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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마땅한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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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육신적으로 태어나고 만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으로도 태어나고 만들어지는 존재입니다. 육신적으로 볼 때는 잘 만들어지는 것과 잘못 만들어지는 것의 차이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크게 만들어지고 작게 만들어지는 것의 차이, 잘생기고 못생기고의 차이일 뿐이지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잘 만들어지는 것과 못 만들어지는 것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정신적 사고들이 만들어져 가느냐는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있습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는 것은 중요한 과제입니다. 인간을 만든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담과 하와를 직접 만드시고 그 이후의 인간들을 만드는 일은 인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기쁨과 보람에 동참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한 인간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떠한 성품으로 만들어지느냐"하는 것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이순신 장군이나 연산군 같은 사람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 역사가 어떻게 됐을까요 알렉산더나 공자가 없었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애굽에서 400년 동안 계속된 이스라엘의 기도를 듣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취하신 응답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한 아기를 주신 것이 응답이었습니다(모세). 죄악으로 죽게된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역사도 한 아기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루셨습니다(예수 그리스도).
인간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은 아름다운 삶의 목표이고 기쁨과 보람을 가지고 수준 높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한 선비가 한양을 다녀오다가 나루터에서 이웃 마을 친구의 외아들을 만났습니다. 선비는 배에서 내렸고 외아들은 그 배에 올랐습니다. 배에서 내려 얼마를 걷던 선비가 산언덕에서 잠시 쉬며 강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그 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순식간에 배가 뒤집어지며 이내 배도 사람도 모두 강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까 선비는 너무 놀랐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크게 탄식하다가 이내 친구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친구는 사실 조정에서의 꽤 높은 벼슬도 마다하고 고향에서 학문만 전념하여 살아가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친한 친구가 갑자가 찾아오니 그는 기뻤습니다. 즐겁게 친구를 환영하며 술과 안주를 준비시켰습니다.
 그럴수록 선비의 마음은 무거워졌습니다. 그래도 도저히 숨길 수 없어 선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방금 목격한 사실을 얘기했습니다. "저... 자네 아들이 강물에 빠져 죽었다네. 내가 워낙 멀리 있어서 도울 수도 없었고 그 못돼먹은 사공이 어찌 그리 많은 사람을 태우던지... " 선비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죄이기도 한 양 말을 맺지 못하여 사공을 원망했습니다. 외아들의 아버지는 선비의 얘기를 조용히 들었습니다. 지극히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던 아버지는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얘기에 눈가에 가벼운 경련을 보이다가 이내 원래의 표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친구가 들려주는 마지막 얘기에 귀를 세우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얘기를 빨리 들려주어서 고맙네. 그러나 너무 걱정 말게. 내 아들은 살아 돌아 올 걸세. 그러니 술이나 들며 오랜만에 얘기나 나누세" 선비는 친구의 태연한 이 모습에 크게 놀랐습니다.
 그가 평소에도 인격 높은 사람인 줄 알고 있었지만 아들이 물에 빠져죽었다는데도 태연하기만 하니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조차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죽었던 외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두 사람에게 조용히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선비는 너무도 놀라 친구 아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예 어르신을 뵙고 저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사공이 정원 이상으로 손님을 태우기에 그만 내렸습니다. 평소 저의 아버님께서는 위험은 스스로 피해야 한다 라고 제게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을 좇아 따라했을 뿐입니다. " 이것이 살아있는 가정교육이 아니겠습니까 그 친구는 아버지와 그 아들의 행동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한 인간을 위한 가정교육이 삶과 죽음의 길에서도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일간지에서 몇 해 전에 조사한 통계자료입니다. 자녀들의 가출이유를 분석한 통계입니다. 부모와의 갈등 47. 9%, 친구 따라 20. 4%, 개인적 요인 19%, 돈벌기 위해 8%,기타 4,7% 이 통계자료에 의하면 부모와 갈등 때문에 가출하는 자녀들이 거의 48%나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문제는 단순히 자녀들 자신의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부모의 문제가 단연 으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모가 부모의 책임을 다하며 잘 양육하기만 하면 자녀들의 문제는 많이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입니다.
"게리 체프만" 이라는 사람과 "로스 캠벨"이라는 두 사람이 함께 지은 책 "자녀를 위한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 두 사람은 부모가 자녀들을 위하여 5가지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 부모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늘 허전한 마음으로,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 이런 부조화가 발생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고유의 언어체계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듯이 사랑은 전달하는데도 독특한 방식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아이는 사랑을 느끼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으며 자기의 사랑을 5가지 방법으로 이해하고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맞는 사랑의 언어를 부모가 구사해줄 때 자녀는 사랑을 가장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녀들이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면, 부모가 자녀들이 이해하는 사랑의 언어로 구사하지 못한다면 자녀들은 사랑 받지 못한다고 느낄 것입니다.
채프먼과 캠벨이 말하는 자녀를 위한 5가지 사랑의 언어 중 제1의 사랑의 언어는 육체적인 접촉입니다. 안아주고 키스를 해준 아기들은 육체적인 접촉 없이 오랫동안 지낸 아기들보다 훨씬 건강하고 안정된 정서적인 삶을 발달시킨다고 합니다. 육체적인 접촉은 가장 강한 소리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현대에만 강조되는 것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히브리인들도 예수님께 자녀들을 데리고 나올 때 "만져주심을 바라고" 나왔다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10:13-16). 자녀들에게 신체적인 접촉의 사랑의 표현은 중요한 것입니다. "스킨 쉽"이라고 영어로 표현하죠. 저희 집 큰 녀석이 사내아이인데 가끔씩 안아주려고 꼭 안아주면 아빠 가슴을 양손으로 밀어붙이면서 한다는 말이 "아빠! 숨 막혀요. 아들을 왜 죽이려고 해요!" 원 멋도 없고 뻣뻣하고... 사내녀석은 그래요. 김새게 해요. 답답한 걸 못 견뎌해요. 그래도 저는 자꾸 안고 볼을 깨물고 그럽니다. 이 녀석이 그러면서도 지 동생만 안아주면 질투하거든요.
제2의 사랑의 언어는 인정하는 말입니다. 자녀들이 노력할 때 격려하는 말을 해주면 더 빨리 학습한다고 합니다. "아주 비슷해. 잘했어. 정말 훌륭해. 네가 해냈어!"와 같은 표현들은 아이들이 빨리 학습하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정서를 풍부하게 만듭니다.
제3의 사랑의 언어는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현대의 생활은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점차 줄어드는 것을 경험합니다. 부모들도 바쁜 세상을 살지만 아이들도 학원에 묻혀 삽니다. 그러다보니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함께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이 자라가면서 아빠를 보고 "아저씨! 누구세요" 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라는 현실이 각박해진다는 사실이 웃지 못할 씁쓸함을 던져줍니다.
저는 요즈음 우리 아이들에게 한 가지 설득시키느라 고생을 합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엄마, 아빠! 우리는 왜 일요일이 없어요" 하는 겁니다. 다른 집은 토요일 오후만 되면 가족이 일요일을 기다리는데 제 아빠는 월요일이 휴일이니까, 월요일은 또 학교에 가야죠 함께 만날 시간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설득시키느라 진땀을 뺍니다. 자기들이 이해할 날이 올 때까지... 함께 하는 것, 사랑의 언어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하시는 사랑의 언어 역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제4의 사랑의 언어는 선물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의 표현을 선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말할 수 없는 많은 선물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선물의 질이나 양을 따질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정성이 들어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도 사랑의 선물이 곧 사랑의 언어입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 아동부예배 때 보니까 선생님들이 아주 조그마한 사랑의 케잌을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주던데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선생님과 학생사이의 사랑의 언어가 케잌처럼 달콤하게 전해집니다. 선물이 사랑의 언어입니다.
제5의 사랑의 언어는 봉사입니다. 열심히 공부할 때 먹을 간식을 만들어주고, 실내화를 빨아주고, 교복을 다려 입히고 하는 이 모든 봉사가 사랑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봉사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봉사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목적이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의존적 사람 내지는 당연히 받아야만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소극적 성품이 되기 쉽습니다.
이 모든 사랑의 언어는 또다시 남을 위해 베푸는 이타적 언어로 발전되게 해야합니다. 이 사실 또한 가르침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모든 사랑의 원리가 어디에서 나오느냐하는 문제입니다. 무엇을 기초로 세워지는 가르침입니까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모든 가르침의 기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가 있다할지라도 그 근본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그것은 곧 퇴색되어버릴 것입니다. 순간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 교육은 헛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잠언기자는 잠언 22:6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중요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오늘 에베소서 6:4말씀에 나오는 교양과 훈계라는 말의 의미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키우기 위한 교육적인 행위가 담겨져 있습니다. 굳이 이 두 가지를 구분한다면 교양은 주로 예방적인 차원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훈계는 주로 치료적인 차원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우선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아니하도록 미리 예방적인 차원에서 교양이 필요합니다. 요즈음 일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본 입니다마는 그래도 배울점은 있습니다. 한때 일본에서는 "오아시스"운동이라는 가정교육이 있었습니다. "오"는 "오하이오 고자이마스(안녕하십니까)", "아"는 "아리가도 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 "시"는 "시스레이 시마시다(실례했습니다)", "스"는 "스미마셍(죄송합니다)". 늘 가정에서 이런 "오아시스"교육을 시키는 작은 운동에서 시작해서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 간다고 합니다. 율곡 선생의 가문에도 "훈요17조"라는 예의범절이 있어 자손 대대로 그 범절을 지킴으로써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율곡의 후손임을 알아볼 수 있게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릴 적 이치도 모른 채 무작정 외워둔 구구셈이 평생 유익을 주듯 가정 안에서 가르친 삶의 가치는 자녀들의 평생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또 치료적인 차원에서 훈계도 필요합니다. 아이들의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게해서는 안되고 바늘도둑을 소도둑으로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분명히 매를 들어서라도 알게끔 해주어야 합니다. 요즈음 장안에서 화제가 되고있는 "친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장 동건, 유 오성이라는 배우들이 등장하는 최고의 흥행작으로 극장마다 엄청난 매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보게되면 학창시절을 불성실하게 보내면서 조직폭력배로 빠져버리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인데 물론 배경은 80년대부터 시작됩니다마는 그 영화 중반쯤에 주인공 준석 이라는 친구가 하는 말 가운데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내가 중학교 때 가출했었는데 집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때 어른 중에 누가 옳은 말 한 마디만 해주었어도 나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면서 어른들에 대한 원망을 털어놓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반드시 훈계가 있어야 합니다. 나중에 오히려 원망 듣지 아니하려면 필요한 훈계는 당연한 것입니다. 아니, 원망이 문제가 아니죠. 성경이 말씀하는바 마땅히 가르칠 바가 훈계입니다. 눅 2:52에는 기독교 교육에 아주 기본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나며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하는 말씀입니다. "키가 자라며"하는 말씀은 "체육", "지혜가 자라며"하는 말씀은 "지육",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워 가더라"는 "종교",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더라"는 "도덕". 이 네 가지 측면으로 우리는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육체적인 것도 중요합니다. 계속 영양을 공급해야 합니다. 균형 있는 영양, 잘 먹여야 건강합니다. 더구나 입맛은 부모가 만드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가 아닙니다. 먹어야할 것을 먹도록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적으로는 많은 지식을 주어야 합니다. 들어야할 것은 듣고, 보아야할 것은 보고, 경험할 것은 다각도로 경험하도록, 그러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가 아닌 교육해야 할 마땅한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입맛은 4살 때 결정이 난답니다. 그 입맛대로 일생을 사는 겁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 40이 넘으면 4살 때 먹던 음식으로 입맛이 돌아간답니다. Original point로 확 돌아간다는 겁니다. 문화인류학에서 내리는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로 우리의 자녀교육은 어릴 때 시작할수록 유익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교육할 것입니까 마땅히 가르칠 바를 교육하되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의 모든 자녀들이 마땅히 배울 바를 배워서 이 나라에,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들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하며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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