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자녀를 양육하라
본문
어린이 주일이다. 어린이 주일은 1855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첼 시의 제일 유니버살리스트교회의 레오나드 목사에 의해 6월 둘째 주일에 시작되었다. 그것이 후에는 5월에 지키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방정환의 지도 아래 5월 1일이 어린이 날로 제정되었다. 1946년에는 국가의 법령으로 5월 5일이 어린이 날로 제정되었다. 교회에서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게 되었다.
본문은 어린이 주일을 맞아 부모들에게 주시는 귀중한 말씀이다. 비록 한 절밖에 안 되는 짧은 본문이지만 자식 양육의 모든 원리가 들어 있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노엽게 하지 말라”이지만,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이다. 현대 부모들이 귀담아 들어야 하고 가슴속에 새겨야 할 교훈이다.
본문 해설
아비들아: 자녀 교육에 관하여 아비들만 지적한 것은 자녀 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이 주로 아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비들은 대표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아담이 개인이면서도 모든 일류의 대표가 되듯이 아비들은 모든 아비들의 대표일 뿐 아니라 부모를 대표하는 호칭이다. 그래서 JB에서는 ‘parents’로 번역했다. 벵겔은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머니에게는 천성적인 인내심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들은 대단히 노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골로새서 3:21에서 여전히 이런 호칭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학자 요아힘 그닐카는 “유대교에서 모든 교육의 중심과 종교 교육은 전적으로 아비의 책임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였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교양’은 ‘파이데이아’이다. 이것은 ‘파이데이스’(아이)에서 온 낱말로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서 온 말이다. 교육은 교육인데 행위를 통한 교육을 의미했다. N4에서는 ‘training’으로 번역했고, 또 다른 성경에서는 ‘disciple’로 번역을 했다. 신약에서는 훈련, 교훈(딤후 3:16), 징계(히 12:5-6)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훈계’라는 말은 ‘누데시아’로서 이것은 ‘누스(마음)’와 ‘티세미(세우다)’의 합성오로 ‘마음을 세우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을 N4에서는 ‘instruction’으로 번역했다. 전자가 행위를 통한 교육이라면, 후자는 말씀을 통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과 행위, 이것이야 말로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이다. 이것은 마치 두 날개 또는 두 바퀴와 같다.
서론
통계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자녀 교육열이 제일 높은 나라가 한국과 일본이라고 한다. 학교 수업 외에 과외 수업을 하고 있다는 학생들이 초등학교의 경우 93%, 중학교의 경우 96%로 나타나고 있다. 사교육비로 지출되는 금액이 공교육비의 두 배 가까이에 이르고 있다. 일선에서 지도하는 교육 전문가들도 과거에 비하면 학력도, 지식도, 경험도 많은 분들이다. 그런데도 과거에 비해 청소년들의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가 둘이 있다고 한다. 가정과 교회이다. 어느 것이 우선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시대에 따라 주장을 달리한다. 과거에는 교회가 당연 우선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가정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오늘의 문제의 원인을 가정에서 찾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가정 사역에 대한 필요성과 더불어 가정 치유 사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 사역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가정은 작은 교회’라는 것이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도 건강하고, 교회가 건강해야 사회도 바로 설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가 하면 가정을 ‘작은 천국’이라고도 한다. 성경에서 천국을 소개할 때에는 가정의 질서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아들로, 성령님을 모성애와도 같은 보혜사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정의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그만큼 가정이 귀하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복은 가정을 통하여 온다. 그런데 오늘의 가정들은 어떠한가 행복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가정에 미움과 갈등, 분노와 다툼, 무관심과 원망, 불안과 실망이 점점 깊이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급기야 가정 붕괴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 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청소년 문제를 보라. 청소년들의 폭력 문제가 심각하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무섭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그래서 학원 폭력이 무서워 자살한 학생이 1997년 7월 현재 20명이 넘는다. 게다가 여학생들까지 여기에 뒤질세라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청소년들의 성적인 타락상이 극심하다. 십대들의 음란 비디오 사건의주인공은 15살짜리 여중 2학년생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벌거벗고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는 일로 번지고 있다. 이것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건들인데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 외에도 마약 사용이며 자살 그리고 가출하는 청소년이 날이 갈수록 급증하고 있는 현실이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자녀 교육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자녀 교육의 원리는 무엇이며 그 지침은 무엇인가
본론
1. 양육의 주체
“아비들아”라는 말씀에서 주체가 드러난다. 즉 자녀들을 가르칠 사람은 학교의 선생님이 아닌 부모들이다. 그런데 우리네의 현실은 어떠한가 자녀들의 교육은 모두 학원 아니면 학교에 위임해 버린 상태이다. 성경은 교사 중에도 부모만한 교사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가르치고 교육할 것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강한 것은 교육 때문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교육은 바벨론 포로기를 중심으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포로기 전까지는 학교가 없었다. 가정교육이 정부였다. 부모가 교사요, 성경과 전승과 부모의 삶 자체가 교과서였다. 그러던 것이 포로 후기를 지나면서 학교가 생기고 회당이 생기게 된 것이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선다싱은 “어머니의 가슴은 나의 신학교였다”고 했고, 임마누엘 칸트는 “나는 우리 어머니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했고, 선에 대한 씨를 뿌려주셨다”고 했고, 허버트는 “백 명의 교사보다도 한 사람의 어머니가 낫다”고 했고, 스펄전은 “가정에서 성경 읽는 소리와 기도 소리가 그치는 자는 화가 있을지로다”라고 했고, 링컨은 대통령 취임시에 낡은 성경을 들고 “어머니가 주신 이 성경책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라고 했고, 페스탈로치는 “가정은 도덕을 위한 학교”라고 했다. 이 모두는 가정에서의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말들이다. 자녀들을 가르고 교육하는 주체는 회당도, 학교도, 사회도 아닌 가정이요, 그 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2. 양육의 대상
‘자녀들’이라는 말씀은 양육의 대상을 밝혀낸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자녀관을 정립해야 한다. 어디서 잘못되는가 하면 자녀를 마치 자기 것인 양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비인격적으로 취급하는 데서 문제가 비롯된다.
성경적인 자녀관은 이렇다. 먼저 자녀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기업(시 127:3)이라는 것이다. 또한 자녀는 여호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창 33:5)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를 맡아서 기르는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한다(시 127:3,4, 삿 13:2). 결코 내 물건, 내 소유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다. 여기서부터 자녀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수 있고, 교육 내용이나 방법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3. 양육의 방법
본문에서 양육의 방법으로는 부정적인 방법과 긍정적인 방법을 말하고 있다.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을 동시에 가르쳐 주고 있다. 세 가지로 가르쳐 준다.
1) 노엽게 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징계와 분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자녀가 잘못하면 징계를 한다(잠 13:24, 19:18). 그러나 분노를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 ‘노함’에 대하여 공동 번역에서는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로 번역을 했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라”로 번역을 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자녀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감정이 상하게 되는가 이에 대하여 핸드릭슨은 6가지를 지적한다. (1) 과잉 보호 (2) 편애 (3) 낙심케 하는 일 (4) 의견의 불일치 (5) 자녀들에 대한 소홀함 (6) 가혹한 처벌이 주어질 때라고 했다. 바클레이는 세 가지로 지적했다. (1)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할 때이다. 즉 ‘내가 너 만할 때는 그런 일을 안 했다’는 식의 꾸지람이다. (2) 지나친 통제 때문이다. (3) 격려에 인색할 때이다. 그래 루터는 이런 말을 한다. “아끼면 자식을 버리게 된다. 그러나 채찍 옆에는 사과를 놓아 두어 자식이 잘 했을 때에는 그 사과를 주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재 자녀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이유로는 이해의 결핍에서 오는 대화의 단절을 들 수 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평행선상을 달리고 있다. 어느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도화지와 크레용을 나누어 주면서 어머니를 그려보라고 했다고 한다. 한 어린아이가 특이하게 어머니를 그렸다. 그것은 입과 손만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기형적이리만큼 크게 말이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우리 엄마는 나만 보면 잔소리나 하고 조금만 잘못해도 손으로 때려요”라고 대답하더란다.
도대체 아이들의 말을 들어 주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아이들은 상처를 입는다. 부모는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그들의 눈으로 보려고 하고 그들의 귀로 들으려고 하고 그들의 가슴으로 같이 느껴 보려는 경험을 갖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가정교육은 어렵게 될 뿐이다.
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는가. 그것은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의 인격체이다. 골로새서 3:21에서 “자녀들이 낙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 주의 교양으로 하라.
여기 ‘교양’이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training’ 또는 ‘disciple’로 번역한다. 이것은 ‘행동을 통한 교육’을 의미한다. 부모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녀들에게는 산교육이 된다. 자녀는 부모를 닮으면서 성장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통하여 부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모들은 항상 옳은 말만 한다. 그러나 정작 행동해야 할 상황에서는 스스로 한 말을 부정해 버린다. 정직을 이야기하면서도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남을 도우라고 하면서도 자기 실속 챙기기에 바쁜 모습이다.
어느 부모가 일곱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놀이동산에 놀러 갔다고 한다. 매표소 앞에서 표를 사려고 하는데 ‘6세 이하는 무료’라는 안내문을 보았다. 곧 아버지는 아들에게 “누가 물어보면 여섯 살이라고 해라”로 하였다. 그러자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아버지에게 반문했다. “나보고는 거짓말 하지 말라더니 지금은 거짓말을 하라고요”하더란다. 말 따로 행동 따로 이것을 따로국밥이라고 하던가. 그러고도 그 자식이 정직하기를 바란단 말인가.
이런 예들은 가정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전화가 걸려오면 “나 없다고 해라”고 아이에게 일러준다. 부모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식들은 들어가 공부하라고 한다. 부모들은 밥상에 앉기만 하면 입맛이 없다느니 어쩌니 하면서도 자녀들에게는 때마다 밥 안 먹는다고 타박이다. 부모들은 자주 싸우면서 자녀들에게는 싸우지 말라고 한다. 이런 것들이 얼마만한 설득력을 가지겠는가. 여기서부터 교육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그 부모들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고 그대로 흉내 내게 되어 있다. 자녀들은 부모의 거울이다. 이제는 말 가지고 교육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행동을 통하여 모범을 보여야 할 때다. 원만한 부부관계, 부모들의 신앙인격, 안정된 가정, 교회생활의 헌신과 봉사, 이런 것들이 모두 산 교육의 내용이 됨을 알자. 자녀들은 귀로 배우고 눈으로 배우는 자들이다. 부모의 삶은 자녀들에게 유산이 된다. 그래서 본문은 “주의 교양으로 교육하라”고 말씀한다.
3)주의 훈계로 하라.
여기 ‘훈계’라고 하는 것을 영어로는 ‘instruction’으로 번역한다. 이것은 ‘말씀을 통한 훈련’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고 한다. 특히 디모데후서 3:16,17에서는 “모든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구세군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캐서린 부스에게는 여덟 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 훌륭한 자식들로 성장했다. 교육의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언제나 악마보다 한 걸음 빨랐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악마가 나쁜 습관, 나쁜 생각, 나쁜 지식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명한 사람들은 대개가 경건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란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부모들은 어떤가. 기독교인 부모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 “자녀 때문에 실망했을 때가 언제냐” 순위는 다음과 같다. 1위는 대학에 떨어졌을 때, 2위는 결혼 생활에 실패했을 때, 3위는 대학졸업 후 취직이 안 됐을 때, 4위는 자식이 입원했을 때, 5위는 부모에게 반항할 때, 6위는 무단가출했을 때, 7위는 신앙생활 잘못할 때였다. 순서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분명히 신앙인이면서 신앙교육에는 별로 무관심한 상태인 것이다. 자식들이 학교 한 번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면서도 교회 한두 번 빠지는 것은 예사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자녀들에 대한 말씀 교육은 어릴수록 효과가 크다. 사람의 뇌는 만 4세까지 95%가 발육되고 나머지 5%는 성인이 되기까지 발육된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의 기본 성격은 만 4세 이전에 형성된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말씀 속에서 자라도록 해야 한다. 사실 디모데가 디모데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렸을 때의 말씀 훈련 때문이다. 그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하여 어려서부터 말씀을 들으면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오직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이다.
결론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31%가 유대인이고 약 70만 명의 변호사 가운데 20%가 유대인이며 미국의 유명 대학의 교수 가운데 35%가 유대인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각계를 주름 잡는 실질적인 세력들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신앙적인 교육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잘 되기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좋은 부모가 되기를 힘쓰며 기도할 것이다. 훌륭한 인물 배후에는 반드시 훌륭한 믿음의 부모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식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 있는가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는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고 있는가 어린이 주일을 맞아 다시 한 번 스스로 자문해 볼 일이다.
본문은 어린이 주일을 맞아 부모들에게 주시는 귀중한 말씀이다. 비록 한 절밖에 안 되는 짧은 본문이지만 자식 양육의 모든 원리가 들어 있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노엽게 하지 말라”이지만,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이다. 현대 부모들이 귀담아 들어야 하고 가슴속에 새겨야 할 교훈이다.
본문 해설
아비들아: 자녀 교육에 관하여 아비들만 지적한 것은 자녀 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이 주로 아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비들은 대표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아담이 개인이면서도 모든 일류의 대표가 되듯이 아비들은 모든 아비들의 대표일 뿐 아니라 부모를 대표하는 호칭이다. 그래서 JB에서는 ‘parents’로 번역했다. 벵겔은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머니에게는 천성적인 인내심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들은 대단히 노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골로새서 3:21에서 여전히 이런 호칭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학자 요아힘 그닐카는 “유대교에서 모든 교육의 중심과 종교 교육은 전적으로 아비의 책임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였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교양’은 ‘파이데이아’이다. 이것은 ‘파이데이스’(아이)에서 온 낱말로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서 온 말이다. 교육은 교육인데 행위를 통한 교육을 의미했다. N4에서는 ‘training’으로 번역했고, 또 다른 성경에서는 ‘disciple’로 번역을 했다. 신약에서는 훈련, 교훈(딤후 3:16), 징계(히 12:5-6)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훈계’라는 말은 ‘누데시아’로서 이것은 ‘누스(마음)’와 ‘티세미(세우다)’의 합성오로 ‘마음을 세우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을 N4에서는 ‘instruction’으로 번역했다. 전자가 행위를 통한 교육이라면, 후자는 말씀을 통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과 행위, 이것이야 말로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이다. 이것은 마치 두 날개 또는 두 바퀴와 같다.
서론
통계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자녀 교육열이 제일 높은 나라가 한국과 일본이라고 한다. 학교 수업 외에 과외 수업을 하고 있다는 학생들이 초등학교의 경우 93%, 중학교의 경우 96%로 나타나고 있다. 사교육비로 지출되는 금액이 공교육비의 두 배 가까이에 이르고 있다. 일선에서 지도하는 교육 전문가들도 과거에 비하면 학력도, 지식도, 경험도 많은 분들이다. 그런데도 과거에 비해 청소년들의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가 둘이 있다고 한다. 가정과 교회이다. 어느 것이 우선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시대에 따라 주장을 달리한다. 과거에는 교회가 당연 우선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가정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오늘의 문제의 원인을 가정에서 찾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가정 사역에 대한 필요성과 더불어 가정 치유 사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 사역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가정은 작은 교회’라는 것이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도 건강하고, 교회가 건강해야 사회도 바로 설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가 하면 가정을 ‘작은 천국’이라고도 한다. 성경에서 천국을 소개할 때에는 가정의 질서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아들로, 성령님을 모성애와도 같은 보혜사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정의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그만큼 가정이 귀하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복은 가정을 통하여 온다. 그런데 오늘의 가정들은 어떠한가 행복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가정에 미움과 갈등, 분노와 다툼, 무관심과 원망, 불안과 실망이 점점 깊이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급기야 가정 붕괴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 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청소년 문제를 보라. 청소년들의 폭력 문제가 심각하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무섭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그래서 학원 폭력이 무서워 자살한 학생이 1997년 7월 현재 20명이 넘는다. 게다가 여학생들까지 여기에 뒤질세라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청소년들의 성적인 타락상이 극심하다. 십대들의 음란 비디오 사건의주인공은 15살짜리 여중 2학년생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벌거벗고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는 일로 번지고 있다. 이것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건들인데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 외에도 마약 사용이며 자살 그리고 가출하는 청소년이 날이 갈수록 급증하고 있는 현실이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자녀 교육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자녀 교육의 원리는 무엇이며 그 지침은 무엇인가
본론
1. 양육의 주체
“아비들아”라는 말씀에서 주체가 드러난다. 즉 자녀들을 가르칠 사람은 학교의 선생님이 아닌 부모들이다. 그런데 우리네의 현실은 어떠한가 자녀들의 교육은 모두 학원 아니면 학교에 위임해 버린 상태이다. 성경은 교사 중에도 부모만한 교사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가르치고 교육할 것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강한 것은 교육 때문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교육은 바벨론 포로기를 중심으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포로기 전까지는 학교가 없었다. 가정교육이 정부였다. 부모가 교사요, 성경과 전승과 부모의 삶 자체가 교과서였다. 그러던 것이 포로 후기를 지나면서 학교가 생기고 회당이 생기게 된 것이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선다싱은 “어머니의 가슴은 나의 신학교였다”고 했고, 임마누엘 칸트는 “나는 우리 어머니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했고, 선에 대한 씨를 뿌려주셨다”고 했고, 허버트는 “백 명의 교사보다도 한 사람의 어머니가 낫다”고 했고, 스펄전은 “가정에서 성경 읽는 소리와 기도 소리가 그치는 자는 화가 있을지로다”라고 했고, 링컨은 대통령 취임시에 낡은 성경을 들고 “어머니가 주신 이 성경책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라고 했고, 페스탈로치는 “가정은 도덕을 위한 학교”라고 했다. 이 모두는 가정에서의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말들이다. 자녀들을 가르고 교육하는 주체는 회당도, 학교도, 사회도 아닌 가정이요, 그 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2. 양육의 대상
‘자녀들’이라는 말씀은 양육의 대상을 밝혀낸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자녀관을 정립해야 한다. 어디서 잘못되는가 하면 자녀를 마치 자기 것인 양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비인격적으로 취급하는 데서 문제가 비롯된다.
성경적인 자녀관은 이렇다. 먼저 자녀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기업(시 127:3)이라는 것이다. 또한 자녀는 여호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창 33:5)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를 맡아서 기르는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한다(시 127:3,4, 삿 13:2). 결코 내 물건, 내 소유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다. 여기서부터 자녀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수 있고, 교육 내용이나 방법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3. 양육의 방법
본문에서 양육의 방법으로는 부정적인 방법과 긍정적인 방법을 말하고 있다.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을 동시에 가르쳐 주고 있다. 세 가지로 가르쳐 준다.
1) 노엽게 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징계와 분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자녀가 잘못하면 징계를 한다(잠 13:24, 19:18). 그러나 분노를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 ‘노함’에 대하여 공동 번역에서는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로 번역을 했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라”로 번역을 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자녀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감정이 상하게 되는가 이에 대하여 핸드릭슨은 6가지를 지적한다. (1) 과잉 보호 (2) 편애 (3) 낙심케 하는 일 (4) 의견의 불일치 (5) 자녀들에 대한 소홀함 (6) 가혹한 처벌이 주어질 때라고 했다. 바클레이는 세 가지로 지적했다. (1)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할 때이다. 즉 ‘내가 너 만할 때는 그런 일을 안 했다’는 식의 꾸지람이다. (2) 지나친 통제 때문이다. (3) 격려에 인색할 때이다. 그래 루터는 이런 말을 한다. “아끼면 자식을 버리게 된다. 그러나 채찍 옆에는 사과를 놓아 두어 자식이 잘 했을 때에는 그 사과를 주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재 자녀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이유로는 이해의 결핍에서 오는 대화의 단절을 들 수 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평행선상을 달리고 있다. 어느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도화지와 크레용을 나누어 주면서 어머니를 그려보라고 했다고 한다. 한 어린아이가 특이하게 어머니를 그렸다. 그것은 입과 손만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기형적이리만큼 크게 말이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우리 엄마는 나만 보면 잔소리나 하고 조금만 잘못해도 손으로 때려요”라고 대답하더란다.
도대체 아이들의 말을 들어 주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아이들은 상처를 입는다. 부모는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그들의 눈으로 보려고 하고 그들의 귀로 들으려고 하고 그들의 가슴으로 같이 느껴 보려는 경험을 갖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가정교육은 어렵게 될 뿐이다.
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는가. 그것은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의 인격체이다. 골로새서 3:21에서 “자녀들이 낙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 주의 교양으로 하라.
여기 ‘교양’이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training’ 또는 ‘disciple’로 번역한다. 이것은 ‘행동을 통한 교육’을 의미한다. 부모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녀들에게는 산교육이 된다. 자녀는 부모를 닮으면서 성장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통하여 부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모들은 항상 옳은 말만 한다. 그러나 정작 행동해야 할 상황에서는 스스로 한 말을 부정해 버린다. 정직을 이야기하면서도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남을 도우라고 하면서도 자기 실속 챙기기에 바쁜 모습이다.
어느 부모가 일곱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놀이동산에 놀러 갔다고 한다. 매표소 앞에서 표를 사려고 하는데 ‘6세 이하는 무료’라는 안내문을 보았다. 곧 아버지는 아들에게 “누가 물어보면 여섯 살이라고 해라”로 하였다. 그러자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아버지에게 반문했다. “나보고는 거짓말 하지 말라더니 지금은 거짓말을 하라고요”하더란다. 말 따로 행동 따로 이것을 따로국밥이라고 하던가. 그러고도 그 자식이 정직하기를 바란단 말인가.
이런 예들은 가정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전화가 걸려오면 “나 없다고 해라”고 아이에게 일러준다. 부모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식들은 들어가 공부하라고 한다. 부모들은 밥상에 앉기만 하면 입맛이 없다느니 어쩌니 하면서도 자녀들에게는 때마다 밥 안 먹는다고 타박이다. 부모들은 자주 싸우면서 자녀들에게는 싸우지 말라고 한다. 이런 것들이 얼마만한 설득력을 가지겠는가. 여기서부터 교육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그 부모들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고 그대로 흉내 내게 되어 있다. 자녀들은 부모의 거울이다. 이제는 말 가지고 교육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행동을 통하여 모범을 보여야 할 때다. 원만한 부부관계, 부모들의 신앙인격, 안정된 가정, 교회생활의 헌신과 봉사, 이런 것들이 모두 산 교육의 내용이 됨을 알자. 자녀들은 귀로 배우고 눈으로 배우는 자들이다. 부모의 삶은 자녀들에게 유산이 된다. 그래서 본문은 “주의 교양으로 교육하라”고 말씀한다.
3)주의 훈계로 하라.
여기 ‘훈계’라고 하는 것을 영어로는 ‘instruction’으로 번역한다. 이것은 ‘말씀을 통한 훈련’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고 한다. 특히 디모데후서 3:16,17에서는 “모든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구세군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캐서린 부스에게는 여덟 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 훌륭한 자식들로 성장했다. 교육의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언제나 악마보다 한 걸음 빨랐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악마가 나쁜 습관, 나쁜 생각, 나쁜 지식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명한 사람들은 대개가 경건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란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부모들은 어떤가. 기독교인 부모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 “자녀 때문에 실망했을 때가 언제냐” 순위는 다음과 같다. 1위는 대학에 떨어졌을 때, 2위는 결혼 생활에 실패했을 때, 3위는 대학졸업 후 취직이 안 됐을 때, 4위는 자식이 입원했을 때, 5위는 부모에게 반항할 때, 6위는 무단가출했을 때, 7위는 신앙생활 잘못할 때였다. 순서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분명히 신앙인이면서 신앙교육에는 별로 무관심한 상태인 것이다. 자식들이 학교 한 번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면서도 교회 한두 번 빠지는 것은 예사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자녀들에 대한 말씀 교육은 어릴수록 효과가 크다. 사람의 뇌는 만 4세까지 95%가 발육되고 나머지 5%는 성인이 되기까지 발육된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의 기본 성격은 만 4세 이전에 형성된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말씀 속에서 자라도록 해야 한다. 사실 디모데가 디모데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렸을 때의 말씀 훈련 때문이다. 그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하여 어려서부터 말씀을 들으면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오직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이다.
결론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31%가 유대인이고 약 70만 명의 변호사 가운데 20%가 유대인이며 미국의 유명 대학의 교수 가운데 35%가 유대인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각계를 주름 잡는 실질적인 세력들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신앙적인 교육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잘 되기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좋은 부모가 되기를 힘쓰며 기도할 것이다. 훌륭한 인물 배후에는 반드시 훌륭한 믿음의 부모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식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 있는가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는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고 있는가 어린이 주일을 맞아 다시 한 번 스스로 자문해 볼 일이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