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마땅한 가르침
본문
호레이스 부쉬넬이라는 미국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호레이스 부쉬넬이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예수를 믿는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아무래도 더 착하고 바르게 살아갈 것 같지 않습니까
호레이스 부쉬넬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별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듣기에는 좀 서운하지만 예수를 믿는 것과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말로는 신앙이 있다고 하는데,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는 전혀 그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 크리스천들이 워낙 엉망이어서 그렇고 우리 나라 크리스천은 안 그렇겠습니까
아마 우리 나라 크리스천들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문제에 별로 관계가 없는데 부모가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아이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착하고 바르게 살더라는 것입니다.
가정 교육이 어느 만큼 중요한 것인지를 아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예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옛날 아이들에 비해서 버릇이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옛날에는 형제가 많았는데 요즘은 기껏해야 애를 하나나 둘만 낳아서 그렇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런 얘기는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애를 많이 낳으면 저절로 없는 버릇도 생기고, 애를 적게 낳으면 있던 버릇도 없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자녀의 숫자에 따라서 버릇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숫자에 따라서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방법이 달라지고, 방법이 달라짐에 따라 버릇이 다르게 들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의 일입니다.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 가면 집에서는 항상 그 친구의 성적을 물어 보곤 했습니다.
“아까 놀러 왔던 걔는 몇 등이나 하는 애냐”
저는 그래서 집에 놀러오는 친구마다 성적을 올려서 얘기하곤 했습니다.
10등 하는 애는 5등이라고 하고, 5등 하는 애는 3등이라고 해야 과일 한 쪽이라도 더 나왔습니다.
저의 부모님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모들이 다 그럴 것입니다.
자기 아이가 어떤 친구를 사귀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가급적이면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친구와 가깝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친구에게서 받는 영향이 아무리 커도 부모에게서 받는 영향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부모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애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있느냐”보다 “내가 애한테 어떤 부모가 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요즘 젊은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와 느긋하게 기다려야 하는 문제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자기 애가 말하는 것이나 걷는 것, 기저귀 떼는 것이 조금만 늦으면 굉장히 초조해 합니다.
물론 남의 애가 첫돌에 걸을 때 자기 애는 10개월에 걸으면 그만큼 신바람이 날 수 있습니다.
또 14개월이 되도록 걷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 조바심이 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10개월에 걷는 애는 이 다음에 달리기도 잘해서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면 항상 1등을 하고, 첫돌이 지나도 제대로 못 걷는 아이는 이 다음에 소아마비에 걸릴 위험이 많다”는 법은 없습니다.
“돌 전에 걷느냐, 돌이 지나도록 못 걷느냐” 하는 얘기는 몇 개월만 기다리면 다 똑같아지는 문제입니다.
기저귀를 떼는 것이 늦어도 그렇습니다.
열 살이 넘어도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조금만 느긋하게 기다리면 시간이 다 해결해 줍니다.
그런데 정작 신경을 써야 하는 문제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폐단이 왕왕 있습니다.
어떤 빵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머니를 따라서 온 아이가 손가락으로 진열된 빵을 콕콕 찌르면서 장난을 쳤습니다.
종업원이 아이를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어머니가 그까짓 빵이 얼마나 한다고 아이 기를 죽이느냐고 아이를 두둔했습니다.
전철에서 소란을 피는 애는 그보다 훨씬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애가 천방지축으로 날뛰어도 어머니가 만류하지 않고 보고만 있습니다.
옆에서 만류하라고 하면 왜 남의 애에게 간섭하느냐고 오히려 역정을 냅니다.
아직은 철이 없어서 그렇지, 조금만 철이 들면 알아서 고칠 텐데 미리부터 닦달해서 기를 죽일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갑니다.
좋지 않은 행동은 한 번 버릇 들면 어지간해서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따끔하게 혼을 내서라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시간만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안달을 하면서도 지금 당장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느긋합니다.
이런 폐단이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한 것인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문제는 교회 밖에서만 이런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교육전도사 시절의 일입니다.
그때 저는 소년부(5, 6학년)를 맡아서 지도했었습니다.
여름 수련회를 앞두고 참가 신청서를 받는데, 당연히 참가할 줄로 알았던 어떤 애가 못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그 교회 집사님이고, 그 아이는 주일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는 아이였는데 난데없이 수련회를 못 간다고 해서 제가 그 아이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야, 너 수련회 왜 안 가”
“저는 가고 싶은데 엄마가 가지 말래요. ” - 아이가 시무룩하게 대답했습니다.
“왜”
“방학하자마자 영어 과외 받으래요. ”
제가 그 대답을 듣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수련회 가겠다는 아이를 억지로 못 가게 하면서까지 영어 과외를 받게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아이가 예수 믿는 것이 남보다 뒤지는 것은 관계없는데 영어가 뒤지는 것은 차마 못 참겠다는 것 아닙니까
믿지 않는 부모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그 교회 집사님이셨습니다.
다른 얘기 백날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신앙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기 부모로부터 직접 배운 셈입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지도할 때의 일입니다.
초등학교 5, 6학년 아이들도 수련회 데려가려면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는데 고등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떤 분이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저한데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사님, 이번에 저의 애 수련회 보내기로 했습니다. 사실 고3이라서 안 보낼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애가 수련회만 보내주면 갔다 와서 공부 열심히 한다고 약속도 했고 수련회에 갔다 오는 것이 꼭 무의미하게 시간을 쓰는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방학 내내 집에만 있는 것보다는 모처럼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스트레스도 풀고 오면 공부에 도움이 될 것도 같아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
여러분은 이 얘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애가 고3이지만 수련회를 보내기로 했으니까 잘한 것입니까
물론 그때 그 분은 저한테서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 먼저 말을 꺼낸 것입니다만 저는 그런 얘기만 들으면 혈압이 오릅니다.
수련회 갔다 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까, 신앙이 좋아져야 합니까
수련회는 말 그대로 신앙 수련을 위한 행사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수련회를 가는 것과 친구들과 어울려서 해수욕장 가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왜요
둘 다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리 당부드리는데, 적어도 우리 교회에는 고등학생인 애가 수련회를 갈 때 “가서 은혜 많이 받고 와라”라고 하지 않고, “갔다 와서 공부 열심히 하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면 합니다.
단지 그런 표현만 안 쓰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표현을 쓰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제대로 정립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가 영어 학원에 다닌다고 가정하십시다.
영어 학원에 10년 다녔는데도 영어 실력이 조금도 늘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너, 그 동안 학원 간다 그래 놓고 어디서 뭐했느냐”라고 나무라지 않겠습니까
학원에 가서 대체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도 지켜볼 테고, 학원에 갔다 오면 쓸데없이 딴짓 못하게 감시를 하면서라도 공부를 시킬 것입니다.
그럼 예수 믿은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어 학원에 10년 다녔으면 그만큼 영어를 잘 해야 하듯이 예수를 10년 믿었으면 그만큼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영어 실력이 늘지 않는 것에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예수를 닮아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어쩌면 자기 자녀가 예수를 닮아갈까봐 오히려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도 거칠고 험한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별로 재주가 없으신 분입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고, 5리를 가자 하면 10리도 가고,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까지도 내주면서 이 모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러니까 예수는 좀 대충 믿어도 이 세상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자녀교육까지 예로 들 것 없습니다.
일단 자기가 세상을 그렇게 살아갑니다.
자기가 세상을 그렇게 살면서 자녀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기 전에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린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맨 처음에는 애굽 온 하수가 피로 변하고, 그 다음에는 개구리가 들끓고, 그 다음에는 이가 들끓고, 그 다음에는 파리 떼가 사방에 가득 차고, 나중에는 애굽 온 땅이 흑암으로 가득 차기도 하고, 맨 마지막에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으니까 거기서 결국 바로가 항복하고는 이스라엘을 내보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자들이 죽는 열 번째 재앙 전까지는 꼼짝도 안하고 완강하게 버티다가 결국 열 번째에 가서 한꺼번에 항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바로의 마음이 몇 번 왔다 갔다 합니다.
개구리가 하도 들끓으니까 “이 개구리들만 없애주면 너희들 하라는 대로 해 주겠다”라고 했다가 정작 모세가 기도를 해서 개구리가 다 물러가니까 딴소리를 하고, 파리 떼가 몰려왔을 때에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출8:28)
“그래, 좋다. 가라. 가! 그 대신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그냥 대충 이 근처에서 너희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라. 그러면 되는 것 아니냐 여호와 하나님을 꼭 섬기고 싶으면 섬기되 너희가 내 백성인 것은 잊지 말아라. ”라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를 요즘 말로 옮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 신앙을 갖는 것이야 좋지. 그런데 그런 거야 어차피 자기 할 일 다 하고 남는 시간에 여가로 해야지. 예수를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어차피 예수야 평생 믿을 거니까 일단 대학은 들어가고……” - 아마 이런 얘기가 될 것입니다.
만약에 결혼 적령기의 자녀가 있어서 배우자를 선택할 때 같으면 이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 “물론 기왕이면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지. 그런데 말이다. 예수만 믿는다고 해서 저절로 잘 살아지는 것은 아니거든. 일단 생활이 안정되어야지. 그러니까 신앙도 신앙이지만……”
바로 이것이 그 옛날 바로가 했던 유혹입니다.
저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것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젓가락질을 할 줄 모릅니다.
몇 년 전부터 식사 시간이 길어지면 손목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젓가락을 잡는 자세가 잘못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식사 때마다 젓가락질 바로 하라고 아버지께서 야단을 많이 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젓가락이야 그냥 아무렇게나 편한 대로 잡으면 되지 왜 굳이 아버지 말씀대로 해야 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무리 꾸중을 하셔도 차라리 아버지하고 같은 시간에 식사를 안하고 말지, 젓가락질은 내 마음대로 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후회가 됩니다.
그런데 후회가 되도 정상적으로 후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아주 고약하게 됩니다.
“내가 그때 아버지 말씀대로 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꾸중을 조금만 더 심하게 하시든지, 아니면 몽둥이 찜질을 해서라도 나의 잘못된 젓가락질을 고쳐주셨으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생각이 더 많습니다.
저는 3남 1녀 중에 차남입니다.
위로 형님이 한 분 계시고 누이동생과 또 막내동생이 있습니다.
10여 년 전에 설을 쇠기 위해서 집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이라고 별로 많지도 않고 겨우 넷 뿐인데, 그저 낳기만 했지 어미라고 뭐 하나 제대로 해 준 게 없으니 참 미안하구나. 더 늦기 전에 있는 재산 정리해서 자식새끼들한테 아파트라도 한 채씩 해줘야 할텐데……”
자식들 결혼할 때 아파트 하나씩은 사줬어야 자식들이 구차하게 남의집살이 안 할 텐데 그걸 못해 준 것이 두고두고 한스러우신 모양입니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예수를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를 모르시는 분이니까 일단 예수는 빼놓고, 자식한테 물려주고 싶은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재산입니다.
그래서 아파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알지 않습니까
그럼 자식한테 무엇을 물려 줘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 자식한테 가장 물려주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그것이 신앙이 아니고 다른 것이라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은 당연히 예수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식을 죽이려고 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꽁꽁 묶고는 칼로 찔러 죽이려던 순간에 다른 누군가의 만류로 인해서 죽이려던 것을 포기했다면, 그런 엄청난 사건을 경험한 그 아이가 과연 어떻게 자라겠습니까
심리학자나 교육학자한테 그런 사건을 경험한 아이가 어떻게 자라게 될지를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전부 다 부정적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자다가도 깜짝 깜짝 놀라고, 걸핏하면 등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깨고, 아버지와 눈만 마주치면 자지러지고…… -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는 충격 때문에 자라서도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 생각입니다.
성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실제로 그런 인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입니다.
이삭은 분명히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충격으로 인해 제대로 자라지를 못했느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아주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대체 어떤 분이기에 우리 아버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죽이라고 하니까 기꺼이 죽이려고 하더라!” - 이삭은 그 사건을 통해서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한테서 여호와 하나님한테 어느 만큼 순종해야 하는지를 배운 것이고,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한테 이것을 가르쳐준 셈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녀한테 그런 것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 제쳐놓고 먼저 대학부터 가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 제쳐놓고 이 세상 풍속을 따라야 한다는 쓸데없는 것을 가르쳐 주지 마시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께 잘 복종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라는 것을 여러분의 생활로 직접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말로만 하면 안 듣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여러분을 어떻게 양육했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자녀는 가장 모범적인 신앙 환경 속에서 가장 모범적인 신앙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
이 시간에도 저희 하늘교회에 속한 믿음의 권속들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하늘 아버지를 예배합니다.
바라옵기는
저희의 마음이 늘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사모할 수 있게 하옵시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게 허락하시옵소서.
특별히 감사드리옵기는
저희를 사랑하셔서 저희에게 가정이 있게 하셨사오니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바라옵기는 저희에게 허락 된 이 가정에서
더욱더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모습으로
저희의 신앙을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한다 하였사오니
저희가 마땅히 가르칠 바를
저희에게 허락하신 태의 열매에게 부지런히 가르칠 수 있게 하옵시되
말과 혀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오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써 바르게 가르칠 수 있게 하옵시고
저희에게 허락 된 가정 통하여
저희에게 허락 된 믿음의 뿌리가
더욱더 깊어질 수 있게 하옵시며
더욱더 풍성한 믿음의 열매가 늘 끊이지 아니하게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호레이스 부쉬넬이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예수를 믿는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아무래도 더 착하고 바르게 살아갈 것 같지 않습니까
호레이스 부쉬넬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별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듣기에는 좀 서운하지만 예수를 믿는 것과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말로는 신앙이 있다고 하는데,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는 전혀 그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 크리스천들이 워낙 엉망이어서 그렇고 우리 나라 크리스천은 안 그렇겠습니까
아마 우리 나라 크리스천들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문제에 별로 관계가 없는데 부모가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아이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착하고 바르게 살더라는 것입니다.
가정 교육이 어느 만큼 중요한 것인지를 아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예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옛날 아이들에 비해서 버릇이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옛날에는 형제가 많았는데 요즘은 기껏해야 애를 하나나 둘만 낳아서 그렇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런 얘기는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애를 많이 낳으면 저절로 없는 버릇도 생기고, 애를 적게 낳으면 있던 버릇도 없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자녀의 숫자에 따라서 버릇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숫자에 따라서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방법이 달라지고, 방법이 달라짐에 따라 버릇이 다르게 들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의 일입니다.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 가면 집에서는 항상 그 친구의 성적을 물어 보곤 했습니다.
“아까 놀러 왔던 걔는 몇 등이나 하는 애냐”
저는 그래서 집에 놀러오는 친구마다 성적을 올려서 얘기하곤 했습니다.
10등 하는 애는 5등이라고 하고, 5등 하는 애는 3등이라고 해야 과일 한 쪽이라도 더 나왔습니다.
저의 부모님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모들이 다 그럴 것입니다.
자기 아이가 어떤 친구를 사귀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가급적이면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친구와 가깝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친구에게서 받는 영향이 아무리 커도 부모에게서 받는 영향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부모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애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있느냐”보다 “내가 애한테 어떤 부모가 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요즘 젊은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와 느긋하게 기다려야 하는 문제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자기 애가 말하는 것이나 걷는 것, 기저귀 떼는 것이 조금만 늦으면 굉장히 초조해 합니다.
물론 남의 애가 첫돌에 걸을 때 자기 애는 10개월에 걸으면 그만큼 신바람이 날 수 있습니다.
또 14개월이 되도록 걷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 조바심이 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10개월에 걷는 애는 이 다음에 달리기도 잘해서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면 항상 1등을 하고, 첫돌이 지나도 제대로 못 걷는 아이는 이 다음에 소아마비에 걸릴 위험이 많다”는 법은 없습니다.
“돌 전에 걷느냐, 돌이 지나도록 못 걷느냐” 하는 얘기는 몇 개월만 기다리면 다 똑같아지는 문제입니다.
기저귀를 떼는 것이 늦어도 그렇습니다.
열 살이 넘어도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조금만 느긋하게 기다리면 시간이 다 해결해 줍니다.
그런데 정작 신경을 써야 하는 문제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폐단이 왕왕 있습니다.
어떤 빵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머니를 따라서 온 아이가 손가락으로 진열된 빵을 콕콕 찌르면서 장난을 쳤습니다.
종업원이 아이를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어머니가 그까짓 빵이 얼마나 한다고 아이 기를 죽이느냐고 아이를 두둔했습니다.
전철에서 소란을 피는 애는 그보다 훨씬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애가 천방지축으로 날뛰어도 어머니가 만류하지 않고 보고만 있습니다.
옆에서 만류하라고 하면 왜 남의 애에게 간섭하느냐고 오히려 역정을 냅니다.
아직은 철이 없어서 그렇지, 조금만 철이 들면 알아서 고칠 텐데 미리부터 닦달해서 기를 죽일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갑니다.
좋지 않은 행동은 한 번 버릇 들면 어지간해서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따끔하게 혼을 내서라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시간만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안달을 하면서도 지금 당장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느긋합니다.
이런 폐단이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한 것인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문제는 교회 밖에서만 이런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교육전도사 시절의 일입니다.
그때 저는 소년부(5, 6학년)를 맡아서 지도했었습니다.
여름 수련회를 앞두고 참가 신청서를 받는데, 당연히 참가할 줄로 알았던 어떤 애가 못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그 교회 집사님이고, 그 아이는 주일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는 아이였는데 난데없이 수련회를 못 간다고 해서 제가 그 아이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야, 너 수련회 왜 안 가”
“저는 가고 싶은데 엄마가 가지 말래요. ” - 아이가 시무룩하게 대답했습니다.
“왜”
“방학하자마자 영어 과외 받으래요. ”
제가 그 대답을 듣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수련회 가겠다는 아이를 억지로 못 가게 하면서까지 영어 과외를 받게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아이가 예수 믿는 것이 남보다 뒤지는 것은 관계없는데 영어가 뒤지는 것은 차마 못 참겠다는 것 아닙니까
믿지 않는 부모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그 교회 집사님이셨습니다.
다른 얘기 백날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신앙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기 부모로부터 직접 배운 셈입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지도할 때의 일입니다.
초등학교 5, 6학년 아이들도 수련회 데려가려면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는데 고등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떤 분이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저한데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사님, 이번에 저의 애 수련회 보내기로 했습니다. 사실 고3이라서 안 보낼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애가 수련회만 보내주면 갔다 와서 공부 열심히 한다고 약속도 했고 수련회에 갔다 오는 것이 꼭 무의미하게 시간을 쓰는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방학 내내 집에만 있는 것보다는 모처럼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스트레스도 풀고 오면 공부에 도움이 될 것도 같아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
여러분은 이 얘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애가 고3이지만 수련회를 보내기로 했으니까 잘한 것입니까
물론 그때 그 분은 저한테서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 먼저 말을 꺼낸 것입니다만 저는 그런 얘기만 들으면 혈압이 오릅니다.
수련회 갔다 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까, 신앙이 좋아져야 합니까
수련회는 말 그대로 신앙 수련을 위한 행사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수련회를 가는 것과 친구들과 어울려서 해수욕장 가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왜요
둘 다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리 당부드리는데, 적어도 우리 교회에는 고등학생인 애가 수련회를 갈 때 “가서 은혜 많이 받고 와라”라고 하지 않고, “갔다 와서 공부 열심히 하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면 합니다.
단지 그런 표현만 안 쓰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표현을 쓰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제대로 정립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가 영어 학원에 다닌다고 가정하십시다.
영어 학원에 10년 다녔는데도 영어 실력이 조금도 늘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너, 그 동안 학원 간다 그래 놓고 어디서 뭐했느냐”라고 나무라지 않겠습니까
학원에 가서 대체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도 지켜볼 테고, 학원에 갔다 오면 쓸데없이 딴짓 못하게 감시를 하면서라도 공부를 시킬 것입니다.
그럼 예수 믿은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어 학원에 10년 다녔으면 그만큼 영어를 잘 해야 하듯이 예수를 10년 믿었으면 그만큼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영어 실력이 늘지 않는 것에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예수를 닮아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어쩌면 자기 자녀가 예수를 닮아갈까봐 오히려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도 거칠고 험한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별로 재주가 없으신 분입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고, 5리를 가자 하면 10리도 가고,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까지도 내주면서 이 모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러니까 예수는 좀 대충 믿어도 이 세상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자녀교육까지 예로 들 것 없습니다.
일단 자기가 세상을 그렇게 살아갑니다.
자기가 세상을 그렇게 살면서 자녀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기 전에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린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맨 처음에는 애굽 온 하수가 피로 변하고, 그 다음에는 개구리가 들끓고, 그 다음에는 이가 들끓고, 그 다음에는 파리 떼가 사방에 가득 차고, 나중에는 애굽 온 땅이 흑암으로 가득 차기도 하고, 맨 마지막에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으니까 거기서 결국 바로가 항복하고는 이스라엘을 내보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자들이 죽는 열 번째 재앙 전까지는 꼼짝도 안하고 완강하게 버티다가 결국 열 번째에 가서 한꺼번에 항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바로의 마음이 몇 번 왔다 갔다 합니다.
개구리가 하도 들끓으니까 “이 개구리들만 없애주면 너희들 하라는 대로 해 주겠다”라고 했다가 정작 모세가 기도를 해서 개구리가 다 물러가니까 딴소리를 하고, 파리 떼가 몰려왔을 때에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출8:28)
“그래, 좋다. 가라. 가! 그 대신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그냥 대충 이 근처에서 너희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라. 그러면 되는 것 아니냐 여호와 하나님을 꼭 섬기고 싶으면 섬기되 너희가 내 백성인 것은 잊지 말아라. ”라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를 요즘 말로 옮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 신앙을 갖는 것이야 좋지. 그런데 그런 거야 어차피 자기 할 일 다 하고 남는 시간에 여가로 해야지. 예수를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어차피 예수야 평생 믿을 거니까 일단 대학은 들어가고……” - 아마 이런 얘기가 될 것입니다.
만약에 결혼 적령기의 자녀가 있어서 배우자를 선택할 때 같으면 이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 “물론 기왕이면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지. 그런데 말이다. 예수만 믿는다고 해서 저절로 잘 살아지는 것은 아니거든. 일단 생활이 안정되어야지. 그러니까 신앙도 신앙이지만……”
바로 이것이 그 옛날 바로가 했던 유혹입니다.
저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것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젓가락질을 할 줄 모릅니다.
몇 년 전부터 식사 시간이 길어지면 손목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젓가락을 잡는 자세가 잘못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식사 때마다 젓가락질 바로 하라고 아버지께서 야단을 많이 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젓가락이야 그냥 아무렇게나 편한 대로 잡으면 되지 왜 굳이 아버지 말씀대로 해야 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무리 꾸중을 하셔도 차라리 아버지하고 같은 시간에 식사를 안하고 말지, 젓가락질은 내 마음대로 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후회가 됩니다.
그런데 후회가 되도 정상적으로 후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아주 고약하게 됩니다.
“내가 그때 아버지 말씀대로 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꾸중을 조금만 더 심하게 하시든지, 아니면 몽둥이 찜질을 해서라도 나의 잘못된 젓가락질을 고쳐주셨으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생각이 더 많습니다.
저는 3남 1녀 중에 차남입니다.
위로 형님이 한 분 계시고 누이동생과 또 막내동생이 있습니다.
10여 년 전에 설을 쇠기 위해서 집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이라고 별로 많지도 않고 겨우 넷 뿐인데, 그저 낳기만 했지 어미라고 뭐 하나 제대로 해 준 게 없으니 참 미안하구나. 더 늦기 전에 있는 재산 정리해서 자식새끼들한테 아파트라도 한 채씩 해줘야 할텐데……”
자식들 결혼할 때 아파트 하나씩은 사줬어야 자식들이 구차하게 남의집살이 안 할 텐데 그걸 못해 준 것이 두고두고 한스러우신 모양입니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예수를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를 모르시는 분이니까 일단 예수는 빼놓고, 자식한테 물려주고 싶은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재산입니다.
그래서 아파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알지 않습니까
그럼 자식한테 무엇을 물려 줘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 자식한테 가장 물려주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그것이 신앙이 아니고 다른 것이라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은 당연히 예수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식을 죽이려고 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꽁꽁 묶고는 칼로 찔러 죽이려던 순간에 다른 누군가의 만류로 인해서 죽이려던 것을 포기했다면, 그런 엄청난 사건을 경험한 그 아이가 과연 어떻게 자라겠습니까
심리학자나 교육학자한테 그런 사건을 경험한 아이가 어떻게 자라게 될지를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전부 다 부정적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자다가도 깜짝 깜짝 놀라고, 걸핏하면 등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깨고, 아버지와 눈만 마주치면 자지러지고…… -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는 충격 때문에 자라서도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 생각입니다.
성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실제로 그런 인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입니다.
이삭은 분명히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충격으로 인해 제대로 자라지를 못했느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아주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대체 어떤 분이기에 우리 아버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죽이라고 하니까 기꺼이 죽이려고 하더라!” - 이삭은 그 사건을 통해서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한테서 여호와 하나님한테 어느 만큼 순종해야 하는지를 배운 것이고,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한테 이것을 가르쳐준 셈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녀한테 그런 것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 제쳐놓고 먼저 대학부터 가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 제쳐놓고 이 세상 풍속을 따라야 한다는 쓸데없는 것을 가르쳐 주지 마시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께 잘 복종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라는 것을 여러분의 생활로 직접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말로만 하면 안 듣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여러분을 어떻게 양육했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자녀는 가장 모범적인 신앙 환경 속에서 가장 모범적인 신앙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
이 시간에도 저희 하늘교회에 속한 믿음의 권속들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하늘 아버지를 예배합니다.
바라옵기는
저희의 마음이 늘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사모할 수 있게 하옵시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게 허락하시옵소서.
특별히 감사드리옵기는
저희를 사랑하셔서 저희에게 가정이 있게 하셨사오니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바라옵기는 저희에게 허락 된 이 가정에서
더욱더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모습으로
저희의 신앙을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한다 하였사오니
저희가 마땅히 가르칠 바를
저희에게 허락하신 태의 열매에게 부지런히 가르칠 수 있게 하옵시되
말과 혀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오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써 바르게 가르칠 수 있게 하옵시고
저희에게 허락 된 가정 통하여
저희에게 허락 된 믿음의 뿌리가
더욱더 깊어질 수 있게 하옵시며
더욱더 풍성한 믿음의 열매가 늘 끊이지 아니하게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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