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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어린이는 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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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세계에서는 꽃이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인간세계에서는 어린아이가 아름답고 예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5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면서 꽃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서 강단에 꽃으로 장식하고 어린이들을 아름다움의 극치로
축복합니다.
예수님도 들에 핀 한 송이 백합화에서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을 배우라고 하셨듯이
어린아이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음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어린이 얼굴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가혹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요즈음 어린이 얼굴에서 피다 시들어진 꽃과 같은 모습을 봅니다.
일그러진 모습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몹쓸 사탄의 모습을 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천국의 표상이며 꽃과 같은 어린이의 모습이 이렇게 되었을까
떡을 달라하는 아이에게 뱀을 줄 아비는 없다고 주님은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어른들은 떡을 달라하는 아이에게 뱀을 주고 있습니다.
 안아 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텔레비전 스위치를 켜줍 니다.
 같이 놀라달라 하는 아이에게 1,000원 짜리 종이 한 장 던져주고 그것으로 놀라고 합니다.
 뛰어다니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피아노 앞에 앉힙니다.
 마음껏 장난치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봉고 차로 억지 로 태워 컴퓨터학원, 미술학원으로 보냅니다.
적어도 이와 같은 경우는 떡을 달라하는 아이에게 뱀을 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옛날로 돌아가 이야기 한 토막 드리고자 합니다.
시골 생활을 했던 저는 비오는 날 아버지가 소먹이 풀을 베어오라고 지게를 지우고 들판으로 보내는
것이 참 싫었습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싫었던지 모릅니다.
좀더 이야기합니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싶어 하는 아이에게 중국집 전화 번호를 가르쳐 줍니다.
 교회 문을 두드리는 아이에게 독서실 문을 두드리라 고 강요를 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아이들에게 뱀을 주는 것과 다를 바 무엇입니까
아름다워야 할 어린이가 아름다움을 잃어 버렸습니다. 꽃과 같아야 할 어린이가 꺾여진 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어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꽃은 귀하게 여겨야 하듯 어린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공중의 새 한 마리도 귀하게 여기시고, 들의 백합화 한 포기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물며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귀하게 여김은 물론 더욱이 어린아이를 귀히 여기는 것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주님 가까이 오는 것을 어른들이 말렸을 때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 중요한 단어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용납하고"란 말인데 이 말은 '아페테'( )로서 "상관치 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라. "는
뜻의 강한 요구입니다.
물론 이 말이 잘못을 행하는 것까지 그대로 두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어린아이의 인격을
무시하고 속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금하지 말라"는 '메 콜뤼에테'( )로서 '메'(강한 부정의 의미) + '콜뤼에테'(현재명령형)
형태로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당장 그만 두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고 하셨는데 어린아이처럼 순결하고 순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인습(因習)을 버리는 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이란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에게 안수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린아이는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꽃처럼 귀히 여겨야 할 어린이라는 뜻입니다. 꽃처럼 귀히 여기는 자녀 사랑이 어떤 것일까 우리는
자연의 섭리에서 그것을 배웁니다.
 첫째 꽃은 해를 바라보아야 잘 자랍니다.
이처럼 어린이는 인생의 해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잘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가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라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어릴 때부터 '쉐마'를 가르쳤습니다.
신명기 6:4-5절이 그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라게 하는 교육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자란
이스라엘 민족은 영원토록 여호와 하나님 신앙으로 생활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꽃은 물이 있어야 자랍니다.
이처럼 어린아이 때에 생명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정말 잘 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의 생명수를 잘 공급해 주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를 꽃처럼 귀히 여기는 내용입니다.
2. 꽃은 꺾으면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의 기(氣)를 꺾으면 안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꺾으면 시들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어린아이들의 기를 꺾어서는 안됩니다.
심방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종종 듣는 말이지만 아이들이 방안에서 놀면 대부분 "나가 놀아라. "라는
말을 하는 경우를 봅니다. "함께 예배 드리자"는 말을 하는 부모님을 보기 힘들 때 많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영적 기를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중고등부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항존직분자의 자녀들이 교회 생활에 열심을 갖게 되면 부모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고등학교, 대학 시험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 직분자들의 자녀들도 주일날 학원과 도서관에 출입하는 것이 습관화되었고
교회 일을 돌아보는 것이 드물게 되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이것보다 더 영적 기를 꺾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말이 있습니다.
어릴 때 영적 기를 꺾어 놓으면 그 자식은 자라서 부모님에게 엄청난 영적 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생각을 꺽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의 꿈을 꺽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의 생각이 꺾여질 때 그 가문의 장래가 꺾여집니다.
아이들의 꿈이 꺾여질 때 역사는 그만큼 어두워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3. 꽃은 환경이 중요합니다.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입 니다.
안개꽃은 원래 흰색입니다. 그런데 붉은색 염료나 파란색 염료를 탄 물에 이 안개꽃을 담그면 얼마
안 가서 꽃 전체가 붉은색이나 파란색으로 변하게 됩니다.
네모난 수박을 재배하여 큰돈을 번 사람도 있습니다.
사과에 글씨를 새겨 재배한 과수원 주인은 두배의 값을 받아 많은 돈을 번 경우도 있습니다.
대나무는 원래 원통이지만 삼각대를 만들어 키우면 삼각 대나무가 되는 글도 읽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의 속담도 있습니다.
이 모든 말들은 환경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는 말할 것 없습니다.
환경에 따라 어린이 인격과 삶의 내용이 형성된다는 뜻입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중요한 환경은 물질적 환경이 아닙니다. 말할 것 없이 정신적 환경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정신적 환경보다 신앙적 환경이 더욱 중요함은 재론할 필요도
없는 내용입니다.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지만 한가지 잊지 못할 것은 그들은 예술을
사랑하고 보다 정신적인 세계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6,500명 좌석의 크렘린 극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발레를 관리하면서 느낀 것은 그 엄청난 모임에서
질서를 완벽하게 유지하면서 예술을 만끽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차원 높은 정신세계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정신세계를 뛰어넘어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보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인다고 부모의 할 일을 다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해야할 일을 다 했느냐 라는 것입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생명의 어린이!
그가 세상 모든 것을 다 소유할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육신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영적 생명을 갖지 않고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세상의 모든 부귀 영화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을 얻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분토처럼 버릴 수 있었다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여호와 하나님 없는 삶이 아무리 바벨론의 모든 것을 다 소유했다 할지라도
의미 없음을 알았기에 일곱배 뜨겁게 한 풀무 가운데로 기쁨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아가서 2:1-2절에는 아름다운 표현방법으로 꽃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샤론의 수선화라 했습니다.
골짜기의 백합화라 했습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 했습니다.
이와같은 용어는 예표론적 의미에서 아담의 범죄이후 죄인된 뭇 사람들 가운데 거듭나고 고귀하고
순결하게 된 성도를 암시하는데 이것을 어린이에 적용한다면 뭇 어른들 가운데서 어린이는 백합화
같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꽃이 있는 가정과 세상 환경은 아름답습니다.
이 꽃과 같은 어린이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이 꽃과 같은 어린이를 꺽지 말아야 합니다.
이 꽃과 같은 어린이가 잘 성장하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동산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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