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자녀를 키우는 힘
본문
오늘은 어린이주일이어서,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끝까지 드릴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더구나 아이들이 여러 순서를 맡아서 하게 되어 기쁩니다.
오늘은 아이들을 바르게 세우는 일에 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싱거운 이야기입니다만, 하루는 오징어가 마음을 굳게 먹고 멸치에게 청혼을 하였습니다. 멸치는 오징어의 청혼을 받아들였을까요 물론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이유는, 작아도 뼈대 있는 '치'자 집안에서 뼈대도 없는 오징어와는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웃고 지나갈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뼈대 있는 가문을 자랑하는가를 빗댄 이야기입니다.
제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 이야기를 이렇게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어린이 주일에 어린이를 유기하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합니다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버려진 모세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출애굽기 이야기의 골자는 무엇입니까 이집트의 노예들이 도망쳐 나와 이스라엘이라는 가문과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건국 신화는 대개 신비로운 사건이나, 영웅 이야기로 윤색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노예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고 뼈대 있는 집안으로 만든 모세를 신비적인 인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살이 하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하늘을 찌릅니다. 그들을 억압할수록 아우성은 더욱 커져가고 있습니다. 노예들의 아우성이 커져가자 이집트의 파라오는 아예 그 씨를 말려버리려고 합니다. 사내아이들이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모세 이야기는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그 명령이 어떤 아픔으로 나타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우리 어린이들, 모세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주었습니까 파라오의 딸이 지어주었습니다. 모세의 친 부모가 지어준 아이의 이름은 무엇인지 아시는 분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이름도 짓지 못한 채 그를 강물에 버려야 했을 것입니다. 아이의 이름을 지을 경황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를 강물에 버려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면서도 또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를 버렸을 것입니다.
홍수를 맞은 노아의 방주가 물이 흘러가는 데로 흘러 다니다가 어느 한 곳에 머무르게 되어 새 생명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모세의 방주도 역시 물 흐름에 맡겨져 있습니다. 강에 버려진 모세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지요 파라오의 딸이었습니다. 아버지인 파라오는 모세를 죽이려하고 딸은 그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그럼, 버려진 모세를 살린데에는 어떤 사람들이 관여하고 있습니까 어머니와 누이와 파라오의 딸과 시녀를 통해서 건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모세의 아버지는 1절에서만 등장하고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2절부터는 모두 어머니가 주어로 등장합니다. '그녀가 아이를 낳았다', '그녀가 석 달 동안이나 숨겨서 키웠다', '그녀는 갈대 상자를 구했다'. '그녀는 아이를 상자에 담아 갈대 사이에 두었다' 등 모두 어머니가 주어입니다. 그리고 4절은 모세의 누이가, 5절 이하는 파라오의 딸이 모두 주어입니다.
그런데, 조금 훌쩍 뛰어 넘어서 10절과 11절 사이에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아이일 때 파라오의 궁정에 들어가서 살던 모세가 어른이 되어서 왕궁 밖으로 나와 소위 '사고'를 치고 있습니다.
모세가 어른이 되어서 첫 번째 한 일이 무엇이지요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이집트 관리를 죽이는 일이었을까요 그 전에 모세는 자기 형제들, 곧 동족에게 찾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는 왕궁에서 나와서 히브리 사람들에게로 갔을까요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이집트 왕궁에서 자라면서 '왕따'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주워 온 아이라고 구박을 했을까요 이집트의 왕궁에서 왕자로 자란 모세가 어떻게 해서 히브리 사람들과 동족의식을 갖게 되었고, 더욱이 동족을 치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상상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만, 성서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모세가 태어나서 버려진 이야기를 전하는 1-10절 사이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파라오의 딸에 의해 물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 누가 나타나지요 모세의 누이가 나타납니다. 그 누이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히브리인의 여인 가운데서 유모를 불러주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어머니를 불러다가 유모로 소개합니다. 이거야말로 도랑치고 가제 잡는 일입니다. 동생도 살리고, 어머니에게 일자리도 소개하고, 정말 지혜로운 계획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젖을 먹인 이가 그의 어머니였다는 이야기 직후에 모세가 동족인 히브리인에게 갔다는 것은 이 둘 사이에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인 아기가 히브리인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면 당연한 이야기를 전해준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머니가 유모가 된 이야기를 통해 모세가 어디에서 자라든, 그의 이름이 모세이든 어떻든 지간에 그는 히브리 사람이며, 히브리 사람의 꿈을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 어머니가 주는 젖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꿈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육신의 젖만 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육신의 젖만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나그네로 살고, 노예로 살면서도 야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이어온 민족의 얼, 민족의 신앙이 담긴 젖을 주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모세가 먹고 자란 젖, 이 젖이 어디에서 이어지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그 젖은 수백 년 동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약속의 땅을 위해 살아갔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게서 이어져온 믿음의 젖줄이었습니다. 나그네된 삶, 억압의 삶, 절망의 삶에서 벗어나 약속과 희망의 땅으로 이어준 희망의 젖줄이었습니다. 이 믿음의 젖줄이 있었기에 모세는 이집트의 문화, 정치, 정신, 종교의 핵심인 왕궁에서 자라면서도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히브리인 동족에게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의 신앙을 잊지 않았던 모세에게 히브리인을 구원할 사명을 맡기셔서 노예를 자유인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모세가 어머니의 젖과 떨어졌다면 그는 결코 히브리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처럼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버려져서 불태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소망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에게 빨려주는 젖은 어떤 젖입니까 일류대학에 가야 한다는 소망입니까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기를 바라는 꿈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결코 일류대학을 가지 말아야 한다거나, 또 자랑스러운 자녀로 키우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녀들이 모두 세상 어디에 내놔도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자녀로 키울 것인가, 하는 것 입니다. 물가에 버려진 아이도 살리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젖줄로 이어진 자녀로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떤 소망의 젖을 먹이고 있습니까
어려서는 성적, 커서는 학교, 직장, 돈 등에 관해서것만을 먹이고는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을 체격만 크지 뼈대 없는 오징어처럼 키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녀들에게 어떤 가치관, 어떤 믿음과 희망을 전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모세의 어머니는 아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었고,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어머니는 모세를 히브리인으로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여호와 하나님께 원망과 아우성만 하는 노예 히브리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을 깨닫는 자유인으로 만드는 지도자가 되는 젖을 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집안과 교회를 통해 자녀들에게 어떤 소망을 심어주고 있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상의 노예가 되는 자녀가 아니라, 하늘의 약속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가르침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로 키우겠다고 결심합시다.
모세가 어머니가 주신 믿음의 젖을 먹고서 믿음과 희망의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자녀들에게 믿음의 젖을 먹여서 믿음과 희망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오늘은 아이들을 바르게 세우는 일에 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싱거운 이야기입니다만, 하루는 오징어가 마음을 굳게 먹고 멸치에게 청혼을 하였습니다. 멸치는 오징어의 청혼을 받아들였을까요 물론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이유는, 작아도 뼈대 있는 '치'자 집안에서 뼈대도 없는 오징어와는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웃고 지나갈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뼈대 있는 가문을 자랑하는가를 빗댄 이야기입니다.
제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 이야기를 이렇게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어린이 주일에 어린이를 유기하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합니다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버려진 모세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출애굽기 이야기의 골자는 무엇입니까 이집트의 노예들이 도망쳐 나와 이스라엘이라는 가문과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건국 신화는 대개 신비로운 사건이나, 영웅 이야기로 윤색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노예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고 뼈대 있는 집안으로 만든 모세를 신비적인 인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살이 하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하늘을 찌릅니다. 그들을 억압할수록 아우성은 더욱 커져가고 있습니다. 노예들의 아우성이 커져가자 이집트의 파라오는 아예 그 씨를 말려버리려고 합니다. 사내아이들이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모세 이야기는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그 명령이 어떤 아픔으로 나타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우리 어린이들, 모세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주었습니까 파라오의 딸이 지어주었습니다. 모세의 친 부모가 지어준 아이의 이름은 무엇인지 아시는 분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이름도 짓지 못한 채 그를 강물에 버려야 했을 것입니다. 아이의 이름을 지을 경황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를 강물에 버려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면서도 또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를 버렸을 것입니다.
홍수를 맞은 노아의 방주가 물이 흘러가는 데로 흘러 다니다가 어느 한 곳에 머무르게 되어 새 생명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모세의 방주도 역시 물 흐름에 맡겨져 있습니다. 강에 버려진 모세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지요 파라오의 딸이었습니다. 아버지인 파라오는 모세를 죽이려하고 딸은 그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그럼, 버려진 모세를 살린데에는 어떤 사람들이 관여하고 있습니까 어머니와 누이와 파라오의 딸과 시녀를 통해서 건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모세의 아버지는 1절에서만 등장하고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2절부터는 모두 어머니가 주어로 등장합니다. '그녀가 아이를 낳았다', '그녀가 석 달 동안이나 숨겨서 키웠다', '그녀는 갈대 상자를 구했다'. '그녀는 아이를 상자에 담아 갈대 사이에 두었다' 등 모두 어머니가 주어입니다. 그리고 4절은 모세의 누이가, 5절 이하는 파라오의 딸이 모두 주어입니다.
그런데, 조금 훌쩍 뛰어 넘어서 10절과 11절 사이에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아이일 때 파라오의 궁정에 들어가서 살던 모세가 어른이 되어서 왕궁 밖으로 나와 소위 '사고'를 치고 있습니다.
모세가 어른이 되어서 첫 번째 한 일이 무엇이지요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이집트 관리를 죽이는 일이었을까요 그 전에 모세는 자기 형제들, 곧 동족에게 찾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는 왕궁에서 나와서 히브리 사람들에게로 갔을까요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이집트 왕궁에서 자라면서 '왕따'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주워 온 아이라고 구박을 했을까요 이집트의 왕궁에서 왕자로 자란 모세가 어떻게 해서 히브리 사람들과 동족의식을 갖게 되었고, 더욱이 동족을 치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상상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만, 성서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모세가 태어나서 버려진 이야기를 전하는 1-10절 사이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파라오의 딸에 의해 물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 누가 나타나지요 모세의 누이가 나타납니다. 그 누이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히브리인의 여인 가운데서 유모를 불러주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어머니를 불러다가 유모로 소개합니다. 이거야말로 도랑치고 가제 잡는 일입니다. 동생도 살리고, 어머니에게 일자리도 소개하고, 정말 지혜로운 계획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젖을 먹인 이가 그의 어머니였다는 이야기 직후에 모세가 동족인 히브리인에게 갔다는 것은 이 둘 사이에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인 아기가 히브리인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면 당연한 이야기를 전해준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머니가 유모가 된 이야기를 통해 모세가 어디에서 자라든, 그의 이름이 모세이든 어떻든 지간에 그는 히브리 사람이며, 히브리 사람의 꿈을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 어머니가 주는 젖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꿈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육신의 젖만 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육신의 젖만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나그네로 살고, 노예로 살면서도 야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이어온 민족의 얼, 민족의 신앙이 담긴 젖을 주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모세가 먹고 자란 젖, 이 젖이 어디에서 이어지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그 젖은 수백 년 동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약속의 땅을 위해 살아갔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게서 이어져온 믿음의 젖줄이었습니다. 나그네된 삶, 억압의 삶, 절망의 삶에서 벗어나 약속과 희망의 땅으로 이어준 희망의 젖줄이었습니다. 이 믿음의 젖줄이 있었기에 모세는 이집트의 문화, 정치, 정신, 종교의 핵심인 왕궁에서 자라면서도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히브리인 동족에게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의 신앙을 잊지 않았던 모세에게 히브리인을 구원할 사명을 맡기셔서 노예를 자유인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모세가 어머니의 젖과 떨어졌다면 그는 결코 히브리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처럼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버려져서 불태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소망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에게 빨려주는 젖은 어떤 젖입니까 일류대학에 가야 한다는 소망입니까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기를 바라는 꿈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결코 일류대학을 가지 말아야 한다거나, 또 자랑스러운 자녀로 키우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녀들이 모두 세상 어디에 내놔도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자녀로 키울 것인가, 하는 것 입니다. 물가에 버려진 아이도 살리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젖줄로 이어진 자녀로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떤 소망의 젖을 먹이고 있습니까
어려서는 성적, 커서는 학교, 직장, 돈 등에 관해서것만을 먹이고는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을 체격만 크지 뼈대 없는 오징어처럼 키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녀들에게 어떤 가치관, 어떤 믿음과 희망을 전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모세의 어머니는 아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었고,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어머니는 모세를 히브리인으로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여호와 하나님께 원망과 아우성만 하는 노예 히브리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을 깨닫는 자유인으로 만드는 지도자가 되는 젖을 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집안과 교회를 통해 자녀들에게 어떤 소망을 심어주고 있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상의 노예가 되는 자녀가 아니라, 하늘의 약속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가르침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로 키우겠다고 결심합시다.
모세가 어머니가 주신 믿음의 젖을 먹고서 믿음과 희망의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자녀들에게 믿음의 젖을 먹여서 믿음과 희망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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