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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빗나간 자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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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향기로운 달입니다. 꽃의 계절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게서는 고양세계 꽃박람회와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들이 향기를 내뿜고 연한 어린 싹들이 조금씩 보기 좋은 녹색을 띄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오월의 첫날 첫 주일로서 어린이 주일 혹은 꽃 주일이라고 합니다.
가정의 달과 또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기독교 가정의 책임과 사랑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말로는 기독교 신앙인이라면서 우리의 가정의 교육은 과연 기독교 가정다운지, 우리의 자녀들은 기독교인들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자라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엄청난 관심과 돈으로 교육시켰다고 안심하고 있거나 전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요즘의 부모들이 본문처럼 빗나간 자녀교육을 시키고 있거나,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다며 자녀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지는 않은지 또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부모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자녀들의 교육문제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왜 그렇게 돈과 열정을 쏟아 부었는데 우리자녀들은 완성되지 못하는 것인가! 를 생각하면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노래하기를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은 마치 장사의 수중에 있는 화살과 같아서 자식이 많은 사람은 복이 있고, 원수들 앞에서도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자식이 많은 것이 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녀가 여호와 하나님의 주신 기업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상급이라면 자녀들로 인해 기쁨을 얻고 자녀들로 인해 높임을 받아야 할텐데 오히려 골칫거리인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자식이 아니라 원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 때문에 부모가 칭찬을 듣고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가 망신을 당하고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아이들이 하나 둘 밖에 없는 시대에는 그저 마냥 귀엽게만 키워 버릇도 없고 예의도 모르는 안하무인의 몹쓸 인간을 키우는 예가 허다합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말씀에는 성전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12-17절은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모습이요,
18-21절은 한나의 아들인 사무엘의 모습이다.
우리 말 성경에는 빠져있지만 원문에는 18절에 "그러나 " 라는 접속어를 써서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대조, 비교하고 있다.
어린이 주일 아침, 우리는 이 아들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상급으로 주신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첫째, 우리의 자녀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제사장인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1)고 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로 밤낮 성전에 살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니 기이한 일이 아닙니까
여기서 “안다”는 말은 이론적이고 지식적인 의미에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체험적이고 인격적인 교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본 경험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그저 피상적으로는 알지 모르나 그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여기 계시고 자신들의 행동을 다 보고 계시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시다는 믿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감히 제물을 강탈하고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을 건드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요즈음에는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과연 저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줄을 아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고 계신 줄을 알면 어떻게 저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할까"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은 진노의 여호와 하나님, 크고 두려우신 여호와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 생각한 것입니다.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신 7:21)고 하셨습니다.
또,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신 10:17)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따라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큰 문제 중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부모를 따라 교회에는 다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경험도 없고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종종 들리는 말이 교회에서 제일 속썩이는 아이들이 목회자의 자녀나 제직자들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웃어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쉽게 귀넘어들을 말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18)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둘째, 자기 절제를 가르쳐야 한다.
자녀가 하나 둘 밖에 없으니 부모가 거절할 줄을 모릅니다.
몇 만원짜리 장난감을 쉽게 사줍니다.
겨우 전자오락 밖에 할 줄 모르는데도 백만원이 넘는 컴퓨터를 덥석 사다 줍니다.
부모가 안 된다고 했더라도 아이가 다리를 뻗고 앉아 울면 해결됩니다.
남의 아이가 먹고 있는 과자도 엄마에게 달라고 울면 빼앗아 주는 부모가 있습니다.
심지어 성찬식 때 사용하는 빵을 아이가 달라고 조른다고 하여 하나 집어 주는 부모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랐으니 안 되는 게 없습니다.
갖고 싶은 것은 다 가질 수 있고,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을 수 있고, 하고 싶은 짓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줄로만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 방식이 집에서 부모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제까지 다 되었는데 왜 안 되느냐고 합니다.
자기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를 거스려 절제할 줄을 모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이런 식으로 자랐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무슨 고기든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달라고 졸랐습니다.
삶은 고기보다 날고기를 원한다고 떼를 썼습니다.
얼굴이 예쁜 여인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렀습니다.
그들은 망나니였습니다.
불량자란 말을 공동번역에는 그렇게 번역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몰라보고 어른도 몰라봤습니다.
그들은 자기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한번 보십시오.
그는 어릴 때 벌써 부모를 떠나 혼자 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왜 엄마, 아빠가 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어린 사무엘에게 참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어린 나이에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절제를 배웠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무엘은 자라서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을 다스려 절제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한 평생 사사로 지내면서 남의 것을 탐내거나 빼앗지 않았습니다(12:3-4).
자신의 자리를 사울에게 물려줄 줄도 알았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안 돼"라는 말을 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자녀들을 망나니로 키우고 싶은가요 그렇지 않다면 절제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그건 안 돼"라는 말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갖고 싶은 것을 참고, 먹고 싶은 것을 참고, 하고 싶은 것을 참는 법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셋째, 좋은 습관을 길러 주시기 바랍니다.
행동은 습관을 낳는다고 합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그의 성품이 되고 성품은 그의 운명을 낳는다고 합니다.
일상생활 중 90%이상의 행동은 습관으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비슷한 행동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특히 어릴 때 길들여진 습관은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말하기를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나봅니다.
이처럼 한 번 길들여진 습관을 고치기란 쉽지 않으니 좋은 습관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저의 집 이야기라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아인에게 아침에 일어나면 예수님을 꼭 만나도록 합니다. 두란노에서 나오는 “예수님은 좋아요”라고 하는 월간지가 있습니다. 매일 큐티 할 수 있도록 하는 책입니다.
일어나면 말씀 읽고 큐티하도록 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사모는 저녁에 잘 때 기도하도록 가르칩니다.
하루는 엄마가 하루는 아이가 어떠할 때 보면 아인가 한달 기도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때는 아인이가 잘못했을 때라든지 요구를 들어 주었을 때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아니 잠을 자는 동안에도, 수백 가지 습관에 따라 움직입니다.
일례로 식사 습관을 생각해 보면은, 밥을 먹을 대도 대부분 오른 손을 사용하지만 왼손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국을 먼저 먹는 사람이 있고 밥 먹기 전에 물을 먼저 마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는 사람도 있고 소리 내지 않고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식사 때마다 신물을 펼치는 습관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직업적인 습관은 각 사람이 가진 직업의 반복적 특성에 따라 형성됩니다.
저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아름다운 언덕이나 넓은 당을 보면 그곳에 멋진 교회당을 짓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언덕 위에 십자가를 세우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내가 목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업가는 넓은 땅을 보면 그곳에 공장이나 멋진 사무실을 세우고 싶어할지도 모릅니다.
아침잠이 많던 내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새벽 기도를 드리는 습관 때문입니다.
습관은 인생을 움직입니다.
우리의 행동 중 90%이상이 습관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러한 일상의 습관이 우리의 미래를 창조합니다.
습관은 예언적이 부분이 있습니다.
습관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습관을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닙니다.
습관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습관이 되기 전에 바른 행동을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고 탄식하셨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처음에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고기를 가져갈 때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두 번 그렇게 하다보니 습관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 제사장들(홉니와 비느하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13)라고 하였습니다.
습관이 되고 나니 두려운 마음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엘리도 처음에 자식의 행동을 보고 겁이 나고 걱정이 되었을 것이지만 이젠 그러려니 하고 만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특히 성도들은 자녀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예배드리는 습관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도 장난치고 떠드는 것을 보면서도 "아직 철이 안 들어 그렇지. 차차 나아질 거야"하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큰 오해입니다.
철이 들기 전에 바른 예배의 습관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사무엘의 어머니는 아직 어린 사무엘에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세마포 에봇을 입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철부지 아이가 뛰어 놀기에는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는 예복을 입어야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기도가 습관이 된 것입니다.
까닭에 그는 후에 말하기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12:23)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신다면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길러 주시기 바랍니다.
주일에는 교회에 가는 습관, 교회에 갈 때는 깨끗한 옷을 단정히 입는 습관, 예배는 엄숙하고 거룩하게 드리는 습관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힘들고 어려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것이 자라는 아이에게 습관이 될 것입니다.
요즈음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아끼지 않습니다.
어느 조사 보고에 의하면 고등학생의 과외지도를 위해 수십 만원씩의 과외비를 지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학을 잘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여호와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공부를 잘한들 무엇에 쓰겠습니까
나중에 부모를 알아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두려운 줄을 알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2:30).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을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겼다.
아들들에게 참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참아달라고 했습니다.
아들들에게 양보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이해해 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훔쳐가도 아들들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이해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29절에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비극이요, 이것이 불행이다.
결국 아들들도 비참하게 되었고, 부모도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영적 습관은 하루아침에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존재 변화의 시작이라면 성화는 존재의 끓임 없는 변화입니다.
신앙생활은 옛 습관을 변화시키라고 요구합니다.
신앙생활은 선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러한 불가향력의 은혜는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게 합니다.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변화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택을 통한 변화를 주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편안하기를 바라는 습관이 있습니다.
현대문화는 편안함이라는 마법을 사람들에게 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평안함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참된 가치에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으로 존재하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존재 가치를 주셨습니다.
성숙을 위해 영적 습관을 훈련하는 것은 참된 가치를 위한 훈련이며 변화를 위한 훈련입니다.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믿음에서 생깁니다.
그리고 믿음과 지식이 순종으로 나타나면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은 지식을 낳고, 지식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경험을 낳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식이 여호와 하나님의 기업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상급인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을 잘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다스려 절제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시기 바랍니다.
어려서부터 좋은 신앙의 습관을 길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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