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교양과 양육으로
본문
벌의 세계에는 여왕벌과 일벌, 그리고 수벌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여왕벌은 벌의 세계를 통치합니다.
일벌은 꽃가루를 나르고 육아활동을 합니다.
(일벌이 산란하는 경우는 여왕벌이 생산능력을 상실했을 때, 그 여왕벌을 없애고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여왕벌을 키워냅니다. )
수벌은 일도 하지 않고 새끼도 기르지 않고 일생에 단 한번 수정만 할 뿐입니다.
그런데 일벌보다 몸이 큰 여왕벌은 벌 세계의 지도자입니다.
여왕벌의 움직임대로 벌은 움직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산란을 하여 새끼를 칩니다.
암벌들도 새끼를 치지만 암벌이 친 새끼는 수벌이 됩니다.
여왕벌이 치는 새끼만이 일벌이 되어 벌의 세계를 움직입니다.
이처럼 여왕벌은 아주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여왕벌은 처음부터 여왕벌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일벌들 중에서 특별히 한 벌을 양육합니다.
여왕벌로 만들기 위해서 일벌의 인두샘에서 분비되는 로얄제리를 먹이고 훈련을 시킵니다.
그렇게 양육이 되면 어느덧 여왕벌이 됩니다.
처음부터 여왕벌의 씨가 있거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왕벌은 철저히 양육을 통해서 되어 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처음부터 뛰어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역할이 달라집니다.
처음부터 우수한 씨, 지도자의 씨, 처음부터 특별한 재능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재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다 좌우하고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양육되느냐 입니다.
우리는 타고난 성품, 타고난 머리, 타고난 재능, 타고난 체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100% 그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품과 재능은 부모의 영향을 받습니다만 자라는 과정에서 어떠한 인격의 훈련을 받느냐, 어떤 재능을 키우고 개발시켜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 처음부터 폭력, 강도, 살인범이 되나요
누가 처음부터 선인으로 태어나는가요
누가 처음부터 뛰어난 과학자로, 예술가로, 전문가로 태어납니까
부모와 이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향을 받았느냐 입니다.
어떤 교육과 환경 속에서 자랐느냐가 중요합니다.
싱가포르의 전 총리(수상) 리콴유의 아버지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도박과 술로 허송세월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리콴유는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라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졌을 때 아버지의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절대로 닮지 않겠다. 아버지의 인생은 살지 않겠다. ’고 다짐을 하고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러한 비전속에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교육받고 자람으로 그는 싱가포르를 부와 정직의 나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종종 한 사람의 이름을 거명할 때, 그 사람의 이름만을 거명하지 않고 누구의 손자, 누구의 아들이라고 거명하는 것을 봅니다.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떤 집안에서 어떤 영향을 받고 자랐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육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한번 쯤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우리의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부모로서의 의무로 가르치고만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양육의 의무를 가지고 자녀들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 아이의 씨가 어떤 씨인지, 머리가 좋으냐 좋지 않으냐,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양육하느냐 입니다.
처음부터 여왕벌이 따로 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달렸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양육하라고 하십니다.
양육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이 바로 양육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과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는 모습,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져야 할 성품들에 대해서, 그리고 능력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13:15)
또한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잘못했을 때 엄격히 야단을 치십니다.
믿음 없음을 책망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음에 대해서 나무라셨고, 말씀과 행동과 그리고 책망을 통해서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양육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것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부모입니다.
내 아이를 누가 양육할 수 있습니까
‘나’입니다.
내가, 말씀과 삶으로, 그리고 때로는 책망과 훈계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양육하십시오.
오늘 말씀은 자녀를 양육하는 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말씀해주십니다.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먼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부모라는, 또 연장자라는 이유로 어린이들에게 야단치고 책망하고, 엄격히 통제하고, 이러한 것을 당연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당연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분노와 상처로 간다면 이미 그것은 여러분의 권위 밖의 일을 자행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쓰고 있는 당시 로마에는 ‘파트리아 포테스타스’라는 절대 부권이 있었습니다.
이 부권은 가족들에게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을 노예로 팔기도 하고, 쇠사슬에 묶어 일을 시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로고 갓 태어난 자녀를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자녀가 출생하면 아버지의 발밑에 놓습니다.
부친이 그 아이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다 버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공공연히 저질러진 행위입니다.
이 부권은 그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지속되었습니다.
아무리 장성한 자식이라 하더라도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아버지의 권위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커라는 사람은, “이 법은 로마의 최대의 과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녀에 대한 배려의 말씀은, 매우 다른 차원의 말씀이요,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여호와 하나님의 법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힘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도 공공연히, 자녀에 대해 로마시대와 같지는 않더라도, 자녀에 대해, 지나친 권리를 행사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게 되고, 우리의 자녀들을 노엽게 만드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이들의 인격에 모욕감을 주고 무시하는 것들입니다.
“골치 덩어리”라는 등, “너 같은 것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
“네가 잘 하는 게 뭐가 있니”
“가방 메고 다니면 다 공부하는 것이냐”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너 도대체 누굴 닮은 거니”
이런 유의 말은, 아이들이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 무시의 말들입니다.
이러할 때, 아이들이 마음속에 앙심이 생기고, 분노와 미움이 생긴답니다. 그리고 낙담하게 되고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게 할 때 반작용이 나타납니다.
지나치게 엄격함 속에는 항상 반동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항상 불편합니다.
때로는 엄격함을 풀고 따뜻하게 대해주려고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또한 아이들에 대한 편애는 가족 안에 큰 갈등과 불행을 낳게 합니다.
이것이 어릴 때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날 때는 따돌림 당한다고 느끼는 자녀의 마음에 노여움이 자리매김하게 되고, 그 노여움이 불행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그 외에도 외로움, 가정불화, 업신여김, 오해받음 등도 아이들을 분노케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이 이런 사고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이런 실수를 합니다.
첫 번째는, 자녀를 내 소유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이들을 내 수준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분노케 한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금해야 합니다.
부모의 권위는 윽박지르거나 명령하는데 있지 않고, 의와 사랑에 있습니다.
그 의와 사랑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동일하게 사랑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서 격려하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자주 이런 말을 사용했습니다.
“채찍을 아끼면 자녀를 버린다. 그러나 채찍 옆에는 사과를 두었다가 자녀들이 잘 했을 때는 그 사과를 주라”
참된 양육은 우리의 자녀들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수준과 그 아이의 입장에서 보고 생각하고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이의 인격이 자라고 지혜가 자라고 그 재능이 자라게 됩니다.
당당하게 되고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녀들을 양육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교양으로 하라.
우리가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자녀들을 ‘교양’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격려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엄격한 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양입니다.
‘교양’이라는 말은 ‘파이데이아’라는 말로 ‘아이’라는 말의 ‘파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말은 ‘어린아이를 양육함’ ‘교육’ ‘징계’의 뜻이 있습니다.
이는 자녀를 교육하는데 있어서, ‘책벌을 통해서 훈련하라’는 말입니다.
곧 징계를 통해서 자녀들이 잘못된 점을 교정시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와 사랑을 통한 교육입니다.
채찍은 의와 사랑입니다.
성경은 자녀교육에 있어서 채찍과 사랑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히 12:5절 이하를 보십시오.
“.....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5-6)하시면서, 징계의 유익함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히 12:11절에 보면,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12:11)라고 합니다.
잠언 13:24절에서 말씀합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
잠 23:13-14절입니다.
“아이를 훈계 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 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
성경은 이렇듯 체벌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엄격히 책벌하십니다.
그것이 의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모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책망하고 체벌할 때 신뢰성이 문제입니다.
곧 권위의 문제입니다.
자녀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부모의 체벌은 폭력이 됩니다.
아이들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느끼기보다는 분풀이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안되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것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체벌이라는 것을 자녀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양육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훈계로 하라.
‘훈계’라는 말은 ‘누페시야’라는 말로 ‘마음’ ‘정신’이라는 말의 ‘누스’와 ‘위치하다’‘놓다’를 의미하는 ‘티테미’의 파생어로 ’충고‘의 뜻을 지닙니다.
곧 말을 통하여 확실히 양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옳은 것에 대해서는 옳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는 것입니다.
특별히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가르치는 것입니다.
흥분해서 매로 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따뜻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분명히 밝혀주어서, 다시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도록, 그리고 잘한 일은 오래 기억하도록, 곧 지혜를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잠언 2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어렸을 때 마땅히 행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면, 그것이 평생의 교훈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대지라는 소설을 쓴 펄벅여사는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작품을 써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 작품 속에서 그녀는 자기의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2세에 결혼한 그녀의 어머니는 선교사인 남편을 따라 전혀 알지 못하는 중국대륙으로 갑니다.
미지의 세계에서 두려움과 굶주림 속에서 선교하며 일곱 자녀를 낳지만 네 아이는 병들어 그 어머니의 품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그녀의 어머니는 믿음으로 세 아이를 정성껏 키웁니다.
아이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그는 절대 고통스러운 빛을 띠지 않고, 아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쾌활하고 즐거운 노래를 부리며 가르치고 잡지나 책에서 재미있는 그림들을 오려다가 아이들의 방에 붙여주고, 오직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이야기,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들려줍니다.
혹 아이들이 잘못했노라면 주의 말씀으로 훈계하고 매를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것이 사랑의 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밝은 얼굴 때문에 한 번도 어머니가 고생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얼굴과 마음을 보면서 밝은 얼굴과 밝은 마음으로 자랐습니다.
그 가운데서 펄벅여사가 있었습니다.
요즈음 매스컴에 나오는 모 재벌 총수의 모습은 우리에게 안타까움을 줍니다.
펄벅의 어머니와 너무나도 대조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이들을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았습니다.
위탁자로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교양과 양육으로 하라”
이 가운데 여왕벌은 벌의 세계를 통치합니다.
일벌은 꽃가루를 나르고 육아활동을 합니다.
(일벌이 산란하는 경우는 여왕벌이 생산능력을 상실했을 때, 그 여왕벌을 없애고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여왕벌을 키워냅니다. )
수벌은 일도 하지 않고 새끼도 기르지 않고 일생에 단 한번 수정만 할 뿐입니다.
그런데 일벌보다 몸이 큰 여왕벌은 벌 세계의 지도자입니다.
여왕벌의 움직임대로 벌은 움직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산란을 하여 새끼를 칩니다.
암벌들도 새끼를 치지만 암벌이 친 새끼는 수벌이 됩니다.
여왕벌이 치는 새끼만이 일벌이 되어 벌의 세계를 움직입니다.
이처럼 여왕벌은 아주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여왕벌은 처음부터 여왕벌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일벌들 중에서 특별히 한 벌을 양육합니다.
여왕벌로 만들기 위해서 일벌의 인두샘에서 분비되는 로얄제리를 먹이고 훈련을 시킵니다.
그렇게 양육이 되면 어느덧 여왕벌이 됩니다.
처음부터 여왕벌의 씨가 있거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왕벌은 철저히 양육을 통해서 되어 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처음부터 뛰어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역할이 달라집니다.
처음부터 우수한 씨, 지도자의 씨, 처음부터 특별한 재능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재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다 좌우하고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양육되느냐 입니다.
우리는 타고난 성품, 타고난 머리, 타고난 재능, 타고난 체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100% 그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품과 재능은 부모의 영향을 받습니다만 자라는 과정에서 어떠한 인격의 훈련을 받느냐, 어떤 재능을 키우고 개발시켜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 처음부터 폭력, 강도, 살인범이 되나요
누가 처음부터 선인으로 태어나는가요
누가 처음부터 뛰어난 과학자로, 예술가로, 전문가로 태어납니까
부모와 이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향을 받았느냐 입니다.
어떤 교육과 환경 속에서 자랐느냐가 중요합니다.
싱가포르의 전 총리(수상) 리콴유의 아버지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도박과 술로 허송세월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리콴유는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라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졌을 때 아버지의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절대로 닮지 않겠다. 아버지의 인생은 살지 않겠다. ’고 다짐을 하고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러한 비전속에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교육받고 자람으로 그는 싱가포르를 부와 정직의 나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종종 한 사람의 이름을 거명할 때, 그 사람의 이름만을 거명하지 않고 누구의 손자, 누구의 아들이라고 거명하는 것을 봅니다.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떤 집안에서 어떤 영향을 받고 자랐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육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한번 쯤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우리의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부모로서의 의무로 가르치고만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양육의 의무를 가지고 자녀들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 아이의 씨가 어떤 씨인지, 머리가 좋으냐 좋지 않으냐,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양육하느냐 입니다.
처음부터 여왕벌이 따로 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달렸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양육하라고 하십니다.
양육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이 바로 양육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과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는 모습,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져야 할 성품들에 대해서, 그리고 능력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13:15)
또한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잘못했을 때 엄격히 야단을 치십니다.
믿음 없음을 책망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음에 대해서 나무라셨고, 말씀과 행동과 그리고 책망을 통해서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양육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것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부모입니다.
내 아이를 누가 양육할 수 있습니까
‘나’입니다.
내가, 말씀과 삶으로, 그리고 때로는 책망과 훈계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양육하십시오.
오늘 말씀은 자녀를 양육하는 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말씀해주십니다.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먼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부모라는, 또 연장자라는 이유로 어린이들에게 야단치고 책망하고, 엄격히 통제하고, 이러한 것을 당연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당연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분노와 상처로 간다면 이미 그것은 여러분의 권위 밖의 일을 자행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쓰고 있는 당시 로마에는 ‘파트리아 포테스타스’라는 절대 부권이 있었습니다.
이 부권은 가족들에게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을 노예로 팔기도 하고, 쇠사슬에 묶어 일을 시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로고 갓 태어난 자녀를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자녀가 출생하면 아버지의 발밑에 놓습니다.
부친이 그 아이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다 버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공공연히 저질러진 행위입니다.
이 부권은 그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지속되었습니다.
아무리 장성한 자식이라 하더라도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아버지의 권위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커라는 사람은, “이 법은 로마의 최대의 과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녀에 대한 배려의 말씀은, 매우 다른 차원의 말씀이요,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여호와 하나님의 법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힘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도 공공연히, 자녀에 대해 로마시대와 같지는 않더라도, 자녀에 대해, 지나친 권리를 행사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게 되고, 우리의 자녀들을 노엽게 만드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이들의 인격에 모욕감을 주고 무시하는 것들입니다.
“골치 덩어리”라는 등, “너 같은 것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
“네가 잘 하는 게 뭐가 있니”
“가방 메고 다니면 다 공부하는 것이냐”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너 도대체 누굴 닮은 거니”
이런 유의 말은, 아이들이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 무시의 말들입니다.
이러할 때, 아이들이 마음속에 앙심이 생기고, 분노와 미움이 생긴답니다. 그리고 낙담하게 되고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게 할 때 반작용이 나타납니다.
지나치게 엄격함 속에는 항상 반동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항상 불편합니다.
때로는 엄격함을 풀고 따뜻하게 대해주려고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또한 아이들에 대한 편애는 가족 안에 큰 갈등과 불행을 낳게 합니다.
이것이 어릴 때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날 때는 따돌림 당한다고 느끼는 자녀의 마음에 노여움이 자리매김하게 되고, 그 노여움이 불행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그 외에도 외로움, 가정불화, 업신여김, 오해받음 등도 아이들을 분노케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이 이런 사고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이런 실수를 합니다.
첫 번째는, 자녀를 내 소유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이들을 내 수준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분노케 한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금해야 합니다.
부모의 권위는 윽박지르거나 명령하는데 있지 않고, 의와 사랑에 있습니다.
그 의와 사랑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동일하게 사랑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서 격려하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자주 이런 말을 사용했습니다.
“채찍을 아끼면 자녀를 버린다. 그러나 채찍 옆에는 사과를 두었다가 자녀들이 잘 했을 때는 그 사과를 주라”
참된 양육은 우리의 자녀들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수준과 그 아이의 입장에서 보고 생각하고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이의 인격이 자라고 지혜가 자라고 그 재능이 자라게 됩니다.
당당하게 되고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녀들을 양육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교양으로 하라.
우리가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자녀들을 ‘교양’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격려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엄격한 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양입니다.
‘교양’이라는 말은 ‘파이데이아’라는 말로 ‘아이’라는 말의 ‘파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말은 ‘어린아이를 양육함’ ‘교육’ ‘징계’의 뜻이 있습니다.
이는 자녀를 교육하는데 있어서, ‘책벌을 통해서 훈련하라’는 말입니다.
곧 징계를 통해서 자녀들이 잘못된 점을 교정시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와 사랑을 통한 교육입니다.
채찍은 의와 사랑입니다.
성경은 자녀교육에 있어서 채찍과 사랑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히 12:5절 이하를 보십시오.
“.....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5-6)하시면서, 징계의 유익함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히 12:11절에 보면,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12:11)라고 합니다.
잠언 13:24절에서 말씀합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
잠 23:13-14절입니다.
“아이를 훈계 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 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
성경은 이렇듯 체벌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엄격히 책벌하십니다.
그것이 의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모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책망하고 체벌할 때 신뢰성이 문제입니다.
곧 권위의 문제입니다.
자녀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부모의 체벌은 폭력이 됩니다.
아이들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느끼기보다는 분풀이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안되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것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체벌이라는 것을 자녀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양육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훈계로 하라.
‘훈계’라는 말은 ‘누페시야’라는 말로 ‘마음’ ‘정신’이라는 말의 ‘누스’와 ‘위치하다’‘놓다’를 의미하는 ‘티테미’의 파생어로 ’충고‘의 뜻을 지닙니다.
곧 말을 통하여 확실히 양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옳은 것에 대해서는 옳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는 것입니다.
특별히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가르치는 것입니다.
흥분해서 매로 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따뜻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분명히 밝혀주어서, 다시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도록, 그리고 잘한 일은 오래 기억하도록, 곧 지혜를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잠언 2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어렸을 때 마땅히 행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면, 그것이 평생의 교훈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대지라는 소설을 쓴 펄벅여사는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작품을 써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 작품 속에서 그녀는 자기의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2세에 결혼한 그녀의 어머니는 선교사인 남편을 따라 전혀 알지 못하는 중국대륙으로 갑니다.
미지의 세계에서 두려움과 굶주림 속에서 선교하며 일곱 자녀를 낳지만 네 아이는 병들어 그 어머니의 품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그녀의 어머니는 믿음으로 세 아이를 정성껏 키웁니다.
아이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그는 절대 고통스러운 빛을 띠지 않고, 아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쾌활하고 즐거운 노래를 부리며 가르치고 잡지나 책에서 재미있는 그림들을 오려다가 아이들의 방에 붙여주고, 오직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이야기,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들려줍니다.
혹 아이들이 잘못했노라면 주의 말씀으로 훈계하고 매를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것이 사랑의 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밝은 얼굴 때문에 한 번도 어머니가 고생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얼굴과 마음을 보면서 밝은 얼굴과 밝은 마음으로 자랐습니다.
그 가운데서 펄벅여사가 있었습니다.
요즈음 매스컴에 나오는 모 재벌 총수의 모습은 우리에게 안타까움을 줍니다.
펄벅의 어머니와 너무나도 대조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이들을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았습니다.
위탁자로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교양과 양육으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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