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사탄 마귀의 제의
본문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모든 가정에 어린이 없는 가정이 없을 만큼 이 사회는 어린이 중심의 사회가 되어 있는데 어린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모습이 그들에게 모범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도 자녀들에게 너희가 할 말이 있도록 신앙에 있어서 본을 보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희 자녀들이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고 묻거든 대답할 말을 준비하라” 그 말의 의미는 어떤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말을 준비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뻐하고 원하신다고 하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하는 숫자가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현상으로만 돌리기에는 우리 부모들의 책임이 너무나 크지요. 본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도둑도 자기 자식은 잘 되라고 말하지만 자식이 커서 결국은 그것 밖에는 배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런 이율배반적 삶을 살지 말고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어 자녀들이 존경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아름다운 성도의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구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에 보면 주님께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그렇지 않은 처녀가 구별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는 이런 말씀이 없었는데 네 번째 재앙에서는 좀 더 특별하신 당신의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바로 앞에 서라”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목사님, 예수 믿으려면 부지런해야 되겠더라구요” ”물론이지요. 예수 잘 믿는 사람 치고 게으른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간에도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은 이불 속에 있을 시간입니다. 보통 11-12시 되어야 세상 사람들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벌써 1부 예배 시간에 교회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고 가르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2부 예배 나오시는 분들은 한결 덜하지만 1부에 순서가 있는 분들은 얼마나 아침이 분주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으면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을 좀 덜 자야 하고, 좀 더 부지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때로는 불편할지 모릅니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11-12시까지 낮잠을 즐길 수가 있는데 우리는 새벽부터 분주해야 하니까 ”이게 뭐람” 때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월을 아끼지 못한 사람과 시간시간의 촌음을 아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위해서 땀흘리고 수고하면서 시간을 쪼개어서 충성한 사람 중에 누가 영광된 자리에 설 수 있겠느냐고 하는 거예요. 오늘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계속해서 아침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나아가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왕 여호와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명의 자리에 미리 미리 가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서 전할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내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면 재앙이 계속 되리라고 하는 말씀을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피가 되는 재앙, 그리고 하숫가에서 개구리떼들이 올라오는 재앙, 띠끌이 변해서 이가 되는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파리떼들이 왕궁과 신하와 백성들 집에 우글거리는 재앙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이 파리는 사실상 ’능애’라고 하는 소 잔등에 앉아 소가죽을 뚫고 피를 빨아먹는 무서운 것입니다. 이 능애떼가 온 하늘을 덮을 정도라고 하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 모릅니다. 4번의 재앙 중에서 두 번째가 바로가 항복을 하고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여호와 하나님께 희생을 드려라” 바로가 제안합니다. ”만약에 이 모든 파리떼들을 제거해 주면 너희들이 이 백성을 데리고 가도 좋은데 멀리 가지 말고 애굽 땅에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에게는 여호와가 어떤 분임을 알게 하시려고 구별하신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성별된 백성들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기 위함임줄 믿습니다. 구별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페두트’인데 ’건져낸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으로 건져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별입니다. 그래서 고센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파리떼가 가지 않는 그것으로 구별의 표를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제안을 합니다. ”제사를 드리되 여기서 드리라. 이 땅에서 드려라” 25절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가 항복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 깊은 흉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배하는 자들에게 편의주의적인 발상을 제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갈 일이 무엇이냐 사흘 길을 걸어서 그 광야의 뜨거운 태양 빛을 쪼이면서, 목말라 하면서, 배고파하면서 호렙산까지 갈 일이 무엇이냐 여기서 대강대강 해버려” 그런 말이지요.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 바로의 제안이 상당 부분 먹혀들어가고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을 가졌던 유럽, 그리고 미국에서 신앙이 뜨거웠을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가 낮이든 밤이든 가득가득 찼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원시사회가 산업사회가 되고, 산업사회가 이제 정보화 사회가 되었습니다. 점점 인간들이 육체의 안일함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면서 예배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수요예배도 주일 저녁예배도 없어집니다. 처음부터 없애기가 미안하니까 오후 2-3시에 잠깐 드립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도 없어지는 거예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유럽 교회가 그랬고, 미국 교회가 그랬어요. 왜 우리는 이상하게도 유럽이나 미국의 안좋은 것만 그대로 받아들입니까 머리에다 파란 물, 노란 물들이는 펑크족들이 영국 런던 웨스터엔드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전 유럽을 휩쓸고 미국으로 해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언제나 우리는 쓰레기 같이 버려야 할 것들은 왜 그렇게 잘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어요. 신앙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일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별해야 하는데 그저 우리는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있어요. 바로의 제안의 상당부분이 우리 한국 교회에도 먹혀들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먼데 뭐하러 가느냐 편하게 드려”
그러나 오늘 이 바로의 제안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너희가 사흘 길을 갈 것이 아니라 여기서 예배를 드려라”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합니다. ”이 땅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배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우리의 편의를 위한 것이라면 아예 예배가 없는 것이 더 편할 것입니다. 예배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드리는 헌신의 행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지 아니하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세월이 흐를수록 자꾸만 형식적이 됩니다. 편의주의적으로 됩니다. 아직까지 신앙생활의 원형이 남아있는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곳을 보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인해서 수십년 동안이나 성경, 찬송을 볼 수 없었고, 공식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다가 최근에 개방 정책으로 인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3시간씩 주일 예배를 드려도 짜증을 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철 뜨거운 나라인 베트남에서 선풍기 한 대도 없이 그들은 2-3시간을 정장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참 예배자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 인기 있는 음식점이 있지요. 뭡니까 이북에서 귀순해 오신 분들이 하는 음식점들, 전철우 냉면집입니까 냉면도 ’랭면’이라고 썼는데 굉장히 번성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집들을 찾아갑니까 원래 냉면이 평양과 함흥에서 시작된 곳이니까 그곳의 변질되지 않은 냉면 맛을 보려고 찾아가는 것이지요. 평양 모란각의 그 냉면, 때묻지 않은 그 본래의 맛, 그것을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의 지금의 냉면은 평양이나 함흥에 사신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의 입맛에 맞게 변질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북 교류 당시에 북한에 다녀온 수많은 분들이 제일 먼저 평양에 가서 먹은 음식이 냉면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변질되지 않아야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변질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급변하는 사회의 현상 속에 교회의 여러 제도들이 변질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누구 중심으로요. 인간 편의주의 중심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는 마루 바닥에서 드릴 때가 제일 좋았어요. 무릎 꿇고 예배 드릴 때처럼 좋을 수가 없어요. 의자에 앉으니까 자꾸 졸게 되지요. 의자에 앉으니까 자꾸 다리 꼬려고 하지요. 자꾸 딴 생각이 나지요. 우리가 편의적으로 바뀌어지다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참 예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형식적인,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제안하고 있습니까 바로가 제안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제안해 보고 저렇게 제안해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자꾸만 곁길로 가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분은 좋지요. 우리를 위한다니까… ”그렇게 뜨거운 뙤약볕에 갈 일이 뭐가 있어 목말라 하면서 갈 일이 뭐가 있어 여기서 그냥 하면 되지... ” 우리 평안의교회가 끊임없이 예배의 원형을 유지하고, 어떤 세상의 편의주의적인 물결이 강같이 흘러간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보루처럼 버티려고 하다 보면 반발도 많고 힘든 것도 많아요.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에 마지막 진정으로 예배하는 성도의 모습을 유지하고 지켜가는 신앙의 파숫꾼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그 귀한 말씀,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별된 삶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을 스스로 느끼게 하신 그 주님의 의도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너희가 1년에 3번은 반드시 내게 와서 얼굴을 보일지니라” 명령하셨습니다.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유월절과 칠칠절과 장막절에는 반드시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요청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사흘길이 문제가 아니지요. 그래서 모세는 아론과 함께 고센에서 광야를 지나 사흘 길을 열심히 걸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아론의 고집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 속에 끊임없이 다가오는 바로와 같은 제안들, 이것은 바로 사탄 마귀의 흉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멀리 멀리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와에게 그것을 먹으면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좋아진는 그 말을 듣고 보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했어요. 평소에는 순진한 사람이었는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그 사람도 물들어 버려요. 그 사람도 점점 유혹의 눈으로 그것을 보게 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구요,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구요, 전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는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까 앉으면 교회 욕하고, 목사 욕하고, 성도들 비판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 있습니까 여러분도 당연히 그런 부류가 될 거예요. 앉으면 어떻게 전도할지, 어떻게 봉사할 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 있으면 여러분도 그런 사람들과 같은 봉사와 희생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바로 사탄은 그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신 지식인’의 상징적 존재였던 한 변호사가 3당을 오락가락 하면서 이 땅에 젊은 사람들의 새로운 희망을 꺼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한편의 코메디와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결국은 정치가 혈연을 뛰어넘지 못했구나” 정치가 혈연을 뛰어넘지 못한 것은 100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혈연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것을 넘지 못하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네가 지금 아무리 바로가 인간의 편의의 가까이 접근해서 너에게 제안을 하더라도 결코 타협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하는 당신의 그 뜻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구원해 주시면서 마지막으로 그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깊은 속뜻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구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에 보면 주님께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그렇지 않은 처녀가 구별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는 이런 말씀이 없었는데 네 번째 재앙에서는 좀 더 특별하신 당신의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바로 앞에 서라”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목사님, 예수 믿으려면 부지런해야 되겠더라구요” ”물론이지요. 예수 잘 믿는 사람 치고 게으른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간에도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은 이불 속에 있을 시간입니다. 보통 11-12시 되어야 세상 사람들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벌써 1부 예배 시간에 교회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고 가르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2부 예배 나오시는 분들은 한결 덜하지만 1부에 순서가 있는 분들은 얼마나 아침이 분주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으면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을 좀 덜 자야 하고, 좀 더 부지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때로는 불편할지 모릅니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11-12시까지 낮잠을 즐길 수가 있는데 우리는 새벽부터 분주해야 하니까 ”이게 뭐람” 때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월을 아끼지 못한 사람과 시간시간의 촌음을 아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위해서 땀흘리고 수고하면서 시간을 쪼개어서 충성한 사람 중에 누가 영광된 자리에 설 수 있겠느냐고 하는 거예요. 오늘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계속해서 아침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나아가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왕 여호와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명의 자리에 미리 미리 가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서 전할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내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면 재앙이 계속 되리라고 하는 말씀을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피가 되는 재앙, 그리고 하숫가에서 개구리떼들이 올라오는 재앙, 띠끌이 변해서 이가 되는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파리떼들이 왕궁과 신하와 백성들 집에 우글거리는 재앙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이 파리는 사실상 ’능애’라고 하는 소 잔등에 앉아 소가죽을 뚫고 피를 빨아먹는 무서운 것입니다. 이 능애떼가 온 하늘을 덮을 정도라고 하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 모릅니다. 4번의 재앙 중에서 두 번째가 바로가 항복을 하고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여호와 하나님께 희생을 드려라” 바로가 제안합니다. ”만약에 이 모든 파리떼들을 제거해 주면 너희들이 이 백성을 데리고 가도 좋은데 멀리 가지 말고 애굽 땅에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에게는 여호와가 어떤 분임을 알게 하시려고 구별하신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성별된 백성들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기 위함임줄 믿습니다. 구별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페두트’인데 ’건져낸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으로 건져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별입니다. 그래서 고센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파리떼가 가지 않는 그것으로 구별의 표를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제안을 합니다. ”제사를 드리되 여기서 드리라. 이 땅에서 드려라” 25절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가 항복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 깊은 흉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배하는 자들에게 편의주의적인 발상을 제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갈 일이 무엇이냐 사흘 길을 걸어서 그 광야의 뜨거운 태양 빛을 쪼이면서, 목말라 하면서, 배고파하면서 호렙산까지 갈 일이 무엇이냐 여기서 대강대강 해버려” 그런 말이지요.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 바로의 제안이 상당 부분 먹혀들어가고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을 가졌던 유럽, 그리고 미국에서 신앙이 뜨거웠을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가 낮이든 밤이든 가득가득 찼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원시사회가 산업사회가 되고, 산업사회가 이제 정보화 사회가 되었습니다. 점점 인간들이 육체의 안일함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면서 예배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수요예배도 주일 저녁예배도 없어집니다. 처음부터 없애기가 미안하니까 오후 2-3시에 잠깐 드립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도 없어지는 거예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유럽 교회가 그랬고, 미국 교회가 그랬어요. 왜 우리는 이상하게도 유럽이나 미국의 안좋은 것만 그대로 받아들입니까 머리에다 파란 물, 노란 물들이는 펑크족들이 영국 런던 웨스터엔드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전 유럽을 휩쓸고 미국으로 해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언제나 우리는 쓰레기 같이 버려야 할 것들은 왜 그렇게 잘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어요. 신앙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일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별해야 하는데 그저 우리는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있어요. 바로의 제안의 상당부분이 우리 한국 교회에도 먹혀들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먼데 뭐하러 가느냐 편하게 드려”
그러나 오늘 이 바로의 제안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너희가 사흘 길을 갈 것이 아니라 여기서 예배를 드려라”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합니다. ”이 땅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배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우리의 편의를 위한 것이라면 아예 예배가 없는 것이 더 편할 것입니다. 예배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드리는 헌신의 행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지 아니하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세월이 흐를수록 자꾸만 형식적이 됩니다. 편의주의적으로 됩니다. 아직까지 신앙생활의 원형이 남아있는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곳을 보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인해서 수십년 동안이나 성경, 찬송을 볼 수 없었고, 공식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다가 최근에 개방 정책으로 인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3시간씩 주일 예배를 드려도 짜증을 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철 뜨거운 나라인 베트남에서 선풍기 한 대도 없이 그들은 2-3시간을 정장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참 예배자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 인기 있는 음식점이 있지요. 뭡니까 이북에서 귀순해 오신 분들이 하는 음식점들, 전철우 냉면집입니까 냉면도 ’랭면’이라고 썼는데 굉장히 번성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집들을 찾아갑니까 원래 냉면이 평양과 함흥에서 시작된 곳이니까 그곳의 변질되지 않은 냉면 맛을 보려고 찾아가는 것이지요. 평양 모란각의 그 냉면, 때묻지 않은 그 본래의 맛, 그것을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의 지금의 냉면은 평양이나 함흥에 사신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의 입맛에 맞게 변질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북 교류 당시에 북한에 다녀온 수많은 분들이 제일 먼저 평양에 가서 먹은 음식이 냉면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변질되지 않아야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변질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급변하는 사회의 현상 속에 교회의 여러 제도들이 변질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누구 중심으로요. 인간 편의주의 중심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는 마루 바닥에서 드릴 때가 제일 좋았어요. 무릎 꿇고 예배 드릴 때처럼 좋을 수가 없어요. 의자에 앉으니까 자꾸 졸게 되지요. 의자에 앉으니까 자꾸 다리 꼬려고 하지요. 자꾸 딴 생각이 나지요. 우리가 편의적으로 바뀌어지다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참 예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형식적인,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제안하고 있습니까 바로가 제안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제안해 보고 저렇게 제안해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자꾸만 곁길로 가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분은 좋지요. 우리를 위한다니까… ”그렇게 뜨거운 뙤약볕에 갈 일이 뭐가 있어 목말라 하면서 갈 일이 뭐가 있어 여기서 그냥 하면 되지... ” 우리 평안의교회가 끊임없이 예배의 원형을 유지하고, 어떤 세상의 편의주의적인 물결이 강같이 흘러간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보루처럼 버티려고 하다 보면 반발도 많고 힘든 것도 많아요.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에 마지막 진정으로 예배하는 성도의 모습을 유지하고 지켜가는 신앙의 파숫꾼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그 귀한 말씀,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별된 삶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을 스스로 느끼게 하신 그 주님의 의도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너희가 1년에 3번은 반드시 내게 와서 얼굴을 보일지니라” 명령하셨습니다.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유월절과 칠칠절과 장막절에는 반드시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요청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사흘길이 문제가 아니지요. 그래서 모세는 아론과 함께 고센에서 광야를 지나 사흘 길을 열심히 걸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아론의 고집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 속에 끊임없이 다가오는 바로와 같은 제안들, 이것은 바로 사탄 마귀의 흉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멀리 멀리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와에게 그것을 먹으면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좋아진는 그 말을 듣고 보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했어요. 평소에는 순진한 사람이었는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그 사람도 물들어 버려요. 그 사람도 점점 유혹의 눈으로 그것을 보게 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구요,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구요, 전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는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까 앉으면 교회 욕하고, 목사 욕하고, 성도들 비판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 있습니까 여러분도 당연히 그런 부류가 될 거예요. 앉으면 어떻게 전도할지, 어떻게 봉사할 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 있으면 여러분도 그런 사람들과 같은 봉사와 희생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바로 사탄은 그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신 지식인’의 상징적 존재였던 한 변호사가 3당을 오락가락 하면서 이 땅에 젊은 사람들의 새로운 희망을 꺼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한편의 코메디와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결국은 정치가 혈연을 뛰어넘지 못했구나” 정치가 혈연을 뛰어넘지 못한 것은 100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혈연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것을 넘지 못하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네가 지금 아무리 바로가 인간의 편의의 가까이 접근해서 너에게 제안을 하더라도 결코 타협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하는 당신의 그 뜻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구원해 주시면서 마지막으로 그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깊은 속뜻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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