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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주님의 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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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조선 정조대왕, 권상연과 윤지충이란 천주교 신자. 예수를 믿고 제사를 폐지하고 조상의 신주를 불살랐다. 이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가서 조정은 미풍양속을 해치고 백성들을 유혹하는 패륜외도라 하여 참수형에 처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신해교난이라 한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인해 이후로 예수교는 불효의 도를 가르치는 서양종교로 매도되기 시작했다. 오늘날도 제사 때문에 예수 못믿겠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러나 제사가 가정의 평화를 주기 보다는 불화의 씨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제사 자체가 형식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정성 마져도 다 빠져 버리고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편리한대로 날자와 장소도 변경하고 제사드린다고 형제간에 모여 다투기도 한다. 그래서 항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유행한 적도 있었다.
2년 전, SBS의 시사고발 프로인 ‘긴급출동 SOS 24'라는 프로에서 부모님의 재산을 정리하게 한 후 필리핀으로 초청해 방치해버린 현대판 고려장에 대한 고발이 있었다. 종종 노부모님을 제주도에 버려 두는 일들이 벌어져 뉴스 거리가 된 적도 있었다. 효의 나라라고 불리던 땅에서 불효의 도를 가르친다고 기독교를 매도하던 이 땅에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 타종교에서도 효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다 중요시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 만큼 효에 대하여 강조하는 종교도 없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효에 대한 교훈은 매우 강력한 것을 보게 된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여호와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신5:16, 너는 너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상급이 보장되어 있는 교훈이다. 그러나 만약 부모를 거역하는 자가 있을 시는 단호하게 징계하였다.
신 21: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신 21: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신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성경은 효자열전이라 할 수 있다.
1)아버지 노아의 허물을 덮어드린 셈과 야벳의 이야기.
창 9:26-27, 셈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아버지 아브라함의 말씀에 순종한 이삭의 이야기(창22)
3)아버지 야곱의 노후를 편히 모신 요셉의 이야기.
4)나오미의 며느리 룻의 이야기.
룻 1:16-17,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5)전쟁터에 나간 다윗의 이야기.
이 사람들을 연구해 보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 자손들도 다 잘 되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효의 가장 이상적인 모본을 보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보여주신 효는 효 중의 효요, 최고의 효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효는 어떤 것인가
요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십자가 상에서 예수께서 보이신 효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끝까지 책임지는 효
불효 중의 불효는 부모보다 앞서 가는 것이다. 그것을 부모의 가슴에 못 박는 일이라 고 한다. 지금 모친 마리아는 십자가 형틀에 못박힌 채 달려 있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다. 못 박힌 아들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못 박힌 아들을 바라보는 마리아 역시 가슴에 못 박히는 듯한 아픔을 안고 있는 것이다.
지난 날, 마리아가 처음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을 때는 그녀의 생애 중에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친족 엘리사벳이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눅1:42)라고 축복하였다. 이 일로 인해 마리아는 성모로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안고 할례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시므온이란 노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마리아에게 예언을 하였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2:35).
그 당시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는 그 자리에서 시므온의 말이 떠 올랐을 것이고 그 예언의 말씀대로 마리아는 칼이 가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 자리에는 유일하게 사도 요한도 함께 있었다. 예수께서 모친 마리아를 내려다 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1)예수님과 마리아와의 관계
N4성경에, “Dear woman!” - 이 말은 예수님과 마리아와의 육친의 관계를 떠나서 모친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었다. 설명을 더 붙인다면 “더 이상 나를 육신의 아들로 생각지 마소서” 란 의미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부름으로 인해 지금 모친이 당하고 있는 정신적 고통을 덜어드려고 했던 것이다.
만약 마리아가 예수님을 정말 자신의 아들로 믿고 주장했다면 마리아는 십자가 밑에서 고통스런 가슴으로 조용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당장 빌라도에게나, 대제사장 가야뱌에게 달려가서 아들을 살려 달라고 통사정했을 것이다. - 내 아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알고 있었다. 마리아의 고통스런 침묵은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무언으로 증명하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다시 확인시킴을 통해 모친 마리아가 당하는 육신적 고통을 덜어드리려 했던 것이다.
2)사도 요한을 지목함
여기서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은 ‘어머니 날 좀 보세요 아들입니다 -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 나를 대신하여 어머니를 부양할 자가 곁에 서 있는 요한이라는 뜻이다. 육신의 아들로 더 이상 모친을 부양해야 할 책임을 감당할 수 없는 입장이기에 그 대역으로 요한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칼이 찌름 같은 고통 중에 있는 마리아에게 최종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부탁은 오늘날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자녀들에게 대하여 어떤 효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해답인 것이다.
효란 - 두 손 두 발, 다 묶여 있고 손과 발이 못에 박히고 허리가 창에 찔려 있는 상태에서라도 실천해야 할 도리라는 뜻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반 보통 가정에서 연로한 부모님에 대한 태도들이 곱지가 않다. 병들었다고 구박, 늙어서 느리다고 구박, 냄새 난다고 구박, ..... 이런 서러운 일이 어디있겠는가
누구 때문에 주름살이 깊어졌고, 누구 때문에 손 마디가 굵어졌으며 허리가 굽었는가 건강할 때 헌신했던 부모님을 병들었다고 구박, 서로 떠 넘기기. 그렇게 하면 훗날 자식들에게 다시 받는다. 돌아가시도록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예수께서 모친 마리아에 대하여 그렇게 하셨다.
2. 영적 가족에 위탁하신 효
예수님에게는 육신의 네 형제와 자매들이 있었다(마13:55-56) -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렇다면 왜 다른 형제들에게 부탁하지 않고 요한에게 부탁하셨는가 요7:5에 보면 그의 형제들은 그 때까지도 불신앙 상태에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혈육보다는 영적인 가족을 더 귀하게 여기셨다.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듯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만약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 밑에, 그 자리에 예수님의 동생들이 있었다면 그들에게 모친을 부탁하셨을 것이다. 요한이 없었고 베드로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베드로에게 모친을 부탁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죽음을 두려워해서 숨었다. 끝까지 십자가 곁에서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본 요한에게 부탁하셨다. 믿음이 있는 영적 가족에게 위탁하셨다.
훗날 회개한 다른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는 일에 드렸고 순교하였다. 물론 요한도 그 선교 사명을 감당했지만 제자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제자가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그 때부터 11년을 더 살다가 59세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효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모친 마리아에게 남겨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대신하여 믿음 있는 요한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 빈 자리를 요한으로 채우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네 어머니라. ”
그 후로 사도 요한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자신의 어머니처럼 마리아를 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효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십자가 상의 효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끝까지 책임지는 효이며 영적인 효인 것이다.
3. 효,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1)노인 시기에 나타나는 신체적, 생리적, 정신적 변화를 이해하여야 한다.
정태기 박사의 저서 “위기목회상담”이란 책에서 노년기에 나타나는 위기 5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신체적인 변화, 자기역할 상실, 관계상실, 존엄성 상실, 소외와 고독이다.
예)카나다의 시내버스 기사 - 80도 넘어 보이는 노인에 대한 친절.
2)마음을 편케 해드려야 한다.
96년도에 학생들과 함께 가나안농군학교에 입소해서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김장로님의 효에 관한 강의를 들었는데 기억나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인사를 잘 하자, 대화를 해 드리자. 대답을 잘 하자.
예)아버님에게 꼭 인사,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 60이 넘은 아들에게 차조심하라.
보고하는데 2시간.
부모님은 우리의 존재실체의 근거가 되신다. 자식들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은 무조건 사랑, 눈물의 사랑, 아픔의 사랑, 먼저 사랑, 한 몸 사랑, 끝까지 사랑, 언제나 사랑이다.
3)용돈을 드리라.
예)어느 신실한 가정 - 봉급을 받은 날, 가족이 모인 가운데서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헌금을 떼고, 부모님 용돈을 떼고, 자녀들 용돈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마음을 편케 해드리는 것도 해야 하고, 인사 잘하는 것도 해야 하면서 동시에 부모님께 용돈도 잘 드려야 한다. 그러나 자녀들에게는 후하지만 부모님에게 매우 인색할 때가 많다. 작은 것이라도 자주 때를 따라서 양말도 사드리고, 세타도 사드리고, 쓸 것을 사드려야 한다.
4)끝까지 보양해 드려야 한다
예)2주전에, 세종병원에서 연노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찾은 모 집사님을 만났다. 너무 보기 좋아서 마음으로 축복했다.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불효자 - 가인, 함, 롯의 두 딸, 에서, 삼손, 홉니와 비느하스, 압논, 압살롬등...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잘 된 사람 하나도 없다. 성경의 증거다.
가나안농군학교 김범일 장로님 - 불효자와는 사귀지도 말라고 했다. 반대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잘못된 사람 하나도 없다고 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다.
이조 선조때 송강 정철의 시
어버이 살아 계시는 동안 정성껏 효도하여라
일단 돌아가신 후에 잘 받들지 못한 것을 애닮게 뉘우쳐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평생에 다시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예수 믿는 가정, 확실히 달라야 한다. 효를 실천하는 가정이다. 어버이 날만, 하지 말고 평상시 이 중심을 가지고 효를 실천하는 복된 가정들 다 되길 축원한다. 그리고 부모님이 안계신 분들은 교회 안이나, 주변 이웃의 어른들을 부모님 모시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섬겨드리기 바란다.
사도 바울의 교훈,
엡 6:1-3,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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