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멍에 벗고 쉬기
본문
오늘은 말씀 본문과 교독문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읽었습니다. 성가도 그렇게 부르셨는데 모세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 주신 것 중에 독특한 계명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함께 읽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인데 ‘부모를 공경하라’로 딱 끝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 첨언을 하셨습니다.
“이 계명은 약속이 딸린 첫째 계명이다. ” 약속이 딸린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약속은 뭡니까 첫째는 네가 잘되고 둘째는 네가 장수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잘살 것이고 오래오래 살 것이다. 이 두 가지 약속을 포함하여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래 살고 싶으십니까 오래 삽시다. 그런데 오래 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오래 사셔야 합니다. ‘못’ 오래 살면 어렵습니다. 저도 오래 살고 적게 살고는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제발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보람되고 아름답고 진실 되게 살 수 있으면 그 기간은 얼마든지 간에 기꺼이 승복할 용의가 있습니다. 기간은 제가 정하는 건 아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 중에 잘산다는 것, 잘된다는 말이 뭘까 여호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잘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에게 복종을 하고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하면 잘살고 오래 산다고 했습니다. 성경말씀 다 들춰보면 우선 오래 산다는 말은 60, 70, 80, 90, 100, 이렇게 오래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건 뭐냐, 자식이 있고, 손자 손녀 세대가 있고,
증손, 고조손 식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공경 때문에 계속해서 자손이 이어갈 겁니다. 자손이 계속되면서 사는 것을 오래 산다고 합니다. 저희가 오래 산다는 말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가정의 삶이 이어집니다. 이어지는 조건은 첫 세대와 둘째 세대와 부모공경이라는 고리로, 둘째 세대와 셋째 세대 사이에 부모 공경하는 고리로, 부모 공경이라는 고리가 있는 한 고리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갑니다.
이 고리를 얼마 동안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구약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이 고리를 수천 대까지 이르게 하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이 고리를 계속 지켜줄 수가 없어서 3, 4대까지만 이르게 하고,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시면 되고 부모를 공경하면 반드시 공경의 고리로 계속해서 우리의 자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입니까 고리가 튼튼하면 튼튼할수록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므로 잘사는 것입니다. 제가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제 자식도 잘살고 손자 손녀도 잘살고 다 잘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그걸 원하십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 말씀이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사랑이 먼저입니다. 부모가 사랑했기에 자식이 공경하는 것이지 사랑도 안 하는 부모한테 진심으로 공경하는 자식을 보셨습니까 부모의 사랑을 감지하지도 못하고 부모가 사랑인지도 모르는데 자식들이 어떻게 공경하라는 말입니까 인륜에 어긋납니다. 사랑도 안 주시는 부모한테 공경하라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 찬양합니까 오늘 예배 왜 드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셨기에 사랑에 감사하여 드리는 우리의 반응이 예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지도 않으셨는데 제가 왜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 드려야 합니까 왜 예배해야 합니까 그 여호와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합니까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에 제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서 낳은 것부터 자식은 부모를 사랑하기에 사랑받는 자식은 부모에게 갚을 도리가 ‘공경’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셨듯이 부모가 먼저 자식을 사랑했기에 자식을 태어나게 했기에 자식은 부모를 공경합니다. 부모이신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깨달읍시다. 어버이날이 훌륭한 날이긴 하지만 사랑을 한번 확인합시다. 자손에게 후진에게 “진심으로 사랑합니까” 묻고 나서 훈계를 합시다. “부모를 공경해라. ”
율법시대, 구약시대에 명령들을 내렸습니다. 내렸더니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이 계속 지탱되어 왔습니다. 율법은 부모 공경만이 아니라 경제생활, 사회생활 모든 면에서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복 받는다고 했는데 혹시 부모 공경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느냐 나한테 와라. ” 그 말을 뒤집어서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짐이 되어서 힘들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와라. ” 이렇게 예수께서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자식 사랑이 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모 공경이 짐스럽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안식일에 유대백성들은 하던 일 다 멈추고 먹는 것까지 전날 다 만들어놓고 밥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것만 허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어떤 사람은 준비를 다 해놓고 마실 것 마시고 먹기만 하면 됩니다. 최소한의 것만 하면 되는데 성전 예배하러 갈 때 그냥 걸어가시지 꼭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차를 끄는 마부는 그날도 일을 해야 합니다. 거룩한 분, 힘드신 분이 성전예배에 가십니다.
율법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은 예배드리러 가기 때문에 안식일 계명을 잘 지키는 훌륭한 사람이고 마차를 끌고 가는 마부는 일을 했으므로 안식일 계명을 위반한 사람입니다. 옳은 법입니까 이런 규정이 예수님 당시까지 철두철미하게 지켜졌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안식일까지도 일을 해야 해서 율법을 위반한 사람이 되었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시켜서 유유히 차를 타고 가면서 운전 안하고 예배에 가면서 율법을 지키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돈이 없다고 사회적 신분이 낮다고 공부 좀 덜 했다고 지식이 좀 모자란다고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율법이 멍에가 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조금 잘났다고, 높다고, 힘이 좀 있다고, 가진 게 좀 많다고, 율법을 유유히 지키면서 즐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법을 지키세요, 국법을 지키세요, 안식일 법을 지키세요, 해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멍에였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율법을 멍에로 보는 사람은 내게로 와라. 그럼 내가 다른 멍에를 줄 텐데 그 멍에는 율법이라는 멍에가 아니라 내 스스로 내 어깨에 진 멍에라는 이름의 새로운 법인데 그 법은 율법이라고 하지 말고 복음이라고 하여라. ” 사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런 말을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명령을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명령을 어떻게 바랐느냐 하면 제사장, 예언자, 왕들을 통해서 명령을 했습니다. 백성들은 지켜야 했습니다. 그 분이 거룩하시고 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인 줄은 알지만 그 분의 사랑이 나한테까지 임했는지는 모르나 전지전능하신 분이 명령하므로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지킴 속에 사랑을 진심으로 깨닫는 일은 덜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는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분, 자신이 사랑의 화신이 되셨습니다. 과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위에서 명령하셨지만 이제 예수님이 오신 다음부터는 사랑의 화신이 예수님이시고, 사랑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랑입니다.
우리 부모와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자꾸 자식보고 명령만 하고 사랑이 없는 부모를 어떻게 공경할 수 있습니까 자식 사랑도 안 하는 부모가 명령만 하고 사랑하라고만 한다면 공경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반대로 공경하지 않는 자식이 어떻게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 얘기는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위에서 명령만 하고 계신 분이 아니고 명령하신 그 분이 바로 사랑의 화신입니다. 부모를, 자식을 사랑하라는 그 부모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라고 명령해도 듣듯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철학이나 사상을 공부해 보면, 모든 인간은 자기에게 부여된 윤리적인 도덕적인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명령을 받습니다. 명령을 바라는 자가 명령이 높으면 고개를 숙일 수 있습니다. 명령을 바라는 자가 명령대로 살지 못하면 우리는 그 명령에 승복하기 어렵습니다. 소위 ‘임페라티브(imperative)’라고 합니다.
명령, 윤리적 명령입니다. 구약시대 여호와 하나님은 명령을 내리신 분이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든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예수는, “나는 명령을 내릴 뿐만 아니라 사랑하라는 명령을 선포하지만 동시에 나는 사랑의 화신이다.
나 스스로가 사랑이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몸을 찢고 버리기까지 십자가도 지고 죽음도 지고 아픔도 지고 승복하기까지 나는 사랑의 화신이다. 사랑의 화신인 내가 말하노니 서로 사랑해라. ” 그래서 이런 예수를 명령 내리시는 예수, 명령만 바라시는 여호와 하나님, 임페라티브(imperative)만이 아니고 사랑 그 자체이신 분 ‘인디카티브(indicative)’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믿는 복 중에 하나가 예수님은 나한테 오셔서 명령만 내리고 지시만 하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의 화신이 되신 분, 스스로 겸손의 화신이 되신 분, 골로새서에서도 말하는 스스로 용서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평화를 이루어라, 하시고 평화를 실제로 이루신 분, 지혜를 가져라, 하시면서 스스로 지혜이신 분, 용납해라, 하시고 저 같은 사람을 용납하신 분, 이 분이 가라사대, “용서해라. 사랑해라, 부모를 공경해라” 이러한 그 분의 말씀이 위대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멍에를 지고 어렵게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멍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스스로 멍에를 벗고 새로운 희생과 사랑의 구연체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에서는 귀합니다.
멍에를 벗고 새로운 쉼을 얻으라고 했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까 제가 읽은 책 중에 최근에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라고 하던데 소개합니다. 듀크대학의 교수로 있는 댄 애리얼리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해서 상식 밖의 경제학인데, 원제는 "Predictably Irrational" 예상할 수 있을 만큼 상식 밖의 경제라는 이야기의 책입니다.
듀크대학에서 실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한 학기가 12주인데 학기당 제출해야 할 텀페이퍼 세 개를 정해놓고, 첫째 그룹에게는 학기말까지 세 가지 주제 텀페이퍼를 마지막 날까지 알아서 언제든 제출해라. 제출 날짜는 자유입니다. 두 번째 그룹한테는 첫째 주제는 4주 말, 둘째는 8주 말, 셋째는 12주 말까지 제출해야 한다.
단 모두 묶어서 아무 때나 제출해도 된다. 세 번째 그룹한테는 4주째는 첫째만, 8주째는 둘째, 12주째는 셋째만 무조건 엄수해서 지켜서 내야 한다. 어기면 감점이다. 결과는 성적을 내보니까 정확하게 주를 지켜서 낸 C그룹이 성적이 제일 좋고, 뒤에 내든 정해지 날에 내든 마음대로 하라고 적당히 제한을 두었던 그룹이 B학점을 받았고, 완전히 풀어준 그룹은 C학점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한 실험입니다. 성적이 다는 아니지만 학기말까지 시간이 있다고 계속 미루고 지금 편리함을 누리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가서 적당히 밤샘하느라 숙제는 밀려서 성적이 나빴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날에 밤샘하느라 고생합니다. 어버이날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을 주시는데 제가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것 아닙니까 사랑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말입니다.
저를 사랑하시는 부모님께 공경을 드려야 할 것 아닙니까 얼마만큼 드리면 되는지, 제 평생 다 모았다가 마지막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공경하면 어떨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려우니까 형편이 펴면 아버님, 어머님께 공경해 드리겠다고 하는데 결국엔 기회를 못 얻어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엄청나게 공경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윤리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 그렇게 격식 차리면서 공경하십니까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데 제 자식들이 좀 참으세요, 적당한 때까지 기다리다가 떠나세요, 하고는 나중에 울면서 제사 드린다고 그 부모님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치 텀페이퍼를 무한정 미뤘다가 마지막 내긴 냈는데 실적이 좋지 않은 텀페이퍼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구원을 베풀어주는 사랑을 몽땅 주셨습니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일 년을 지내다가 크리스마스가 되면 몽땅 예배드릴 테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으시죠, 하면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한 번에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 드리면 너무 심하니까 부활절과 나눠서 예배드리겠습니다,
하면서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에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자윱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자유하십니다. 그렇다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사랑을 유보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내려주십니다.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오늘 이 순간도 끊이지 않고 사랑을 베푸시는데 제가 끊고 제가 알아서 제 십자가를 지키면 여호와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말은 주일처럼 예배드리는 것도 있고 가정예배도 있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다 예배입니다. 살아가면서 예배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진실로 사랑하면서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의식하고 일분일초도 기도드리면서 감사하는 마음, 골로새서의 말씀처럼 시와 찬미와 기도로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 부모님께 공경인데 그 순간순간을 모아서 마지막에 드리겠다고 하는 분이 있다면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은 없습니다.
마지막에 모아드릴 수 있는 기회는 없습니다. 그 때 예배를 받으실 여호와 하나님은 안 계시고, 그 때 몽땅 공경을 받으실 부모님은 이미 이 땅에 안 계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마지막 모아서 받아주실 그런 여호와 하나님은 성경말씀에 없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려울 때도 계시고 기쁠 때도 계시고 아침에도 계시고 밤에도 계시고 항상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항상 함께 있는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살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받으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문드문 드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부모님의 사랑을 항상 받으면서 부모님 공경은 몰아서 드리겠다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수고하고 힘들게 사는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만든 족쇄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푸십시오. 풀고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받으면 항상 예배하십시오.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시면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평화의 마음을 가지고 시도 읊고 찬미하고 노래하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생활입니다.
생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것이 예배라는 형식으로, 예전이라는 형식으로 다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좀 쉽다고, 쉬고 싶다고 큰 걸 놓치지 마십시오. 소탐대실하지 맙시다. 지금 사랑합시다. 지금 공경하십시다. 그리고 지금 예배합시다. 미루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축복을 부모가 베푼 사랑을 지금 만끽하고 지금 감사를 드립시다. 항상 어버이날, 항상 어버이의 사랑을 받는 날로 삽시다.
마지막 예수께서 장수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살아있지만 저는 정말 오래 살고 싶습니다. 제 육을 떠나서 사는 것은 개의치 않겠습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제가 자식들에게 전해주고 간직하고 싶습니다. 제 아들을 보고 사람들이 이렇게 사람들이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를 닮았다, 그리고 손자 얼굴이 할아버지 닮았다, 혹은 수십 대 전의 어느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좋은 걸 보고, 나쁜 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지금만 사는 게 아니라 수십 대 수천 대 뒤에 오는 제 후손 속에서 살고 싶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래 산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큰 축복은 세대를 초월하여 수천 대까지 이르러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내가 사랑합니다. 먼저 가셨다고 서글퍼하지 마십시오. 훌륭한 조상은 이런 방식으로 후손에서 살아갑니다. 저는 그렇게 오래 살고 싶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게 오래 사는 사람을 부모 공경하는 사람들 속에서 찾으십니다.
우리의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어머니의, 할머니의 좋은 것을 받는 전제로, 태어나지 않은 우리 자손들이 지금 제 안에서, 우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 후손이 제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가슴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한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약속, 약속은 보이지 않지만 계속해서 살아가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주 안에서 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됩니다. 끊임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예배도, 여호와 하나님 찬양도 끊이지 마십시오. 부모의 사랑은 계속됩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도 끊이지 마십시오. 수고와 짐이 아니라 기쁨의 샘물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마시십시오. 나중에 마신다고 미루지 말고 목마를 때마다 마시십시오. 인도나 캄보디아에는 샘물이 없어서 펌프를 이용해서 물을 끌어 올려서 마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펌프 물에 지혜가 하나 있습니다. 그냥 펌프질 한다고 물이 절대로 올라오지 않습니다. 펌프 속에 물 한 바가지 부으셔야 합니다. 그 물이 내려가서 펌프질에 윤활유가 되어서 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데 물을 한두 바가지 끌어올리는 대가는 펌프질 하는 만큼 물이 올라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공경이 한 바가지 물을 붓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의 사랑은 이미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무한대 생명의 물을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라 이름하는,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이라 이름하는 물 한 바가지만 부으십시오. 믿음의 물, 소망의 물, 사랑의 물, 이 물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 땅이 완전히 끝나는 날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날까지 수천 대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되 지금 사랑을 하십시오. 내일도 사랑하십시오. 모레도 사랑하십시오. 지금을 미루지 맙시다. 지금 공경합시다. 지금 사랑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앞으로도 되실 겁니다. 구원의 문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아멘.
“이 계명은 약속이 딸린 첫째 계명이다. ” 약속이 딸린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약속은 뭡니까 첫째는 네가 잘되고 둘째는 네가 장수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잘살 것이고 오래오래 살 것이다. 이 두 가지 약속을 포함하여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래 살고 싶으십니까 오래 삽시다. 그런데 오래 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오래 사셔야 합니다. ‘못’ 오래 살면 어렵습니다. 저도 오래 살고 적게 살고는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제발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보람되고 아름답고 진실 되게 살 수 있으면 그 기간은 얼마든지 간에 기꺼이 승복할 용의가 있습니다. 기간은 제가 정하는 건 아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 중에 잘산다는 것, 잘된다는 말이 뭘까 여호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잘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에게 복종을 하고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하면 잘살고 오래 산다고 했습니다. 성경말씀 다 들춰보면 우선 오래 산다는 말은 60, 70, 80, 90, 100, 이렇게 오래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건 뭐냐, 자식이 있고, 손자 손녀 세대가 있고,
증손, 고조손 식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공경 때문에 계속해서 자손이 이어갈 겁니다. 자손이 계속되면서 사는 것을 오래 산다고 합니다. 저희가 오래 산다는 말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가정의 삶이 이어집니다. 이어지는 조건은 첫 세대와 둘째 세대와 부모공경이라는 고리로, 둘째 세대와 셋째 세대 사이에 부모 공경하는 고리로, 부모 공경이라는 고리가 있는 한 고리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갑니다.
이 고리를 얼마 동안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구약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이 고리를 수천 대까지 이르게 하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이 고리를 계속 지켜줄 수가 없어서 3, 4대까지만 이르게 하고,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시면 되고 부모를 공경하면 반드시 공경의 고리로 계속해서 우리의 자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입니까 고리가 튼튼하면 튼튼할수록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므로 잘사는 것입니다. 제가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제 자식도 잘살고 손자 손녀도 잘살고 다 잘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그걸 원하십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 말씀이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사랑이 먼저입니다. 부모가 사랑했기에 자식이 공경하는 것이지 사랑도 안 하는 부모한테 진심으로 공경하는 자식을 보셨습니까 부모의 사랑을 감지하지도 못하고 부모가 사랑인지도 모르는데 자식들이 어떻게 공경하라는 말입니까 인륜에 어긋납니다. 사랑도 안 주시는 부모한테 공경하라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 찬양합니까 오늘 예배 왜 드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셨기에 사랑에 감사하여 드리는 우리의 반응이 예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지도 않으셨는데 제가 왜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 드려야 합니까 왜 예배해야 합니까 그 여호와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합니까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에 제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서 낳은 것부터 자식은 부모를 사랑하기에 사랑받는 자식은 부모에게 갚을 도리가 ‘공경’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셨듯이 부모가 먼저 자식을 사랑했기에 자식을 태어나게 했기에 자식은 부모를 공경합니다. 부모이신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깨달읍시다. 어버이날이 훌륭한 날이긴 하지만 사랑을 한번 확인합시다. 자손에게 후진에게 “진심으로 사랑합니까” 묻고 나서 훈계를 합시다. “부모를 공경해라. ”
율법시대, 구약시대에 명령들을 내렸습니다. 내렸더니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이 계속 지탱되어 왔습니다. 율법은 부모 공경만이 아니라 경제생활, 사회생활 모든 면에서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복 받는다고 했는데 혹시 부모 공경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느냐 나한테 와라. ” 그 말을 뒤집어서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짐이 되어서 힘들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와라. ” 이렇게 예수께서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자식 사랑이 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모 공경이 짐스럽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안식일에 유대백성들은 하던 일 다 멈추고 먹는 것까지 전날 다 만들어놓고 밥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것만 허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어떤 사람은 준비를 다 해놓고 마실 것 마시고 먹기만 하면 됩니다. 최소한의 것만 하면 되는데 성전 예배하러 갈 때 그냥 걸어가시지 꼭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차를 끄는 마부는 그날도 일을 해야 합니다. 거룩한 분, 힘드신 분이 성전예배에 가십니다.
율법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은 예배드리러 가기 때문에 안식일 계명을 잘 지키는 훌륭한 사람이고 마차를 끌고 가는 마부는 일을 했으므로 안식일 계명을 위반한 사람입니다. 옳은 법입니까 이런 규정이 예수님 당시까지 철두철미하게 지켜졌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안식일까지도 일을 해야 해서 율법을 위반한 사람이 되었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시켜서 유유히 차를 타고 가면서 운전 안하고 예배에 가면서 율법을 지키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돈이 없다고 사회적 신분이 낮다고 공부 좀 덜 했다고 지식이 좀 모자란다고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율법이 멍에가 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조금 잘났다고, 높다고, 힘이 좀 있다고, 가진 게 좀 많다고, 율법을 유유히 지키면서 즐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법을 지키세요, 국법을 지키세요, 안식일 법을 지키세요, 해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멍에였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율법을 멍에로 보는 사람은 내게로 와라. 그럼 내가 다른 멍에를 줄 텐데 그 멍에는 율법이라는 멍에가 아니라 내 스스로 내 어깨에 진 멍에라는 이름의 새로운 법인데 그 법은 율법이라고 하지 말고 복음이라고 하여라. ” 사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런 말을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명령을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명령을 어떻게 바랐느냐 하면 제사장, 예언자, 왕들을 통해서 명령을 했습니다. 백성들은 지켜야 했습니다. 그 분이 거룩하시고 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인 줄은 알지만 그 분의 사랑이 나한테까지 임했는지는 모르나 전지전능하신 분이 명령하므로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지킴 속에 사랑을 진심으로 깨닫는 일은 덜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는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분, 자신이 사랑의 화신이 되셨습니다. 과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위에서 명령하셨지만 이제 예수님이 오신 다음부터는 사랑의 화신이 예수님이시고, 사랑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랑입니다.
우리 부모와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자꾸 자식보고 명령만 하고 사랑이 없는 부모를 어떻게 공경할 수 있습니까 자식 사랑도 안 하는 부모가 명령만 하고 사랑하라고만 한다면 공경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반대로 공경하지 않는 자식이 어떻게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 얘기는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위에서 명령만 하고 계신 분이 아니고 명령하신 그 분이 바로 사랑의 화신입니다. 부모를, 자식을 사랑하라는 그 부모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라고 명령해도 듣듯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철학이나 사상을 공부해 보면, 모든 인간은 자기에게 부여된 윤리적인 도덕적인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명령을 받습니다. 명령을 바라는 자가 명령이 높으면 고개를 숙일 수 있습니다. 명령을 바라는 자가 명령대로 살지 못하면 우리는 그 명령에 승복하기 어렵습니다. 소위 ‘임페라티브(imperative)’라고 합니다.
명령, 윤리적 명령입니다. 구약시대 여호와 하나님은 명령을 내리신 분이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든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예수는, “나는 명령을 내릴 뿐만 아니라 사랑하라는 명령을 선포하지만 동시에 나는 사랑의 화신이다.
나 스스로가 사랑이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몸을 찢고 버리기까지 십자가도 지고 죽음도 지고 아픔도 지고 승복하기까지 나는 사랑의 화신이다. 사랑의 화신인 내가 말하노니 서로 사랑해라. ” 그래서 이런 예수를 명령 내리시는 예수, 명령만 바라시는 여호와 하나님, 임페라티브(imperative)만이 아니고 사랑 그 자체이신 분 ‘인디카티브(indicative)’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믿는 복 중에 하나가 예수님은 나한테 오셔서 명령만 내리고 지시만 하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의 화신이 되신 분, 스스로 겸손의 화신이 되신 분, 골로새서에서도 말하는 스스로 용서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평화를 이루어라, 하시고 평화를 실제로 이루신 분, 지혜를 가져라, 하시면서 스스로 지혜이신 분, 용납해라, 하시고 저 같은 사람을 용납하신 분, 이 분이 가라사대, “용서해라. 사랑해라, 부모를 공경해라” 이러한 그 분의 말씀이 위대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멍에를 지고 어렵게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멍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스스로 멍에를 벗고 새로운 희생과 사랑의 구연체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에서는 귀합니다.
멍에를 벗고 새로운 쉼을 얻으라고 했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까 제가 읽은 책 중에 최근에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라고 하던데 소개합니다. 듀크대학의 교수로 있는 댄 애리얼리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해서 상식 밖의 경제학인데, 원제는 "Predictably Irrational" 예상할 수 있을 만큼 상식 밖의 경제라는 이야기의 책입니다.
듀크대학에서 실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한 학기가 12주인데 학기당 제출해야 할 텀페이퍼 세 개를 정해놓고, 첫째 그룹에게는 학기말까지 세 가지 주제 텀페이퍼를 마지막 날까지 알아서 언제든 제출해라. 제출 날짜는 자유입니다. 두 번째 그룹한테는 첫째 주제는 4주 말, 둘째는 8주 말, 셋째는 12주 말까지 제출해야 한다.
단 모두 묶어서 아무 때나 제출해도 된다. 세 번째 그룹한테는 4주째는 첫째만, 8주째는 둘째, 12주째는 셋째만 무조건 엄수해서 지켜서 내야 한다. 어기면 감점이다. 결과는 성적을 내보니까 정확하게 주를 지켜서 낸 C그룹이 성적이 제일 좋고, 뒤에 내든 정해지 날에 내든 마음대로 하라고 적당히 제한을 두었던 그룹이 B학점을 받았고, 완전히 풀어준 그룹은 C학점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한 실험입니다. 성적이 다는 아니지만 학기말까지 시간이 있다고 계속 미루고 지금 편리함을 누리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가서 적당히 밤샘하느라 숙제는 밀려서 성적이 나빴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날에 밤샘하느라 고생합니다. 어버이날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을 주시는데 제가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것 아닙니까 사랑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말입니다.
저를 사랑하시는 부모님께 공경을 드려야 할 것 아닙니까 얼마만큼 드리면 되는지, 제 평생 다 모았다가 마지막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공경하면 어떨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려우니까 형편이 펴면 아버님, 어머님께 공경해 드리겠다고 하는데 결국엔 기회를 못 얻어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엄청나게 공경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윤리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 그렇게 격식 차리면서 공경하십니까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데 제 자식들이 좀 참으세요, 적당한 때까지 기다리다가 떠나세요, 하고는 나중에 울면서 제사 드린다고 그 부모님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치 텀페이퍼를 무한정 미뤘다가 마지막 내긴 냈는데 실적이 좋지 않은 텀페이퍼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구원을 베풀어주는 사랑을 몽땅 주셨습니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일 년을 지내다가 크리스마스가 되면 몽땅 예배드릴 테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으시죠, 하면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한 번에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 드리면 너무 심하니까 부활절과 나눠서 예배드리겠습니다,
하면서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에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자윱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자유하십니다. 그렇다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사랑을 유보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내려주십니다.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오늘 이 순간도 끊이지 않고 사랑을 베푸시는데 제가 끊고 제가 알아서 제 십자가를 지키면 여호와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말은 주일처럼 예배드리는 것도 있고 가정예배도 있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다 예배입니다. 살아가면서 예배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진실로 사랑하면서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의식하고 일분일초도 기도드리면서 감사하는 마음, 골로새서의 말씀처럼 시와 찬미와 기도로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 부모님께 공경인데 그 순간순간을 모아서 마지막에 드리겠다고 하는 분이 있다면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은 없습니다.
마지막에 모아드릴 수 있는 기회는 없습니다. 그 때 예배를 받으실 여호와 하나님은 안 계시고, 그 때 몽땅 공경을 받으실 부모님은 이미 이 땅에 안 계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마지막 모아서 받아주실 그런 여호와 하나님은 성경말씀에 없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려울 때도 계시고 기쁠 때도 계시고 아침에도 계시고 밤에도 계시고 항상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항상 함께 있는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살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받으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문드문 드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부모님의 사랑을 항상 받으면서 부모님 공경은 몰아서 드리겠다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수고하고 힘들게 사는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만든 족쇄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푸십시오. 풀고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받으면 항상 예배하십시오.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시면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평화의 마음을 가지고 시도 읊고 찬미하고 노래하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생활입니다.
생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것이 예배라는 형식으로, 예전이라는 형식으로 다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좀 쉽다고, 쉬고 싶다고 큰 걸 놓치지 마십시오. 소탐대실하지 맙시다. 지금 사랑합시다. 지금 공경하십시다. 그리고 지금 예배합시다. 미루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축복을 부모가 베푼 사랑을 지금 만끽하고 지금 감사를 드립시다. 항상 어버이날, 항상 어버이의 사랑을 받는 날로 삽시다.
마지막 예수께서 장수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살아있지만 저는 정말 오래 살고 싶습니다. 제 육을 떠나서 사는 것은 개의치 않겠습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제가 자식들에게 전해주고 간직하고 싶습니다. 제 아들을 보고 사람들이 이렇게 사람들이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를 닮았다, 그리고 손자 얼굴이 할아버지 닮았다, 혹은 수십 대 전의 어느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좋은 걸 보고, 나쁜 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지금만 사는 게 아니라 수십 대 수천 대 뒤에 오는 제 후손 속에서 살고 싶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래 산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큰 축복은 세대를 초월하여 수천 대까지 이르러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내가 사랑합니다. 먼저 가셨다고 서글퍼하지 마십시오. 훌륭한 조상은 이런 방식으로 후손에서 살아갑니다. 저는 그렇게 오래 살고 싶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게 오래 사는 사람을 부모 공경하는 사람들 속에서 찾으십니다.
우리의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어머니의, 할머니의 좋은 것을 받는 전제로, 태어나지 않은 우리 자손들이 지금 제 안에서, 우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 후손이 제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가슴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한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약속, 약속은 보이지 않지만 계속해서 살아가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주 안에서 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됩니다. 끊임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예배도, 여호와 하나님 찬양도 끊이지 마십시오. 부모의 사랑은 계속됩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도 끊이지 마십시오. 수고와 짐이 아니라 기쁨의 샘물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마시십시오. 나중에 마신다고 미루지 말고 목마를 때마다 마시십시오. 인도나 캄보디아에는 샘물이 없어서 펌프를 이용해서 물을 끌어 올려서 마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펌프 물에 지혜가 하나 있습니다. 그냥 펌프질 한다고 물이 절대로 올라오지 않습니다. 펌프 속에 물 한 바가지 부으셔야 합니다. 그 물이 내려가서 펌프질에 윤활유가 되어서 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데 물을 한두 바가지 끌어올리는 대가는 펌프질 하는 만큼 물이 올라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공경이 한 바가지 물을 붓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의 사랑은 이미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무한대 생명의 물을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라 이름하는,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이라 이름하는 물 한 바가지만 부으십시오. 믿음의 물, 소망의 물, 사랑의 물, 이 물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 땅이 완전히 끝나는 날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날까지 수천 대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되 지금 사랑을 하십시오. 내일도 사랑하십시오. 모레도 사랑하십시오. 지금을 미루지 맙시다. 지금 공경합시다. 지금 사랑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앞으로도 되실 겁니다. 구원의 문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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