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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부모된 도리를 다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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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부흥회 마지막 날 저녁집회 때 강사목사님 말씀을 받으면서 은혜도 많이 받고 생각도 많이 하였습니다.. 부모가 뿌린 축복의 씨앗은 자녀가 거둔다는 말씀은 공감도 되고 부모된 내가 자녀들에게 정말 소중한 유산(신앙)을 남기고 가야 하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강사목사님이 우스개소리로 아들만 셋 있는 우리 가정을 놓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들만 셋 있는 집은 둘째 아이가 항상 관심거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첫째와 셋째 사이에서 큰아이는 큰아이라고 첫정이라고 사랑 받고, 셋째는 막둥이라고 사랑 받고, 큰아이는 첫째니까 옷을 사고 신발을 사고 신경 써서 좋은 것(우리는 주로 질기고 오래 입을 것)을 사주고, 막내는 이미 형들이 입느라고 다 헤어진 옷 신발 또 신기기가 안쓰러워서 다시 새것 사주고. 둘째는 늘 중간에 끼어서 헌 옷만 물려 입고 참 딱한 아이가 둘째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요즘 우리 둘째가 ‘반항아’기질을 보이기 시작해서 내심 걱정하며 기도중입니다. 예전엔 형이 입고 다니는 것 자기 것이 되었다고 좋아하며 형 것도 잘 입고 신발도 물려 신고하더니 요즘은 가끔 ‘왜 나만 헌것 입어야 하냐고~’하면서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엄마가 큰맘 먹고 둘째 아이 메이커 신발을 사주었다고 해서 잘했다고 말하고는 아이가 신고있는 신을 보니까 걸어가는데 뒤꿈치 가 들락날락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이 알뜰한 엄마가 그 비싼 신발을 둘째 아이만 신기려고 살 리가 없었습니다. 셋째까지 신기려고 그리고 애 발이 얼른 커지니까 오래 신으라고 발 사이즈 보다 한두 치수 큰 것을 사 신긴 것이었습니다.
요즘에 이 아이가 무슨 물건이든 입으로 가져가서 물고 있는데 ‘지저분하다’고 야단을 치면 어른 뺐다가는 어느새 다시 자기 손가락을 물어뜯는데 손톱 나오는 쪽이 다 헐어버리도록 손가락을 물고 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육학 책을 보니, 아이가 손가락을 물어뜯는 증상의 원인이 단 한마디로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욕구불만. ”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어린아이 같지만 엄마아빠가 형에게 보이는 관심, 동생에게 쏟는 애정의 표현만큼 자신에게는 보여주질 않는다는 점이 아이에게 감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한 번 밖에 놀러 나가면 집에 들어올 생각도 안하고 닥치는 대로 동네아이들을 집으로 끌고 들어와서 잔뜩 어질러놓고 나가고, 요즘엔 뭐라고 야단을 치면 주먹을 불끈 쥐고 막 덤벼들기까지 합니다. 경험 많으신 인생의 선배들께서 이 아이를 어찌하면 좋을지-저를 좀 지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부모마음에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차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세 아이를 똑같이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을 받는 당사자는 느낄 수가 없다고 하는 데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이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도 병이나 동생 못지않게 중요하다’ 는 사실을 느껴보고 싶은 것입니다. 야단맞을 때 이 아이가 하는 말. “엄마, 아빠는 나만 미워하잖아~”한다. 그 말이 얼마나 가슴 아픈 소리인지 모른다. “사랑결핍!” 여기 이 자리에는 부모님 입장이신 분들도 있고 자녀 입장이신 분들도 있다. 혹 여러분 중에는 ‘사랑결핍증’으로 몸살을 앓고 계시는 분들은 없습니까. 지금은 내가 장성하여 어른이 되고 나도 자녀를 낳아 키우고 있지만, 어린시절 반드시 사랑을 받았어야만 했던 시기에 부모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미 2,30대 청년이 되어 이제 막 가정을 이루었거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몸과 마음의 독립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어린시절, 학창시절 부모님에게서 사랑을 충분히 공급 받고 자라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의외로 우리 곁에는 사랑결핍증 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몸이 상한 상처보다 더 크고 치유가 까다로운 것이 마음에 받은 상처라고 합니다. 사랑결핍으로 말미암아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사회 적응이 되질 않고 훗날 가정을 꾸려가면서도 온전하고 건강한 가정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짜증을 잘 내고 매사에 부정적, 불평불만이 가득하고 누구에게도 정을 주질 못하고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질 못하는 이런 사람은 ‘지적 받고 책망 받는다’고 나아지질 않습니다. 다만 사랑결핍은 “사랑보충”으로 재울 수 있을 뿐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현대사회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정붕괴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90%, 미국에서는 50%이상,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30%를 넘어서고 있는 이 수치는 “이혼율”이다. 궁극적으로 가정파괴의 현실은 ‘사랑 없는 가정’에서 자라난 세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합니다. 채워지지 않은 사랑이 “상처 받은 인격”을 만들고 그 상처 받은 인격체인 한 인간은 ‘좋지않은 일’, ‘옳지 못한 일’, ‘바르지 않은 일’을 만들어내는 장본인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모내기’ 철이 되겠지만 모내기는 모판에서 곱게 자란 파릇파릇한 벼를 논에다 옮겨 심는 작업입니다. 헌데 가뭄이 몇 달간 계속되어 모판에서부터 발아가 잘 되질 않던가. 새싹이 움트고 자라나는 과정에 너무 춥던가, 너무 덥던가, 수분이 부족하던가 하면 그 벼는 좋은 낱알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법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사실 모판에 뿌려진 볍씨와 같다. 볍씨에 필요한 것은 적절한 수분과 온도입니다. 너무 메마르면 죽는다. 가능성이 말라 죽고 맙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수분과 적절한 온도, 이것이 우리 인생에겐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묘약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치료약이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랑결핍의 문제는 사랑보충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도 인생의 심각한 문제를 ‘십자가 사랑’이라는 묘약으로 주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문제의 열쇠입니다. 특별히 부모 자녀간의 문제는 사랑으로만 풀어갈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의 문제, 특히 세대간의 골이 가로막혀 있는 부모-자식간의 문제는 사랑으로만 메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모는 자녀들을 향한 “사랑 보충하기”에 투자를 시작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충분히 내 아이들에게 공급되도록(모내기를 하기에 중분한 물리 메마른 논바닥에 흘러 들듯이)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100이라고 할 때 자녀가 느끼는 사랑은 고작 10밖에 안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사랑보충하기는 없는 사랑을 붓는 방법이 아니라, 있는 사랑이 충분히 느껴질 수 있도록 “전달하는 방법을 개발하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 특히 부모의 자녀사랑은 전달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떤 분이 말하길, ‘많은 부모의 사랑이 마치 부뚜막의 소금과 같다. ’고 하였다. 부뚜막의 소금은 음식에 들어가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아닙다. 소금이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음식이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내가 부모로서 너를 사랑하고 있다. ’고. 그 자녀의 삶에 사랑이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너도 커서 부모가 되어보면 안다. ’라고만 말할 줄 알 뿐이다. 하지만 이 자녀가 커서 부모가 된 다음에는 이미 사랑결핍의 인격을 가진 부모이기에 그 가정에서 자라는 자녀들이 사랑을 알고 느낄 순 없게 되고 맙니다. 아이가 사랑을 못 느끼는건 철없는 아이책임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라고 말할 줄만 알아서는 곤란합니다. 부모 책임입니다. 이건 모든 사랑의 원칙입니다. 부부지간에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사랑을 모르는 것은 남편책임이 아니라 아내 책임입니다. 아내가 남편 사랑을 모르는 것도 아내 책임이 아니라 남편 책임입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걸 몰라-’라는 말은 먹혀 들지 않습니다. 모든 사랑은 상대방이 충분히 느끼고 알 수 있는 수준에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느낄 수 없는 이유는 부모가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뿐 아니라,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부모를 존경하기는커녕 부모를 사랑하지도 않는 자녀들이 생각 밖으로 너무 많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엡 6:1~4은 부모와 자녀간에 꼭 지켜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4절 말씀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되어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모들은 ‘철없는 아이가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시기를 ‘그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 부모된 이들이 자녀들을 노엽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신이 완벽한 인격이라는(성숙한 인격이라는) 전제 하에 자녀를 대합니다. 그러기에 무의식 중에 ‘네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래!’하고 무시하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인격이 있다는 것을 성경본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 ” ‘내 자식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자식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난 내 자녀를 노엽게 한 적도 없고 내 자녀는 부모에게 노여워할 자격도 없습니다. ’하는 식의 사고방식이 우리 자녀들과 부모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이를 인격체로 대하지 못한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참고 참다가 버럭 소리를 질러버리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소리지른다고 아이를 미워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 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사랑을 표현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녀가 “내 말을 안 듣는다. ”고 짜증이 나면, 거의 큰소리로 제압을 하곤 하였습니다. 좀더 흥분이 되면 말도 함부로 막해대기도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그건 자식교육도 아니고 사랑의 충고도 아닙니다. 다만 “내 감정풀이의 대상”으로 자녀를 대하였을 뿐입니다. 이렇게 해놓고는 부모는 곧 잊습니다. 자녀도 곧 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녀의 무의식 저 깊은 곳에 ‘비인격적인 언어’나 ‘억압적인 분위기’가 “상처”로 자리잡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자녀가 커서 사회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미칠 만큼 심각한 상처가 된다고 합니다.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내 자녀라고 함부로 내 감정을 쏟아 붓는 일은 그 소중한 인격에 폭력을 가하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고전13장에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랑은 이 무례함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지금 부모의 뜻대로 살아주질 않는 주된 요인은 바로 이 상처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따스하게 사랑을 표현해 주는 일도 없었을 뿐더러 아이의 감정따위는 아랑곳하지않고 자기 인내의 한계점 앞에 아이를 세워놓고 ‘하나 둘 셋 할 때까지 빨리-그렇게 하지 않으면-’식으로 몰아붙여왔다는 얘기다. 본문에서 ‘자녀를 노엽게 할 줄만 알았지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할 줄은 모르는’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길 ‘아이 앞에서 난 네 부모니까 이렇게 함부로 말할 자격이 있어’하면서 일방적으로 몰아부치지 말고 말씀으로 양육하고자 하는 신앙중심의 자세를 갖추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아버지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이상적 아버지상으로 기억할만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 믿음의 부모였고 그 믿음의 대를 끊지 않고 자손들에게 이어져 내려가게 하여서 축복 받는 후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은 신앙 있는 부모가 믿음으로 바로 살고, 위하여 기도해준 덕에 복 받는 후손들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준비를 해 두셨습니까 자녀들이 말하길 “부모님은 날 위하여 무얼 해 주셨습니까. 무얼 주고 가시겠습니까”할 때 “이 녀석아 낳아주고 먹여주고 키워주었으면 됐지 무얼 더 바라느냐”고 윽박지르기만 하겠는가 이렇게 답해줄 수 있는 부모가 되시길 바랍니다. ‘얘야, 이 에비는 널 위해 해 줄 것이 없구나. 하지만 난 널 위해 기도와 그리고 이 믿음을 남기고 싶단다. ’ 여러분, 돈 많이 남기고 간 부모는 자식을 망치는 부모라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을 남기고 기도(눈물의)를 남긴 부모는 부모된 도리를 다한 부모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창 18:18~19보면 아브라함이 어떠한 부모로 부모도리를 다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지키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즉,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택함을 받은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 아브라함이야말로 자기 자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말씀 잘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야 복 받는다. ”고 가르칠만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시길 바란다. ‘나도 잘 되고 내 후손도 잘 되고-’ 이렇게 된다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뭔가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릴 보실 때 ‘아- 내가 보니 000는 내가 축복을 주면 자기뿐 아니라 자기 후손들에게도 “말씀대로 살아라”하며 이 복을 물려줄 줄 아는 사람이겠구나’하시면 될 일이다. “축복의 조상이 되시길 바란다. ” 구약에는 축복을 물려주는 부모된 도리가 나온다면 신약에는 대표적으로 “용서하는 부모”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이 등장하고 있다. 자녀들이 부모를 향하여 노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언급하였듯이 ‘윽박지르는 것’과 ‘무시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짧은 지식과 감정으로만 강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너그러운 사랑, 넉넉한 용서’에 대한 체험이 있지 않으면 자녀들의 상처는 크게 자리잡을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신약에 등장하는 모범부모는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하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 아버지는 집 나간 탕자, 아버지를 배신하고 허랑방탕하여 한없이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상처를 안겨준 불효자 중의 불효자였다. 알고 계시듯 이 탕자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 탕자를 기다려주고 용서하고 즉각적인 회복을 베푸셨다.
부모는 “사랑”이다. 주의 교양과 훈계는 말씀 안에 다 있다. 그러므로 부모가 부모된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자녀에게 베풀 수 있는 교양과 훈계는 곡 “말씀”에 근거한 용서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여러분, 자녀들은 부모의 훈계에 무조건 반발하는 게 아니라, 즉 훈계를 포기한 부모는 부모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훈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매를 들 수도 있다. 문제는 훈계, 책 벌 자체에 자녀들이 노여워하는 게 아니라 부모에게서 “말씀의 권위가 없는 채 말을 위한 말, 벌을 위한 벌만을 주고 끝내려는 모습이 모일 때 상처를 받고, 실망을 하더라는 것이다. ”
여러분, 자녀에게 존경 받는 부모가 되시길 바란다. 그것은 물질, 권세, 명예가 아니라, 그것은 “영적권위”이다. 오늘 본문 4절은 “아이들 함부로 야단치지 마라. 화나게 하지 마라”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말씀을 바탕으로 무장해서 때리면서도 사랑과 존경을 받는 그런 부모가 되라”는 말씀이다. 우리 자녀들은 부모의 기도 때문에 더 잘하는 자녀들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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