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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성령충만과 자녀교육

본문

오늘은 우리 한국교회가 공통적으로 지키고 있는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 날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인 가정의 자녀들과 우리 교회 주일학교의 유초등부 어린이들과 중고등부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일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에 자녀교육에 대하여 교훈하시는 본문이 많이 있습니다만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가장 명료하게 말하고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에베소서 5:18-6:9의 문맥 속에 있습니다. 이 본문은 성령충만을 받은 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실제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고 할 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특권적인 면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적인 요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됨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두 번째 요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어떤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하는 것으로 책임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여러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최소단위로 가정을 이루는 요소인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고, 그 다음으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서 경영주와 근로자, 직장 상사와 아랫사람 등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 두 가지 요소가운데 두 번째 요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여러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그 기초적인 원리와 방법을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의지하여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자녀교육의 원리와 방법이 되는 성령충만한 삶이 무엇이며, 두 번째로는 성령충만과 자녀교육의 관계, 세 번째로는 성령의 충만을 자녀교육에 적용하는 방법에 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자녀교육의 원리의 방법 : 성령충만한 삶
그러면 신자다운 삶의 원리와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성령충만은 어떤 개념일까요 성령의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쉬운 표현으로 바꾸면 성령이 그의 삶을 지배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이라는 개념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바울이 다른 곳에서 이 개념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18-21의 말씀과 내용적으로 평행을 이루는 부분이 골로새서 3:16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다음의 말씀도 읽어보면 에베소서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 “성령의 충만”이라는 표현과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원리인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령의 충만은 단순한 개념이 아닙니다. 현대 신학자들이 “성령의 충만”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책을 쓴 것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것 자체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부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능력이 입혀지기도 하고 초자연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거 교회역사나 지금이나 스스로는 성령의 충만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비윤리적이며 초법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 때문에 과연 성령의 충만으로 나타난 현상인지 역사적으로 검증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검증하는 중요한 기준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원리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한편으로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요소가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원리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고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 점은 성령충만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안다면 더욱 분명해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하면서, 그 성령충만의 결과에 대하여 말하기를 서로 화답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서로 복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헬라어 성경에서 서로 화답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서로 복종하라고 하는 다섯 개의 동사가 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섯 개의 분사가 주절인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에 종속되어 결과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헬라어 성경에 보면 맨 마지막 분사인 “서로 복종하라”고 하는 에베소서 5:21의 말씀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주절의 말씀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문단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N4, RSV, NEB 같은 영어번역성경에서 이 점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충만의 결과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충만의 결과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일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을 사회적인 관계인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주인과 종(노사관계)의 관계에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결론은 성령의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특별하고도 신비한 능력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신자 개개인의 삶에서 기쁨과 감사생활, 그리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삶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어서 전체적인 강조점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있습니다.
특히 순종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서로간의 관계에서 복종하고 섬기는 것,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고 주인은 종을 사랑으로 대하는 일들을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로 이해하고, 성령충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삶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결론은 “성령의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특별하고도 신비한 능력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원리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복종하는 생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충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삶 가운데 하나가 신자부모가 자녀를 교육하는 문제입니다. “성령충만”이란 어떤 신비스러운 힘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의무는 단순한 윤리규범이 아니라 기독교교리의 적용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행동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성령충만과 자녀교육
그러면 성령충만한 신자 부모들은 자녀를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아비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 “아비”가 누구인지를 먼저 정의를 내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아비”는 단순히 아버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형제들” 이라고 말할 때 자매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아비” 라고 말할 때 어머니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 가운데 Good News Bible 에서는 아예 의역을 해서 “부모들”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 교회사에서 아비들을 혈연적인 부모에서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연령과 은사에 있어서 모든 윗사람을 포함하여 우리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폭넓게 적용하였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 교리 문답 124문).
오늘은 어린이 주일과 관련하여 이 두 면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본문은 두 가지의 명령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명령으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적극적인 명령으로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소극적인 명령으로 되어 있는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자녀들이 화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화가 나고 반감을 느끼고 저항감을 갖게 되는 경우들을 열거해 보면 이 명령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어릴 때 어떤 경우에 화가 나고 저항감을 느꼈습니까 아동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대개가 다음의 경우들에서 저항감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불합리한 일들을 요구하는 일, 거칠거나 난폭하게 대하는 일, 지나치게 편애하는 일, 어린이의 일에 무관심한 일, 특별한 이유없이 매질하는 일, 주먹이나 발로 아이를 때리는 일, 어린이들에게 창피를 주는 일,
욕지거리를 함부로 하는 일, 어린이의 말이나 행동을 무시하는 일, 다른 어린이와 비교하는 일 등이 바로 그러한 경우들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이러한 경우들을 만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분노를 느낄 만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일들이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경우들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자녀들의 인격에 대하여 부당한 대우를 하지 말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소년기나 청년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유없이 반항하거나 그들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 권위나 제도를 부정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사람은 거의 대개가 자라날 때 부모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어릴 때부터 자녀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제도들이 자녀들을 보호하고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라면 부모를 위시한 위에 있는 권위나 제도에 대하여 그렇게 심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자녀들을 노엽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인격을 무시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본문에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정리해 보면 어린 자녀들의 인격을 무시하지 말고 그들을 화나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도 인격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지위가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이들의 인격이나 지위가 무시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서 루소(J. J. Rousseau)나 로크(J. Locke)나 “섬머힐” 학교로 유명한 니일(A. S. Neill) 등이 주장하는 대로의 어린이가 원래는 선하기 때문에 부모나 사회가 할 일은 이들의 본래적 심성을 살려주고 그들의 성장에 제도를 통하여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교육방법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어린이들에게 지시적인(directive) 것이 아니라 비지시적인(non-directive) 방법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이론으로 자녀들 스스로 자기의 길을 찾아가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이 스스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만 이 방법은 참으로 어린이를 위한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인 교리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무능력”에 관한 교리입니다. 어린이도 마찬가지로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사회제도나 다른 권위에 의해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날 부모들이 아이들의 기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버릇없는 행동을 하거나 마땅히 통제되어야하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방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우상이 되어서 자녀들에게 온 삶이 송두리째 끌려가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자녀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대로 두라는 말이 아니고 그들의 인격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적극적인 방법으로 자녀교육에 대한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육하라”(εκτρεφετε, to provide with tender care)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자녀를 교육시키되 자녀들을 인격을 세워주는 방법으로 기르는 것을 말합니다. 칼빈(J. Calvin)은 이 말의 뜻을 설명하기를 “좋은 마음을 품게 하며 따뜻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앞의 부정적인 명령인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녀는 따뜻함과 사랑으로 보호를 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εν παιδει και νουθεσι κυριου) 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뜻 볼 때 주의 교양과 훈계를 가르쳐야 한다고 하는 교육내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수단을 의미하는 전치사 “엔”(εν)과 결합되어 헬라어 문법적인 용어로 수단의 여격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의 의미는 주의 교양과 훈계를 도구로 사용하여 양육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하는 교육방법적인 문제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 “교양”이라고 번역된 용어는 헬라어로 “파이데이아”(παιδεια, discipline NASB)라는 말인데 징계 또는 훈육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용어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서 12:5-6의 말씀과 비교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 이 본문에서 사용된 “교양”이라는 말은 히브리서에 나오는 “징계”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서 매를 사용할 것을 말합니다. 잠언 13:24에 “매질을 차마 하지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교양”은 체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주의 교양”과 함께 “주의 훈계”로 양육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훈계는 헬라어로 “누세시아”(νουθεσια)인데 이것은 앞에 나오는 주의 교양과 구별하여 생각해 본다면 징계는 체벌을 통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만 “훈계”는 말로서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른 양육은 체벌과 함께 훈계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의 신자가정에 절실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있는 김진규 교수님이 오래 전에 “대전극동방송국 5분 칼럼”에 그 분이 알고 있는 한 중년부부의 이야기를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그 실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이 40이 넘어 느지막하게 결혼한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곧 아이를 갖기를 원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아이가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노력한 끝에 마침내 나이 50이 훨씬 넘어 귀여운 아기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늦둥이를 얻은 기쁨에 이 부부는 어쩔 줄을 모르며 귀여운 아들을 보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아기가 돌을 지나며 더욱 재롱을 부리며 예쁜 짓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귀여운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가서 엄마를 한 대 때리고 오렴. ” 아기는 아장아장 걸어가서 작은 막대기로 엄마를 때리니, 엄마는 그런 아기가 귀여워 “아이구, 나 죽는다. ” 하면서 쓰러지는 시늉을 하면, 아기도 함께 까르르 웃었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 부모는 재롱둥이 아들에게 매 맞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아기는 엄마 아빠를 때리는 것이 흥미로운 오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점점 자라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부모에게 주먹을 쥐고 덤벼들었습니다. 부모뿐이 아니라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까지도 이 아이에게 손찌검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지만, 어른을 때리는 습관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부모는 장성한 아들을 조용히 불러 놓고 부모를 때리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고 훈계했지만, 이미 습관으로 굳어버린 아들의 행동을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아들은 걸핏하면 부모를 때리는 패륜아가 되었고, 좋은 머리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실패자가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부모의 잘못된 교육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오늘날 일반가정에서 자녀들이 왕 노릇하는 것을 종종 보곤 합니다. 징계와 훈계가 없이 자라나게 됨으로 아이들이 예절도 모르고 위에 있는 권위도 무시하는 것을 종종 보곤 합니다. 그래서 청소년 범죄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가는 것이 오늘날의 현상입니다. 오늘날의 부모들은 자녀가 잘못을 범하였을 때 거기에 대하여 너무 관대합니다.
예의범절이 없어도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녀들이 대화를 요구할 때는 바쁘다고 하는 이유로 외면해 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한다고 열심히 일하지만 정작으로 그것이 자녀를 위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고,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자녀에 대하여 부모의 교육적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은 먼저 가정에서 나타나고 다음으로 사회전반에 걸쳐 권위와 질서를 무시하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문제는 사회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신자부모들은 어떤 훈계나 징계를 사용해야 할까요 본문에 보면 체벌로 하는 징계와 말로 하는 훈계를 “‘주의’(κυριου, of the Lord) 교양과 훈계로”라고 한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자부모들이 자녀들을 양육할 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징계와 훈계를 사용하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교육적인 방법이 아니라 주의 가르침인 성경의 말씀에 따라 양육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영어번역 성경 가운데 New English Bible에서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라는 말을 “‘기독교교육에 속한’(which belong to a Christian upbringing) 징계와 훈계로”라고 번역하였는데 아주 적절한 의역이라고 생각됩니다. 기독교교육적인 방법으로 자녀들을 징계하고 훈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신자부모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녀들을 양육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3. 성령충만을 자녀교육에 적용하는 방법
그런데 이 일은 이론적으로는 잘 알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세 아이가 있습니다만 이 원리에 따라 가르치려고 노력하지만 잘 하지 못합니다. 우리 집의 첫째 아이가 지난 금요일에 태국으로 갔습니다만 가기 전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잠을 자는 문제로 인하여 아이를 심하게 책망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제 아내가 “이번 달 가정의 달인데 어떻게 설교하는지 보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 아닐까요 “지금 행동으로 자녀들을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이론과 실제를 설명하는지 봅시다. ” 사실 저는 그날도 우리 세 아이들과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저는 심하게 아이들을 책망하고 가슴에 상처가 생길 정도로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저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빠가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고 또한 많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잘 통제가 안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성령께서 통제하게 하시고 상황을 간섭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신자 부모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문맥 속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결과 가운데 자녀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성령충만의 결과 가운데 하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지 않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을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이 가진 자연적인 의지력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가 있어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을 자녀교육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유명한 성경학자인 안토니 후크마(Anthony Hoekema)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여호와 하나님과 끊임없이 접촉하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접촉을 유지하는 방법은 성령의 능력을 믿고 기도를 통하여 능력을 간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가장 최선의 방법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육하는 것인데,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함으로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믿는 교리내용을 실제 생활에 적용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매년 5월이 되면 어린이날을 중심으로 어린이들에게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더욱 우리 각 가정의 자녀들과 우리 교회 주일학교의 유·초등부 어린이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의 자녀들과 우리 교회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성령을 의지하며 복음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 일의 중요성을 이번에 다시 한 번 확인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단 선교부에서 발행하는 해외선교125호(2007, Spring)를 읽으면서였습니다. 이 회보에 파라과이의 박은주 선교사님이 “파라과이의 검은 진주”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교회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학생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확인하고 우리 교회 주일학교 부흥을 위하여 류성근 강도사님과 함께 토요일에 몇 몇 아이들을 선택하여 특별히 “어린이 제자훈련”을 시키고 전도도 하고, 책도 읽히고 영어도 가르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때로는 장학금도 주면서 훈련시키려고 합니다.
박은주 선교사님의 글에는 파라과이의 어린이날에 특별한 아이들 40여명을 초청하였는데 그중에 몇 년이 흐른 지금 복음을 듣고 변화받은 한 아이를 소개하였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훌리오 쎄살 베니떼스”라는 12살 난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는 나이가 12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고사하고 출생신고도 되지 않아 호적도 없는 아이였습니다. 이미 7-8살 때부터 거리에 나와 구결하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 마약까지 경험한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가 처음 주일학교에 나왔을 때 오랫동안 길거리에 방치되어 나쁜 어른들의 흉내를 다 내고 아무에게도 통제받지 않고 자란 습성이 배어 자기 마음대로 해 버리는 아이로 기존의 아이들과 조화와 질서를 순식간에 무너뜨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머리가 상당히 좋고, 특별한 일에 “애살”이 많아 하고자 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성경구절을 암송해 오라고 하면 엉터리 발음으로 더듬거리기도 하였지만 열심히 외웠습니다.
교회에서 찬송을 배우는데 박자와 음정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부르는 아이였는데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면서 “거리의 아이”가 아니라 “교회의 아이” “예수님의 아이”롤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 교회의 베아뜨리스라는 자매가 시청으로부터 대리 양육권을 받아 양육하고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반듯하고 예절바른 아이로 자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지난 해 2006년 7월에 만 16세가 되던 해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 간증한 내용 가운데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어린 나이에 벌써 이 세상에 온갖 더러운 죄를 다 지었습니다. 아마 성도 여러분들은 내가 했던 일들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죄인지조차 모른 채, 내 삶 전부가 바로 죄 그 자체였습니다. 나에게는 내일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없이 그렇게 길거리에 버려져 하루하루를 살던 아이였습니다.
(중략) 그러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벌써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아과비바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평생 섬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또한 이 시간을 빌어 저를 가족처럼 키워주셨던 베아뜨리스 자매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이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의 영혼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 모든 삶을 바르게 정도하시고 내 몸까지 구원하신 우리 주님을 위해서 제 생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린이 주일을 맞아 우리 신자 부모들은 다시 한 번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는 일에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함으로 가르칠 때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 자녀들에게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함으로 가르친 것이 가장 좋은 교육방법이었고 자녀의 미래를 대비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구나” 하는 것을 반드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맡겨주신 주일학교 아이들도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쳐 우리 교회의 아이들이 자라 우리 민족을 구원하는 신실한 일꾼들을 키워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가운데 훌리오 같은 아이들도 많이 나오게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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