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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자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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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이 푸른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5월에는 국가적으로도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등 가정적인 날이 많습니다. 가정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어딘지 모르게 푸근한 느낌을 줍니다. 그곳엔 부모님의 사랑이 베어있고 자녀들의 해맑은 웃음과 희망이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말세에 나타나는 커다란 징조 중에 하나가 자녀들이 점점 부모 말을 듣지 않고, 또 젊은 세대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현상이갈수록 확대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데, 요즈음 우리가 현실적으로 심각하게 보고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 하면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로 가부장적인 가족제도에서의 어른들이 갖는 권위가 너무 강압적이라는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은 군사부일체라 해서 부모의 귄위, 또는 선생님의 권위가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권위가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에 질서가 무너지고 앞 뒤 선후 도 없이 모두가 제멋대로 굴러가는 듯한 혼란이 왜 생겨나는지 아십니까 저는 일차적으로 부모의 권위, 특히 아버지의 권위나 스승의 권위가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그 권위를 시행하는 어떤 방법, 절차의 잘못을 찾아내려 하기보다, 아예 권위를 가지니까 문제더라 하고 모든 권위에 대하여 반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 이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좋은 예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교육에서 바로 이러한 권위주의적, 일방통행적 주입식 교육에 반발해서 소위 민주주의식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개혁한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 몬테소리 박사입니다. 몬테소리 박사는 그 동안에 있었던 주입식 교육과 기계식 교육, 그리고 강압적, 일방 통행적인 교육을 가르치는 쪽 입장에서 하지말고 받는 쪽 입장에서 하자,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교육의 내용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방법을 택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교육방법론에 있어서 상당한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육이라는 것은 효과면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 학생에게 효과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피교육자가 스스로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결정하는 것만큼 이상적인 것이 없지요. 그러나 이런 교육 철학이 가능하려면 먼저 인간은 본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론이라는 것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절대적 부패와 무가치와 무능한 존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주면, 얼마든지 아름답게 피어나고 가치있고 선한 삶을 살 주 있다고 생각하는 몬테소리 박사의 인간이해와 성경이 지적하는 인간론과는 근본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을 줄 때 그 사람이 동의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그냥 선포라는 형식으로 전달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성경의 내용이 진리이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이 성경을 듣는다고 그에게 효과가 바로 생긴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전도라는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6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린도전서 1:26) 라고 합니다. 전도는 설득이 아니며 토론이 아닙니다. 설명도 아닙니다. 선포입니다. 그래서 전도같이 미련한 방법이 없습니다.
요즘은 부쩍 늘어난 것 같은데 역이나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는 거의 예외없이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긴 장대에다 "회개하라" 이렇게 깃발을 서 붙이고 나이 많으신 할머님이나 할아버님이 버스에 올라 오셔서 구원에 대한 선포를 큰소리로 말씀하시고 내려가시기도 하셨고, 또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도 들으셨을 겁니다. 자칭 교양있는 신자라고 생각한다면 좀 창피하다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왜 기독교를 저런 식으로 전하는가, 차라리 그러지 말고 말쑥하게 차려입고 "차라도 한잔 하실까요" 하면서 "선은 이렇고 후는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라고 이야기 한다면 잘들을텐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맞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토론할 문제가 아니며 설명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방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받는 사람이 동의해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동의해서 되는 것이지만 진리라는 것은 과반수 투표로 많은 사람이 동의해서 결정하는
결론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 갈릴레오라는 사람이 지구가 자전한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재판에 회부당했습니다. 자기의 주장이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계속 주장하다가는 목숨을 잃을 것이니까 할 수 없이 부인하고 나오면서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습니다. 내가 돈다고 해서 돌고, 내가 안 돈다 그런다고 해서 안도는 것도 아닌 바에야 뭐 때문에 이 원수들하고 된다 안 된다 싸우면서 억울하게 죽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게 갈릴레오의 배짱인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재판에서 지구가 돌지 않는다고 주장하더라도 여전히 지구는 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권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부모는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스승의 권위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부권이나 사도권은 민주주의 식으로 자녀들이나 학생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뭐라던 부모는 부모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요, 스승은 스승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선택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권위의 문제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의사가 환자에게 수술하는 것을 민주주의 식으로 합의해서 하자 한다고 의사 아닌 다른 사람을 대신 시킬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약사가 환자에게 약을 지어주는 것도 그래요.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전문적으로 약을 다룰 수 있도록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합의해서 약을 지어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사도 사람이기에 실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환자의 가족들이 워낙 의사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의사노릇 하는 것도 힘드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환자나 가족들에게 수술하기 전에 동의서를 요구하는 것도 알고 보면, 환자들의 가족들이 시술한 의사들에게 반발을 하고 보상을 요구하니까 법적으로 그 책임을 지지 않으려다 보니 그렇지 정말 의사로서의 권위는 수술해야할 환자는 무조건 수술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분야에는 각기 나름대로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그 분야에 권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권위는 그것을 전달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강압적일 수밖에 없고, 혹독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지켜지고 시행되는 과정에는 그것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노여움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4절이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노여움은 어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노여워할 정도로 강압적이거나 강제성을 띄는 방법은 분명 고쳐져야 합니다.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훈육-가르치고 인도하고 꾸짖고 또 필요하다면 매를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애와 인내와 성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문제는 훈육하고 꾸짖을 때, 부모가 가진 권위를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려다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경우를피하라는 말씀이지 자녀를 꾸중하지 말라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가령 제 딸이 학교에서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목사의 자식이 왜 공부를 잘 못하느냐고 생각할까봐 "누구집 애는 2개 밖에 안 틀렸다는데 너는 5개나 틀렸다!"라고 하면서 아이를 꾸중한다면, 애들은 분명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나를 통해서 자기 자존심을 채우고 싶어하는 거로구나!, 우리 부모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는 걸까라는 의구심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매질하는 것이 옳으냐 나쁘냐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만, 성경에는 분명 매질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사실 채벌 문제가 등장하게된 배경에는 매질 자체가 아니라 그 매질이 선생님의 자존심 세우려는데 동원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제자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가해진 체벌은 체벌할수록 그를 사람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님으로 모시고 있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반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녀는 부모의 권위에, 학생은 스승의 권위에 반발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아버님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긍휼과 인내로 매질하는 것처럼 부모나 선생님도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매질이 아니라 사랑으로 꾸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서 자녀들을 양육할 때는 주안에서 하라고 한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부모가 부모로서의 정당한 권위를 가지려면,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는 부모된 우리가 먼저 삶의 가치와 목표를 성경의 표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런 표준과 목표는 주님께 대한 헌신의 척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대한 헌신은 결과적으로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목표를 제공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하는 여러분의 행동, 여러분의 태도, 여러분의 판단, 여러분의 이상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여러분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들 때문에 자녀들의 일생이 망쳐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어린 아이를 세상에 보내실 때는 그 나름대로의 살아갈 수 있는 재능을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언제나 아이들을 자기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것을 기준으로 키우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때론 지나친 욕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던 시절로 돌아가 보세요. 우리의 말이나 행동 그 어느 것 하나 알게 모르게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분의 자녀는 그들이 장차 사물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방법을 여러분의 무릎에서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그에게 해 준 말을 들을 수도 있고, 듣지 않을 수도 있으나, 아이들이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정말 사랑하는 부모라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결혼하지 않았을 때는 자기 기분에 따라 활동하거나 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생기면 그 때에는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면 두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라 6명이 함께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신랑과 신부의 생각과 생활 태도에 그들 부모님들의 의식과 태도가 자기도 모르게 베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있는데도 과거와 달라진 점이 없는 부모라면 그는 이미 부모로서의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안에서 양육한다는 말씀은 부모된 자신이 먼저 주님의 양육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최악의 실패는 부모됨의 실패입니다. 한 사람이 성인이 되어 어른이 되면 그 사람을 통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른이 되면 스스로 독립된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독립된 존재로 자유를 가졌다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통제하고 조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자녀들도 자라나면 제멋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잘 되려면 부모님부터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그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 해야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겉으로 열심인 체 해도, 자녀는 그것이 진실한 열심인지 아닌지를 너무나 쉽게 알아차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자기 자신의 양심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자녀들의 눈은 결코 속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은 부모의 가식을 너무도 분명하게 빤히 들여다 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자녀들의 순결하고 고상한 삶을 위하여, 스스로 죄된 것들로부터 구별하여 진실로 거룩하기 위해 저 옛날 에녹이 했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에녹을 보세요. 그는 아들을 낳은 후에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창 5:21-22에 보면,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에녹이 65세가 되기까지의 그의 생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간은 분명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이 기록은 아주 특수합니다. 왜 에녹이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아무런 말이 없다가 자녀가 생긴 후부터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자기가 부모로서의 책임을 지기에는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에녹이 자녀가 생기면서부터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최초로 하늘로 들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새길 수 있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여호와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면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먼저 앞에서 행하고, 자녀들로 하여금 여러분 뒤를 따르게 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생활이 실패하는 이유는 부모들이 자기들의 자녀들에게는 죄와 불의와 가까이 말고 주님과 함께 동행할 것 기대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자녀를 잘되게 하려면 부모된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자녀를 어떻게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 어떻게 빚을 것인가는 여러분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께 어떻게 교육을 받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부모님은 세상적 사고방식과 세상적 가치에 따라 살고 있으면서 나의 자녀를 역사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훌륭하게 키우겠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 우리의 자녀들이 잘되기를 열심히 빌고 기도하면서도 실상은 우리의 자녀 교육을 모두 세상에 맡겨 버렸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만을 터득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듯이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 세상에 살아남는 법만을 배우도록 요구하고 있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친 적이 별로 없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녀에게 누구를 가장 무서워하게 할 것이냐를 꼭 가르쳐야 합니다. 구약의 나훔서 1:2-4에 보시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여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도다(나훔 1:2-4)
성경이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은혜롭고 자비롭고 인자가 크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이런 표현은 성경에 후렴처럼 등장합니다. 그러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 이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진노하시는가 무엇을 질투하시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 하는 표현도 많습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이 이토록 무섭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누구를 두려워해야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뭐가 제일 무섭습니까 세상입니까 권세와 명예와 돈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닥달을 하면서 자녀들을 공부를 시키는 이유도 깊이 들여다 보면 바로 이 세상이 요구하는 돈과 권세와 명예가 여러분을 짓누르도록 무섭기 때문입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시면 절대 여러분 자녀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실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정말 두려웠다면 공부보다 먼저 신앙교육을 시켰을 겁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이 공부는 꼭 해야 된다"라고 눈에 불을 켜고 가르치듯이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가르쳤을 겁니다.
여러분 자녀가 학교를 안 가서 선생님한테 전화가 와 보십시오. "오늘 댁의 자녀가 학교에 안 왔는데요. " "아니에요. 선생님! 아침에 도시락 싸들고 갔는데요. "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 녀석 들어오기만 해 보라. " 대낮부터 심장이 콩 튀듯 팥 튀듯 안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주일날 아이가 교회에 안 나와서 전도사님이 "집사님! 집사님 댁의 아이가 주일날 예배당에 안 나왔습니다. "고 집에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아휴, 우리 아이는 이상하게 교회가 재미 없대요"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안 무서운 겁니다. 더구나 더욱 불행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키우지 않으면 저들이 다 큰 후 우리가 부모 대접조차 받지 못할거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어디서 실패했는가 그 이유를 멀리 가서 찾으실거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가정생활에서 신앙에 실패했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진 힘만으로 생활하는 사람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생활을 제대로 하려다 보면 우리의 실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자의 실력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향하여 갖는 열심과 나 스스로는 도저히 바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인하여, 매일 주님 앞에 매어 달리는 것, 이것이 신자의 실력입니다. 자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저는 이거 정말 못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제 자녀의 마음에 오셔서 간섭해 주십시오. 나를 통하여 유혹 많은 이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이길 신앙을 전달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제대로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부산진 가족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늙어도 청정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진정으로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사람임을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인 것을 생활 속에서 보여주십시오. 우리의 자녀를 세상에 빼앗기지 마십시다. 우리 자녀의 마음을 그의 본성과 세상의 타락한 원리에 내맡기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여호와 하나님 손에 붙잡힌 바 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부모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부모의 권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여러분의 자녀 또한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길 실력있는 사람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여호와께서 시온의 복을 내리시고, 또 여러분의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과 평강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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