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자녀를 어떻게 키울까?
본문
어느 집사님의 가정에 심방 가서 “아이를 키우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성도님의 대답은 ‘아이 키우는 것’이라 대답 했습니다. ‘아이를 잘 키우고 계시는데요’라고 했을 때 집사님의 대답은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는 것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야 젖 주고 밥 주면 큽니다.
문제는 올바르게 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고 싶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 우리사회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의 말씀 예레미야 애가2장의 말씀에 보면 어른들의 불신앙 때문에 어린이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 /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혼미하여 그 어미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뇨 하도다 / 처녀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꼬 처녀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꼬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칠소냐”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길거리에서 방황하며 거리를 헤매다가 결국 어미의 품에서 혼이 죽어갑니다. 그때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뇨”이것을 보면 나라가 망하니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 죽어가는 아이들입니다. 어른들 보다 아이들이 참기 어렵고 그들이 쉽게 죽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다”고 표현했습니다. 아직도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아이들이 세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세계적으로 식량부족 문제로 곡물 가격이 치솟고 있어 모든 백성들이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기근 하면 생각나는 나라가 있습니다. 소말리아입니다. 소말리아에서 직접 겪은 이야기를 한 기자가 기사와 사진을 실어 아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연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기근이 극심한 때였습니다.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 기자는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배가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으며, 피부는 한 백살이나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기자가 과일 하나 갖고 있어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고 있을 힘이 없었습니다.
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아이가 땅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 이었습니다.
형은 자신의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입 베어서는 그것을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씹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온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현재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아이들은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배만 부르다고 인간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정말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키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가치관이 혼미하여 방황하고 어른들이 저질러 놓은 덫에 걸려 그들의 무너짐, 파괴됨이 심각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예레미야처럼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달에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 모 초등학교에서 지난 달 21일에 집단성폭력이 발생해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낮에 학교 잔디밭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2006년부터 자행되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기사에 난대로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5-6학년 남학생들과 심지어 중학생까지 연루가 되어 있는데 하급생 남녀 학생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해초등학생과 중학생이 11명인데 14세가 넘는 남학생 3명을 성폭력범죄에 적용해서 구속했습니다.
12-13세 3명은 가정법원 소년부로 송치했고, 12세 안된 초등학생 5명은 부모에게 인계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범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만 20세 미만의 아이들의 성폭행 당한자와 성폭행 가해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앞의 학교만이 아닌 다른 학교들도 이런 유사한 사례들이 있다는 말들이 오고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너무 성인의 행동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행하도록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어서 그들에게 꿈과 낭만을 가지고 아름다운 가치관이 형성되어야 할 시기에 이런 부정한 가치관으로 형성되어 올바르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이런 현상이 있다는 것은 어른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손자 손녀들을 어떻게 키우면 될까요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키울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을 오늘 본문 신약의 말씀인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 기적의 사건은 복음서 전체에 기록되어 있는 기사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명시되지 않으면서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도시락의 주인공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아이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요한복음에서만 그 도시락의 주인이 아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이가 도시락을 내어놓은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아이로 키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아이로 키웁시다.
이 아이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못해 열정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따라다닐 정도로 열정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오늘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리더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리더십이 있지만 그 중에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열정’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어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하는 간절한 마음,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도시락을 준비하여서라도 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열정이, 이런 간절함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교회에 가고 싶어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 아침이 되면 먼저 일어나 교회에 가야 한다고 나서는 자녀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시내에 사시는 한 집사님은 주일에 교회에 오셔서 하루 종일 있다가 보면 피곤하기도 하고 있을 곳도 잘 없고 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아이는 교회에 계속 잊고 싶어 하고, 오후 예배 마치고 찬양대 연습을 하지 않고 빨리 가고 싶은데 아이가 먼저 찬양대 연습실 문 앞에 가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아이 때문에 찬양연습을 하고 간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아이로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오면 부모님이 가고자 해도 더 머물고 싶어 하고,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가도록 하는 아이로 키운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통해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아이로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늘 주님을 소망하고 교회를 사모하는 아이로 키워야 합니다. 교육이란 반복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들도 자신들의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관심을 갖게 만드십시오.
그것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갖게 하십시오. 그리고 성도 여러분들이 먼저 그들의 예배당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목적 헌금과 헌물을 드린다면 그것에 우리의 마음이 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어느 작은 마을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집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리 많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헌신할 사람을 계속해서 초청했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마지막 날, 한 작은 소년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목사님은 부흥회 기간동안 예수님을 영접하고 헌신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온 이 소년만은 달랐습니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불꽃이 일어났으며 그 소년은,
“오! 여호와 하나님, 저의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저에게 아프리카를 주십시오” 라고 외쳤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아프리카의 아버지라고 불리운 '리빙스턴'입니다. 작은 한 소년의 눈에 일어났던 불꽃이 흑암의 아프리카 대륙에 새벽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마가복음 4:31-32).
둘째, 인내와 절제가 가능한 아이였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여러 가지 우리가 참아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참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그 욕망을 절제하고 인내한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특히 우리가 보릿고개 시절에 다 겪었던 이야기지만 배고픔을 참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있습니다. “사흘을 굶으면 담을 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할 정도로 참기 어려운 것이 배고픔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분명히 음식을 먹은 사람이 장정만 5천명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유독 도시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아이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도시락을 갖고 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도시락을 갖고 온 것을 보면 다른 많은 사람들도 도시락을 갖고 왔으나 이미 다 먹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인공인 이 아이는 도시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먹고 싶은 마음을 지금까지 참은 것입니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먹을 때 자기도 먹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참았습니다. 바로 이런 아이가 필요합니다. 자기가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인내하고 절제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갖도록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보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잘해줍니다.
하나 뿐인 아들이라고, 하나뿐인 딸이라고 해 달라고 하는 대로 다 해주면 어떻게 될까요 인내심도 절제하는 마음도 키우지 못하면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가 될 것입니다. 인내와 절제가 없이는 온전한 충성과 헌신이 어렵습니다.
셋째, 자신이 아껴놓았던 것을 기꺼이 내어놓을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것을 남을 위해 내어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기 혼자 먹으면 알맞은 도시락을 배고픔을 참으며 아꼈던 것을 한꺼번에 다 내어놓았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모습니까 자신의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신앙이었습니다. 자신의 몫이라도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믿음을 간직한 아이로 키우십시오. 작은 것이지만 자기의 것을 예수님께 내려놓았더니 결국 5천명을 먹이고도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의 도시락을 통해서 어른들이 배고픔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아이로 키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이라고 해서 다 아이가 아닙니다. 어른보다 나은 아이들도 있습니다. 1인분의 도시락이 5천명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배부르게 먹고도 열 두 광주리를 거두었으니 얼마나 푸짐한 잔치였습니까 이 아이는 자기도 실컷 먹었습니다. 혼자 먹었더라면 그것으로 끝나버렸겠지만 자신이 먹지 않고 내어놓았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먹고 즐거워했습니다. 바로 이런 헌신자가 우리 교회와 사회에 많으면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이런 아이로 키우고자 하는 한 성도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지난 월요일 소망부 어른들을 모시고 삼천포 대교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와서 저녁식사까지 드렸습니다. 어른들을 집으로 돌아가신 후에 저는 서재에 들어왔습니다. 매일 저는 누구로부터 전자편지가 와 있는 것을 검색하는데 서재에서 메일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닉네임으로 편지가 한통 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열어보는 순간, 너무 감격적이면서도 충격적인 글이 하나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조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00구역 000 집사입니다. 먼저 귀한설교 감사합니다.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 시키는 곳(교육관)건축이기에 고민하다가 먼저 태아 때부터 납입하고 있는 자녀보험을 해약해서 자녀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먼저 드리기로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자녀를 지금까지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게 해주셔서 감사드리며, 그리고 성장하여 여호와 하나님나라 위해 귀하게 쓰임 받으리라는 믿음으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이들 건강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 건축헌금에 대한 사연을 이야기 해주면 그들도 부모의 마음을 이해 해 주고 신앙이 더 성숙되리라 생각됩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가슴이 조여 왔습니다. 마치 아이의 도시락처럼 느껴지는 너무도 귀한 일이었습니다. 자녀교육을 위한 보험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쓴 집사님의 내려놓음이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천명이 먹고 남았던 사건처럼 되어 지기를 저는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글을 읽고 기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두 주간 전에는 또 다른 헌금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 남편을 통한 보험금이 조금 나왔는데 그것이 결혼 후에 첫 번째로 받아본 남편이름의 월급봉투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시부모님과 의논해서 건축헌금을 드린다고 가져왔을 때 그 헌금을 받는 이 목사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너무 감동이 되면서도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정말 여호와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이 목사를 감동시키는 분들이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이런 감동을 주시는 분들의 면면을 보면 초신자이거나 정말 넉넉지 않는 가운데 그런 믿음의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그러면 안 되지만 한 번도 제가 기대했던 분들을 통해서 감동과 감격을 주시지 않고, 전혀 의외의 성도들을 통하여 감격과 충격을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속과 겉이 다름을 알 수 있고, 믿음이란 겉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의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더 큰 감동이었고,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면서도 교육관건축을 위한 전교인 헌신예배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녀들을 이런 아이로 키우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아이로 키우고, 자기가 취하고 싶은 마음을 인내와 절제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아이, 그렇게 아꼈던 것을 남을 위해 내어놓을 줄 아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런 아이들의 헌신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모습을 보고서 우리 어른들은 더욱 분발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될 줄 믿습니다. 도종환 선생의《다시 피는 꽃》이라는 싯귀를 소개하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걸 버릴 줄 알아 꽃은 다시 핀다.
제 몸 가장 빛나는 꽃을 저를 키워준 들판에 거름으로 돌려보낼 줄 알아
꽃은 봄이면 다시 살아난다.
가장 소중한 걸 미련 없이 버릴 줄 알아 나무는 다시 푸른 잎을 낸다.
하늘 아래 가장 자랑스럽던 열매도 저를 있게 한 숲이 원하면 되돌려줄 줄 알아
나무는 봄이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
변치 않고 아름답게 있는 것은 없다.
영원히 가진 것을 누릴 수는 없다.
나무도 풀 한 포기도 사람도 그걸 바라는 건 욕심이다.
바다까지 갔다가 제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제 목숨 다 던져 수천의 알을 낳고
조용히 물 밑으로 돌아가는 연어를 보라.
물고기 한 마리도 영원히 살고자 할 때는 저를 버리고 가는 걸 보라.
신학자이면서 철학자이자 의사, 음악가였던 슈바이처 박사. 그가 스물한 살 되던 어느 봄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나는 이 행복의 대가로 이 세상에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 ” 그는 30세에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나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지난 30년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왔으니 이제 앞으로 30년은 남을 위해 살겠다. ”
주님은 지금도 어린아이가 주님을 만날 소망을 갖고 도시락까지 준비해온 것을 내어놓아 5천명을 배부르게 한 것과 같은 동일한 헌신을 원하고 게십니다. 주님을 더욱 열정적으로 만나기를 힘쓰고 은혜 받는 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헌신의 도구로 쓰임받는 그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갈라디아 6장 7절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문제는 올바르게 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고 싶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 우리사회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의 말씀 예레미야 애가2장의 말씀에 보면 어른들의 불신앙 때문에 어린이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 /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혼미하여 그 어미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뇨 하도다 / 처녀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꼬 처녀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꼬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칠소냐”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길거리에서 방황하며 거리를 헤매다가 결국 어미의 품에서 혼이 죽어갑니다. 그때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뇨”이것을 보면 나라가 망하니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 죽어가는 아이들입니다. 어른들 보다 아이들이 참기 어렵고 그들이 쉽게 죽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다”고 표현했습니다. 아직도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아이들이 세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세계적으로 식량부족 문제로 곡물 가격이 치솟고 있어 모든 백성들이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기근 하면 생각나는 나라가 있습니다. 소말리아입니다. 소말리아에서 직접 겪은 이야기를 한 기자가 기사와 사진을 실어 아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연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기근이 극심한 때였습니다.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 기자는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배가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으며, 피부는 한 백살이나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기자가 과일 하나 갖고 있어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고 있을 힘이 없었습니다.
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아이가 땅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 이었습니다.
형은 자신의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입 베어서는 그것을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씹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온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현재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아이들은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배만 부르다고 인간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정말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키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가치관이 혼미하여 방황하고 어른들이 저질러 놓은 덫에 걸려 그들의 무너짐, 파괴됨이 심각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예레미야처럼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달에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 모 초등학교에서 지난 달 21일에 집단성폭력이 발생해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낮에 학교 잔디밭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2006년부터 자행되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기사에 난대로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5-6학년 남학생들과 심지어 중학생까지 연루가 되어 있는데 하급생 남녀 학생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해초등학생과 중학생이 11명인데 14세가 넘는 남학생 3명을 성폭력범죄에 적용해서 구속했습니다.
12-13세 3명은 가정법원 소년부로 송치했고, 12세 안된 초등학생 5명은 부모에게 인계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범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만 20세 미만의 아이들의 성폭행 당한자와 성폭행 가해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앞의 학교만이 아닌 다른 학교들도 이런 유사한 사례들이 있다는 말들이 오고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너무 성인의 행동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행하도록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어서 그들에게 꿈과 낭만을 가지고 아름다운 가치관이 형성되어야 할 시기에 이런 부정한 가치관으로 형성되어 올바르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이런 현상이 있다는 것은 어른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손자 손녀들을 어떻게 키우면 될까요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키울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을 오늘 본문 신약의 말씀인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 기적의 사건은 복음서 전체에 기록되어 있는 기사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명시되지 않으면서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도시락의 주인공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아이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요한복음에서만 그 도시락의 주인이 아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이가 도시락을 내어놓은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아이로 키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아이로 키웁시다.
이 아이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못해 열정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따라다닐 정도로 열정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오늘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리더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리더십이 있지만 그 중에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열정’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어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하는 간절한 마음,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도시락을 준비하여서라도 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열정이, 이런 간절함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교회에 가고 싶어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 아침이 되면 먼저 일어나 교회에 가야 한다고 나서는 자녀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시내에 사시는 한 집사님은 주일에 교회에 오셔서 하루 종일 있다가 보면 피곤하기도 하고 있을 곳도 잘 없고 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아이는 교회에 계속 잊고 싶어 하고, 오후 예배 마치고 찬양대 연습을 하지 않고 빨리 가고 싶은데 아이가 먼저 찬양대 연습실 문 앞에 가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아이 때문에 찬양연습을 하고 간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아이로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오면 부모님이 가고자 해도 더 머물고 싶어 하고,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가도록 하는 아이로 키운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통해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아이로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늘 주님을 소망하고 교회를 사모하는 아이로 키워야 합니다. 교육이란 반복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들도 자신들의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관심을 갖게 만드십시오.
그것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갖게 하십시오. 그리고 성도 여러분들이 먼저 그들의 예배당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목적 헌금과 헌물을 드린다면 그것에 우리의 마음이 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어느 작은 마을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집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리 많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헌신할 사람을 계속해서 초청했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마지막 날, 한 작은 소년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목사님은 부흥회 기간동안 예수님을 영접하고 헌신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온 이 소년만은 달랐습니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불꽃이 일어났으며 그 소년은,
“오! 여호와 하나님, 저의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저에게 아프리카를 주십시오” 라고 외쳤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아프리카의 아버지라고 불리운 '리빙스턴'입니다. 작은 한 소년의 눈에 일어났던 불꽃이 흑암의 아프리카 대륙에 새벽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마가복음 4:31-32).
둘째, 인내와 절제가 가능한 아이였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여러 가지 우리가 참아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참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그 욕망을 절제하고 인내한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특히 우리가 보릿고개 시절에 다 겪었던 이야기지만 배고픔을 참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있습니다. “사흘을 굶으면 담을 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할 정도로 참기 어려운 것이 배고픔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분명히 음식을 먹은 사람이 장정만 5천명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유독 도시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아이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도시락을 갖고 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도시락을 갖고 온 것을 보면 다른 많은 사람들도 도시락을 갖고 왔으나 이미 다 먹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인공인 이 아이는 도시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먹고 싶은 마음을 지금까지 참은 것입니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먹을 때 자기도 먹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참았습니다. 바로 이런 아이가 필요합니다. 자기가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인내하고 절제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갖도록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보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잘해줍니다.
하나 뿐인 아들이라고, 하나뿐인 딸이라고 해 달라고 하는 대로 다 해주면 어떻게 될까요 인내심도 절제하는 마음도 키우지 못하면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가 될 것입니다. 인내와 절제가 없이는 온전한 충성과 헌신이 어렵습니다.
셋째, 자신이 아껴놓았던 것을 기꺼이 내어놓을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것을 남을 위해 내어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기 혼자 먹으면 알맞은 도시락을 배고픔을 참으며 아꼈던 것을 한꺼번에 다 내어놓았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모습니까 자신의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신앙이었습니다. 자신의 몫이라도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믿음을 간직한 아이로 키우십시오. 작은 것이지만 자기의 것을 예수님께 내려놓았더니 결국 5천명을 먹이고도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의 도시락을 통해서 어른들이 배고픔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아이로 키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이라고 해서 다 아이가 아닙니다. 어른보다 나은 아이들도 있습니다. 1인분의 도시락이 5천명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배부르게 먹고도 열 두 광주리를 거두었으니 얼마나 푸짐한 잔치였습니까 이 아이는 자기도 실컷 먹었습니다. 혼자 먹었더라면 그것으로 끝나버렸겠지만 자신이 먹지 않고 내어놓았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먹고 즐거워했습니다. 바로 이런 헌신자가 우리 교회와 사회에 많으면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이런 아이로 키우고자 하는 한 성도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지난 월요일 소망부 어른들을 모시고 삼천포 대교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와서 저녁식사까지 드렸습니다. 어른들을 집으로 돌아가신 후에 저는 서재에 들어왔습니다. 매일 저는 누구로부터 전자편지가 와 있는 것을 검색하는데 서재에서 메일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닉네임으로 편지가 한통 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열어보는 순간, 너무 감격적이면서도 충격적인 글이 하나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조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00구역 000 집사입니다. 먼저 귀한설교 감사합니다.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 시키는 곳(교육관)건축이기에 고민하다가 먼저 태아 때부터 납입하고 있는 자녀보험을 해약해서 자녀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먼저 드리기로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자녀를 지금까지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게 해주셔서 감사드리며, 그리고 성장하여 여호와 하나님나라 위해 귀하게 쓰임 받으리라는 믿음으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이들 건강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 건축헌금에 대한 사연을 이야기 해주면 그들도 부모의 마음을 이해 해 주고 신앙이 더 성숙되리라 생각됩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가슴이 조여 왔습니다. 마치 아이의 도시락처럼 느껴지는 너무도 귀한 일이었습니다. 자녀교육을 위한 보험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쓴 집사님의 내려놓음이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천명이 먹고 남았던 사건처럼 되어 지기를 저는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글을 읽고 기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두 주간 전에는 또 다른 헌금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 남편을 통한 보험금이 조금 나왔는데 그것이 결혼 후에 첫 번째로 받아본 남편이름의 월급봉투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시부모님과 의논해서 건축헌금을 드린다고 가져왔을 때 그 헌금을 받는 이 목사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너무 감동이 되면서도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정말 여호와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이 목사를 감동시키는 분들이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이런 감동을 주시는 분들의 면면을 보면 초신자이거나 정말 넉넉지 않는 가운데 그런 믿음의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그러면 안 되지만 한 번도 제가 기대했던 분들을 통해서 감동과 감격을 주시지 않고, 전혀 의외의 성도들을 통하여 감격과 충격을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속과 겉이 다름을 알 수 있고, 믿음이란 겉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의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더 큰 감동이었고,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면서도 교육관건축을 위한 전교인 헌신예배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녀들을 이런 아이로 키우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아이로 키우고, 자기가 취하고 싶은 마음을 인내와 절제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아이, 그렇게 아꼈던 것을 남을 위해 내어놓을 줄 아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런 아이들의 헌신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모습을 보고서 우리 어른들은 더욱 분발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될 줄 믿습니다. 도종환 선생의《다시 피는 꽃》이라는 싯귀를 소개하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걸 버릴 줄 알아 꽃은 다시 핀다.
제 몸 가장 빛나는 꽃을 저를 키워준 들판에 거름으로 돌려보낼 줄 알아
꽃은 봄이면 다시 살아난다.
가장 소중한 걸 미련 없이 버릴 줄 알아 나무는 다시 푸른 잎을 낸다.
하늘 아래 가장 자랑스럽던 열매도 저를 있게 한 숲이 원하면 되돌려줄 줄 알아
나무는 봄이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
변치 않고 아름답게 있는 것은 없다.
영원히 가진 것을 누릴 수는 없다.
나무도 풀 한 포기도 사람도 그걸 바라는 건 욕심이다.
바다까지 갔다가 제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제 목숨 다 던져 수천의 알을 낳고
조용히 물 밑으로 돌아가는 연어를 보라.
물고기 한 마리도 영원히 살고자 할 때는 저를 버리고 가는 걸 보라.
신학자이면서 철학자이자 의사, 음악가였던 슈바이처 박사. 그가 스물한 살 되던 어느 봄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나는 이 행복의 대가로 이 세상에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 ” 그는 30세에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나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지난 30년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왔으니 이제 앞으로 30년은 남을 위해 살겠다. ”
주님은 지금도 어린아이가 주님을 만날 소망을 갖고 도시락까지 준비해온 것을 내어놓아 5천명을 배부르게 한 것과 같은 동일한 헌신을 원하고 게십니다. 주님을 더욱 열정적으로 만나기를 힘쓰고 은혜 받는 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헌신의 도구로 쓰임받는 그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갈라디아 6장 7절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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