘무슨 소리냐 기독교식으로 못한다!’ 그를 때 충돌이 생깁니다. ‘교회에서 해야 겠습니다. ’, ‘교회에서 한다는 것은 허락할 수없다 교회에서 끝난 후 피로연할 수 있느냐’, ‘그럼요 교회에서 음식장만 할 수 있습니다. ’, ‘술을 해도 되느냐’, ‘그것은 안 됩니다. ’, ‘봐라 그러니까 못한다는 것 아니냐 네 육촌아저씨도 오고 당숙도 오고 시골에서도 여러 친지 분들이 오실 텐데 잔치 집에 술이 없다는 것이 왠 말이냐 절대 안 된다’ 바로 이런 큰 싸움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여러분 결혼식을 교회에서 할 만큼 단오하고 결단력이 있습니다. 그 만큼 신앙 안에서 삶을 살고자하는 기특함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열심히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겼느냐하는 것을 묻고 싶습니다. 신앙으로 싸우지 마세요. 제사 문제나 결혼식 문제나 담배 피우고, 술 먹는 문제 등으로 싸우지 마세요. 죄를 짓는 것이 아니면 일반법칙을 따르세요. 결혼식 교회에서 안 하면 어떻습니까
술 담배 하면 어떻습니까 제사를 지내겠다고 목숨을 거는데 어떻하겠습니까 부모님이 교회 나가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 중에 제사 밥 얻어먹지 못할까봐 불안해하면 제사 매일 지내준다고 하세요. 그리고 교회 데리고 나오세요. 그래서 천국가면 끝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신앙인이라고 그 신앙을 지킨다고 특별법칙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왜 일반법칙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불신자들 속에서 신자의 삶은 이래야합니다. 이 사람이 자기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시고 ‘이게 옳고 저게 그러다’ 따지고 싸우지 마세요. 우리가 영원한 나라를 내다보면서 세상을 보아야합니다. 스데반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신자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저쪽은 칼을 들고 예수님에 대해서 반대하고 영원적 차원에서 거슬리는 것이라면 부모라 할지라도 같이 서 있을 수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다 들으세요. 일차 일반법칙을 지키면서 아랑과 인내와 화평과 온유와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결혼 할 사람을 데리고 갔는데 부모가 반대하면 심각하게 생각하세요. 고집만 피우지 말고 부모님이 잘 못 판단한 것이라면 기다리세요. 인내하면서 더 잘 해드리면서 기다리면 됩니다. 노총각 노처녀가 되면 어떻습니까 이것이 일반법칙을 준수하는 길입니다.
최창용목사님의 간증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최목사님 아버지께서 예수 믿고 신학교에 간 것을 엄청나게 반대를 하셨답니다. 얼마큼 반대를 하셨느냐하면 졸업식 때 찾아오셔서 학교기물을 부수고 목사님 사모님에게 그렇게 욕을 해서 사람들이 후처인줄 알았답니다. 졸업식을 하고 아버님께 찾아가니까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고 가업을 이어갈 것이냐 둘째, 호적을 파 갈 것이냐 셋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실 것이냐 그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겠다고 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전북익산에서 시골교회를 시무하시는데 할머니가 연루창이 나서 몸 위에서부터 아래로 썩어 들어가는데 매일 사모님이 목욕을 시키는데도 냄새가 나서 교인들이 코를 막지 않으면 교회에 들어올 수 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약 3년 정도 이런 고생을 사모님이 신혼인데도 불구하고 다 감당하셨습니다. 이 소문이 나서 전북 익산 도청 효손부 표창까지 받았답니다. 약 3년 정도 고생하시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할아버지가 중풍이 왔는데 거동을 못하고 몇 년 동안 똥오줌을 받아냈답니다. 그러다가 돌아가셨는데 하루 만에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살아나자마자 아주 어눌한 말로 ‘너희가 믿는 예수님은 절대로 믿지 않겠다. ’ 이러면서 이를 갈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더니 뜨거운 불구덩이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거기가 바로 지옥이에요. 그 곳에 가시지 않기 위해서 예수를 믿어야합니다. ’ 이 말을 듣고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영접기도 다 받으시고 돌아가셨답니다. 최목사님과 사모님이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이런 관점에서도 은혜가 되지만 그러나 이런 고생이 결국 두 분을 천국으로 인도하신 것만큼 큰 효도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날 줄이라 어떻게 알았습니까 다시 사시니까 최목사님이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오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효의마음을 가진 자에게 축복하십니다. 부모님께 가장 효도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효는 자기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두고 염려하지마세요. 부모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편안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요즘 치매환자나 중풍환자가 많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가 두려워서 골방에 방치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효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시설 좋은 노인병원이나 요양원, 실버타운 같은 곳에 모시고 가는 것이 부모님에게 훨씬 나은 것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린 것입니다. 결국 자존심이나 남이 무서워서 하는 효는 진정한 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창립 1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오늘이 어버이주일이면서 창립15주년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오후에는 강정규전도사 목사안수식도 있습니다. 저희교회가 추구해야할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신자들이 일반법칙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령을 받고 그 성령으로 삶 속에서 실천해야할 것이 ‘복종’아닙니까 부부관계에서 부모와 자식관계에서 종과 상전의 관계에서 일반법칙이 지켜지며 교회에서 변화를 받아 삶 속에서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귀한 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가슴이 뜨겁거나 마음이 벅차거나 하는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벅찬 감격이 나를 어디로 인도하는가에 대한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이 어디에서 드러나야 하는가 하면 곧 부부관계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그리고 상사와 직원의 관계에서 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부모와 자녀관계를 계속 이어서 말씀드립니다.
보십시오. 성령 충만의 그 실천 강령이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라’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자녀들아 부모에게 복종하라, 종들아 상전들에게 복종하라. ’ 이렇게 복종하는 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군림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자녀들아 보무에게 복종하라’를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서 대표적인 성경이 가르침들을 배워나가야 하고 이것으로 여러분들의 가정을 다스려야하고 또 나아가서는 교회를 섬겨야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그런데 오늘날 유별나게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아이들이 어른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8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악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여호와 하나님의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여기에 분명히 악의 대표적인 목록 속에 등장하는 것이 ‘부모를 거역하는 것’ 이것은 악한 일에 있어서 대표적인 것입니다.
‘불효가 악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악한 일의 대표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디모데후서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이것이 남의 이야기로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이 부분에서 마음이 좀 찔려야합니다.
사실 부모와 자식관계에 효를 하지 못하는 것 중의 가장 큰 문제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2-5절까지 계속 보면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 나타나는 대표적인 악들에게서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까 교만하고 훼방하고 여기에 똑같은 비중으로 ‘부모를 거역하고’가 나옵니다. 교회가 분명히 갖추어야할 예의 중에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해야된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냥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닙니다.
‘나이’란 아주 중요한 질서입니다. 이 질서가 파괴되면 혼란이 옵니다. 교회의 질서 가정의 질서 사회의 질서 나아가서는 국가의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지요. 가정과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른이 고집을 부리면 따르십시오. 바꾸어 말하면 이 마음을 잦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부모님께 효하는 것은 효도할 마음이 생긴 것으로도 이미 복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부모님과 친하십니까 아니면 싸우며 살고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 부모가 잘했느니 자식이 잘했느니 따지면 평안이 없습니다. 저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모시고 계실 때는 몰랐는데 없으니까 그 공백을 매우는 데는 참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어가 있지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고 그렇습니다. 어버이날 꽃을 꼽아 줄 부모가 없다는 것,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는 부모가 없을 때 알게 된다는 것이 참 불행입니다.
제 친구 중에 어머니를 일찍 잃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도 일찍 잃었습니다. 나를 만날 때마다 부모가 살아계신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된다고 누차 강조했는데 그 때는 사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가 어머니 산소에 저를 꼭 데리고 갔는데 산소에 가면 담배를 꼽아 놓고 술을 따르고 그러고는 저한데 노래를 불러날라고 했습니다. ‘불효자는 웁니다’ 이 노래를 이 친구가 들으면서 항상 울었습니다. 우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노래를 너무 은혜롭게 불렀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부모님 납골당에 가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그 친구의 마음을 알겠습디다.
그러니까 부모님 앞에 내가 잘했다 잘못했다 따지거나 싸우면 평안이 없습니다. 그냥 계신 것만으로 감사하세요. 이상한 것은 부모에게 따지면 평안이 없다는 것을 저는 실질적으로 느낀 사람입니다. 무조건 지기로 하면 평안이 있습니다. 이것이 참 이상합니다. 내가 옳은데 그냥 지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그 실천 사항이 부모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기로 하면 평안이 있다는 것은 극히 성경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죄란 대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자존심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마저도 참지 못하는 자존심입니다. 그래서 죄란 내가 옳다는 고집입니다. 윗사람이나 아무리 높은 사람일지라도 나의 부모이든,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일지라도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을 못 참습니다. 언제나 내가 옳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저 사람은 왜 바보 같은 일을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거든 우리는 지금 죄를 짓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치매 걸린 어머니가 소 사오라 거르면 소사오고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소 팔아라 그러면 팔고 그 판돈을 뿌리며 다녀도 ‘당신의 행동에 아무런 미움이 나오지 않는 것’ 이것이 효 아닐까요 부시대통령이 아침 6시에 평소에 하든대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부모님과 소파에 앉아서 소파위에 다리를 올려놓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자세는 흔한 일입니다. 순간 어머니가 ‘소파에서 발 좀 내려’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아버지 부시가 ‘여보 그래도 아들은 현직 대통령인데’하며 은근히 나무랐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대통령이라도 그렇지요 아들이 어머니 앞에 다리를 올려서는 안되지요. ’하며 응수를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부시대통령은 신속하게 발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미국 현지 대통령이지만 그는 어머니의 한 아들이고 자녀가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 멀고 실제로 안 보이십니다. 신앙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장 잘 가다듬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목사일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를 여호와 하나님이 세웠음을 알고 성도들이 듣는 자세가 참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이러하고 저렇게 하되 요렇게는 말라’라고 하는 것을 성도들은 성의 있게 들어야합니다.
안타까움과 아픔을 가지고 ‘이 길로 가라’그러면 그것이 돌아서 가는 길일지라도 돌아가면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마음들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서양교육을 받고, 전자계산기를 두들기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고, 핸드폰으로 모든 업무를 다 보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인간성이 점점 사라지고, 용서하며, 따뜻하게 받으며, 존경하며, 사랑하던 것들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모도 부모 같지 않게 여기며 무식하도고 고리타분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로마서 1:18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을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자에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꼭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면 불의해 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불의한 일, 즉 죄 짓은 일은 불경한일의 열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른 채 세상을 향해 깨끗하게 살고 착하게 산다는 것은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잘 들으세요. 우리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불의한 행동을 한다면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존재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심령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불의를 행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오늘의 젊은 세대가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 젊은이들의 불행입니다. 여러분 존경하는 대상을 찾기 이전에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조급하고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존경하기로 결심하고 찾아야 됩니다. 존경할 대상이 나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존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배고플 때 밥 사주고 심심하면 놀아주고 내 편이 되어서 상담하고 이런 사람 찾으려면 없습니다. 여러분의 욕심을 채우는 사람을 찾으니까 없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존경할만한 사람들 많습니다. 존경할만한 사람이란 성실하게 살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충분히 존경할 만합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하느냐하면 우리는 바로 이런 권위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 속에 떠밀러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님을 공경하라’ 이 말씀 속에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할, 그리스도를 드러내어야할 부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부모님을 공양하며 높이며 존경하며 순종하는 것에,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내하고 오래 참음에 대해 상 주시는 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순종하십시오. 어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정을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같이, 그 분께 순종하는 것같이 귀한 가정을 만들어야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자녀들은 어떠한 문제에서도 부모를 원망하거나 반대하거나 대등하게 싸워서는 안 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모와 자녀관계를 허락하신 것은 분명히 그 속에 부모가 가지는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하나의 상징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를 순종하며 어른을 공경한다면 바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순종하며 경외하는 일의 한 표현이 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순종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어린 소자에게 내 이름으로 물 한 그릇 준 것도 내게 한 것이다’그랬습니다. 하물며 부모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지요.
우리 신앙이 좀 우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사문제는 목숨을 겁니다. 주일성수도 목숨을 걸고 잘합니다. 그 좋아하는 술, 담배도 끊습니다. 아주 대단합니다. 그런데 삶 속에서 복종의 관계는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왜 예수 믿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웁니까 시어머니는 권사이고, 며느리는 집사인데도 싸울 때만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없습니다.
보세요. 새벽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기도하고, 산기도 수시로 가고, 이것이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삶 속에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여정에서 남을 사랑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무례히 행치 않고 이런 것으로 가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난 후 우리 집에 절대로 제사 않지 낸다. 술 담배 끊고 살겠다’ 이런 결심으로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상전과 하인이 복종하는 결단을 하시란 말입니다.
성경에는 일반법칙과 특별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특별법칙이 더 중요할 것으로 인식합니다. ‘특’자가 들어가면 모든 것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은 특별한 경우에 주사를 맞는 것과 같습니다. 주사를 맞는 것은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것이 일차적인 법칙이지요. 일차적인 법칙이란 성경에 있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질서로 허락한 법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부모를 만나고 우연히 자녀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내가 정한 아내 내가 정한 아내가 아닙니다. 이미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화가 날 때 ‘당신 같은 사람 만나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아휴 내 남편 아니면 누가 나 같은 것을 데리고 살겠나’ 차라리 이것이 솔직한 마음 아닙니까 그래서 천생연분입니다. 서로 잘 만났습니다. 오죽 여호와 하나님께서 짝을 잘 만나게 했을 까요 어찌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시며 다스리시는 인생이 우연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일차법칙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십계명에도 나오는 법칙이지요. 그래서 예외 없이 자식들이 그 일반법칙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정확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신 이 일반 법칙을 거스르지 말라는 명령을 일반법칙의 권위로 요구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내신 일반법칙에 의하여 부모는 자식에게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그 법칙 때문에 ‘예수 믿지마!’라고 하는 것만은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법칙을 주신 분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지을 것을 요구하거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만큼은 지킬 수 없습니다. 그것을 요구하는 자체가 그 일반 법칙을 세운 그 분의 신분과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닌 다음에는 다 들어야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자녀들이 믿지 않는 부모들 밑에서 이런 충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는 자녀들이 결혼식을 기독교식으로 하겠다고 주장하면 부모님들은 ‘무슨 소리냐 기독교식으로 못한다!’ 그를 때 충돌이 생깁니다. ‘교회에서 해야 겠습니다. ’, ‘교회에서 한다는 것은 허락할 수없다 교회에서 끝난 후 피로연할 수 있느냐’, ‘그럼요 교회에서 음식장만 할 수 있습니다. ’, ‘술을 해도 되느냐’, ‘그것은 안 됩니다. ’, ‘봐라 그러니까 못한다는 것 아니냐 네 육촌아저씨도 오고 당숙도 오고 시골에서도 여러 친지 분들이 오실 텐데 잔치 집에 술이 없다는 것이 왠 말이냐 절대 안 된다’ 바로 이런 큰 싸움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여러분 결혼식을 교회에서 할 만큼 단오하고 결단력이 있습니다. 그 만큼 신앙 안에서 삶을 살고자하는 기특함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열심히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겼느냐하는 것을 묻고 싶습니다. 신앙으로 싸우지 마세요. 제사 문제나 결혼식 문제나 담배 피우고, 술 먹는 문제 등으로 싸우지 마세요. 죄를 짓는 것이 아니면 일반법칙을 따르세요. 결혼식 교회에서 안 하면 어떻습니까
술 담배 하면 어떻습니까 제사를 지내겠다고 목숨을 거는데 어떻하겠습니까 부모님이 교회 나가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 중에 제사 밥 얻어먹지 못할까봐 불안해하면 제사 매일 지내준다고 하세요. 그리고 교회 데리고 나오세요. 그래서 천국가면 끝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신앙인이라고 그 신앙을 지킨다고 특별법칙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왜 일반법칙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불신자들 속에서 신자의 삶은 이래야합니다. 이 사람이 자기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시고 ‘이게 옳고 저게 그러다’ 따지고 싸우지 마세요. 우리가 영원한 나라를 내다보면서 세상을 보아야합니다. 스데반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신자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저쪽은 칼을 들고 예수님에 대해서 반대하고 영원적 차원에서 거슬리는 것이라면 부모라 할지라도 같이 서 있을 수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다 들으세요. 일차 일반법칙을 지키면서 아랑과 인내와 화평과 온유와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결혼 할 사람을 데리고 갔는데 부모가 반대하면 심각하게 생각하세요. 고집만 피우지 말고 부모님이 잘 못 판단한 것이라면 기다리세요. 인내하면서 더 잘 해드리면서 기다리면 됩니다. 노총각 노처녀가 되면 어떻습니까 이것이 일반법칙을 준수하는 길입니다.
최창용목사님의 간증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최목사님 아버지께서 예수 믿고 신학교에 간 것을 엄청나게 반대를 하셨답니다. 얼마큼 반대를 하셨느냐하면 졸업식 때 찾아오셔서 학교기물을 부수고 목사님 사모님에게 그렇게 욕을 해서 사람들이 후처인줄 알았답니다. 졸업식을 하고 아버님께 찾아가니까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고 가업을 이어갈 것이냐 둘째, 호적을 파 갈 것이냐 셋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실 것이냐 그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겠다고 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전북익산에서 시골교회를 시무하시는데 할머니가 연루창이 나서 몸 위에서부터 아래로 썩어 들어가는데 매일 사모님이 목욕을 시키는데도 냄새가 나서 교인들이 코를 막지 않으면 교회에 들어올 수 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약 3년 정도 이런 고생을 사모님이 신혼인데도 불구하고 다 감당하셨습니다. 이 소문이 나서 전북 익산 도청 효손부 표창까지 받았답니다. 약 3년 정도 고생하시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할아버지가 중풍이 왔는데 거동을 못하고 몇 년 동안 똥오줌을 받아냈답니다. 그러다가 돌아가셨는데 하루 만에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살아나자마자 아주 어눌한 말로 ‘너희가 믿는 예수님은 절대로 믿지 않겠다. ’ 이러면서 이를 갈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더니 뜨거운 불구덩이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거기가 바로 지옥이에요. 그 곳에 가시지 않기 위해서 예수를 믿어야합니다. ’ 이 말을 듣고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영접기도 다 받으시고 돌아가셨답니다. 최목사님과 사모님이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이런 관점에서도 은혜가 되지만 그러나 이런 고생이 결국 두 분을 천국으로 인도하신 것만큼 큰 효도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날 줄이라 어떻게 알았습니까 다시 사시니까 최목사님이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오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효의마음을 가진 자에게 축복하십니다. 부모님께 가장 효도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효는 자기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두고 염려하지마세요. 부모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편안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요즘 치매환자나 중풍환자가 많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가 두려워서 골방에 방치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효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시설 좋은 노인병원이나 요양원, 실버타운 같은 곳에 모시고 가는 것이 부모님에게 훨씬 나은 것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린 것입니다. 결국 자존심이나 남이 무서워서 하는 효는 진정한 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창립 1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오늘이 어버이주일이면서 창립15주년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오후에는 강정규전도사 목사안수식도 있습니다. 저희교회가 추구해야할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신자들이 일반법칙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령을 받고 그 성령으로 삶 속에서 실천해야할 것이 ‘복종’아닙니까 부부관계에서 부모와 자식관계에서 종과 상전의 관계에서 일반법칙이 지켜지며 교회에서 변화를 받아 삶 속에서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귀한 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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