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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주님의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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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어린이 주일입니다만, 꼭 나이가 어린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우리 자녀들, 우리 다음 세대의 사람들 혹은 우리보다 지위가 낮거나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하실 때 꼭 나이가 어린 아이들만이 아니라, 작은 사람, 그러니까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가리켜서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녀에 대해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면, 늘 먼저 떠오르는 것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에베소서에서도 먼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6:1에, “자녀 된 이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유교에서도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라고 가르칩니다. 이게 문제될 건 전혀 없는데, 문제는 거기서 멈춰서는 겁니다. 물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해야지요. 그건 당연한데, 성경에서는 부모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아울러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4절의 말씀이 바로 그건데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게 뭘 말하는 걸까요 자녀가 화를 내게 만들지 말라는 말인가요 어떤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약을 올려서 화를 내게 만드는 걸 즐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울면 재미있어 하고 그러지요.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들한테 몇 번씩은 해봤을 얘기가, 너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너희 엄마 아빠는 따로 있어, 하는 건데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런 얘기 들으면 우선 울음부터 터뜨리지요. 그러면 그거 재미있어 하고, 다음에 또 그래야지, 그럽니다. 아이들이 자기 전에 일부러 무서운 얘기를 해서 겁을 주는 부모도 있지요. 그래야 애들이 조용히 잔다는 건데요, 그게 아이들한테 참 나쁘답니다. 자기 전에 무서운 얘기를 하면 꿈길에서 겁에 질려 헤매게 된다는 서양 속담도 있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걸까요 넓게 보면 그런 일도 포함되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자녀로 하여금 분노의 감정을 가지게 하지 말라, 그의 인격이 분노의 감정에 지배를 받도록 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려서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이의 일생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서, 그 일로 인해 항상 분노하게 되거나, 혹은 그로 인해 분노를 배우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겁니다.
요즘 많이 사용되는 단어 가운데 “트라우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체가 손상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으면 그게 마음에 상처가 되어서, 그게 일종의 정신 장애로 나타나는 걸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요즘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어린이가 성추행을 당하면, 그 이후로 밥도 잘 먹지 않고, 밖에 나가려고 하지도 않고, 남자 어른만 보면 무서워서 몸이 굳어버리는 게 바로 트라우마라는 겁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잘 양육하지 않고 상처를 주었을 경우에 그런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거지요.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아주 경직되거나 불쾌해합니다. 어떤 사건 이후로 두 번 다시 부모 얼굴을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건 경우가 심한 케이스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부모가 자녀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서 자녀가 평생을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살도록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걸 전적으로 부모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뭐든지 상대적인 것이고, 그런 경우에도 부모보다는 본인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해야 할 겁니다. 자기가 극복해야 할 일도 있고, 또 대부분 그렇게 극복하고, 잊어버리고 삽니다. 하지만, 여기서 누가 더 잘못했다, 누구 책임이다, 누구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지금 에베소서에서 하는 이야기는,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부모에 대해 분노하는 자녀는, 참 안타깝게도 자기 자식에게 그 분노를 전해줍니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내 아이는 그런 불행을 겪게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느 새 자기 부모와 똑같이 자기 아이에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또다시 부모를 원망하게 되는 거지요. 내 부모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 아이까지 불행해지게 되었어, 그런다는 겁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술만 먹으면 집안 살림 다 때려 부수고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서, 항상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숨어 다니고 도망 다니는 아이들에게서 아버지 못지않은 폭력성을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가 되면, 자식들에게 똑같이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는 거지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악순환이지요. 폭력과 그로 인한 불행이 대물림되는 겁니다.
오늘 에베소서는 부모된 이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자녀는 언제 노여워할까요 부모가 자기를 때리거나 야단칠 때 그럴까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자녀가 노여워하는 건 자기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지금 자기가 겪는 일이 공정하지 않다는 거지요. 예를 들면 형제들이 여럿 있는데, 부모가 유독 누군가를 편애한다든지, 할머니가 손녀는 거들떠도 안보고 손자만 끼고 돈다든지, 그런 경우도 그렇고,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혹은 자녀 앞에서 말과 행동이 전혀 별개일 때도 그렇습니다. 자녀에게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놓고, 부모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거나, 심지어는 자녀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거짓말하면,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게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야단을 쳐놓고, 누가 찾아왔을 때, 아이한테, 엄마 아빠 나가고 없다고 하라고 거짓말을 강요합니다. 그러면, 좀 큰 아이들이야 부모를 비웃으면서 이해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가치관에 혼란을 가져올 뿐 아니라, 부모에 대해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 부모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런 거지요. 물론 그게 커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사회에 적응하게 하는 훈련도 될 테지만, 그게 자녀를 분노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된다는 겁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 부모가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고 용서를 노래하면서도, 마음속에는 미움과 질투와 시기가 가득하고, 말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호와 하나님만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돈 생각만 가득 차 있으면, 어떨까요 물론 부모가 어디 꼭 그렇겠습니까 하지만, 아이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혼란을 느끼고 신앙에 큰 상처로 남게 된다는 겁니다.
노여운 감정이란, 좌절, 절망, 불신, 패배감 등과 얽혀 있습니다. 거대한 장벽 앞에 마주선 느낌, 앞이 꽉 막혀버린 것 같은 상태, 그럴 때 노여움을 느끼게 됩니다. 도무지 우리 엄마 아빠하고는 말이 안 통해, 내 입장은 털끝만큼도 배려해주지 않아, 거기서 더 나가면, 우리 엄마 아빠는 나쁜 사람들이야, 그렇게 되지요.
물론 사람들마다 차이는 있습니다. 그런 걸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사소한 일로 인해 절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건, 부모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그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적이 있는지, 그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자녀가 분노하는 건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생각에, 부모는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자기 주장만 하고, 자기 멋대로만 하려고 한다고 생각할 때 분노한다는 겁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할 뿐이라고 생각할 때 절망하고, 그 절망이 분노의 감정으로 남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자녀들 비위 맞춰주고, 야단도 치지 말고, 무조건 잘해주기만 하라는 건가요 그런 거 아니라는 건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조언합니다.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가르치십시오. ”
이건 더 어렵습니다. 말뜻은 알겠는데요, 그러면 주님의 훈련은 뭐고, 주님의 훈계로 가르치는 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이 말씀은 앞서 설명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과 연결시켜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가르치라는 거지요. 교육도 하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고, 제 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라는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우선, 주님의 마음으로 훈련하고 훈계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자녀를 바라보고, 주님의 눈으로 자녀의 마음과 상태를 살피라는 겁니다.
어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잘 해 보려고, 시어머니가 뭘 좋아하시는지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하루는 시누이가, 그러니까 시어머니의 딸이 한 입 베어 물은 복숭아를 들고 뛰어와서는, 엄마, 이거 너무너무 맛있어. 먹다가 너무 맛있어서 엄마 생각나서 가져왔어, 엄마 드세요,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너무 좋아하면서, 아이고, 엄마 생각하는 건 역시 내 딸밖에 없어, 그러면서 복숭아를 맛있게 먹더라지요. 며느리가 그 모습을 보고는, 옳다, 바로 저거다, 하고서, 자기도 복숭아를 먹다가 맛있는 걸 골라서는 시어머니에게 달려가서 드리면서, 어머니 이거 너무 맛있어서 어머니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펄펄 뛰면서, 아니 이년이 시어머니 과일 먹는 것도 아까워서, 이제는 제가 먹다 남긴 과일을 먹으라고 가져오네, 하더라지요.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것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벤자민 웨스트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벤자민이 아직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동생을 그에게 맡겨놓고 외출을 했습니다. 동생과 놀다가 동생이 잠이 들자 심심해진 벤자민은 집안 여기저기 뒤지다가, 물감이 들어있는 병을 몇 개 발견했습니다. 벤자민은 그걸 가지고 동생의 초상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방안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방바닥에는 온통 물바다가 되었고, 벽에도 여기 저기 물감이 튀어서, 말도 못할 지경이 되었겠지요. 어머니는 외출에서 돌아와서 물감으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방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어머니는 벤자민이 하루 온종일 애써서 그린 그림을 집어 들고는, “오, 동생을 그렸구나! 멋진 걸” 하고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허리를 굽혀 입을 맞춰 주었습니다. 벤자민 웨스트는 늘 “그 때 나의 어머니의 키스가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눈으로 자녀를 보기 위해서는 우선 내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물감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집안을 내 눈으로 보면, 이거 다 내가 치워야 되는데, 이거 언제 다 치우냐, 아이고 저 원수, 그러겠지요. 하지만, 주님의 눈으로 보면, 하루 종일 동생을 돌보던 형의 모습과, 잠든 동생의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그 모습을 그리려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애쓴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이들을 볼 때, 내 눈높이에서, 내 관점으로, 내 생각에 맞춰서 보게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렇게 봅니다. 그리고 판단하지요. 저놈은 아주 못됐어. 말썽만 부리고,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고, 저놈은 날 괴롭히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어. 저놈은 틀림없이 전생에 내 마누라였을 거야. 그럽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지, 아이들은 그 나름대로 아주 합리적이고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그걸 그들의 눈높이에서 보면, 아이들이 한 일이 당연하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우리를 보시면,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보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우리가 보이기나 할까요 보이기만 하면 당장 쓸어버리고 없애버려야 할 존재들 아닐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름답게 만들어놓으신 지구를 쓰레기 더미로 덮어버리고, 온통 뒤집어 엎어놓고, 그러면서도 자기들끼리는 왜 그렇게 싸우는지, 바퀴벌레 없애버리듯이 박멸하려고 세스코에 전화 걸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우리를 보지 않으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눈높이로 우리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눈높이에 맞추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만큼 낮아지셔서,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신 겁니다.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라는 것은, 이렇게 주님의 시각으로 자녀를 보고, 자녀의 입장에서 자녀를 이해하면서 양육하고 가르치고 돌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주님의 자녀로, 주님의 백성으로 자라도록 하라는 것이 오늘 말씀의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라는 말씀은, 주님이 하셨던 그 방식으로,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하고 훈계하셨듯이, 주님이 주님의 자녀들을 기르시는 것과 같이 훈련하고 훈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상황에서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늘 생각하면서, 마치 주님이 하시듯이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야단치고 인도하라는 거지요. 다시 말하면, 주님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라는 겁니다.
아이들은 아주 민감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부모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야단을 쳐도 사랑해서 야단치는 건지, 화가 나서 야단치는 건지, 아이들이 먼저 압니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 속에 감춰져있는 우리의 마음을 아이들은 알아챈다는 겁니다.
주님은 한 번도 사람을, 주님의 자녀들을 함부로 대하시거나 생각 없이, 배려하지 않은 채 대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모든 일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목적과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귀찮아서 아무렇게나 대답하시는 법도 없고, 우리가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듣고 그냥 잊어버리시는 법도 없습니다. 그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대할 때, 이런 마음과 이런 자세로 자녀를 대하고 이렇게 자녀를 양육하고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자녀를 기르지 않고, 내 방식대로, 내 멋대로, 나 좋으라고 자녀를 기르면서, 훈계라는 이름으로 자녀에게 화풀이하고,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믿음을 빼앗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모습을 빼앗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존중해주십니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시거나 무시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존중하시지만, 우리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바른 길로, 선한 길, 의의 길, 주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억지로 끌고 가기 보다는 주님이 앞서 가심으로 우리를 따라오도록 하십니다. 우리를 억지로 그 길로 내몰지 않으시고, 거기 길이 있고, 그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주님이 우리보다 먼저, 우리 앞에서 가셔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보여주시고, 따라오게 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는 것은, 자녀에게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본을 보인다는 건, 우리를 통해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보고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고, 부모를 통해 주님의 인내와 주님의 희생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도 그 모습을 그대로 닮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입니다. 자녀를 보면 부모의 모습을 압니다. 자녀에게 부모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문제라고 하지만, 그건 우리가 문제라는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면 우리 자녀들에게도 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본받지 않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니까 우리 자녀도 세상을 따라 다니고 세상의 악을 본받는 겁니다. 요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대구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이, 그 아이들이 생각해내서 한 일입니까
어른들이 한 일 그대로 흉내 낸 것 아닙니까 어른들이 만든 동영상 보고, 거기서 어른 듯이 보여준 일을 그대로 따라했다는 것 아닙니까 어른들이 만든 폭력조직을 보고 그거 그대로 따라서 조직을 만들고 어른들이 한 일을 그대로 흉내 냈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문제이고, 누가 잘못한 겁니까 그 아이들이 잘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만이 잘못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부모 된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바뀌지 않으면, 이런 일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세상은 더 나빠질 겁니다. 더 악해지고, 더 폭력적으로 되고, 더 흉해질 겁니다. 우리 아이들을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세상이 요구하는 사람으로 기르는 일에만 몰두하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공부만 잘하고,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가르치면, 세상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고 죄를 그냥 방법이라고 부르게 될 겁니다. 사실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가 꼭 자녀를 대하는 부모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닐 겁니다. 우리보다 낮은 자리에 있고, 우리보다 약하고, 우리보다 부족한 사람을 대할 때, 바로 이런 마음으로, 이런 모습으로 대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 겁니다. 오늘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간에 가져야 할 바른 관계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
자녀가 부모에게 잘하기를 기대한다면,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로 인해 분노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를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길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 된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를 주님의 손에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내 생각과 내 고집과 내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그래서 주님의 손에 붙잡히지 않으면, 내 자녀 역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마음속으로는 분노의 감정을 쌓아가면서도, 우리의 잘못되고 부족하고 악한 모습을 그대로 닮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본받고 주님께 사로잡힌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우리 자녀가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주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맙시다. 자녀가 효도하기를 기대하기 전에, 자녀가 우리에게 분노하게 하지 않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눈으로 자녀를 바라보고, 주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사랑하며, 무엇보다 우리 자녀를 우리 손에서 놓아서 주님 손에 맡길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그래서 우리 자녀를 주님의 자녀로,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일꾼으로 키우고, 주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이루어내는 영웅으로 만드는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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