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아비들아! 자녀를 양육하라
본문
'남극의 신사'라고 불리우는 펭귄은 자식을 극진히 사랑하는 부성애의 대표적인 동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암컷 펭귄이 알을 낳으면 수컷 펭귄은 알이 깨지지 않도록 자기의 발등으로 알을 받습니다. 알을 낳은 암컷은 먹이를 찾아 나서고, 알을 받은 수컷이 그 알을 품습니다. 영하 50도의 추위와 시속 300km의 강풍 속에서도 수컷은 알이 깨질까봐 식음을 전폐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한 달 가까이 알을 품고 있습니다. 암컷은 먹이를 찾아 나섰다가 알이 부화되기 2,3일 전에 돌아와 수컷과 교대를 해서 알을 품습니다.
한달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고 알을 품고 있던 수컷은 기진맥진해서 죽음 직전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센 바람이 몰아쳐도, 그 어떤 혹한의 추위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배가 고파 허기져도 아빠 펭귄은 절대로 알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습니다. 아무나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부성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 전에 지나간 '어린이날'을 맞이하면서 신문과 방송마다 '어린이'에 대한 특집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눈에 띠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최근 들어 자녀들의 방임형 학대가 증가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제대로 밥을 주지 않거나 학교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혼이 늘어나면서 자기가 낳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포기하기는 부모가 늘어가고 있다는 슬픈 보도도 있었습니다. 학대라고 부를만큼 아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만 보도되고 있지만, 사실 먹을 것을 주면서도 실제로 양육을 포기하거나 바르게 양육하려는 의지가 없는 부모들까지 하면 양육받을 권리를 누리지 못한 아이들은 너무 많을 것입니다.
정말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그 자녀에 대한 양육의 책임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부모된 책임을 너무나 쉽게 내팽개쳐버린 세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성경은 우리 신앙의 부모들에게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 신앙인 부모들이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화나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너희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 하면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이건 자녀들에게 주는 말씀이어야 하지 않느냐'고 되물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우리에게 화나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느냐'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화나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을 공동번역에서는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부모님들이 너무 쉽게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도, 자녀들이 상처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고 물어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라고 업신여기지 말고, 아무리 작은 아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실족케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그들을 실족케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첫 번째로 우리의 자녀들도 엄연한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도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말과 행동에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무리 작은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비록 어른들이 보기에는 작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전 인격이 달려 있는 소중한 감정들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너무 자주 그들의 감정을 무시합니다.
몇주 전에 주방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전도사님의 큰아들 예찬이가 우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주위에 있던 어른들은 예찬이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왜 우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밥먹다가 우는 아이를 보면서 어른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농담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찬이가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속상해 죽겠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자기 마음도 모르고 웃고 농담하고, 자기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으니까 "제발 말 좀 그만 하라"는 것입니다.
오후 예배 들어가기 전에 놀고 있는 예찬이게 "밥 먹다가 왜 속상했어" 그렇게 물었더니, 예찬이가 "지금은 행복해요" 그러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감정이 어른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 어른들의 웃음거리가 되면 그 아이는 인격적으로 무시당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우리 어른들이 느끼는 것과 똑같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그들의 감정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작은 그 자체로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실족케 하지 않으려면 내가 낳은 아이라 하더라도 내 소유물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청지기들입니다. 그건 아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잘 양육하고 키우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이들입니다. 절대로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마치 내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 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래도 좀 나은 편입니다. 내 물건처럼 생각하는 부모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마치 종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내 물건이나 종처럼 취급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바르게 키웠는지에 대해서 반드시 회계하자고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랍비가 안식일에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두 아이가 집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랍비의 아내는 아이들의 시체를 이층으로 옮긴 뒤 흰 천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인 랍비가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귀중한 보석을 잘 보관해 달라고 맡기고 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주인이 나타나 맡긴 보석을 돌려 달라고 했어요.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러자 랍비는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라는 듯이 "말할 것도 없이 맡은 보석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되겠지. " 그러자 랍비의 아내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실은 조금 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셨던 귀중한 보석 두 개를 찾아 가지고 하늘로 돌아갔어요. " 랍비는 아내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보석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석을 맡겨주셨는데, 우리는 그 보석을 마치 냇가에 굴러다니는 값어치 없는 돌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 원인은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감정적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서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고후 4:7)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만 아니라 아이들도 질그릇 속에 감추어진 보화입니다. 보화는 소중하기는 소중한데, 질그릇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에 깨지기 쉽습니다.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질그릇 안에 담겨져 있는 보화처럼 연약한 아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대합니다. 내 기분이 좋을 때에는 잘 대해주다가도, 내 기분이 좋지 않으면 막대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 감정이 조절되지 않고 감정으로 대하면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와 같은 우리 아이들의 인격이 깨어지고 꿈이 깨어지고 행복이 깨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자녀를 양육할 때에 "사랑하는 것은 뜨거운 가슴으로, 꾸짖고 책망하는 것은 냉철한 머리로" 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것은 머리로, 꾸짖는 것은 가슴으로 하면 아이를 바르게 양육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계산된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며, 폭발하는 감정에 따라서 아이를 꾸짖는다면 그 꾸지람은 역효과를 내고 맙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것은 뜨거운 가슴(감정)으로 해야 하고, 꾸지람과 책망은 냉철한 머리(이성)으로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우리보다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습니다. 아이들을 화나게 하거나 낙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내 방식대로 양육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열은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교육을 시키려고 합니다. 논밭을 다 팔고, 집을 팔아서라도 가르치려고 합니다. 심지어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빚을 지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영어를 잘하게 한다고 아이들의 혀까지 자르는 게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입니다.
물론 그런 교육열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우리나라의 교육열 때문에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교육열이 대부분 부모들의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을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고생해서 가르쳐 놓으면 나중에 아이가 성공해서 부모를 잘 모실 것이고, 공부를 많이 시키면 훌륭하게 자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부모들은 자기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아이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식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라 주어야 마음이 놓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공부 잘하는 자기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법대에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노래를 너무 너무 좋아해서 성악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법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자기 꿈을 포기하고 법대 가기 위해서 공부를 했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으니까 성적도 떨어지고, 결국에는 4수까지 해서 성악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법대에 가고, 의대에 가라는 것은 부모들의 욕심입니다. 아이들의 개성과 소질을 무시한 채 부모의 욕심대로 커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내 욕심대로, 내 방식대로 양육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양육을 해야 합니다.
②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자녀를 양육하기를 원하십니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우리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여야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자녀 양육의 목적도 바로 이것이어야 합니다.
'교양'이라는 말은 '훈련'이라는 말입니다. 훈련에는 피나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둬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자라가지 않습니다.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과감하게 채찍을 가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육에서 채찍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채찍질을 금하고 있긴 하지만, 훈련을 위해서는 채찍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잠언에서도 자녀를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는 채찍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 23:14)고 했고,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 29:15)고 했습니다.
음부의 자식이 되지 않게 하려면 채찍이 필요하고, 채찍이 필요할 때에 채찍하지 않으면 그 자식은 결국 부모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못된 자식이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채찍을 아끼다가 자식을 망친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구약의 말씀에 소개되고 있는 엘리 제사장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사시대 마지막 사사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삼상 2:12)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처럼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못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사무엘상 2장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제물을 가져옵니다. 그러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환을 시켜서 제물을 자기들 마음대로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제물을 삶고 있으면 갈고리로 걸리는 대로 제사장 몫이라고 가져 가버렸고, 불에 태워 드릴 제물은 태우기도 전에 '생고기를 원한다'며 생고기를 가져 가버렸습니다.
제물로 드린 짐승 가운데 일부는 제사장의 몫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사장의 몫이라 하더라도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다음, 제사장이 자기의 몫을 가져가야 합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기도 전에 자기들 마음대로 제물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이 그런 사악한 짓을 일삼고 있는데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엄하게 꾸중을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쳐서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한 자식들의 악행을 고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성적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회막에서 말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 조용히 타이를 뿐입니다. 그런데도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타이름을 듣지 않습니다. 이미 망나니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의 가문에서는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실 수 없다고 판단하시고는 사무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어린 사무엘에게 들려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엘리 제사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 죄악이 너무 커서 어떤 방법으로도 용서가 되지 않을만큼 멀리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을 바로잡아주지 못했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다. "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는 채찍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채찍을 아끼면 아이를 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후에는 부모를 욕되게 하는 자식이 되고 맙니다.
세 번째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 속에는 부모가 먼저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말로부터 배우는 것보다도 삶과 행동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러기에 부모님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아이들에게 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바르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앙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주일성수하지 않으면서 자식들더러 주일학교에 빠지지 말라고 말하면, 지금 당장은 부모님 말씀이 무서워서 주일학교에 가겠지요. 그러나 그런 신앙은 어떤 포기될지 모르는 불안한 신앙일 뿐입니다. 주일 성수하는 것, 십일조 생활하는 것, 기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 겸손히 섬기는 것, 신앙인답게 사는 것, 그런 모든 것을 부모님이 먼저 본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지 말라고 해도 따라합니다.
어느 설문조사에 이런 보고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만약 내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물었더니, 아주 흥미로운 대답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겠습니까 그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기들이 아빠 엄마가 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진짜 아빠와 진짜 엄마를 혼내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답니다. 그 이유는 그 동안 엄마 아빠도 잘못한 것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는 실수하고 잘못하고서도 아무런 반성이나 벌을 받지 않으면서, 자기들이 잘못하면 어김없이 나무라고 혼내기 때문에 너무나도 불공평하게 느낀 것입니다. '삶'은 없고 '말'로만 가르치려는 부모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비행 청소년은 없다. 단지 비행 부모가 있을 뿐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아 뒤에는 반드시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부모의 모습이 10년, 20년 후의 자녀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아이들에게 본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삶으로 본을 보여주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먼저 본을 보이시고 "내가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해 줍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 오늘 어버이주일에 부모된 우리들이 먼저 이 귀한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아름다운 생애를 살아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장해 갈 것입니다.
한달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고 알을 품고 있던 수컷은 기진맥진해서 죽음 직전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센 바람이 몰아쳐도, 그 어떤 혹한의 추위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배가 고파 허기져도 아빠 펭귄은 절대로 알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습니다. 아무나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부성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 전에 지나간 '어린이날'을 맞이하면서 신문과 방송마다 '어린이'에 대한 특집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눈에 띠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최근 들어 자녀들의 방임형 학대가 증가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제대로 밥을 주지 않거나 학교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혼이 늘어나면서 자기가 낳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포기하기는 부모가 늘어가고 있다는 슬픈 보도도 있었습니다. 학대라고 부를만큼 아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만 보도되고 있지만, 사실 먹을 것을 주면서도 실제로 양육을 포기하거나 바르게 양육하려는 의지가 없는 부모들까지 하면 양육받을 권리를 누리지 못한 아이들은 너무 많을 것입니다.
정말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그 자녀에 대한 양육의 책임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부모된 책임을 너무나 쉽게 내팽개쳐버린 세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성경은 우리 신앙의 부모들에게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 신앙인 부모들이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화나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너희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 하면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이건 자녀들에게 주는 말씀이어야 하지 않느냐'고 되물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우리에게 화나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느냐'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화나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을 공동번역에서는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부모님들이 너무 쉽게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도, 자녀들이 상처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고 물어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라고 업신여기지 말고, 아무리 작은 아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실족케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그들을 실족케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첫 번째로 우리의 자녀들도 엄연한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도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말과 행동에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무리 작은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비록 어른들이 보기에는 작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전 인격이 달려 있는 소중한 감정들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너무 자주 그들의 감정을 무시합니다.
몇주 전에 주방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전도사님의 큰아들 예찬이가 우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주위에 있던 어른들은 예찬이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왜 우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밥먹다가 우는 아이를 보면서 어른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농담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찬이가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속상해 죽겠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자기 마음도 모르고 웃고 농담하고, 자기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으니까 "제발 말 좀 그만 하라"는 것입니다.
오후 예배 들어가기 전에 놀고 있는 예찬이게 "밥 먹다가 왜 속상했어" 그렇게 물었더니, 예찬이가 "지금은 행복해요" 그러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감정이 어른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 어른들의 웃음거리가 되면 그 아이는 인격적으로 무시당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우리 어른들이 느끼는 것과 똑같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그들의 감정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작은 그 자체로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실족케 하지 않으려면 내가 낳은 아이라 하더라도 내 소유물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청지기들입니다. 그건 아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잘 양육하고 키우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이들입니다. 절대로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마치 내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 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래도 좀 나은 편입니다. 내 물건처럼 생각하는 부모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마치 종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내 물건이나 종처럼 취급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바르게 키웠는지에 대해서 반드시 회계하자고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랍비가 안식일에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두 아이가 집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랍비의 아내는 아이들의 시체를 이층으로 옮긴 뒤 흰 천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인 랍비가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귀중한 보석을 잘 보관해 달라고 맡기고 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주인이 나타나 맡긴 보석을 돌려 달라고 했어요.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러자 랍비는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라는 듯이 "말할 것도 없이 맡은 보석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되겠지. " 그러자 랍비의 아내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실은 조금 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셨던 귀중한 보석 두 개를 찾아 가지고 하늘로 돌아갔어요. " 랍비는 아내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보석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석을 맡겨주셨는데, 우리는 그 보석을 마치 냇가에 굴러다니는 값어치 없는 돌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 원인은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감정적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서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고후 4:7)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만 아니라 아이들도 질그릇 속에 감추어진 보화입니다. 보화는 소중하기는 소중한데, 질그릇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에 깨지기 쉽습니다.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질그릇 안에 담겨져 있는 보화처럼 연약한 아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대합니다. 내 기분이 좋을 때에는 잘 대해주다가도, 내 기분이 좋지 않으면 막대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 감정이 조절되지 않고 감정으로 대하면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와 같은 우리 아이들의 인격이 깨어지고 꿈이 깨어지고 행복이 깨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자녀를 양육할 때에 "사랑하는 것은 뜨거운 가슴으로, 꾸짖고 책망하는 것은 냉철한 머리로" 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것은 머리로, 꾸짖는 것은 가슴으로 하면 아이를 바르게 양육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계산된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며, 폭발하는 감정에 따라서 아이를 꾸짖는다면 그 꾸지람은 역효과를 내고 맙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것은 뜨거운 가슴(감정)으로 해야 하고, 꾸지람과 책망은 냉철한 머리(이성)으로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우리보다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습니다. 아이들을 화나게 하거나 낙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내 방식대로 양육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열은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교육을 시키려고 합니다. 논밭을 다 팔고, 집을 팔아서라도 가르치려고 합니다. 심지어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빚을 지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영어를 잘하게 한다고 아이들의 혀까지 자르는 게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입니다.
물론 그런 교육열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우리나라의 교육열 때문에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교육열이 대부분 부모들의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을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고생해서 가르쳐 놓으면 나중에 아이가 성공해서 부모를 잘 모실 것이고, 공부를 많이 시키면 훌륭하게 자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부모들은 자기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아이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식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라 주어야 마음이 놓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공부 잘하는 자기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법대에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노래를 너무 너무 좋아해서 성악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법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자기 꿈을 포기하고 법대 가기 위해서 공부를 했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으니까 성적도 떨어지고, 결국에는 4수까지 해서 성악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법대에 가고, 의대에 가라는 것은 부모들의 욕심입니다. 아이들의 개성과 소질을 무시한 채 부모의 욕심대로 커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내 욕심대로, 내 방식대로 양육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양육을 해야 합니다.
②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자녀를 양육하기를 원하십니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우리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여야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자녀 양육의 목적도 바로 이것이어야 합니다.
'교양'이라는 말은 '훈련'이라는 말입니다. 훈련에는 피나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둬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자라가지 않습니다.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과감하게 채찍을 가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육에서 채찍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채찍질을 금하고 있긴 하지만, 훈련을 위해서는 채찍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잠언에서도 자녀를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는 채찍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 23:14)고 했고,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 29:15)고 했습니다.
음부의 자식이 되지 않게 하려면 채찍이 필요하고, 채찍이 필요할 때에 채찍하지 않으면 그 자식은 결국 부모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못된 자식이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채찍을 아끼다가 자식을 망친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구약의 말씀에 소개되고 있는 엘리 제사장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사시대 마지막 사사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삼상 2:12)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처럼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못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사무엘상 2장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제물을 가져옵니다. 그러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환을 시켜서 제물을 자기들 마음대로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제물을 삶고 있으면 갈고리로 걸리는 대로 제사장 몫이라고 가져 가버렸고, 불에 태워 드릴 제물은 태우기도 전에 '생고기를 원한다'며 생고기를 가져 가버렸습니다.
제물로 드린 짐승 가운데 일부는 제사장의 몫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사장의 몫이라 하더라도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다음, 제사장이 자기의 몫을 가져가야 합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기도 전에 자기들 마음대로 제물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이 그런 사악한 짓을 일삼고 있는데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엄하게 꾸중을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쳐서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한 자식들의 악행을 고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성적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회막에서 말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 조용히 타이를 뿐입니다. 그런데도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타이름을 듣지 않습니다. 이미 망나니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의 가문에서는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실 수 없다고 판단하시고는 사무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어린 사무엘에게 들려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엘리 제사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 죄악이 너무 커서 어떤 방법으로도 용서가 되지 않을만큼 멀리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을 바로잡아주지 못했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다. "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는 채찍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채찍을 아끼면 아이를 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후에는 부모를 욕되게 하는 자식이 되고 맙니다.
세 번째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 속에는 부모가 먼저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말로부터 배우는 것보다도 삶과 행동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러기에 부모님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아이들에게 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바르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앙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주일성수하지 않으면서 자식들더러 주일학교에 빠지지 말라고 말하면, 지금 당장은 부모님 말씀이 무서워서 주일학교에 가겠지요. 그러나 그런 신앙은 어떤 포기될지 모르는 불안한 신앙일 뿐입니다. 주일 성수하는 것, 십일조 생활하는 것, 기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 겸손히 섬기는 것, 신앙인답게 사는 것, 그런 모든 것을 부모님이 먼저 본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지 말라고 해도 따라합니다.
어느 설문조사에 이런 보고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만약 내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물었더니, 아주 흥미로운 대답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겠습니까 그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기들이 아빠 엄마가 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진짜 아빠와 진짜 엄마를 혼내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답니다. 그 이유는 그 동안 엄마 아빠도 잘못한 것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는 실수하고 잘못하고서도 아무런 반성이나 벌을 받지 않으면서, 자기들이 잘못하면 어김없이 나무라고 혼내기 때문에 너무나도 불공평하게 느낀 것입니다. '삶'은 없고 '말'로만 가르치려는 부모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비행 청소년은 없다. 단지 비행 부모가 있을 뿐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아 뒤에는 반드시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부모의 모습이 10년, 20년 후의 자녀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아이들에게 본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삶으로 본을 보여주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먼저 본을 보이시고 "내가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해 줍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 오늘 어버이주일에 부모된 우리들이 먼저 이 귀한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아름다운 생애를 살아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장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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