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부모의 자세
본문
우리는 부모로서 자녀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아니라 신자로서 자녀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갈등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자녀양육에 대해서 누구나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개를 기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개는 훈련을 시키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자식은 훈련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교육에 대한 원리와 원칙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꼭 된다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 된 부모의 자세요, 책임인가 하는 시점에서 일단 여러분들이 준행해야 되는 원칙입니다.
우리가 먼저 큰 틀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사실 본문은 5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5:15-21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 감하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을 피차 복종하라’ 이 주제를 구체화 시킨 것이 5장 22절부터 6장까지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구체적인 목표와 원리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았으니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위해 맨 처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사람같이 지혜 없는 사람같이, 시간을 죽여 가며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십자군운동처럼 목숨을 건 살벌한 싸움이 아니라 일생생활에서 그 뜻이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곧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관계, 상전과 부하관계에서 그 문제가 먼저 실천 되어야 되고 그 자세가 나타나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 원리가 무엇입니까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입니다. 성령 충만의 최고 특권이 무엇이냐 하면 21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라’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삶이란 복종하는 삶인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생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에다 결부시켜 설명합니다. 그것이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상전과 부하직원관계로 말입니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 진술된 것을 구체적으로 기억해야 될 것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라는 말의 뜻입니다.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자식이 싫어하는 것을 시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구의 교육을 둘로 나눌 때 미국식교육과 구라파식 교육으로 나 눌 수 있습니다. 곧 미국식과 영국식입니다. 미국식과 영국식의 큰 차이는 매를 드느냐 안 드느냐의 차이입니다. 미국식은 매를 안 드는 것으로 같고 영국은 매를 드는 것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영국식 교육은 아직도 엄합니다. 미국식 교육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공립학교에 보내지 못 할 만큼 문란해 졌습니다. 권위도 없어지고, 질서도 없어서 폭력이 남무하고무절제한 학교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대학가에서 총기난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국식 교육이 성공하지 못한 것의 실례로 미국이 죤 듀이 교부철학의 원리를 따랐습니다. 존 듀이 교육철학이란 아동에게 자율적으로 맡기는 교육입니다. 하고 싶은 공부만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너 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수학을 기피하게 되었지요. 그 결과 구소련이 인공위성을 먼저 쏘아 올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 교과과정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 원리는 따르고 있습니다. 자율학습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배경은 미국사람들은 거의가 구라파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고 그 당시 구라파의 교육은 냉혹함, 권위, 융통성 없고, 경직되어 있는 모습들이 사회곳곳에 단편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탈출한 사람들이 미국으로 건너오자 종교문제만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에서 자유를 주었던 것입니다.
교육, 연애, 옷 입는 것, 먹는 것 등등 모든 것에 자유롭게 두었습니다. 서양 사람과 우리나라사람이 식사를 할 때 대표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 무엇인가하면 우리는 식사를 할 때 옷을 벗습니다마는 서양 사람들은 식사를 할 때 벗은 옷도 다시 입습니다. 식사가 중요한 예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식사가 노동이니까 옷을 벗고 밭가는 심정으로 아귀다툼을 하면서 먹습니다. 이렇듯 틀에 박힌 것에 대한 반발 때문에 미국식 식사는 자유분방합니다.
그 반발이 지금 교육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둬라, 나둬라’로 되었는데, 이상하게 우리나라가 미국식 교육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 같은 기분입니다. 우리나라도 억압된 전통아래 교육을 받고 켰든 사람들이 반발해서 자녀들에게 ‘괜찮아, 괜찮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육도 없고, 권위도 사라지고, 자기 마음대로 키우는 것입니다. 인사도 똑똑히 하는 아이가 없고 어른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의 엄함에 대한 반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가정에 권위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을 쌍꺼풀 수술한 외과의사가 구속됐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을 꿰매지 않고 눈을 꿰맨 것이 구속의 이유랍니다. 물에 빠진 노대통령을 아무도 건저내지 않았는데 어떤 고등학생이 용감하게 물에 뛰어 들어가서 건져냈습니다. 그래서 노대통령이 소원이 무엇인지 물어보니까 이 학생이 하는 말이 국립묘지에 자기를 묻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대통령이 ‘아니 이제 몇 살 안 먹었는데 무슨 죽음을 생각하느냐’ 했더니 이 학생이 하는 말이 ‘아마 대통령을 건져준 것을 국민들이 알면 나를 죽일 것입니다. ’ 하더랍니다. 우스게 소리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대통령의 권위가 이렇게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가정에서 사라지면 모든 권위는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일차 권위인 아버지가 아이들의 눈에는 최고 권위자인데 그 권위자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권위자로 생각하겠습니까 아무도 권위자로 생각 안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 욕하지 마세요. ‘저 인간 옛날에 어떻게 했는지 아냐 너희들 아니면 진작에 이혼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권위를 짓밟습니다. 이거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선생님 말씀 듣는 줄 아십니까 선생을 아주 우습게 압니다. 이런 아이가 크면 통제할 자가 없습니다. 막무가내입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도 안 믿게 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겠는데, 아버지의 권위가 살아나야 가정의 권위와 나가서는 국가의 권위가 섭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함에 있어서 신자가 지녀야 할 원리 중 첫째가 ‘노엽게 하지 말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자녀가 잘못했거나 자녀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훈계를 하고, 꾸중을 하고, 타이르고 할 때 감정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감정으로 아이를 양육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 원리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자녀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 자식이니까 내가 죽이든 살리든 내 마음이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신자된 부모가 아닙니다. 자식은 여호와 하나님이 맡기신 책임이지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 자식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서 자식이 실수한 문제를 가지고 내가 화를 낼 권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노엽다’는 것은 감정과 감정의 충돌, 의지와 의지와의 충돌로 자녀를 만나는 자세에서 바꾸어 이제 자녀와 만나는 훈련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라고 해서 인격적으로 모독할 권리는 없습니다. ‘이구, 저걸 누가 낳았냐, 저 애 내 애 맞어!’ 물론 매를 사용하십시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감정으로 매를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놀러갔는데 미국에서는 아이를 때리면 경찰이 잡아갑니다. 그래서 때리지 못하고 참다가 참다가 한국공항에 내지자 마자 개 패듯이 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버릇이 없으면 때려야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미움과 감정이 들어가면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을 뭐라고 비아냥거립니까 ‘술 취한 개’라고 하지요. 이 모든 문제가 여기에 걸려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입니다.
술에 취하면 조그만 자극에도 자제력을 잃게 됩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하게 되지요. 평소에는 잘 주어야 만 원짜리였는데 술만 먹으면 십만 원짜리 수표가 왔다 갔다 합니다. 조그만 자극에도 생각하고 자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걷다가 가볍게 부딪치기만 해도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는 수준인데 술만 먹으면 시비꺼리로 발전시키기 일쑤입니다. 이렇듯 자녀의 조그마한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폭발합니다. 자제력을 갖지 못한 행동을 술 취한 것으로, 그리고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으로 성경을 지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딤후 1:7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신자가 가진 사명과 능력과 목표가 얼마나 굉장한 것입니까 우리가 가진 것은 영원한 것이요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그 나라가 이제 곧 올 것이며, 곧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데 우리는 모든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능력은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으로 발휘될 때 진정한 능력을 가진 자라고 합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도 능력으로 하시되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으로 하시란 말입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내가 화가 나면 두들겨 패고, 내가 기쁘면 무엇을 사주고 하는 대상으로 대한다면 아직도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 중에 또 한 가지는 자녀를 양육하는데 여러분의 기분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기분이 좋으면 용서가 되고, 조금 잘 못한 것도 기분이 안 좋으면 심하게 야단치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밖에서나 부부관계에서나 어떤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 상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야단을 치면 그 부모의 상한 마음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흘러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부관계가 나쁘면 아이들이 그 사이에서 불안해하고 눈치를 보고 심리적인 정신질환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른들이 가지는 불안감과 아픈 마음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흘러 보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의 아픔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요즘은 더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무조건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고생하면서 성장했다고 해서 그 보상심리로 아이들을 관대한 과잉보호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래서 무절제하게 키우고 있습니다. 이게 아이들에게 독을 조금씩 먹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부모가 모든 일을 대신해 주니까 아이들이 바보가 되어 가는데 여러 가지 현상 중에 특히 책임감이 사라집니다.
학생으로서의 책임, 자녀로서의 책임 이런 것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결국 어른이 되었을 때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요즘 얼마나 이혼율이 급상승합니까 무절제로 인해서 가정을 지키는 능력이 없어서 결국 책임감이 없어서 나타나는 심각한 현상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훈련을 시키셔야 합니다. 책임을 부모가 맡으면 안 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잘 못한 것 있으면 매를 대십시오. 자녀는 여러분들의 소유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조심하셔야 됩니다. 인생을 아이들에게 다 빼앗기고 자기의 시간이나 자기의 삶이 없습니다. 요즘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아이들을 명문대학에 보내려면, 첫째, 어머니의 정보력이 있어야하고, 둘째, 아이들의 체력이 강해야하고, 셋째, 할아버지를 잘 만나야 된다고 합니다.
첫째와 둘째는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셋째가 이해가 잘 안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제 아버지만 돈 잘 벌어서는 뒷감당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생을 아이에게 걸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람직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예를 들어 우산을 갖고 갔는데 안가지고 왔습니다. 수련회가 끝나면 신발, 볼펜, 수건, 우산 들이 한 바구니가 나온답니다. 우산을 가지고 오면 ‘에이 그런 것 왜 가지고 왔니 귀찮게 버리고 오지’ 이런 식입니다. 안 챙겨 와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챙기지 않는 것 아닙니까 지금 절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가장 심각한 것은 자녀가 돈의 위력부터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품을 입지 않은 아이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평수 적은 아파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돈의 위력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를 상상 한 번 해 보십시오.
그 다음에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합리적’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자녀들에게 설명할 기회를 갖고 또한 자녀들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잘못했다고 하셔야 됩니다. 하기야 요즘은 너무 부모가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잘못했다고 만 해가지고 툭하면 아이들은 자기의 잘못을 부모에게 뒤집어씌우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자녀 앞에 주정을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셔야합니다. 자녀는 여러분의 분노와 억울함을 푸는 대상이 아님을 기억해야 됩니다.
자녀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감시자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어떻게 커가는 가를 보면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가 그대로 들어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무엇을 하찮게 여기는가 보십시오. 부모가 하는 꾸중이나 가르침, 또한 그 권위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며 무엇을 싫어하시는가’를 기준으로 해서 양육하셔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 해야 되는 커다란 합리성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의 근거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가 그것입니다. 주의 교양이란 말은 ‘영양을 공급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또 훈계해야 됩니다. 여기서 영양을 공급하라는 것은 어느 것이 영양이 있는가에 초점이 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급하라’에 초점을 맞추어야합니다
그 영양은 주의 영양입니다. 그 주의 영양을 공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영양은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아이들을 양육하면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아이를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양육을 어떤 자세로 해야 되는가가 5장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하기 위해 피 흘리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경멸을 당하시고, 수치를 참으시고, 교회를 보양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할 때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향해 기도하시고, 인내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 자녀를 주의 자녀로 양육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일에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셔야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는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결국 인내의 싸움이라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죽으신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한두 번 매를 들기도 하고 말로 타일러 보기도 하지만 자녀들도 다 악하게 태어나고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게으르고 악하고 교활한 것 아닙니까 그들의 성질을 고치고 그들의 마음에 의를 심어주고 경건을 만들어 내는 데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입니다.
이 싸움에 우리가 지치고 한숨만 나오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훈계는 일종의 타이름입니다. 용기와 권면을 주는 것 위로와 격려하는 것이 포함되며, 꾸중을 하고 책망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 말씀은 바로 가치관에 대한 기준입니다. 그래서 교양이나 훈계가 어떤 단어로 제한되고 있는가 하면 주님의 교양, 주님의 훈계로 제한됩니다. 세상사는 기준이 아니고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 주께서 가치를 인정하는 것,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자녀를 꾸짖고 격려하고 권면하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끈질기게 실현해야 되고 열심과 정열을 가져야 되고 인내해야 되고 그리고 부단히 설득해야 되는 것이 있다면‘주님을 아는 일’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우리 성령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는 부지런히 가르쳐야 됩니다. 구약에서도 이일은 가장 큰 부모의 책임이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교육하는 최고의 길이 세상에는 없다고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자녀라고 믿으신다면 여호와 하나님 품에서 자라나도록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며 그를 말씀으로 양육시키는 것이 최고의 교육법이라고 확신합니다. 변화는 말씀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진리의 깨달음은 말씀을 통해서 발견됩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삶이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가 일평생 아이들을 뒷바라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을 질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일평생 아이들과 함께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법대로 살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자녀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기도하시고 염려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께 자녀를 맡기시길 축복합니다.
개는 훈련을 시키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자식은 훈련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교육에 대한 원리와 원칙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꼭 된다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 된 부모의 자세요, 책임인가 하는 시점에서 일단 여러분들이 준행해야 되는 원칙입니다.
우리가 먼저 큰 틀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사실 본문은 5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5:15-21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 감하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을 피차 복종하라’ 이 주제를 구체화 시킨 것이 5장 22절부터 6장까지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구체적인 목표와 원리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았으니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위해 맨 처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사람같이 지혜 없는 사람같이, 시간을 죽여 가며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십자군운동처럼 목숨을 건 살벌한 싸움이 아니라 일생생활에서 그 뜻이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곧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관계, 상전과 부하관계에서 그 문제가 먼저 실천 되어야 되고 그 자세가 나타나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 원리가 무엇입니까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입니다. 성령 충만의 최고 특권이 무엇이냐 하면 21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라’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삶이란 복종하는 삶인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생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에다 결부시켜 설명합니다. 그것이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상전과 부하직원관계로 말입니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 진술된 것을 구체적으로 기억해야 될 것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라는 말의 뜻입니다.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자식이 싫어하는 것을 시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구의 교육을 둘로 나눌 때 미국식교육과 구라파식 교육으로 나 눌 수 있습니다. 곧 미국식과 영국식입니다. 미국식과 영국식의 큰 차이는 매를 드느냐 안 드느냐의 차이입니다. 미국식은 매를 안 드는 것으로 같고 영국은 매를 드는 것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영국식 교육은 아직도 엄합니다. 미국식 교육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공립학교에 보내지 못 할 만큼 문란해 졌습니다. 권위도 없어지고, 질서도 없어서 폭력이 남무하고무절제한 학교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대학가에서 총기난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국식 교육이 성공하지 못한 것의 실례로 미국이 죤 듀이 교부철학의 원리를 따랐습니다. 존 듀이 교육철학이란 아동에게 자율적으로 맡기는 교육입니다. 하고 싶은 공부만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너 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수학을 기피하게 되었지요. 그 결과 구소련이 인공위성을 먼저 쏘아 올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 교과과정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 원리는 따르고 있습니다. 자율학습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배경은 미국사람들은 거의가 구라파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고 그 당시 구라파의 교육은 냉혹함, 권위, 융통성 없고, 경직되어 있는 모습들이 사회곳곳에 단편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탈출한 사람들이 미국으로 건너오자 종교문제만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에서 자유를 주었던 것입니다.
교육, 연애, 옷 입는 것, 먹는 것 등등 모든 것에 자유롭게 두었습니다. 서양 사람과 우리나라사람이 식사를 할 때 대표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 무엇인가하면 우리는 식사를 할 때 옷을 벗습니다마는 서양 사람들은 식사를 할 때 벗은 옷도 다시 입습니다. 식사가 중요한 예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식사가 노동이니까 옷을 벗고 밭가는 심정으로 아귀다툼을 하면서 먹습니다. 이렇듯 틀에 박힌 것에 대한 반발 때문에 미국식 식사는 자유분방합니다.
그 반발이 지금 교육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둬라, 나둬라’로 되었는데, 이상하게 우리나라가 미국식 교육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 같은 기분입니다. 우리나라도 억압된 전통아래 교육을 받고 켰든 사람들이 반발해서 자녀들에게 ‘괜찮아, 괜찮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육도 없고, 권위도 사라지고, 자기 마음대로 키우는 것입니다. 인사도 똑똑히 하는 아이가 없고 어른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의 엄함에 대한 반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가정에 권위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을 쌍꺼풀 수술한 외과의사가 구속됐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을 꿰매지 않고 눈을 꿰맨 것이 구속의 이유랍니다. 물에 빠진 노대통령을 아무도 건저내지 않았는데 어떤 고등학생이 용감하게 물에 뛰어 들어가서 건져냈습니다. 그래서 노대통령이 소원이 무엇인지 물어보니까 이 학생이 하는 말이 국립묘지에 자기를 묻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대통령이 ‘아니 이제 몇 살 안 먹었는데 무슨 죽음을 생각하느냐’ 했더니 이 학생이 하는 말이 ‘아마 대통령을 건져준 것을 국민들이 알면 나를 죽일 것입니다. ’ 하더랍니다. 우스게 소리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대통령의 권위가 이렇게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가정에서 사라지면 모든 권위는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일차 권위인 아버지가 아이들의 눈에는 최고 권위자인데 그 권위자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권위자로 생각하겠습니까 아무도 권위자로 생각 안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 욕하지 마세요. ‘저 인간 옛날에 어떻게 했는지 아냐 너희들 아니면 진작에 이혼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권위를 짓밟습니다. 이거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선생님 말씀 듣는 줄 아십니까 선생을 아주 우습게 압니다. 이런 아이가 크면 통제할 자가 없습니다. 막무가내입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도 안 믿게 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겠는데, 아버지의 권위가 살아나야 가정의 권위와 나가서는 국가의 권위가 섭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함에 있어서 신자가 지녀야 할 원리 중 첫째가 ‘노엽게 하지 말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자녀가 잘못했거나 자녀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훈계를 하고, 꾸중을 하고, 타이르고 할 때 감정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감정으로 아이를 양육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 원리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자녀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 자식이니까 내가 죽이든 살리든 내 마음이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신자된 부모가 아닙니다. 자식은 여호와 하나님이 맡기신 책임이지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 자식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서 자식이 실수한 문제를 가지고 내가 화를 낼 권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노엽다’는 것은 감정과 감정의 충돌, 의지와 의지와의 충돌로 자녀를 만나는 자세에서 바꾸어 이제 자녀와 만나는 훈련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라고 해서 인격적으로 모독할 권리는 없습니다. ‘이구, 저걸 누가 낳았냐, 저 애 내 애 맞어!’ 물론 매를 사용하십시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감정으로 매를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놀러갔는데 미국에서는 아이를 때리면 경찰이 잡아갑니다. 그래서 때리지 못하고 참다가 참다가 한국공항에 내지자 마자 개 패듯이 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버릇이 없으면 때려야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미움과 감정이 들어가면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을 뭐라고 비아냥거립니까 ‘술 취한 개’라고 하지요. 이 모든 문제가 여기에 걸려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입니다.
술에 취하면 조그만 자극에도 자제력을 잃게 됩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하게 되지요. 평소에는 잘 주어야 만 원짜리였는데 술만 먹으면 십만 원짜리 수표가 왔다 갔다 합니다. 조그만 자극에도 생각하고 자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걷다가 가볍게 부딪치기만 해도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는 수준인데 술만 먹으면 시비꺼리로 발전시키기 일쑤입니다. 이렇듯 자녀의 조그마한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폭발합니다. 자제력을 갖지 못한 행동을 술 취한 것으로, 그리고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으로 성경을 지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딤후 1:7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신자가 가진 사명과 능력과 목표가 얼마나 굉장한 것입니까 우리가 가진 것은 영원한 것이요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그 나라가 이제 곧 올 것이며, 곧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데 우리는 모든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능력은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으로 발휘될 때 진정한 능력을 가진 자라고 합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도 능력으로 하시되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으로 하시란 말입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내가 화가 나면 두들겨 패고, 내가 기쁘면 무엇을 사주고 하는 대상으로 대한다면 아직도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 중에 또 한 가지는 자녀를 양육하는데 여러분의 기분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기분이 좋으면 용서가 되고, 조금 잘 못한 것도 기분이 안 좋으면 심하게 야단치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밖에서나 부부관계에서나 어떤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 상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야단을 치면 그 부모의 상한 마음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흘러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부관계가 나쁘면 아이들이 그 사이에서 불안해하고 눈치를 보고 심리적인 정신질환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른들이 가지는 불안감과 아픈 마음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흘러 보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의 아픔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요즘은 더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무조건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고생하면서 성장했다고 해서 그 보상심리로 아이들을 관대한 과잉보호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래서 무절제하게 키우고 있습니다. 이게 아이들에게 독을 조금씩 먹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부모가 모든 일을 대신해 주니까 아이들이 바보가 되어 가는데 여러 가지 현상 중에 특히 책임감이 사라집니다.
학생으로서의 책임, 자녀로서의 책임 이런 것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결국 어른이 되었을 때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요즘 얼마나 이혼율이 급상승합니까 무절제로 인해서 가정을 지키는 능력이 없어서 결국 책임감이 없어서 나타나는 심각한 현상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훈련을 시키셔야 합니다. 책임을 부모가 맡으면 안 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잘 못한 것 있으면 매를 대십시오. 자녀는 여러분들의 소유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조심하셔야 됩니다. 인생을 아이들에게 다 빼앗기고 자기의 시간이나 자기의 삶이 없습니다. 요즘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아이들을 명문대학에 보내려면, 첫째, 어머니의 정보력이 있어야하고, 둘째, 아이들의 체력이 강해야하고, 셋째, 할아버지를 잘 만나야 된다고 합니다.
첫째와 둘째는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셋째가 이해가 잘 안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제 아버지만 돈 잘 벌어서는 뒷감당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생을 아이에게 걸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람직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예를 들어 우산을 갖고 갔는데 안가지고 왔습니다. 수련회가 끝나면 신발, 볼펜, 수건, 우산 들이 한 바구니가 나온답니다. 우산을 가지고 오면 ‘에이 그런 것 왜 가지고 왔니 귀찮게 버리고 오지’ 이런 식입니다. 안 챙겨 와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챙기지 않는 것 아닙니까 지금 절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가장 심각한 것은 자녀가 돈의 위력부터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품을 입지 않은 아이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평수 적은 아파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돈의 위력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를 상상 한 번 해 보십시오.
그 다음에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합리적’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자녀들에게 설명할 기회를 갖고 또한 자녀들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잘못했다고 하셔야 됩니다. 하기야 요즘은 너무 부모가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잘못했다고 만 해가지고 툭하면 아이들은 자기의 잘못을 부모에게 뒤집어씌우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자녀 앞에 주정을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셔야합니다. 자녀는 여러분의 분노와 억울함을 푸는 대상이 아님을 기억해야 됩니다.
자녀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감시자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어떻게 커가는 가를 보면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가 그대로 들어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무엇을 하찮게 여기는가 보십시오. 부모가 하는 꾸중이나 가르침, 또한 그 권위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며 무엇을 싫어하시는가’를 기준으로 해서 양육하셔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 해야 되는 커다란 합리성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의 근거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가 그것입니다. 주의 교양이란 말은 ‘영양을 공급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또 훈계해야 됩니다. 여기서 영양을 공급하라는 것은 어느 것이 영양이 있는가에 초점이 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급하라’에 초점을 맞추어야합니다
그 영양은 주의 영양입니다. 그 주의 영양을 공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영양은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아이들을 양육하면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아이를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양육을 어떤 자세로 해야 되는가가 5장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하기 위해 피 흘리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경멸을 당하시고, 수치를 참으시고, 교회를 보양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할 때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향해 기도하시고, 인내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 자녀를 주의 자녀로 양육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일에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셔야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는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결국 인내의 싸움이라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죽으신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한두 번 매를 들기도 하고 말로 타일러 보기도 하지만 자녀들도 다 악하게 태어나고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게으르고 악하고 교활한 것 아닙니까 그들의 성질을 고치고 그들의 마음에 의를 심어주고 경건을 만들어 내는 데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입니다.
이 싸움에 우리가 지치고 한숨만 나오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훈계는 일종의 타이름입니다. 용기와 권면을 주는 것 위로와 격려하는 것이 포함되며, 꾸중을 하고 책망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 말씀은 바로 가치관에 대한 기준입니다. 그래서 교양이나 훈계가 어떤 단어로 제한되고 있는가 하면 주님의 교양, 주님의 훈계로 제한됩니다. 세상사는 기준이 아니고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 주께서 가치를 인정하는 것,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자녀를 꾸짖고 격려하고 권면하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끈질기게 실현해야 되고 열심과 정열을 가져야 되고 인내해야 되고 그리고 부단히 설득해야 되는 것이 있다면‘주님을 아는 일’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우리 성령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는 부지런히 가르쳐야 됩니다. 구약에서도 이일은 가장 큰 부모의 책임이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교육하는 최고의 길이 세상에는 없다고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자녀라고 믿으신다면 여호와 하나님 품에서 자라나도록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며 그를 말씀으로 양육시키는 것이 최고의 교육법이라고 확신합니다. 변화는 말씀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진리의 깨달음은 말씀을 통해서 발견됩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삶이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가 일평생 아이들을 뒷바라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을 질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일평생 아이들과 함께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법대로 살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자녀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기도하시고 염려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께 자녀를 맡기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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