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어버이의 눈물
본문
지난 4월 12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해외 고려장’의 실태에 대한 보도를 보았습니다.
부모의 재산을 빼앗고 부모를 해외에 방치한 현대판 고려장을 심층 보도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 딸을 출가시킨 최씨 부부는 한국에서 평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캐나다에 사는 두 딸이 2004년 5월 영주권을 받아 캐나다에서 함께 생활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노년에 사랑하는 딸 곁에 사는 것도 좋다 싶어서 재산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큰딸은 자신이 부모님을 모실 거라며 부모님의 전 재산 8천만원을 받아갔습니다.
그 후 최씨 부부는 캐나다에 있는 큰 딸에 집에 갔지만 연락도 없이 행적을 감췄습니다.
둘째 달은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2006년 이후 부모님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딸들에게 버림받은 최씨 부부는 오갈 데 없는 국제미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현재 낯선 이국 나라 캐나다에서 깡통을 주워 생활비를 마련하고, 한인교회의 도움으로 쪽방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렇게 해외로 이민을 가면서 늙은 부모를 모시겠다는 말로 부모의 재산만 챙기고 연락을 끊어 버리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님들 가운데 외국에 있는 자녀들이 같이 살자고 재산 정리해서 들어오라고 하면 잘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현대판 해외 고려장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자식을 믿어온 노인들에게는 신체적 학대보다 더 큰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최악의 노인 학대다”
이 방송을 본 네티즌들은 ‘보는 내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에게 어쩌면 저럴 수 있는가’, ‘동방 예의지국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다’라며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부모님은 나의 존재의 근원입니다.
오늘의 나가 있기까지 최선을 다해서 수고의 땀을 흘리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은 못할망정 노년에 마지막 희망까지 빼앗는 파렴치한 자식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물론 이것은 소수의 못된 자식들이 저지르는 불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도가 다를 뿐이지 과연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겸허하게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일 년 365일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며 사는 것이 마땅한 자식의 도리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날을 정해 놓고서라도 부모 공경의 마음을 되새기며, 효도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여러분 가운데는 효도를 하고 싶어도 양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할 수 없는 분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어르신들, 또한 우리 주변에 있는 어르신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다시한번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효성을 다하는 결단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 다윗의 통곡의 눈물입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제일 잘생기고 영리한 아들이 압살롬입니다.
그는 지략이 뛰어나고, 용기 있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마음속에 이기적인 야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절제되지 않는 야망은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갑니다.
그는 아버지의 왕좌를 빼앗으려는 야심을 품고, 4년 동안 몰래 군대를 훈련시킵니다.
아버지 다윗을 향한 민심을 이간질시킵니다.
마침내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예루살렘 성에서 쫓아내고 왕좌에 앉습니다.
후에는 아버지를 죽이고자 합니다.
아버지의 군대와 아들의 군대가 목숨을 걸고 치열한 싸움을 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불행한 싸움이 어디 있습니까
결국 이 싸움에서 압살롬은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에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전쟁은 다윗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승리의 반가운 소식을 들었지만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에 왕의 체면도 생각지 않고 성곽에 올라가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 다윗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부모님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아닐까요
첫째로, 부모님은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자식도 끝까지 사랑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아들 압살롬은 특별한 사랑과 애정을 쏟았던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흥분하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당장 잡아서 목을 치라고 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터로 나가는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 장군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18:5)
이 말을 할 때 함께 있던 모든 백성들이 듣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당치도 않은 말이 아닙니까
전쟁을 일으킨 주범을 너그럽게 대해주라는 다윗의 요구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다윗은 혹시 압살롬에게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문 앞에서 아들에 관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아비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용서하고 압살롬이 무사하기만을 기원합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마음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패역한 짓을 하고, 끊임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지만 택하신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속죄의 제물로 보내십니다.
가장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시면서도 끝까지 침묵하십니다.
마침내 “다 이루었다” 선언하시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시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 사랑은 곧 여호와 하나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사랑치 못하는 자가 어찌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구약에서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출21:15-17)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쉴만한 물가 칼럼에 소개된 것처럼 노모를 돌보지 않아 길가에 방치하는 못된 자식임에도 어머니는 끝까지 감싸줍니다.
경찰서에서 서로 모시지 않겠다고 싸우고 있는 꼴난 자식들 앞에서 노모는 끝까지 자식 걱정스러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오래 산 것이 죄지 애들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자식들은 이래 가라 저래 가라 안 했심더. 아무 일도 없심더. 자 이 보소. 이것도 애들이 넣어준 기라. ”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못된 자식일지라도 끝까지 감싸 안으시고, 사랑하시는 것이 우리 부모님이십니다.
아무런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형편없는 모습까지도 끌어안으시고, 품어 주시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알고, 이런 사랑을 덧입고 살아왔다면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성을 다하는 것은 마땅한 자식의 도리가 아닐까요
둘째로, 부모님의 사랑은 자식의 불행을 자기 탓으로 여기며 괴로워합니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자식이 잘되면 부모님의 마음은 기쁩니다.
반대로 아무리 자식이 못됐어도 불행해지면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사실 엄격하게 따지면 압살롬의 불행은 다윗이 뿌린 씨앗을 거두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남편을 고의로 살인을 합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 다윗이 참회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범죄의 결과에 대한 심판은 면하지 못했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10)
그리고 집안에 재앙이 일어나고, 태어난 아들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다윗은 압살롬은 반역은 바로 자신의 범죄의 결과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음이 분명합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 앞에서 다윗은 결국 자신의 죄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는 심한 자책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번 여호와 하나님 앞에 짓는 범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신성한 가정 속에 불행의 씨앗을 뿌리는 부모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못되면 스스로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식이 잘못해도 자신의 종아리를 치는 것이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부모님은 자식이 잘 되면 그 공로를 자식에게 돌리지만 자식이 잘못되면 그 책임을 부모 자신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셋째로, 부모님의 사랑은 자식을 자신의 생명과 왕관보다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다윗은 관심은 온통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아들과 벌이는 전쟁이지만 한 나라의 왕으로서 승리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관심은 전쟁의 승패에 있지 않습니다.
전쟁터에서 달려온 전령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왕의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았다고 보고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마땅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어떻게 승리했느냐를 묻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던진 첫 질문이 무엇입니까
“압살롬은 잘 있느냐”(32절)
비록 아버지를 왕좌에서 몰아내고, 죽이고자 전쟁을 일으킨 못된 아들이지만 다윗에게 압살롬은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지켜야할 사랑의 대상입니다.
전령으로부터 왕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마음이 심히 아팠습니다.
차마 신하들 앞에서 울 수 없어서 문 위층으로 올라가 통곡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다윗은 차라리 자기가 죽고 압살롬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통곡합니다.
자기 생명보다 아들이 살았더라면 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왕권보다, 나라보다도 압살롬이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자녀를 사랑하는 진정한 부모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미운 짓을 하고, 심지어 아버지를 향해 칼을 겨눈 아들이라도 그 자식의 죽음 앞에서 차라리 자신의 생명을 주어서라도 그 아들의 죽음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바치고자 하는 애틋한 아비의 심정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이 다윗의 절규를 조용히 마음에 담고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들은 바로 그런 마음으로 여러분을 길러 주셨습니다.
생전에 계신 어버이들 역시 다윗의 그 마음을 가지고 지금도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어버이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오늘의 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이렇게 말할 주제는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송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했고, 죄송한 마음을 품고 말씀을 전합니다.
86세 되신 저의 어머님은 작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해 주셔서 지금은 식사도 잘 하시고, 거동하는데 불편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비록 회복은 하셨지만 전보다는 많이 변하신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전에는 한번 입을 여시면 쉼 없이 말씀을 하셨는데 이제는 별로 말씀이 없으십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귀가 더 어두워지셔서 이제는 전화로는 대화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자주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문안조차 자주 여쭙지 못하는 불효자식입니다.
그런데도 어머님 자신은 모든 것을 자식에게 주었으면서도 더 주지 못해서 안달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지난 번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깨어나시고 나서 제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막내 아들 주려고 찹쌀을 사두었는데.. ’
당신은 아파서 쓰러져 있으면서도 자식에게 찹쌀을 전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더 마음 아파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에 가슴이 찡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압살롬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형편없는 자식이지만 어버이는 끝까지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자식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시고, 가슴아파하는 것이 어버이의 사랑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꿔서라도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어버이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어버이의 놀라운 사랑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압살롬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정말 육신의 부모님조차 사랑으로 섬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여 우리 안에 어버이에 대한 경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 시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버이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내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마시고, 부모님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십시오.
자녀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면 몸에서 냄새가 납니다.
물론 힘이 있으시면 자주 씻으시면 되지만 여의치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자주 찾아뵙고 목욕을 시켜 해드리십시오.
나이가 드시면 힘이 입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은 말벗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형식적인 문안을 여쭙습니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은 용돈보다 선물보다 자기와 함께 말해주기를 원합니다.
손주들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시니까 재미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이 드신 부모님들은 하루 종일 TV만 보십니다.
부모님과 같이 사시면 하루에 일정시간을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잘 들어주시는 것이 효도하는 지름길입니다.
언젠가는 힘이 없으셔서 말하지 못할 때가옵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말하실 수 있을 때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돈을 좀 넉넉히 드리십시오.
밥 해드리고, 옷 사드리고, 다 해드리는데 무슨 돈이 필요하냐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조사한 바에 의하면 어르신들이 제일 받고 싶은 선물이 바로 ‘용돈’입니다.
사람이 수중에 돈이 있으면 안심이 되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것 같습니다.
저희도 매달 정기적으로 용돈을 보내 드리는데요 그것을 받는 기쁨이 크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시골에서 계셨으니까 통장에 입금을 시켜 드렸는데 이제는 형님 댁에 계시니까 형수님께 보내드릴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 찾아 뵀을 때 형수님이 말했습니다.
어머님께서 왜 지난달에는 통장에 돈이 안들어 왔냐며 몇 번이나 챙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돈으로 받지 않으셨냐고 말씀드려도 몇 번이나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가실 때까지는 어머님 통장으로 용돈을 보내드려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얼마나 어버이를 잘 섬겼느냐가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왕대 밭에 왕대 나듯이 어버이에게 효성을 다하는 부모 밑에 효성스런 자녀들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법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계신 부모님을 잘 섬기고, 어르신들을 공경하는 모습을 보여 줄 때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 보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일곱 번째 맞이하는 효도관광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이번에는 우리 어르신들과 함께 9분의 시각 장애우들이 동참합니다.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어버이를 향한 사랑을 애틋하게 표현합니다.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 뿐인가 하노라
우리의 부모님이 평생을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정성을 다하여 섬기시기 바랍니다.
돌아가신 후에 아무리 목놓아 울어도 이미 때는 늦습니다.
평생에 한번 주어지는 부모님 섬김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후회하지 마시고 최선을 다하여 주님 섬기는 마음으로 효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옥중일기 중 노모님을 생각하고 울며 쓴 글 한 부분을 읽어 드리므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내 어머님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 맞아 상할 때 내 어머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실까 춘풍추우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에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에 내 어머니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려 기도합니다.
어머님 보양한다고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더욱 없었습니다. 불효한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내 어머님, 팔순 넘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 손에 부탁하나이다. ”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6:1-3)
부모의 재산을 빼앗고 부모를 해외에 방치한 현대판 고려장을 심층 보도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 딸을 출가시킨 최씨 부부는 한국에서 평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캐나다에 사는 두 딸이 2004년 5월 영주권을 받아 캐나다에서 함께 생활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노년에 사랑하는 딸 곁에 사는 것도 좋다 싶어서 재산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큰딸은 자신이 부모님을 모실 거라며 부모님의 전 재산 8천만원을 받아갔습니다.
그 후 최씨 부부는 캐나다에 있는 큰 딸에 집에 갔지만 연락도 없이 행적을 감췄습니다.
둘째 달은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2006년 이후 부모님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딸들에게 버림받은 최씨 부부는 오갈 데 없는 국제미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현재 낯선 이국 나라 캐나다에서 깡통을 주워 생활비를 마련하고, 한인교회의 도움으로 쪽방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렇게 해외로 이민을 가면서 늙은 부모를 모시겠다는 말로 부모의 재산만 챙기고 연락을 끊어 버리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님들 가운데 외국에 있는 자녀들이 같이 살자고 재산 정리해서 들어오라고 하면 잘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현대판 해외 고려장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자식을 믿어온 노인들에게는 신체적 학대보다 더 큰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최악의 노인 학대다”
이 방송을 본 네티즌들은 ‘보는 내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에게 어쩌면 저럴 수 있는가’, ‘동방 예의지국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다’라며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부모님은 나의 존재의 근원입니다.
오늘의 나가 있기까지 최선을 다해서 수고의 땀을 흘리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은 못할망정 노년에 마지막 희망까지 빼앗는 파렴치한 자식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물론 이것은 소수의 못된 자식들이 저지르는 불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도가 다를 뿐이지 과연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겸허하게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일 년 365일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며 사는 것이 마땅한 자식의 도리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날을 정해 놓고서라도 부모 공경의 마음을 되새기며, 효도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여러분 가운데는 효도를 하고 싶어도 양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할 수 없는 분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어르신들, 또한 우리 주변에 있는 어르신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다시한번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효성을 다하는 결단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 다윗의 통곡의 눈물입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제일 잘생기고 영리한 아들이 압살롬입니다.
그는 지략이 뛰어나고, 용기 있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마음속에 이기적인 야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절제되지 않는 야망은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갑니다.
그는 아버지의 왕좌를 빼앗으려는 야심을 품고, 4년 동안 몰래 군대를 훈련시킵니다.
아버지 다윗을 향한 민심을 이간질시킵니다.
마침내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예루살렘 성에서 쫓아내고 왕좌에 앉습니다.
후에는 아버지를 죽이고자 합니다.
아버지의 군대와 아들의 군대가 목숨을 걸고 치열한 싸움을 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불행한 싸움이 어디 있습니까
결국 이 싸움에서 압살롬은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에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전쟁은 다윗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승리의 반가운 소식을 들었지만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에 왕의 체면도 생각지 않고 성곽에 올라가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 다윗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부모님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아닐까요
첫째로, 부모님은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자식도 끝까지 사랑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아들 압살롬은 특별한 사랑과 애정을 쏟았던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흥분하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당장 잡아서 목을 치라고 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터로 나가는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 장군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18:5)
이 말을 할 때 함께 있던 모든 백성들이 듣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당치도 않은 말이 아닙니까
전쟁을 일으킨 주범을 너그럽게 대해주라는 다윗의 요구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다윗은 혹시 압살롬에게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문 앞에서 아들에 관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아비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용서하고 압살롬이 무사하기만을 기원합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마음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패역한 짓을 하고, 끊임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지만 택하신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속죄의 제물로 보내십니다.
가장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시면서도 끝까지 침묵하십니다.
마침내 “다 이루었다” 선언하시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시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 사랑은 곧 여호와 하나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사랑치 못하는 자가 어찌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구약에서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출21:15-17)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쉴만한 물가 칼럼에 소개된 것처럼 노모를 돌보지 않아 길가에 방치하는 못된 자식임에도 어머니는 끝까지 감싸줍니다.
경찰서에서 서로 모시지 않겠다고 싸우고 있는 꼴난 자식들 앞에서 노모는 끝까지 자식 걱정스러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오래 산 것이 죄지 애들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자식들은 이래 가라 저래 가라 안 했심더. 아무 일도 없심더. 자 이 보소. 이것도 애들이 넣어준 기라. ”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못된 자식일지라도 끝까지 감싸 안으시고, 사랑하시는 것이 우리 부모님이십니다.
아무런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형편없는 모습까지도 끌어안으시고, 품어 주시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알고, 이런 사랑을 덧입고 살아왔다면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성을 다하는 것은 마땅한 자식의 도리가 아닐까요
둘째로, 부모님의 사랑은 자식의 불행을 자기 탓으로 여기며 괴로워합니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자식이 잘되면 부모님의 마음은 기쁩니다.
반대로 아무리 자식이 못됐어도 불행해지면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사실 엄격하게 따지면 압살롬의 불행은 다윗이 뿌린 씨앗을 거두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남편을 고의로 살인을 합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 다윗이 참회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범죄의 결과에 대한 심판은 면하지 못했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10)
그리고 집안에 재앙이 일어나고, 태어난 아들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다윗은 압살롬은 반역은 바로 자신의 범죄의 결과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음이 분명합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 앞에서 다윗은 결국 자신의 죄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는 심한 자책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번 여호와 하나님 앞에 짓는 범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신성한 가정 속에 불행의 씨앗을 뿌리는 부모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못되면 스스로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식이 잘못해도 자신의 종아리를 치는 것이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부모님은 자식이 잘 되면 그 공로를 자식에게 돌리지만 자식이 잘못되면 그 책임을 부모 자신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셋째로, 부모님의 사랑은 자식을 자신의 생명과 왕관보다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다윗은 관심은 온통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아들과 벌이는 전쟁이지만 한 나라의 왕으로서 승리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관심은 전쟁의 승패에 있지 않습니다.
전쟁터에서 달려온 전령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왕의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았다고 보고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마땅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어떻게 승리했느냐를 묻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던진 첫 질문이 무엇입니까
“압살롬은 잘 있느냐”(32절)
비록 아버지를 왕좌에서 몰아내고, 죽이고자 전쟁을 일으킨 못된 아들이지만 다윗에게 압살롬은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지켜야할 사랑의 대상입니다.
전령으로부터 왕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마음이 심히 아팠습니다.
차마 신하들 앞에서 울 수 없어서 문 위층으로 올라가 통곡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다윗은 차라리 자기가 죽고 압살롬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통곡합니다.
자기 생명보다 아들이 살았더라면 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왕권보다, 나라보다도 압살롬이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자녀를 사랑하는 진정한 부모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미운 짓을 하고, 심지어 아버지를 향해 칼을 겨눈 아들이라도 그 자식의 죽음 앞에서 차라리 자신의 생명을 주어서라도 그 아들의 죽음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바치고자 하는 애틋한 아비의 심정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이 다윗의 절규를 조용히 마음에 담고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들은 바로 그런 마음으로 여러분을 길러 주셨습니다.
생전에 계신 어버이들 역시 다윗의 그 마음을 가지고 지금도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어버이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오늘의 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이렇게 말할 주제는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송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했고, 죄송한 마음을 품고 말씀을 전합니다.
86세 되신 저의 어머님은 작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해 주셔서 지금은 식사도 잘 하시고, 거동하는데 불편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비록 회복은 하셨지만 전보다는 많이 변하신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전에는 한번 입을 여시면 쉼 없이 말씀을 하셨는데 이제는 별로 말씀이 없으십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귀가 더 어두워지셔서 이제는 전화로는 대화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자주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문안조차 자주 여쭙지 못하는 불효자식입니다.
그런데도 어머님 자신은 모든 것을 자식에게 주었으면서도 더 주지 못해서 안달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지난 번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깨어나시고 나서 제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막내 아들 주려고 찹쌀을 사두었는데.. ’
당신은 아파서 쓰러져 있으면서도 자식에게 찹쌀을 전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더 마음 아파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에 가슴이 찡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압살롬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형편없는 자식이지만 어버이는 끝까지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자식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시고, 가슴아파하는 것이 어버이의 사랑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꿔서라도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어버이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어버이의 놀라운 사랑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압살롬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정말 육신의 부모님조차 사랑으로 섬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여 우리 안에 어버이에 대한 경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 시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버이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내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마시고, 부모님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십시오.
자녀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면 몸에서 냄새가 납니다.
물론 힘이 있으시면 자주 씻으시면 되지만 여의치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자주 찾아뵙고 목욕을 시켜 해드리십시오.
나이가 드시면 힘이 입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은 말벗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형식적인 문안을 여쭙습니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은 용돈보다 선물보다 자기와 함께 말해주기를 원합니다.
손주들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시니까 재미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이 드신 부모님들은 하루 종일 TV만 보십니다.
부모님과 같이 사시면 하루에 일정시간을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잘 들어주시는 것이 효도하는 지름길입니다.
언젠가는 힘이 없으셔서 말하지 못할 때가옵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말하실 수 있을 때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돈을 좀 넉넉히 드리십시오.
밥 해드리고, 옷 사드리고, 다 해드리는데 무슨 돈이 필요하냐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조사한 바에 의하면 어르신들이 제일 받고 싶은 선물이 바로 ‘용돈’입니다.
사람이 수중에 돈이 있으면 안심이 되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것 같습니다.
저희도 매달 정기적으로 용돈을 보내 드리는데요 그것을 받는 기쁨이 크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시골에서 계셨으니까 통장에 입금을 시켜 드렸는데 이제는 형님 댁에 계시니까 형수님께 보내드릴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 찾아 뵀을 때 형수님이 말했습니다.
어머님께서 왜 지난달에는 통장에 돈이 안들어 왔냐며 몇 번이나 챙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돈으로 받지 않으셨냐고 말씀드려도 몇 번이나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가실 때까지는 어머님 통장으로 용돈을 보내드려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얼마나 어버이를 잘 섬겼느냐가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왕대 밭에 왕대 나듯이 어버이에게 효성을 다하는 부모 밑에 효성스런 자녀들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법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계신 부모님을 잘 섬기고, 어르신들을 공경하는 모습을 보여 줄 때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 보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일곱 번째 맞이하는 효도관광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이번에는 우리 어르신들과 함께 9분의 시각 장애우들이 동참합니다.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어버이를 향한 사랑을 애틋하게 표현합니다.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 뿐인가 하노라
우리의 부모님이 평생을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정성을 다하여 섬기시기 바랍니다.
돌아가신 후에 아무리 목놓아 울어도 이미 때는 늦습니다.
평생에 한번 주어지는 부모님 섬김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후회하지 마시고 최선을 다하여 주님 섬기는 마음으로 효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옥중일기 중 노모님을 생각하고 울며 쓴 글 한 부분을 읽어 드리므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내 어머님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 맞아 상할 때 내 어머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실까 춘풍추우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에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에 내 어머니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려 기도합니다.
어머님 보양한다고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더욱 없었습니다. 불효한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내 어머님, 팔순 넘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 손에 부탁하나이다. ”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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