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행복한 자녀
본문
여러분은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저는 성공한 인생보다는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목회 성공도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행복한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주의 은혜에 감사하고 맡겨주신 은혜 감사해서 여호와 하나님 사랑하고 성도들 사랑하며 행복한 목회를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여러분들도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괴로워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안 주신 것만 생각하며 힘들어하지 말고 주신 것 생각하며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사십시오.
우리 자녀들도 행복한 자녀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행복한 자녀로 만드는 방법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를 모릅니다. 두루뭉술하게 사랑하자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오늘은 몇 가지 자녀 사랑의 방법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대로 사랑한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진정 행복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1. 복된 자아상을 갖게 해주라
자아상이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자신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혼란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번에 총기로 3명 이상의 사람을 죽인 조승희라는 청년은 자실 자기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잘 모르니 자기를 긍정적으로 봐야 하는지 자기를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학교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 급우들이 질문합니다. “What's your name" 그러자 조승희가 "My name is question. "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부모의 눈으로 보면 안 됩니다. 부모의 눈으로 보면 부모의 기준에 따라서 자녀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절대기준이 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눈으로 자녀를 봐야 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씀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는데 긍휼에 풍성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막으시고 주님의 부활하심과 함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그런 존재들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고 그렇게 인정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도 성경이 말하는 바른 정체성을 갖게 될 것이고 건강한 자아상을 소유하여 행복한 생애를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동일하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이 확신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보배롭게 여기신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 대문에 존귀한 사람이다.
2. 축복의 말을 해주라
복을 빌어주는 것이 축복의 말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축복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인간의 말은 예언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말을 들으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세요. “기대가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실 거야, 너 때문에 세상은 달라질 거야, 엄마는 네가 있어서 행복해... ”
가장 좋은 축복 중에 하나가 칭찬입니다. 칭찬을 하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가 발생해서 삶에 생기를 주고 활력이 넘쳐서 생산적인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칭찬을 통해서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19세기 초 미국에 벤쟈민 웨스트(Benjamin West)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하루는 부모님이 외출하고 난 사이에 그가 혼자 집에 남게 되었습니다. 벤쟈민은 심심한 나머지 그림물감을 다 풀어서 자기의 누이동생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이 지저분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잠시 뒤에 부모님이 돌아왔습니다. 집에 들어와 보니까 방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그것에 대해서 벤쟈민에게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벤쟈민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야! 우리 벤쟈민이 그림을 엄청 잘 그렸네. 딱 보니까 누이동생인걸 알겠네!" 그러면서 칭찬해 주었습니다. 부모님은 벤쟈민을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림을 잘 그렸다고 격려의 입맞춤까지 해주었습니다. 나중에 벤쟈민은 그때 일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내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부모님의 격려와 입맞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더욱 더 잘 하는 동기를 제공해줍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 (Pygmalion Effect) 라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이 보다 더 좋은 교육방법이 없다고도 합니다. 칭찬, 격려, 신뢰, 인정, 애정, 사랑, 긍정, 확신,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변화됩니다. 아낌없이 칭찬하십시오. 칭찬을 할 때는 마음자세를 긍정적으로 바꾸셔서 진정으로 칭찬하십시오.
3. 꿈과 환상을 보게 하라
인생이 불행해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남과 나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비결이 비전을 보는 것입니다.
비전은 나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다르듯이 각 사람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은 다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남과 같이 살려고 하기 때문에 남과 나를 비교하고 남보다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남보다 좀 나은 부분 때문에 교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참된 성공은 소유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면 그 사람은 비록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했어도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자신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그 비전에 헌신한다면 그가 사회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라갔느냐 혹은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 했느냐와 상관없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모르고 방황합니다. 이것 조금하다가 안 되면 다른 것 조금하고 이런 식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의 뜻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기 때문에 성공 같으나 실상은 실패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여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방황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의 비전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이들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모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르기에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교회에 나오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받은 젊은이들은 참 복된 자들입니다.
성경은 성령께서 임하시면 자녀들도, 젊은이들도, 노인들도 꿈과 환상을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놀라운 것입니다. 자녀들과 젊은이들이 꿈과 환상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 할 수 있더라도 노인들도 꿈을 꾼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 믿는 노인들의 말년이 일반인들보다는 더 아름다운 이유는 천국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수명이 다하면 나는 흙으로 돌아가고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는 존재가 아니라 비록 몸은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영은 여호와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 영원한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하고 젊은이들은 비전을 보고 노인들도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한 소망의 종교입니다.
4. 좋은 것보다 옳은 것을 하게 하라
사단은 좋은 것을 하게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옳은 것을 하게 하십니다.
좋은 것을 선택하는 순간 옳은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좋은 것을 선택하므로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보기에 좋은 선악과를 선택하므로 언제나 옳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버렸던 것입니다. 요셉은 좋은 것보다 옳은 것을 선택하므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1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은 달콤한 것입니다. 그녀의 유혹은 10대 후반의 젊은이의 육체에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것보다는 언제나 옳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좋은 것을 포기하고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고난을 수반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던지는 유혹을 물리치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므로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좋은 것을 선택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보다 고난을 당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여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지혜를 가르쳐야 합니다. 만약 우리 자녀들이 옳은 것보다 좋은 것을 선택하는 습관을 가진다면 그 아이들의 장래는 어두운 것입니다.
서양에 어느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면회를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작별의 입맞춤을 하는 순간에 아들이 어머니의 입술을 세게 깨물어 상처를 주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 몹쓸 놈이라고 꾸짖었습니다. 그 때 아들은 이렇게 항변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처럼 사형수가 된 것은 우리 어머니의 책임이 큽니다. 내가 어릴 때 옆집에 가서 탐나는 물건을 슬쩍 훔쳐올 때 어머니는 뻔히 아시면서도 나를 타일러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내가 원하는 물건은 사람을 해쳐서라도 가져야 직성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형수가 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옳은 것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옳은 것의 기준은 언제나 변함없이 옳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 자녀들에게 너무나 유혹적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세상의 유혹 앞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세상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할 때 부모의 교양과 훈계를 기억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5. 상처를 주지 말라
상처는 쓴 뿌리를 만들고 쓴 뿌리는 악한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본문에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녀를 화나게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기 "노엽게 한다"는 말은 공동번역에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에는 '파로르기조'의 현재명령법 2인칭인 '파로르기제티' 즉, "화로 자극하다, 성나게 하다"라고 하여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느 책에서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노여워하는 몇 가지 경우를 말했는데 소개해보겠습니다.
첫째, 편애 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자녀들 가운데 누구는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하는 것은 아주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에서와 야곱의 문제는 부모의 편애에서 출발한 것이 많습니다.
둘째,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공부 잘하는 옆집 아이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모든 사람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각 사람마다 독특한 특성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셋째, 지나친 강요를 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특히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수준을 정해놓고, 이 성적을 받아야 한다든가, 어떤 대학에 꼭 들어가야 한다는 강요는 좋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능력이 안 따라주는데도 부모가 막 강요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힘이 없으니 할 수 없이 따라 해도 마음에 분노가 쌓입니다.
넷째, 기를 꺾는 행위를 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네가 뭘 하겠느냐', '너는 못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잘 해보려는 의지를 꺾고 부모 앞에서 말대꾸도 못하게 하는 것이 자녀들 속에 분을 쌓이게 합니다.
다섯째, 과잉보호를 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한국 부모님들이 과잉보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입시철이 되면 공부만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시키지 않고 부모들이 다 해줍니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나중에는 혼자서 뭘 할 줄 모릅니다. 과잉보호가 당장에는 아이들이 편해서 부모에게 원망을 안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다 큰 다음에, 자신이 남들보다 능력이 떨어지고 혼자서 독립적으로 못하는 것을 보면 부모님이 자신이 어릴 때에 과잉보호를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부모가 자신을 왜 이렇게 키웠는지 원망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자녀는 원망하게 됩니다. 과잉보호도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번에 지리산에 방사된 반달가슴곰 천왕이가 인공 생태학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이유는 등산로에서 탐방객들로부터 먹이를 얻어먹는 버릇으로 인하여 야생성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등산로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사람들이 모른척하고 지나가야 하는데 귀엽다고 먹을 것을 던져줬기 때문에 야생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섯째, 부모가 희생에 인색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이것은 과잉보호와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조금도 희생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 부모들은 과잉보호에 많이 치우치는데, 미국의 부모들은 자녀를 기를 때, 합리적으로 기른다고 하면서 희생에 많이 인색합니다. 자녀에게 독립심을 기른다고, 밤에 어린 아기가 많이 울어대도 절대 가보지 않습니다. 먹는 것을 줘도 준 것 그대로 혼자 먹도록 훈련시키고 부모가 세운 규율을 절대적으로 지키도록 만듭니다. 부모들이 절대 양보를 안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자녀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진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려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부모가 희생하기 싫어서 그런 것인지 알아채고 마음이 섭섭해져서 분노가 생깁니다.
일곱째, 부모에게 등한시 당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아버지들이 자녀의 생일도 잘 알아주지 않고, 자녀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고 일에만 파묻혀서 자기 일에는 충실하지만 자녀 일에 등한시 할 때, 자녀들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여덟째, 잔인한 언어나 지나친 채벌이 주어질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아이들을 야단칠 때도 말을 골라서 해야 합니다. 한국 부모님들 보면 자식들에게 심한 말을 합니다. 저주스런 말을 퍼붓는 경우도 있고, 채벌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걸핏하면 손이 올라갑니다. 태권도 민족이라 그런지 부모가 발까지 올라갑니다. 매를 때릴 때는 때리는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에 비해서 적당한 양으로 때려야 합니다.
아홉째, 일관성이 없는 부모의 태도에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동일한 행동에 대해서 부모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가만 내버려두기도 하고 야단을 치기도 하고 때로는 웃음으로 받아드리기도 한다면 자녀는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너그러우면서 자녀들의 동일한 실수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관성이 없는 부모의 이런 태도가 자녀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열째, 듣지 않고 판단할 때 자녀는 분노합니다. 들어보고 판단을 해야 합니다. 잘 들어보고 옳고 그른 것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들어보지도 않고 먼저 인상 쓰고 야단치면 자녀들이 분노합니다.
6.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게 하라
렘17:7-8을 보면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받을 몇 가지 복을 약속합니다. 첫째, 물가에 심기운 나무, 즉 물댄 동산에서 자라는 과목처럼 튼튼한 뿌리와 줄기를 내고 과실을 맺는 나무가 되게 하십니다. 둘째,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습니다. 가뭄과 같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도 그 마음에 걱정을 제거해주시고 평안의 복을 주십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자의 특징 중 하나는 환경에 관계없이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셋째, 결실이 그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열매를 풍성히 맺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열매를 맺는 성도의 삶을 보장해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높은 뜻 숭의교회를 담임하는 김동호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그분과 저는 만나 본적도 없습니다. 저는 그분을 책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그분은 저를 전혀 모르십니다. 김목사님을 존경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분은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분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자신은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은 성경의 말씀대로 내가 파지 아니한 우물의 물을 마시는 사람이고, 내가 채우지 아니한 물건이 가득한 집에서 살게 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김목사님은 자기가 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잘 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복을 받게 된 이유가 84년 6월에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이분이 82년 1월 첫 주일부터 영락교회 부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32살이었습니다. 그 당시 32살 나이로 영락교회 부목사가 된다는 것은 어렵던 때였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를 담임하시던 임택진 목사님이 당시 영락교회 당회장에게 ‘김 목사는 내 아들 같은 목사’라시며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 기막힌 추천으로 영락교회 부목사가 되었을 때 사람들 사이에는 별것 아니지만 뒷말들이 좀 있었습니다. ‘김 목사 끈 좋다. ’ 영락교회에서 2년 반 정도 시무를 하다가 84년 6월 첫 주부터 승동교회라고 하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영락교회를 사임하자마자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겨 담임목사께서 사임하시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영락교회의 강단을 임시로 임택진 목사님께서 맡으셨었습니다. 그러시다가 수요예배 설교 중 잠시 혈압이 높아지셔서 강단에서 쓰러지시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임 목사님께서 강단에서 쓰러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김동호 목사님의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김목사님은 즉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우리 목사님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다음 기도가 문제였습니다. “저 10년은 봐 주셔야 되는데요...... ” 참 황당한 기도였습니다. 그 때 김목사님은 처음 자신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전까지 믿음만큼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하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참 죄스럽고 많이 부끄러웠답니다. 그래서 즉시 여호와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임 목사님에 대한 줄을 끊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만 끈을 삼고 목회를 하겠다고 여호와 하나님께 서원하였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큰 복을 받은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이 2001년 동안교회를 사임하고 교회 개척을 준비하고 있을 때 동안교회 교인들 중에 김목사님이 큰 물주를 잡아서 교회와 교인들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큰 물주로부터 100억원을 받았다는 말이 돌더니 얼마 되지 않아 받았다는 돈이 300억원으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김목사님은 좀 답답한 마음이 들어 동안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습니다. 그 때 그 글의 제목이 ‘큰 물주와 조물주’였습니다. “내가 큰 물주를 잡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라고. 그러나 그 물주는 이번에 처음 붙잡은 물주가 아니라 처음부터 내가 꼭 붙잡고 있던 물주인데 그 물주 이름은 큰 물주가 아니라 조물주입니다. ”라는 내용의 글입니다.
시56편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을 위대하게 사용하시고 엄청난 복을 주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시 56편을 기록할 당시 다윗의 상황은 정말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아 약 10여년을 도망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땅에서 더 이상 살수 없어서 블레셋 땅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블레셋이 무슨 땅입니까 다윗이 죽였던 거인 골리앗의 땅입니다. 다윗은 이전에 블레셋의 대장군이었던 골리앗을 죽인 장본인으로서, 블레셋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다윗은 블레셋의 국가발전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원수였습니다. (삼상 17장) 때문에 그들은 이전부터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다윗이 사울왕의 위협을 피하여 제 발로 블레셋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볼 때, 다윗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고 위험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상 21장 13절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 다윗은 그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침을 수염에 흘리면서 미친 척까지 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 빠져나온 다윗이 시56편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 비참한 지경에 놓였으면서도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1,2절에 보면 그가 당한 상황의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리고 3,4절에서 주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합니다. 또 5,6절에서 다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7,8절에 보면 눈물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9절에 자신이 기도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편이 되시므로 결국은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지하고 찬송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합시다. 그것이 돈을 주는 것보다 많은 교육을 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했듯이 우리도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괴로워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안 주신 것만 생각하며 힘들어하지 말고 주신 것 생각하며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사십시오.
우리 자녀들도 행복한 자녀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행복한 자녀로 만드는 방법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를 모릅니다. 두루뭉술하게 사랑하자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오늘은 몇 가지 자녀 사랑의 방법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대로 사랑한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진정 행복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1. 복된 자아상을 갖게 해주라
자아상이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자신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혼란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번에 총기로 3명 이상의 사람을 죽인 조승희라는 청년은 자실 자기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잘 모르니 자기를 긍정적으로 봐야 하는지 자기를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학교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 급우들이 질문합니다. “What's your name" 그러자 조승희가 "My name is question. "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부모의 눈으로 보면 안 됩니다. 부모의 눈으로 보면 부모의 기준에 따라서 자녀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절대기준이 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눈으로 자녀를 봐야 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씀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는데 긍휼에 풍성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막으시고 주님의 부활하심과 함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그런 존재들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고 그렇게 인정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도 성경이 말하는 바른 정체성을 갖게 될 것이고 건강한 자아상을 소유하여 행복한 생애를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동일하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이 확신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보배롭게 여기신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 대문에 존귀한 사람이다.
2. 축복의 말을 해주라
복을 빌어주는 것이 축복의 말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축복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인간의 말은 예언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말을 들으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세요. “기대가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실 거야, 너 때문에 세상은 달라질 거야, 엄마는 네가 있어서 행복해... ”
가장 좋은 축복 중에 하나가 칭찬입니다. 칭찬을 하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가 발생해서 삶에 생기를 주고 활력이 넘쳐서 생산적인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칭찬을 통해서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19세기 초 미국에 벤쟈민 웨스트(Benjamin West)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하루는 부모님이 외출하고 난 사이에 그가 혼자 집에 남게 되었습니다. 벤쟈민은 심심한 나머지 그림물감을 다 풀어서 자기의 누이동생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이 지저분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잠시 뒤에 부모님이 돌아왔습니다. 집에 들어와 보니까 방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그것에 대해서 벤쟈민에게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벤쟈민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야! 우리 벤쟈민이 그림을 엄청 잘 그렸네. 딱 보니까 누이동생인걸 알겠네!" 그러면서 칭찬해 주었습니다. 부모님은 벤쟈민을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림을 잘 그렸다고 격려의 입맞춤까지 해주었습니다. 나중에 벤쟈민은 그때 일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내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부모님의 격려와 입맞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더욱 더 잘 하는 동기를 제공해줍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 (Pygmalion Effect) 라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이 보다 더 좋은 교육방법이 없다고도 합니다. 칭찬, 격려, 신뢰, 인정, 애정, 사랑, 긍정, 확신,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변화됩니다. 아낌없이 칭찬하십시오. 칭찬을 할 때는 마음자세를 긍정적으로 바꾸셔서 진정으로 칭찬하십시오.
3. 꿈과 환상을 보게 하라
인생이 불행해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남과 나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비결이 비전을 보는 것입니다.
비전은 나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다르듯이 각 사람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은 다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남과 같이 살려고 하기 때문에 남과 나를 비교하고 남보다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남보다 좀 나은 부분 때문에 교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참된 성공은 소유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면 그 사람은 비록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했어도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자신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그 비전에 헌신한다면 그가 사회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라갔느냐 혹은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 했느냐와 상관없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모르고 방황합니다. 이것 조금하다가 안 되면 다른 것 조금하고 이런 식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의 뜻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기 때문에 성공 같으나 실상은 실패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여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방황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의 비전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이들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모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르기에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교회에 나오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받은 젊은이들은 참 복된 자들입니다.
성경은 성령께서 임하시면 자녀들도, 젊은이들도, 노인들도 꿈과 환상을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놀라운 것입니다. 자녀들과 젊은이들이 꿈과 환상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 할 수 있더라도 노인들도 꿈을 꾼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 믿는 노인들의 말년이 일반인들보다는 더 아름다운 이유는 천국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수명이 다하면 나는 흙으로 돌아가고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는 존재가 아니라 비록 몸은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영은 여호와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 영원한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하고 젊은이들은 비전을 보고 노인들도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한 소망의 종교입니다.
4. 좋은 것보다 옳은 것을 하게 하라
사단은 좋은 것을 하게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옳은 것을 하게 하십니다.
좋은 것을 선택하는 순간 옳은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좋은 것을 선택하므로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보기에 좋은 선악과를 선택하므로 언제나 옳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버렸던 것입니다. 요셉은 좋은 것보다 옳은 것을 선택하므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1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은 달콤한 것입니다. 그녀의 유혹은 10대 후반의 젊은이의 육체에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것보다는 언제나 옳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좋은 것을 포기하고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고난을 수반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던지는 유혹을 물리치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므로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좋은 것을 선택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보다 고난을 당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여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지혜를 가르쳐야 합니다. 만약 우리 자녀들이 옳은 것보다 좋은 것을 선택하는 습관을 가진다면 그 아이들의 장래는 어두운 것입니다.
서양에 어느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면회를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작별의 입맞춤을 하는 순간에 아들이 어머니의 입술을 세게 깨물어 상처를 주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 몹쓸 놈이라고 꾸짖었습니다. 그 때 아들은 이렇게 항변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처럼 사형수가 된 것은 우리 어머니의 책임이 큽니다. 내가 어릴 때 옆집에 가서 탐나는 물건을 슬쩍 훔쳐올 때 어머니는 뻔히 아시면서도 나를 타일러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내가 원하는 물건은 사람을 해쳐서라도 가져야 직성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형수가 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옳은 것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옳은 것의 기준은 언제나 변함없이 옳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 자녀들에게 너무나 유혹적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세상의 유혹 앞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세상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할 때 부모의 교양과 훈계를 기억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5. 상처를 주지 말라
상처는 쓴 뿌리를 만들고 쓴 뿌리는 악한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본문에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녀를 화나게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기 "노엽게 한다"는 말은 공동번역에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에는 '파로르기조'의 현재명령법 2인칭인 '파로르기제티' 즉, "화로 자극하다, 성나게 하다"라고 하여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느 책에서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노여워하는 몇 가지 경우를 말했는데 소개해보겠습니다.
첫째, 편애 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자녀들 가운데 누구는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하는 것은 아주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에서와 야곱의 문제는 부모의 편애에서 출발한 것이 많습니다.
둘째,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공부 잘하는 옆집 아이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모든 사람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각 사람마다 독특한 특성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셋째, 지나친 강요를 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특히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수준을 정해놓고, 이 성적을 받아야 한다든가, 어떤 대학에 꼭 들어가야 한다는 강요는 좋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능력이 안 따라주는데도 부모가 막 강요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힘이 없으니 할 수 없이 따라 해도 마음에 분노가 쌓입니다.
넷째, 기를 꺾는 행위를 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네가 뭘 하겠느냐', '너는 못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잘 해보려는 의지를 꺾고 부모 앞에서 말대꾸도 못하게 하는 것이 자녀들 속에 분을 쌓이게 합니다.
다섯째, 과잉보호를 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한국 부모님들이 과잉보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입시철이 되면 공부만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시키지 않고 부모들이 다 해줍니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나중에는 혼자서 뭘 할 줄 모릅니다. 과잉보호가 당장에는 아이들이 편해서 부모에게 원망을 안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다 큰 다음에, 자신이 남들보다 능력이 떨어지고 혼자서 독립적으로 못하는 것을 보면 부모님이 자신이 어릴 때에 과잉보호를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부모가 자신을 왜 이렇게 키웠는지 원망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자녀는 원망하게 됩니다. 과잉보호도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번에 지리산에 방사된 반달가슴곰 천왕이가 인공 생태학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이유는 등산로에서 탐방객들로부터 먹이를 얻어먹는 버릇으로 인하여 야생성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등산로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사람들이 모른척하고 지나가야 하는데 귀엽다고 먹을 것을 던져줬기 때문에 야생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섯째, 부모가 희생에 인색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이것은 과잉보호와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조금도 희생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 부모들은 과잉보호에 많이 치우치는데, 미국의 부모들은 자녀를 기를 때, 합리적으로 기른다고 하면서 희생에 많이 인색합니다. 자녀에게 독립심을 기른다고, 밤에 어린 아기가 많이 울어대도 절대 가보지 않습니다. 먹는 것을 줘도 준 것 그대로 혼자 먹도록 훈련시키고 부모가 세운 규율을 절대적으로 지키도록 만듭니다. 부모들이 절대 양보를 안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자녀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진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려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부모가 희생하기 싫어서 그런 것인지 알아채고 마음이 섭섭해져서 분노가 생깁니다.
일곱째, 부모에게 등한시 당할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아버지들이 자녀의 생일도 잘 알아주지 않고, 자녀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고 일에만 파묻혀서 자기 일에는 충실하지만 자녀 일에 등한시 할 때, 자녀들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여덟째, 잔인한 언어나 지나친 채벌이 주어질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아이들을 야단칠 때도 말을 골라서 해야 합니다. 한국 부모님들 보면 자식들에게 심한 말을 합니다. 저주스런 말을 퍼붓는 경우도 있고, 채벌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걸핏하면 손이 올라갑니다. 태권도 민족이라 그런지 부모가 발까지 올라갑니다. 매를 때릴 때는 때리는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에 비해서 적당한 양으로 때려야 합니다.
아홉째, 일관성이 없는 부모의 태도에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동일한 행동에 대해서 부모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가만 내버려두기도 하고 야단을 치기도 하고 때로는 웃음으로 받아드리기도 한다면 자녀는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너그러우면서 자녀들의 동일한 실수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관성이 없는 부모의 이런 태도가 자녀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열째, 듣지 않고 판단할 때 자녀는 분노합니다. 들어보고 판단을 해야 합니다. 잘 들어보고 옳고 그른 것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들어보지도 않고 먼저 인상 쓰고 야단치면 자녀들이 분노합니다.
6.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게 하라
렘17:7-8을 보면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받을 몇 가지 복을 약속합니다. 첫째, 물가에 심기운 나무, 즉 물댄 동산에서 자라는 과목처럼 튼튼한 뿌리와 줄기를 내고 과실을 맺는 나무가 되게 하십니다. 둘째,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습니다. 가뭄과 같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도 그 마음에 걱정을 제거해주시고 평안의 복을 주십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자의 특징 중 하나는 환경에 관계없이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셋째, 결실이 그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열매를 풍성히 맺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열매를 맺는 성도의 삶을 보장해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높은 뜻 숭의교회를 담임하는 김동호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그분과 저는 만나 본적도 없습니다. 저는 그분을 책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그분은 저를 전혀 모르십니다. 김목사님을 존경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분은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분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자신은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은 성경의 말씀대로 내가 파지 아니한 우물의 물을 마시는 사람이고, 내가 채우지 아니한 물건이 가득한 집에서 살게 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김목사님은 자기가 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잘 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복을 받게 된 이유가 84년 6월에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이분이 82년 1월 첫 주일부터 영락교회 부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32살이었습니다. 그 당시 32살 나이로 영락교회 부목사가 된다는 것은 어렵던 때였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를 담임하시던 임택진 목사님이 당시 영락교회 당회장에게 ‘김 목사는 내 아들 같은 목사’라시며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 기막힌 추천으로 영락교회 부목사가 되었을 때 사람들 사이에는 별것 아니지만 뒷말들이 좀 있었습니다. ‘김 목사 끈 좋다. ’ 영락교회에서 2년 반 정도 시무를 하다가 84년 6월 첫 주부터 승동교회라고 하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영락교회를 사임하자마자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겨 담임목사께서 사임하시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영락교회의 강단을 임시로 임택진 목사님께서 맡으셨었습니다. 그러시다가 수요예배 설교 중 잠시 혈압이 높아지셔서 강단에서 쓰러지시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임 목사님께서 강단에서 쓰러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김동호 목사님의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김목사님은 즉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우리 목사님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다음 기도가 문제였습니다. “저 10년은 봐 주셔야 되는데요...... ” 참 황당한 기도였습니다. 그 때 김목사님은 처음 자신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전까지 믿음만큼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하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참 죄스럽고 많이 부끄러웠답니다. 그래서 즉시 여호와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임 목사님에 대한 줄을 끊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만 끈을 삼고 목회를 하겠다고 여호와 하나님께 서원하였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큰 복을 받은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이 2001년 동안교회를 사임하고 교회 개척을 준비하고 있을 때 동안교회 교인들 중에 김목사님이 큰 물주를 잡아서 교회와 교인들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큰 물주로부터 100억원을 받았다는 말이 돌더니 얼마 되지 않아 받았다는 돈이 300억원으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김목사님은 좀 답답한 마음이 들어 동안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습니다. 그 때 그 글의 제목이 ‘큰 물주와 조물주’였습니다. “내가 큰 물주를 잡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라고. 그러나 그 물주는 이번에 처음 붙잡은 물주가 아니라 처음부터 내가 꼭 붙잡고 있던 물주인데 그 물주 이름은 큰 물주가 아니라 조물주입니다. ”라는 내용의 글입니다.
시56편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을 위대하게 사용하시고 엄청난 복을 주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시 56편을 기록할 당시 다윗의 상황은 정말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아 약 10여년을 도망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땅에서 더 이상 살수 없어서 블레셋 땅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블레셋이 무슨 땅입니까 다윗이 죽였던 거인 골리앗의 땅입니다. 다윗은 이전에 블레셋의 대장군이었던 골리앗을 죽인 장본인으로서, 블레셋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다윗은 블레셋의 국가발전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원수였습니다. (삼상 17장) 때문에 그들은 이전부터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다윗이 사울왕의 위협을 피하여 제 발로 블레셋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볼 때, 다윗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고 위험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상 21장 13절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 다윗은 그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침을 수염에 흘리면서 미친 척까지 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 빠져나온 다윗이 시56편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 비참한 지경에 놓였으면서도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1,2절에 보면 그가 당한 상황의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리고 3,4절에서 주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합니다. 또 5,6절에서 다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7,8절에 보면 눈물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9절에 자신이 기도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편이 되시므로 결국은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지하고 찬송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합시다. 그것이 돈을 주는 것보다 많은 교육을 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했듯이 우리도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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