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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어린이를 용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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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린이주일에 맞추어서 “어린이를 용납하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1. 환영받지 못하는 어린이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에게 안수기도 받고자 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자들은 아이들의 부모들이었을 것입니다. 부모들이 보니까 예수님이 너무나 놀라운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병도 고치시고 사랑이 풍성하시고 가르침도 훌륭했습니다. 보통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분이 이제 자기 동네를 떠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다시 자기 동네를 방문하실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그 동네의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자기 자녀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받으면 정말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아오는 어른들의 행렬을 제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일행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길이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길이 험난해서가 아니라 모여드는 사람들 때문에 심히 피곤한 여행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유는 마지막 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면 거기서 고난당하실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동네마다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자연히 예수님의 여행은 느리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렇게 느린 여행길에 제자들은 짜증이 날만도 했습니다. 계속 모여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하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피곤하실까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까지 몰려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제자들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어른들을 꾸짖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온다면 우리 선생님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해도 해도 당신들 너무 하군요!”
이렇게 사람들을 무안하게 하고 호통을 치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화를 내셨다고 쓰고 있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어린아이들을 만나야겠다, 그들을 안고 축복해야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들은 참으로 단순해서 자기들을 환영하는 사람에게로 달려가 안깁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유괴범에 잘 꼬여 넘어갑니다. 유괴범들이 자기들을 극진하게 환영해주니까 아무 의심 없이 유괴범을 따라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어린이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면 어린이들이 결국 어디로 가겠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가끔씩 말 안 듣는 자녀들에게 소리치며 협박합니다. “야! 이 자식아, 정신 못 차려!” 좀 더 화가 나면, “야, 나가! 너 같은 것 소용없어! 안 나가!” 이런 협박에도 꼼짝 않고 아이들이 나가지 않은 것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만약에 청개구리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순종을 잘해서 집을 뛰쳐나가버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즘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심심찮게 가출하는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면 갈수록 청소년들의 탈선과 범죄가 급증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들이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어린이를 용납하시는 예수님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환영했습니다. 안아주시고 그들의 머리에 안수하시며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적어도 19-20장의 문맥 가운데서 읽어야 합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19:1을 보세요. 주 사역지 갈릴리를 떠나서 목적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을 요단강 건너편(동편) 길로 택하셨습니다. 성경지명으로는 베레아입니다. 이 여행길에서 일어난 사건과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 19-20장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다섯 가지의 통념을 깨뜨리시고 대신에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관을 주창하십니다. 사실 이 같은 통념들은 오늘날도 버젓이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세속정신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다섯 가지의 통념들은,
1) 여자들을 무시하는 바리새인들의 통념(19:3-9)
2) 아이들을 경시하는 제자들의 통념(19:13-15)
3) 자기 삶에 충실한 엘리트 청년들의 통념(19:16-22)
4) 자기 자식들의 출세에 집착하는 어머니들의 통념(20:20-27)
5) 장애인들을 천시하는 건강한 자들의 통념(20:29-34)
여기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요약하면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통념들이 전복되는 곳입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마 20:16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 19:30에서도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
그러면 어떤 자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먼저 될 자입니까 20:26-27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 섬기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0:28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닮아서 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여자를 귀히 여깁니다. 아내를 존중합니다. 어린이들을 환영합니다.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자기 자녀들에게 섬김과 희생을 교훈합니다. 장애인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대신에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힘 없는 사람, 약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제일 무시를 당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서 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들의 바른 모습입니다.
얘기를 좁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이들을 경시한 것은 그 당시 유대사회의 통념이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집니다. 어른들은 남의 집 아이들, 자기와는 별 상관없는 아이들을 귀찮게 생각하고 경시합니다. 그러면서 어른들은 대체로 자기들의 어린 시절을 망각합니다. 기껏 기억한다면 자기들이 어렸을 때는 안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은 “요즘 아이들, 왜 그래, 이해하지 못하겠어, 요즘 아이들 버릇이 왜 그 모양이야, 못쓰겠어!”라고 하십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린이 경시 풍조가 베여있습니다. 모든 것이 어른 위주입니다. 아이들이 뛰놀 공간을 마련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아이들을 위한 배려는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려납니다. 우리교회는 그렇지 않지만 대체로 아이들은 예배의 방해꾼으로 취급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아이들은 기가 죽고 주눅이 듭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교회 오기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통념을 넘어서 아이들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어린이들을 즐겁게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3. 왜 어린이들을 용납해야 하는가
왜 어린이들을 용납해야 합니까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무시하면 어린이들은 금방 알아차립니다. 어린이들의 눈치는 대단합니다. 그러면서 솔직하게 반응합니다. 자기를 무시하는 어른은 피하고 대신에 자기들을 환영해주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의 탈선은 일차적으로 부모와 어른들에게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왜 어린이들을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즐겁게 환영해야 합니까 어린이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자라나는 그들에게 좋은 자리를 준비하여 물려주는 일입니다.
등산에는 철칙이 있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빨리 그 정상을 비워주는 것입니다. 다음 사람이 정상에 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어른들이 모든 것을 언제까지나 주도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권한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누가 지혜로운 자입니까 인생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발전적인 역사를 신뢰하는 성도들은 미래를 내다보는 자들입니다. 그 미래가 아이들의 것임을 알고 때가 되면 그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어른들이 되어야 합니다(청출어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19:14). ” 천국은 어린이들에 의해 계속 확장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성세대가 해야 할 일은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기는 것입니다. 교회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어린이들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인정하는 자들의 겸손한 행위입니다.
여러분, 어린이가 없다면 미래도 없습니다. 어린이가 없다면 희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를 귀히 여기고 환영해야 합니다. 어린이는 한 가정의 미래, 사회의 미래, 나라의 미래, 세계의 미래, 교회의 미래,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미래입니다.
4. 어떻게 어린이들을 용납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 어린이들을 용납해야 합니다. 환영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들을 바르게 용납하는 것입니까 많은 말씀을 할 수 있겠지만 네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우리 어른들이 주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상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무시한 것은 얼마 전에 주께서 주셨던 교훈을 그들이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에 나서기 바로 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그때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가운데 세우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8:3-5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회개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주님의 말씀만이 세상의 통념을 깨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정립시켜주는 초석입니다. 그러므로 어른들과 부모들이 항상 주님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을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세상의 통념에 따르는 생각인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인지를 항상 성경에 비추어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어린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어른들이 될 수 있습니다.
2)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비유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천국은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노는 곳입니다. 어린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치는 곳입니다. 천국은 주님과 어린이가 함께 즐기는 놀이동산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어린이들을 친구로 생각하셨다면 우리도 그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린이들을 귀찮아 할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이 버릇없이 굴 때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야, 이 놈아, 아빠가 네 친구야” 아이들이 아빠가 친구처럼 같이 놀아주기를 기대했는데 그냥 한 마디로 묵사발을 낸 것입니다. 얼마나 아이들이 무안하겠습니까
우리 부모나 어른들이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할 때 아이들은 친구가 되어줄 대행물들을 찾습니다. 대표적으로 TV 만화나 컴퓨터 게임이 아이들의 친구가 됩니다.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TV 만화나 컴퓨터 게임이 아이들의 지적 정서적 인격적 발달에 정말 유익합니까 보세요! 아이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놀이 프로그램은 타락한 어른들의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닙니까 서로 싸우고, 죽이고, 경쟁하고, 힘을 숭배하게 하고, 겉모양(얼짱 몸짱)에 혹하게 하고, 개인주의를 심화시키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어른들의 타락한 모습을 가장 빨리 배우게 하는 것들입니다.
서울중앙교회에 엄수민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엄집사님은 재미교포 2세입니다. 몇 년 전에 한국에 와서 삼성캐피탈의 팀장으로 근무합니다. 회사 근무시간 중에는 정말 집중해서 일합니다. 그리고는 오후 5시 반이면 칼 같이 퇴근합니다. 저녁에 가족들과 식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엄집사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자녀들과 함께 노는 것이라고 합니다. 두 아들(초등학생) 현상이와 준상이를 보면 정말 밝고 맑습니다.
함께 놀아주는 부모가 있을 때 아이들은 행복하게 자랍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줄 때 컴퓨터 오락이 없어도 우리 아이들은 얼마든지 맑고 밝게 자랄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부모, 어른, 교사가 되는 길은 아이들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3)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를 용납한다는 것은 어린이와 친구가 된다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른들이 어린이처럼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어른들이 어린이의 좋은 성품을 본받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 ”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른들의 선생이 어린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추천하신 어린이들의 좋은 성품 가운데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순수함, 단순함, 겸손, 온유, 열려 있는 마음 등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의 성품입니다.
심방을 하면 부모들이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꼭 아이들에게 인사를 시킵니다. “목사님께 인사 드려야지!” 그리고 과일을 차리면서 아이들에게 “목사님께 먼저 드려야지!”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신이 나서 인사도 하고 과일도 찍어서 줍니다. 그렇게 하는 아이들의 마음에는 ‘아,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목사님은 참 좋으신 분이시구나!’ 그러면서 제게 관심을 가집니다. 의젓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예배도 잘 드리고 예쁜 손 모으고 기도도 잘 합니다. 기분이 오르면 한바탕 노래와 춤도 공연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린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이끌려 나오면서 그들도 그런 마음을 가졌으리라 짐작합니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우리가 지금 어딜 가지” 엄마는 신이 나서 대답합니다. “얘야,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거야. 예수님은 병도 고치시고 사랑도 많으시고 너무나 좋으신 분이셔. 너를 보면 참으로 기뻐하실 거야! 널 품에 안고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실 거야! 예수님 보면 뭐라고 말할까 ‘예수님, 사랑해요! 축복해주셔서 감사해요. 착한 어린이가 되겠어요!’ 라고 해야겠지” 엄마의 얘기를 듣고는 아이들의 마음은 벌써부터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아름다운 마음, 열린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서 이런 성품을 배워야 하는데 오히려 어른들은 자신들의 좋지 못한 성품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경쟁심, 이기적인 야망, 욕심, 외식, 이중적인 마음, 조급함 등을 아이들에게 주입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교적인 전통에 베여있는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속과 겉이 다른 이중인격을 은연중에 심어주고 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애어른”입니다. 어른 같은 아이가 되라고 합니다. 근엄한 아빠가 요구하는 아이의 모델은 점잖은 아이, 속에 영감이 들어있는 아이, 겉늙은 아이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다워야 하는데 아이다움을 빨리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유교적 전통입니다. 아이들에게서 아이다움을 제거하고 대신에 어른들의 못된 성품을 심을 때 아이들이 밝고 맑게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회의 미래는 암담할 것입니다.
반대로 어른들이 아이들의 좋은 성품을 본받으면 이 사회는 훨씬 밝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을 선생으로 삼으십시오! 이 말은 아이들 앞에서 긴장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이들이 가까이 있을 때는 더욱 조심하십시오! 왜 그리해야 합니까 자칫 잘못하면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 앞에서는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우리의 마음과 기분에 맞도록 키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키워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귀한 일꾼이 되도록,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이 되도록 양육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요 책임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우리어른들부터 아이들 속에 있는 천국 백성의 품성을 계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말로 하면 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4)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부모가 가장 좋은 부모입니까 자기 자녀를 주님께 데리고 와서 주님의 축복을 받게 하는 부모입니다. 어떤 어른이 좋은 어른입니까 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막지 않는 어른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혼자만 신나게 달리지 마시고 좀 느리고 답답하겠지만 자녀들의 손을 잡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부모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언젠가는 그 자녀들이 커서 여러분들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그들이 걸음 느린 여러분의 손을 잡고 길을 천천히 인도할 날이 올 것입니다.
자녀들과 함께 주님께 나아가는 것 가운데 가장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예배(교회학교, 가정예배, 목장정기모임)입니다. 주일의 공동예배에 아이들과 함께 오는 것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하찮은 일이 아니라 자녀교육에 있어서 가장 귀하고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부모와 함께 드리는 영아부 예배를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아부 예배를 드리면 아이들만 변화된 것이 아니라 부모들도 변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께서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로서 제게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교회가 어린이들을 환영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부모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어른들과 어울려 신나게 노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바라시는 건강한 교회상입니다. 주일만 아니라 평소에도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모여 즐기는 모임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목장정기모임입니다. 아이들이 목장모임을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인생 최후의 결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것에는 성공했을지라도 자녀 농사에 실패했다면 여러분이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지금 네 자녀가 어디에 있느냐 바른 길 가고 있느냐 천국의 자녀답게 살고 있느냐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느냐 세상의 통념에 사로잡혀 살고 있느냐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방해꾼으로 살고 있느냐”
여러분, 우리의 미래는 어린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에게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가 밝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어린이들에게 친절하고 존경 받는 어른들을 찾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존경 받는 어른들이야말로 천국에서 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부모, 좋은 어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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