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노엽게 함과 양육함
본문
어린이 날에 청와대에서 대통령 할아버지가 300여명의 소년소녀 가장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교회도 어린이 주일에 이제는 전향적인 어린이 중심의 프로그램을 가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린이'라는 말은 방정환 선생님이 만든 말로 '아이'라는 말을 존경의 뜻을 담아서 '어린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의 본래 의미는 '어리신 이'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진정한 어린이 사랑이 이 하루동안에 어린아이들 앞에 어른들이 밥을 들고 가서 '어리신 분 잡수세요'하는 식으로 대접을 하든지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을 직접적으로 인정해주고 그 가치를 존경해주는 그런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정환 선생님이 이렇게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었지만 또 동요시인 강소천 선생님이 어린이에 관한 의미를 우리에게 많이 부각시켰습니다. 그는 '병아리'라는 동시를 통해서 이 병아리가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한번 쳐다보고 또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을 두 번 쳐다보는 그런 동시를 통해서 어린 병아리의 순진한 물먹는 모습이 아이들의 심성이라고 묘사를 했는데 어쨌든 교회가 어린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한국의 독특한 기독교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이고 이것은 또 아무리 강조해도 좋은 일입니다.
상처받는 아이들
성경에 보면 믿음인들의 어린 시절에 부모와의 양육적 관계에서 소개된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은 어린이들을 향한 교육과 양육에 많은 분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이 말씀에도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교훈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준 이 교훈 안에 부모가 어린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될까라는 엄숙한 교훈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현상과 더불어 어린이에 관한 이야기들을 집합해 보아야 될 필요성을 느낍니다.
요즘 보도되는 연구자료들에 의하면 문제아들 가운데 대부분은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고 자란 아이들이 다 커서 문제아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큰 사고를 일으킨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한결같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입니다. 그래서 폐륜아도 많지만 폐륜 아버지도 우리 사회에 대단히 많다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아이들은 잘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례를 보면 여러 유형이 있지만 극단적으로 몹쓸 아버지들이 있고 부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자꾸만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하는 자녀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고 심지어 딸아이의 경우에는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사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상처는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유산이 됩니다. 모두가 불행해지는 유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은 이제는 상처를 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아들에게 감동적인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부모의 말은 설득력이 없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의 지적에 의하면 부모는 이제 모범적으로 자녀들을 가르쳐야 하고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며 자녀들에게 감동적인 부모상을 전수해 주어야 된다고 지적을 합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
내가 부모님에 대해서 내 생애에 영향을 미친 감동적인 사례가 한 가지라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다면 그 없는 한을 가지고 아이들 앞에 분풀이를 합니까 '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감동적인 유산이 없다, 그만큼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났다'라고 비관해서 우리가 부모답지 못한 모습을 갖느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거꾸로 가야 됩니다. 내가 부모로부터 감동적인 경험을 갖지 못했다면 이제는 내 자녀들에게는 내가 못 받은 감동을 물려주고 가는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사명감을 인식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아이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족, 가정의 교육, 그리고 자녀교육에 먼저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을 하라'가 아닙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자녀들에게는 노엽게 하여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는 양육하지 않고 있는 부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에게 명한 여호와 하나님의 준엄한 가정교육의 원리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라"는 이 원리 앞에 우리는 구체적인 교훈들을 연구해야 됩니다. 성경은 구체적인 항목을 우리 앞에 말씀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원리만 말씀합니다.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연구하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순진함을 그대로 수용해야
우리가 아이들을 노엽게 하지 않으려면 첫째로 미숙하며 순진한 아이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이해심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길거리를 가면 '공사중'이라고 적어놓은 팻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차도 둘러가야 되고 사람도 비켜가야 됩니다. 시민들이 불편해도 이해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인생의 공사중입니다. 그 아이들은 공사가 끝난 존재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미숙함은 공사중입니다. 그 아이들의 잘못됨은 공사중입니다. 그것을 사실대로 볼 줄 알고 받아들일 줄 아는 부모의 안목에서 자녀교육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다움으로써 온전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이답지 못한 것은 곤란합니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공항에 가기 위해서 지하철을 탔는데 막대를 꿰 가지고 끌고 가는 여행자 가방을 들었습니다. 지하철 안에서도 그 가방은 대단히 편리합니다. 가방을 세워놓고 그 손잡이를 잡고 있으면 지하철 손잡이를 안 잡아도 가방무게가 나를 지탱해주기 때문에 바로 서서 갈 수가 있어 아주 편합니다. 그런데 내 앞에 앉아있는 두 세 살 정도된 꼬마가 이 가방에 호기심이 난 것입니다. 일어나서는 자기가 잡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하고 같이 잡으면 얼마나 보기 좋겠습니다만 이놈이 또 무슨 심술인지 내 손을 떼라고 합니다. 자기 혼자 잡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애를 한대 때리면서 '이건 아저씨 것이야. 네 것이 아니야. 말썽부리지 말고 앉아' 그런데 이 애가 기어코 그 가방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화가 났어요. 제가 그 모자의 싸움을 안 말리고는 안 되겠더라고요. '아주머니 그 애 이리 보내세요. 너 이거 잡아라. ' 그래서 제가 손잡이를 내려 주었습니다. 이 손잡이가 아이보다 높기 때문에 내려서 맞춰주니 잡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정류장 가더니 그만 안 하려고 합니다. 나는 손잡이를 내려 잡기 때문에 참 편합니다. 그러나 그 애는 키가 작으니까 손을 들고 잡아야 되기 때문에 팔이 아픕니다. 그러니까 한 정류소 가다가 그만 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다움입니다. 호기심 때문에 한번 잡아보려고 말썽을 부리지만 그 애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아이의 순진함의 발동이지 오해를 하면 안됩니다.
아이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오늘의 부모들의 잘못된 양육자세를 제가 동조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거꾸로 된 이야기입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방치하는 잘못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다운 짓을 했다고 너무 칭찬해주지 마십시오. 아이다운 행동을 칭찬해 주어야 됩니다.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됩니다. 애가 조금 어색한 짓을 했는데도 아이다움이 있다면 그걸 교훈의 재료를 삼고 훈계의 재료를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이다움마저도 말살시켜 버리는 어른들의 행동은 많이 일어납니다. 한눈을 파는 애를 보고 왜 한눈 파느냐고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한눈 팔기 때문에 지금 정상입니다. 공원에 데리고 갔는데 한눈도 안 팔고 벤치에 어른처럼 가만히 앉아있고 꽃을 보아도 미소도 없고 만지지도 않는 그런 애가 칭찬 받을 애입니까 아닙니다. 꽃을 보면 만지려 하고 꺾으려고 하는 아이가 아이다운 것입니다. 그것을 적당히 경계해주고 주의해주고 감시만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욕심을 강요하지 말라
두번째는 부모가 못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어린이 주일을 앞두고 텔레비전에서 한 주간 동안 우리 교육문제를 많이 다뤘습니다. 강남의 어느 동네를 조사했는데 아이들 가운데 과외를 세 과목 이하로 하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제일 많이 하는 아이가 일곱 개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전부 세 개 이상씩 하는데 그 가운데 55%가 네, 다섯 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이 지금 아이들의 정서나 아이들의 그 모습을 순진하게 보지를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이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기자가 풍자를 재미있게 했습니다. 애가 학원을 대 여섯 군대를 돌고 캄캄한 시간에 지쳐서 돌아오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이 엄마는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애가 학원을 다 다녀왔구나. 내말 거역 안하고 내가 가라는 학원을 다 다니고 돌아왔구나. ' 학원에 갔다가 지쳐 캄캄할 때 들어오는 그 애를 맞이하는 그것이 부모의 즐거움인 것처럼 비치는 모습이 한심하다는 것입니다. 과외를 시키고 있으면서도 아이 편의 배려는 전혀 느끼지를 못하고 있는 부모들이 위기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상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노엽게 하고 있습니다. 집단 탈모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아과에 정신착란증을 일으키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의 탄식이 보도됐습니다. 두 살 짜리 아인데 유독히 말을 잘하더랍니다. 얼마나 말을 똑똑하게 잘하는지, 아이가 어학에 소질이 있는가 보다 싶어 영어학원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이 아이는 한국말도 영어도 둘 다 이상하게 하는 상황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일년이 지났는데 두 살 때보다도 이 세 살 먹은 애가 우리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두 살 때는 똑똑하게 우리말을 알아듣기도 하고 표현도 했는데 영어를 1년 하니까 한국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소유물로 생각지 말라
현대 부모들이 양육이라는 미명하에 우리 자녀들을 분노케 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이 대목을 좀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 우리 부모들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지는 않고 아이를 위한다고 하는 일들이 아이들을 노엽게 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회적인 잘못된 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내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재물이 여유가 있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무언가 우리의 환경에 소유가 높아 가는 가운데 자녀들까지도 소유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질서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느냐고 해서 자녀를 방치합니까 공중도덕을 해치고 남에게 폐해를 주는 자녀들의 행동을 보고 사기를 떨어뜨린다 해서 방치하고 있는 얼빠진 부모들이 한 둘이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교양과 훈계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구체적인 방법이 성경에는 없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어린이 주일에 부모된 어른들이 한번은 생각하고 인식해야 될 문제로 저 나름대로 몇 가지 정리를 해보고자 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할 때 너무 영적으로만 접근을 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교양과 훈계는 곧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으로 가르치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로써 어린아이들 앞에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가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기술적으로 가르칠만한 부모가 얼마나 되느냐 실제적으로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인 관점, 교육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생각을 해보면 됩니다. 이것은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사춘기 이전에는 반드시 부모가 사랑의 매를 들라는 것입니다. 사춘기 이후에는 매를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국부모들은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사춘기 이전에는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깨어질까 그저 과보호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소견도 들고 나름대로 자기 세계도 생기고 자기 판단력도 생긴 다 큰 아이들에게 매를 든답니다. 사춘기 이하의 아이에게 부모가 사랑의 매를 들지 않는 것도 위기이고 다 큰 아이들에게 매를 가하는 부모들의 모습도 위기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위기가 한국 가정에 팽배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춘기의 나이가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아이들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은 12세로 규정을 합니다. 12세 전으로 해서 12살 이하의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는 타이밍을 맞추어서 부모가 사랑의 매질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했을 때 '내가 거짓말한 것이 탄로 나면 큰일나지'라고 두려움이 있는 그 때 부모가 거짓말은 나쁘다고 사랑의 매를 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아이의 거짓말은 고쳐진다는 것입니다.
가정교육이 살아나야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 화란 선교사님 가정의 아이들이 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는데 전혀 떠들지를 않습니다. 어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하도 신기해서 어째서 당신 아이들은 예배 시간에 떠들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닥터 호체스가 제게 두 마디를 했는데 그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한 마디는 '가정의 교육으로 가능하지요'라는 것입니다. 애가 와서 예배에 떠들고 장난을 하고 예배에 방해를 하면 체크를 했다가 그날 돌아가서 애를 앉혀놓고는 '너 오늘 예배시간에 이런 행동했지, 그건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예배시간에 네가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 예배를 드릴 수가 없고 예배를 방해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이야. 네 잘못에 대해서 너는 벌을 받아야 돼' 회초리를 가지고 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아이 입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스리면 그 아이는 그때 했던 행동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체스 박사님의
두번째 충고의 말에 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분이 한국에 와서 8년을 살았는데 한번도 한국을 비판하는 말을 안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딱 한마디 내게 하더라고요. '목사님, 한국가정에는 교육이 없습니다. ' 아이들이 밖에 나와서 하는 행동을 부모들이 다루는 것을 보고는 교육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정교육이 없다는 이 말은 가정교육을 못 받고 있는 아이들이 불행하다는 말이 아니라 아이들을 바로 가르치는 못하는 부모들이 불행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일에 대해서 가르침이 있어야 되는데 다 큰 아이들에게는 매를 가지고 다스려서는 안됩니다.
전문가의 이야기를 우리가 좀 받아들여야 됩니다. 여기 사춘기 이하의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애를 아낀다고 사랑의 매질까지 아끼지 말기 바랍니다. 사랑의 매가 우리에게 필요하고 다 컸으면 대화와 모범으로 우리 자녀들을 가르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주님의 교양과 훈계가 묻어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른의 분풀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하는 그 말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묻어나가서 그 아이가 매를 맞으면서도 부모의 입을 통해서 성경말씀을 듣는 기회가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부모의 대화가 단순히 도덕적인 훈계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말씀이 묻어나가는 부모의 교훈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적절하게 해야 됩니다.
기회의 세대
미국의 닥터 보너라는 종교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사회에서 성공한 253명의 크리스천 전문인들을 실험조사 한 통계가 있고 또 스펜서 목사님이라는 분은 성경학자요 유명한 목회자로 자기 교인들 1,000명을 대상으로 실험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에 참 절묘한 통계가 나왔습니다. 유명인사들을 조사한 보너 박사나 교인들을 조사한 스펜서 박사는 서로 의논하고 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각각 별도로 조사를 한 것입니다. 전혀 서로 암시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스무살 이전에 예수를 믿은 사람의 통계가 닥터 보너의 조사에는 138명으로 55%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점점 늘어갈수록 예수를 믿게 되는 개종의 기회가 줄어들고 60세 이상은 한 사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닥터 스펜서가 조사한 1,000명 교인들을 조사를 해보니까 548명이 20살 전에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50세 이후에 예수를 믿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4명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 두 학자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위한 투자를 어린이들과 청소들에게 해야 되며 20세 이전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55%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이 점에서 새로운 각오와 어린이 교육을 향한 교회의 투자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요즘 연극을 봤습니다. '나 어릴 적에'라는 가족극입니다. 그 연극에 보면 배우가 나와서 이런 대사를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배우가 극장 천장을 가리키면서 '얘들아 저 하늘에 별을 보아라'고 했습니다. 내가 관람하러 갔던 그 시간의 관객들이 80%가 어린이들입니다. 어린이날을 기해서 만든 연극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많이 초청되었습니다. 그런데 배우가 '얘들아 저 하늘에 별을 보아라'고 손을 가리킬 때 어린이 관객들은 전부 뒤를 다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어른들을 보니까 한 사람도 안 돌아다보고 있더라고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대사가 여러 번 나옵니다. 앞에 장면에도 또 나왔는데 그 배우가 저 하늘에 별을 보라고 할 때마다 아까 돌아보고 속았는데도 또 돌아봅니다. 그만큼 순수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한번은 커녕 안 돌아봅니다. 왜 안 돌아봅니까 안 돌아보도록 벌써 나사가 지금 녹이 슬어 있습니다. 의식이 굳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밭도 어른들은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20살 이하의 청소년들의 방황과 환갑이 지난 사람들의 방황은 다릅니다. 청소년들의 방황은 해소할 가능성도 많고 포기할 수도 있는데 어른들의 방황은 포기가 잘 안됩니다. 어른들이 갖고 있는 문제는 전환이 잘 안됩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문제는 전환이 빨리 온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날의 교회 프로그램은 어른들이 직접적으로 어린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복음을 전해야 되는 이 막중한 사명 앞에서 55%의 가능성이 있는 20세 이하의 이 소년세대들, 어린이 세대들을 향한 복음 전도에 우리는 오히려 10%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는 이것이 우리 교회의 불균형인 것입니다. 어린 세대들을 노엽게 하고 있는 어른 세대들의 죄를 어른들이 인식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들을 향하여 주의 교양과 훈계로 다가가야 합니다. 어른들이 하는 모든 행위 속에, 우리 부모들이 하는 말속에, 행동 속에 주님의 교양과 훈계가 묻어나가야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 자녀들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을 받을 수 있는 줄 압니다.
88올림픽 때 온 세계가 주목했던 프로그램은 금메달을 따는 장면도 아니고 수 천명이 나와서 매스게임 하는 장면도 아니고 100명이 넘는 무희들이 나와서 춤추는 장면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음향이 꺼지고 조용한 그 시간에 꼬마 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리는 88올림픽의 개막식 장면은 미국 NBC TV에서 서 서울 올림픽의 대표적인 상징이라는 말을 하고 세계 언론들이 헤드라인으로 세계평화의 희망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계언론들이 감탄한 것은 어른들의 행동이 아니라 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리는 그 장면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과 희망은 어린이에게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 세대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어른들이 욕심을 절제할 줄 알아야 됩니다. 어린이날을 맞아 성도들 가정의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충만히 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방정환 선생님이 이렇게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었지만 또 동요시인 강소천 선생님이 어린이에 관한 의미를 우리에게 많이 부각시켰습니다. 그는 '병아리'라는 동시를 통해서 이 병아리가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한번 쳐다보고 또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을 두 번 쳐다보는 그런 동시를 통해서 어린 병아리의 순진한 물먹는 모습이 아이들의 심성이라고 묘사를 했는데 어쨌든 교회가 어린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한국의 독특한 기독교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이고 이것은 또 아무리 강조해도 좋은 일입니다.
상처받는 아이들
성경에 보면 믿음인들의 어린 시절에 부모와의 양육적 관계에서 소개된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은 어린이들을 향한 교육과 양육에 많은 분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이 말씀에도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교훈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준 이 교훈 안에 부모가 어린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될까라는 엄숙한 교훈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현상과 더불어 어린이에 관한 이야기들을 집합해 보아야 될 필요성을 느낍니다.
요즘 보도되는 연구자료들에 의하면 문제아들 가운데 대부분은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고 자란 아이들이 다 커서 문제아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큰 사고를 일으킨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한결같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입니다. 그래서 폐륜아도 많지만 폐륜 아버지도 우리 사회에 대단히 많다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아이들은 잘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례를 보면 여러 유형이 있지만 극단적으로 몹쓸 아버지들이 있고 부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자꾸만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하는 자녀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고 심지어 딸아이의 경우에는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사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상처는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유산이 됩니다. 모두가 불행해지는 유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은 이제는 상처를 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아들에게 감동적인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부모의 말은 설득력이 없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의 지적에 의하면 부모는 이제 모범적으로 자녀들을 가르쳐야 하고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며 자녀들에게 감동적인 부모상을 전수해 주어야 된다고 지적을 합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
내가 부모님에 대해서 내 생애에 영향을 미친 감동적인 사례가 한 가지라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다면 그 없는 한을 가지고 아이들 앞에 분풀이를 합니까 '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감동적인 유산이 없다, 그만큼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났다'라고 비관해서 우리가 부모답지 못한 모습을 갖느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거꾸로 가야 됩니다. 내가 부모로부터 감동적인 경험을 갖지 못했다면 이제는 내 자녀들에게는 내가 못 받은 감동을 물려주고 가는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사명감을 인식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아이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족, 가정의 교육, 그리고 자녀교육에 먼저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을 하라'가 아닙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자녀들에게는 노엽게 하여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는 양육하지 않고 있는 부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에게 명한 여호와 하나님의 준엄한 가정교육의 원리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라"는 이 원리 앞에 우리는 구체적인 교훈들을 연구해야 됩니다. 성경은 구체적인 항목을 우리 앞에 말씀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원리만 말씀합니다.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연구하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순진함을 그대로 수용해야
우리가 아이들을 노엽게 하지 않으려면 첫째로 미숙하며 순진한 아이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이해심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길거리를 가면 '공사중'이라고 적어놓은 팻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차도 둘러가야 되고 사람도 비켜가야 됩니다. 시민들이 불편해도 이해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인생의 공사중입니다. 그 아이들은 공사가 끝난 존재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미숙함은 공사중입니다. 그 아이들의 잘못됨은 공사중입니다. 그것을 사실대로 볼 줄 알고 받아들일 줄 아는 부모의 안목에서 자녀교육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다움으로써 온전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이답지 못한 것은 곤란합니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공항에 가기 위해서 지하철을 탔는데 막대를 꿰 가지고 끌고 가는 여행자 가방을 들었습니다. 지하철 안에서도 그 가방은 대단히 편리합니다. 가방을 세워놓고 그 손잡이를 잡고 있으면 지하철 손잡이를 안 잡아도 가방무게가 나를 지탱해주기 때문에 바로 서서 갈 수가 있어 아주 편합니다. 그런데 내 앞에 앉아있는 두 세 살 정도된 꼬마가 이 가방에 호기심이 난 것입니다. 일어나서는 자기가 잡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하고 같이 잡으면 얼마나 보기 좋겠습니다만 이놈이 또 무슨 심술인지 내 손을 떼라고 합니다. 자기 혼자 잡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애를 한대 때리면서 '이건 아저씨 것이야. 네 것이 아니야. 말썽부리지 말고 앉아' 그런데 이 애가 기어코 그 가방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화가 났어요. 제가 그 모자의 싸움을 안 말리고는 안 되겠더라고요. '아주머니 그 애 이리 보내세요. 너 이거 잡아라. ' 그래서 제가 손잡이를 내려 주었습니다. 이 손잡이가 아이보다 높기 때문에 내려서 맞춰주니 잡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정류장 가더니 그만 안 하려고 합니다. 나는 손잡이를 내려 잡기 때문에 참 편합니다. 그러나 그 애는 키가 작으니까 손을 들고 잡아야 되기 때문에 팔이 아픕니다. 그러니까 한 정류소 가다가 그만 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다움입니다. 호기심 때문에 한번 잡아보려고 말썽을 부리지만 그 애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아이의 순진함의 발동이지 오해를 하면 안됩니다.
아이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오늘의 부모들의 잘못된 양육자세를 제가 동조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거꾸로 된 이야기입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방치하는 잘못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다운 짓을 했다고 너무 칭찬해주지 마십시오. 아이다운 행동을 칭찬해 주어야 됩니다.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됩니다. 애가 조금 어색한 짓을 했는데도 아이다움이 있다면 그걸 교훈의 재료를 삼고 훈계의 재료를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이다움마저도 말살시켜 버리는 어른들의 행동은 많이 일어납니다. 한눈을 파는 애를 보고 왜 한눈 파느냐고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한눈 팔기 때문에 지금 정상입니다. 공원에 데리고 갔는데 한눈도 안 팔고 벤치에 어른처럼 가만히 앉아있고 꽃을 보아도 미소도 없고 만지지도 않는 그런 애가 칭찬 받을 애입니까 아닙니다. 꽃을 보면 만지려 하고 꺾으려고 하는 아이가 아이다운 것입니다. 그것을 적당히 경계해주고 주의해주고 감시만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욕심을 강요하지 말라
두번째는 부모가 못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어린이 주일을 앞두고 텔레비전에서 한 주간 동안 우리 교육문제를 많이 다뤘습니다. 강남의 어느 동네를 조사했는데 아이들 가운데 과외를 세 과목 이하로 하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제일 많이 하는 아이가 일곱 개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전부 세 개 이상씩 하는데 그 가운데 55%가 네, 다섯 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이 지금 아이들의 정서나 아이들의 그 모습을 순진하게 보지를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이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기자가 풍자를 재미있게 했습니다. 애가 학원을 대 여섯 군대를 돌고 캄캄한 시간에 지쳐서 돌아오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이 엄마는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애가 학원을 다 다녀왔구나. 내말 거역 안하고 내가 가라는 학원을 다 다니고 돌아왔구나. ' 학원에 갔다가 지쳐 캄캄할 때 들어오는 그 애를 맞이하는 그것이 부모의 즐거움인 것처럼 비치는 모습이 한심하다는 것입니다. 과외를 시키고 있으면서도 아이 편의 배려는 전혀 느끼지를 못하고 있는 부모들이 위기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상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노엽게 하고 있습니다. 집단 탈모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아과에 정신착란증을 일으키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의 탄식이 보도됐습니다. 두 살 짜리 아인데 유독히 말을 잘하더랍니다. 얼마나 말을 똑똑하게 잘하는지, 아이가 어학에 소질이 있는가 보다 싶어 영어학원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이 아이는 한국말도 영어도 둘 다 이상하게 하는 상황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일년이 지났는데 두 살 때보다도 이 세 살 먹은 애가 우리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두 살 때는 똑똑하게 우리말을 알아듣기도 하고 표현도 했는데 영어를 1년 하니까 한국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소유물로 생각지 말라
현대 부모들이 양육이라는 미명하에 우리 자녀들을 분노케 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이 대목을 좀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 우리 부모들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지는 않고 아이를 위한다고 하는 일들이 아이들을 노엽게 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회적인 잘못된 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내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재물이 여유가 있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무언가 우리의 환경에 소유가 높아 가는 가운데 자녀들까지도 소유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질서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느냐고 해서 자녀를 방치합니까 공중도덕을 해치고 남에게 폐해를 주는 자녀들의 행동을 보고 사기를 떨어뜨린다 해서 방치하고 있는 얼빠진 부모들이 한 둘이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교양과 훈계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구체적인 방법이 성경에는 없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어린이 주일에 부모된 어른들이 한번은 생각하고 인식해야 될 문제로 저 나름대로 몇 가지 정리를 해보고자 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할 때 너무 영적으로만 접근을 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교양과 훈계는 곧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으로 가르치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로써 어린아이들 앞에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가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기술적으로 가르칠만한 부모가 얼마나 되느냐 실제적으로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인 관점, 교육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생각을 해보면 됩니다. 이것은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사춘기 이전에는 반드시 부모가 사랑의 매를 들라는 것입니다. 사춘기 이후에는 매를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국부모들은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사춘기 이전에는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깨어질까 그저 과보호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소견도 들고 나름대로 자기 세계도 생기고 자기 판단력도 생긴 다 큰 아이들에게 매를 든답니다. 사춘기 이하의 아이에게 부모가 사랑의 매를 들지 않는 것도 위기이고 다 큰 아이들에게 매를 가하는 부모들의 모습도 위기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위기가 한국 가정에 팽배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춘기의 나이가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아이들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은 12세로 규정을 합니다. 12세 전으로 해서 12살 이하의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는 타이밍을 맞추어서 부모가 사랑의 매질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했을 때 '내가 거짓말한 것이 탄로 나면 큰일나지'라고 두려움이 있는 그 때 부모가 거짓말은 나쁘다고 사랑의 매를 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아이의 거짓말은 고쳐진다는 것입니다.
가정교육이 살아나야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 화란 선교사님 가정의 아이들이 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는데 전혀 떠들지를 않습니다. 어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하도 신기해서 어째서 당신 아이들은 예배 시간에 떠들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닥터 호체스가 제게 두 마디를 했는데 그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한 마디는 '가정의 교육으로 가능하지요'라는 것입니다. 애가 와서 예배에 떠들고 장난을 하고 예배에 방해를 하면 체크를 했다가 그날 돌아가서 애를 앉혀놓고는 '너 오늘 예배시간에 이런 행동했지, 그건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예배시간에 네가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 예배를 드릴 수가 없고 예배를 방해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이야. 네 잘못에 대해서 너는 벌을 받아야 돼' 회초리를 가지고 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아이 입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스리면 그 아이는 그때 했던 행동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체스 박사님의
두번째 충고의 말에 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분이 한국에 와서 8년을 살았는데 한번도 한국을 비판하는 말을 안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딱 한마디 내게 하더라고요. '목사님, 한국가정에는 교육이 없습니다. ' 아이들이 밖에 나와서 하는 행동을 부모들이 다루는 것을 보고는 교육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정교육이 없다는 이 말은 가정교육을 못 받고 있는 아이들이 불행하다는 말이 아니라 아이들을 바로 가르치는 못하는 부모들이 불행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일에 대해서 가르침이 있어야 되는데 다 큰 아이들에게는 매를 가지고 다스려서는 안됩니다.
전문가의 이야기를 우리가 좀 받아들여야 됩니다. 여기 사춘기 이하의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애를 아낀다고 사랑의 매질까지 아끼지 말기 바랍니다. 사랑의 매가 우리에게 필요하고 다 컸으면 대화와 모범으로 우리 자녀들을 가르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주님의 교양과 훈계가 묻어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른의 분풀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하는 그 말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묻어나가서 그 아이가 매를 맞으면서도 부모의 입을 통해서 성경말씀을 듣는 기회가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부모의 대화가 단순히 도덕적인 훈계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말씀이 묻어나가는 부모의 교훈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적절하게 해야 됩니다.
기회의 세대
미국의 닥터 보너라는 종교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사회에서 성공한 253명의 크리스천 전문인들을 실험조사 한 통계가 있고 또 스펜서 목사님이라는 분은 성경학자요 유명한 목회자로 자기 교인들 1,000명을 대상으로 실험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에 참 절묘한 통계가 나왔습니다. 유명인사들을 조사한 보너 박사나 교인들을 조사한 스펜서 박사는 서로 의논하고 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각각 별도로 조사를 한 것입니다. 전혀 서로 암시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스무살 이전에 예수를 믿은 사람의 통계가 닥터 보너의 조사에는 138명으로 55%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점점 늘어갈수록 예수를 믿게 되는 개종의 기회가 줄어들고 60세 이상은 한 사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닥터 스펜서가 조사한 1,000명 교인들을 조사를 해보니까 548명이 20살 전에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50세 이후에 예수를 믿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4명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 두 학자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위한 투자를 어린이들과 청소들에게 해야 되며 20세 이전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55%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이 점에서 새로운 각오와 어린이 교육을 향한 교회의 투자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요즘 연극을 봤습니다. '나 어릴 적에'라는 가족극입니다. 그 연극에 보면 배우가 나와서 이런 대사를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배우가 극장 천장을 가리키면서 '얘들아 저 하늘에 별을 보아라'고 했습니다. 내가 관람하러 갔던 그 시간의 관객들이 80%가 어린이들입니다. 어린이날을 기해서 만든 연극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많이 초청되었습니다. 그런데 배우가 '얘들아 저 하늘에 별을 보아라'고 손을 가리킬 때 어린이 관객들은 전부 뒤를 다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어른들을 보니까 한 사람도 안 돌아다보고 있더라고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대사가 여러 번 나옵니다. 앞에 장면에도 또 나왔는데 그 배우가 저 하늘에 별을 보라고 할 때마다 아까 돌아보고 속았는데도 또 돌아봅니다. 그만큼 순수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한번은 커녕 안 돌아봅니다. 왜 안 돌아봅니까 안 돌아보도록 벌써 나사가 지금 녹이 슬어 있습니다. 의식이 굳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밭도 어른들은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20살 이하의 청소년들의 방황과 환갑이 지난 사람들의 방황은 다릅니다. 청소년들의 방황은 해소할 가능성도 많고 포기할 수도 있는데 어른들의 방황은 포기가 잘 안됩니다. 어른들이 갖고 있는 문제는 전환이 잘 안됩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문제는 전환이 빨리 온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날의 교회 프로그램은 어른들이 직접적으로 어린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복음을 전해야 되는 이 막중한 사명 앞에서 55%의 가능성이 있는 20세 이하의 이 소년세대들, 어린이 세대들을 향한 복음 전도에 우리는 오히려 10%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는 이것이 우리 교회의 불균형인 것입니다. 어린 세대들을 노엽게 하고 있는 어른 세대들의 죄를 어른들이 인식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들을 향하여 주의 교양과 훈계로 다가가야 합니다. 어른들이 하는 모든 행위 속에, 우리 부모들이 하는 말속에, 행동 속에 주님의 교양과 훈계가 묻어나가야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 자녀들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을 받을 수 있는 줄 압니다.
88올림픽 때 온 세계가 주목했던 프로그램은 금메달을 따는 장면도 아니고 수 천명이 나와서 매스게임 하는 장면도 아니고 100명이 넘는 무희들이 나와서 춤추는 장면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음향이 꺼지고 조용한 그 시간에 꼬마 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리는 88올림픽의 개막식 장면은 미국 NBC TV에서 서 서울 올림픽의 대표적인 상징이라는 말을 하고 세계 언론들이 헤드라인으로 세계평화의 희망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계언론들이 감탄한 것은 어른들의 행동이 아니라 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리는 그 장면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과 희망은 어린이에게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 세대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어른들이 욕심을 절제할 줄 알아야 됩니다. 어린이날을 맞아 성도들 가정의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충만히 임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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