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축복받는 자녀 만들기
본문
미국의 작가 게리 스몰리(Gary Smalley)는 어릴 때 엄한 할아버지 아래서 컸습니다. 어느 날, 그가 늦게 귀가했다가 할아버지한테 매를 맞았습니다. 속이 상해서 있는데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식사하러 오시라는 말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방으로 갔는데, 그때 열린 방문으로 그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평소에 전혀 피도 눈물도 없던 할아버지가 침대 끝에서 기도하며 울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우는 일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갑자기 멍해졌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할아버지가 자기를 때린 후에 마음이 아파서 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조금 후, 할아버지는 게리의 인기척을 느끼고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게리! 나도 너를 때리면 마음이 아프단다! 나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너는 여호와 하나님이 귀하게 쓰실 거야. 네 앞날에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할아버지는 기도하고 있다. ” 그 후 그는 항상 할아버지의 축복의 말을 기억하면서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축복의 말입니다. 가정에서 축복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는 진짜 복된 인생이 됩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경쟁적으로 구하는 것을 보면 부모의 축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본문 뒷부분을 보면 야곱의 속임수로 에서가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기자 에서는 몸서리를 치며 “아버지여! 나도 축복해주세요!”라고 통곡했습니다. 그처럼 고대 유대 사회에서는 ‘부모의 축복’을 소중히 여겼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부모의 축복을 들으시고, 자녀를 축복한다고 믿었습니다.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은 부모의 축복을 들으시고 자녀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를 많이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왜 부모의 축복이 중요할까요 첫째, 바른 판단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복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참된 축복을 모르고 가짜 축복에 현혹되기 때문입니다. 기복주의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대개 정서가 불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영혼의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정서적으로 건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를 잘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축복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인간관계를 인정관계로 보지 않고 언약관계로 봅니다. 그래서 사회생활이 순탄하고, 정서적인 문제가 별로 없고, 여유가 있고, 공격적이지 않고, 민감하지 않고, 상처를 잘 받지 않습니다.
셋째, 열린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인정과 축복을 많이 받고 자라면 여호와 하나님도 자신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믿음과 열린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삶의 중심과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도 인정을 받으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기 때문에 율법주의, 신비주의, 비판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한 부모의 인정과 축복을 받고 자란 사람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좋은 친구도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오해가 생겨도 금방 풀고, 오해가 상처로 발전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의 인정을 지나치게 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억지로 특별하게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부모의 축복을 넉넉히 받고 자란 경험은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 되기 때문에 자녀에게 축복을 많이 해주는 것은 부모가 남겨주어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입니다.
축복받는 자녀 만들기
부모가 자녀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 3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헌신하는 삶을 가르치십시오
본문 앞부분에 있는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게 전에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 이삭은 자녀를 무작정 축복하지 않고 먼저 자녀의 별미를 받은 후 축복했습니다. 그처럼 자녀가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면 먼저 자녀에게 헌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를 우상처럼 키워서 받기만 하고 드리고 헌신할 줄 모르는 자녀로 키우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멀어집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당부합니다. “얘야! 장애가 있거나 남들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아이들을 특별히 잘 보살펴주고, 그의 친구가 되어주라. ” 그렇게 교육 받고 자란 자녀가 어떻게 잘못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장애인을 왕따 시키는 사람을 가장 저주할 것이고, 장애인을 잘 돌보는 사람을 가장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삶과 헌신하는 삶을 최선을 다해 가르쳐야 합니다.
요새는 선천적인 장애인보다 사고로 인한 후천적인 장애인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예비 장애인들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며 항상 장애인을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장애인을 ‘장애우’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이 억지로 친구가 되어주는 느낌을 주면서 오히려 장애인을 더 2류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요새는 저도 ‘장애우’란 어휘보다는 그냥 ‘장애인’이란 보통명사를 씁니다. 표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선진국은 돈이 많아서 선진국이 아닙니다. 장애인들을 위해 시설과 배려, 그리고 편견 없는 시선이 바로 선진국의 지표입니다. 교육열이 높다고 하면서 장애인과의 통합교육을 반대하고, 장애인 시설을 혐오 시설로 생각하고 반대하는 지지리도 복이 없는 어른들이 있다면 아직 선진국 자격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연약하고 소외된 이웃을 배려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시선을 전수하고, 받기보다는 베푸는 자녀로 사려 깊게 키우십시오. 그래야 자녀들이 누구보다 복된 자녀로 자라납니다. 드릴 줄 모르고, 베풀 줄 모르는 인색한 삶은 축복된 삶을 방해하는 제일 대적이 됩니다.
2. 자녀와의 깊은 만남을 가지십시오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 자녀와 입맞춤하고, 자녀를 꼭 안아주고, 자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과 같은 접촉은 부모의 축복을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그런 축복의 터치는 자녀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용납한다는 뜻도 있고, 그 축복의 터치를 통해서 자녀와 인격적인 깊은 만남과 교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의 말에 의하면 몸에 있는 약 5백만 개의 촉각 중 3분의 1 정도가 손에 집중되어 있어서, 손의 터치는 의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손의 터치가 많으면 헤모글로빈 수치가 증가하고, 머리가 맑게 되고, 노인들의 치매 예방 효과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손 한번 잡아주는 것은 그런 의학적 효과보다 훨씬 더 큰 효과와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손도 많이 잡아주고, 자녀들에게 축복의 터치를 많이 해주십시오.
왜 사람들이 이단에 잘 빠집니까 이단에는 그런 터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사랑의 터치를 많이 해주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그때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 제자들이 꾸짖었지만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자녀들에게도 그런 축복의 터치를 해주십시오.
어렸을 때 축복의 터치를 해주면 다 좋아하지만 커가면서 자녀들은 그런 터치에 부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면 안 되기 때문에 축복의 터치를 위한 기회 포착을 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놀이나 스포츠, 그리고 여행 등을 통해서 자연스런 터치 시간을 만들려고 하고, 무엇보다 자녀와의 만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자녀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주는 가장 소중한 요인이 됩니다.
3.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침묵은 금이라고 말하지만 가정에서는 금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침묵은 나머지 식구들에게 상처를 주고 불안하게 만드는 일종의 폭력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는 침묵보다는 사랑과 인정과 격려의 말이 넘쳐야 합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입을 열면 “무엇을 하라!”고 하지만 그런 말 열 마디보다 축복의 말 한 마디가 훨씬 자녀의 앞날에 복을 불러옵니다. 어떤 축복의 말을 해주어야 합니까
1) 자녀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말
본문 27절 하반부 말씀을 보면 이삭은 아들 야곱을 축복할 때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발의 향취로다. ”라고 축복합니다. 그 말은 “너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존재다. ”라는 말입니다. 축복한다는 말의 뜻은 “당신은 잘됩니다. ”는 말이 아니라 “당신은 귀한 사람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한다. ”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영어로 “Bless the Lord. ”라고 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축복한다. ”는 말입니다. 만약 축복한다는 말이 잘된다는 말이라면 어떻게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께 “여호와 하나님은 잘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한다(축복한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 당신은 귀한 분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자녀들을 축복하는 것도 똑 같습니다. “너는 성공할 것이다. 돈을 많이 벌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기복주의 조장이지 축복이 아닙니다. 진정 축복의 말은 이런 말입니다. “너는 내게 참으로 귀한 존재이다!” 그런 축복의 말을 통해서 자녀들의 가치를 인정해 주십시오. 실제로 자녀의 가치는 무한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 자녀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키울 때 좋지 않은 교육 유형들이 있습니다. 첫째, ‘위협형’이 있습니다. “너! 한 번 만 더 하면 끝날 줄 알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나열형이 있습니다. 잘못한 것을 줄줄이 모았다가 일이 생겼을 때 나열합니다. 셋째, 조소형이 있습니다. “잘 논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비웃습니다. 넷째, 변덕형이 있습니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는데 언제는 야단치고 언제는 그냥 넘어가서 아이들을 갈팡질팡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나쁜 것은 ‘비교형’입니다. “걔는 안 그러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합니다. 그런 말은 듣는 사람들의 가능성과 기를 꺾습니다. 그러므로 남과 잘못된 비교를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녀들을 망치는 길이 됩니다.
아인슈타인이 고등학교 때, 공부를 못했던지 성적표에 이런 평가가 기록되었습니다. “이 학생은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 가능성이 없음. ” 자녀가 이런 성적표를 받아왔다면 부모들은 대개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낙심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얘야! 걱정할 것 없어. 남과 같아지려면 남보다 나아질 수 없지.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훌륭해 질 거야. ”
현재 모습은 부족해도 자녀들의 가치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그것을 일깨우는 것이 바로 참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그들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자녀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서 자녀가 감정의 희생양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그처럼 자녀의 인격과 가치를 존중해줄 때 자녀가 복된 자녀로 자라나게 됩니다.
2) 자녀의 가능성을 격려하는 말
본문 28-29절에서 이삭은 계속해서 아들 야곱을 축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가 굴복하며 네가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 이 이삭의 축복을 한 마디로 말하면 “너는 앞으로 크게 될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감춰진 잠재능력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보기 싫은 애벌레도 그 안에는 아름다운 나비가 들어 있습니다. 자녀들도 지금은 연약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놀라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가능성을 격려해주고, 잠재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물리 법칙에 의하면 물은 위로 흐르지 못합니다. 그처럼 부모가 아이들을 낮게 평가하면 아이들은 그 부모의 평가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녀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격려해주면 자녀는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자녀로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키울 때 격려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남아프리카 정글의 바벰바족은 가끔 누가 범죄하면 그를 마을 광장에 세우고 모든 마을 사람들은 그 주위에 큰 원을 이루어 섭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그 죄인의 장점이나 그가 과거에 했던 선행을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때 과장이나 농담은 일체 금지되고, 비난이나 욕이나 책망은 한마디도 하지 말아야 하고, 진지하게 칭찬만 해주어야 하는데, 칭찬이 바닥날 때까지 며칠이라도 하다가 칭찬이 다 끝나면 그때부터 그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로 축제를 벌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정말 새 사람이 되고, 그래서 그 부족 사회에서는 범죄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사람의 진정한 변화와 발전은 비판과 지탄보다는 칭찬과 격려에서 더 많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힘써 격려해주십시오.
3) 자녀의 영혼에 믿음을 주는 말
가끔 부모들은 자녀 앞에서 남의 흉을 보고,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자녀의 마음과 영혼에는 상처가 생기고, 어른을 우습게 알고, 똑같이 뒤에서 흉보는 자녀로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도 자제하고, 자녀 앞에서 남 흉보는 것도 극히 자제하십시오. 심지어는 정치인 나쁘다고 욕하는 것이나 “일본이 나쁘다! 북한이 나쁘다!”고 욕하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어느 날 황희 정승은 길을 가다가 농부가 두 마리 소로 밭을 가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여보게, 둘 중 어느 소가 밭을 잘 가나” 그때 농부가 쟁기를 놓고 다가와 조용히 말했습니다. “대감님! 조용히 말씀하세요.
왼쪽 편 소가 더 잘 갑니다. ” 그러자 황희 정승이 뭐가 무서워 그렇게 조용히 말하느냐고 했더니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대감님! 아무리 소가 미물이라도 자기가 밭을 못 간다고 말하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황희 정승이 깨닫는 바가 있어서 더욱 언행을 조심해서 훌륭한 정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녀가 기대에 미치는 것 같지 않아도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십시오.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주십시오. 누가 내 자녀보다 앞선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일찍 핀 꽃이 먼저 시듭니다. 사람은 항상 앞서는 법도 없고, 항상 뒤쳐지는 법도 없습니다. 앞선 날이 있으면 뒤쳐지는 날도 생기고, 뒤쳐지는 날이 있으면 앞서는 날도 생깁니다. 그 상황에서 믿음 잃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자녀를 믿고 격려해주는 것이 부모의 할 일입니다.
자녀에게 힘써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아이들은 잘 이끄는 대로 잘 자랄 것이고, 축복하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각박하고 상처가 많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축복을 받고 자란 너그럽고 넉넉한 사람이 더욱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최대한 축복해주어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잘 양육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축복
부모의 축복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과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부모의 축복을 받을 기회가 없게 되었다면 다 끝난 인생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한 상황을 지혜롭게 잘 극복하면 일찍부터 성숙해지고, 책임감이 큰 사람이 될 수 있고, 또한 과거의 아픔이 성취동기와 종교심을 자극해 더욱 복된 존재가 될 수 있고, 자신의 아픔이 불운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과 이웃사랑으로 승화될 수도 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부모의 돌봄과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훌륭한 사람들이 된 예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과거의 종교적 분위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부모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과거의 유교는 주로 힘 있는 자의 편에 섰습니다.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는 왕의 편에 섰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는 부모의 편에 섰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는 남편의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자녀를 이해하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부모의 축복을 잘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닙니다.
부모의 축복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부모님의 축복을 크게 받지 못했어도 어느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존재가 된다면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한 상황이나 과거의 상처도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축복을 많이 받고 자라지 못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고, 그때 더욱 겸손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붙들면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의 모습이 부족해도 상관없습니다. 차라리 부족한 것이 나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사람이 세상에서도 성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에서도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들이 있을 때 천국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높아서 서로 헐뜯으면 그게 지옥입니다. 어떤 부모는 말합니다. “너희들이 잘 커주니 항상 고맙다. ” 그런 가정은 행복합니다. 반면에 어떤 부모는 말합니다. “뉘 집 자식인지 알 수가 없다. 누굴 닮아서 저 꼴인가” 마치 자신은 흠잡을 데가 없는데 자식은 돌연변이로 태어났다는 식입니다. 그런 태도의 차이가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만듭니다.
사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모의 축복을 받으면 좋지만 받지 못하고 자랐을지라도 겸손히 여호와 하나님을 붙들고 나가면 길이 생깁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과거의 어떤 상처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 붙들고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축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래서 각박하고 상처가 많은 세상에 축복을 많이 받고 축복을 많이 전해주는 너그럽고 넉넉한 사람이 되십시오.
지금도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음성은 생생하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자들은 옛날에 받지 못한 축복의 말을 지금도 넘치게 받는 셈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더 많이 축복받고, 가족과 이웃에게 축복의 말을 많이 해줌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할아버지가 우는 일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갑자기 멍해졌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할아버지가 자기를 때린 후에 마음이 아파서 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조금 후, 할아버지는 게리의 인기척을 느끼고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게리! 나도 너를 때리면 마음이 아프단다! 나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너는 여호와 하나님이 귀하게 쓰실 거야. 네 앞날에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할아버지는 기도하고 있다. ” 그 후 그는 항상 할아버지의 축복의 말을 기억하면서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축복의 말입니다. 가정에서 축복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는 진짜 복된 인생이 됩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경쟁적으로 구하는 것을 보면 부모의 축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본문 뒷부분을 보면 야곱의 속임수로 에서가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기자 에서는 몸서리를 치며 “아버지여! 나도 축복해주세요!”라고 통곡했습니다. 그처럼 고대 유대 사회에서는 ‘부모의 축복’을 소중히 여겼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부모의 축복을 들으시고, 자녀를 축복한다고 믿었습니다.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은 부모의 축복을 들으시고 자녀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를 많이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왜 부모의 축복이 중요할까요 첫째, 바른 판단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복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참된 축복을 모르고 가짜 축복에 현혹되기 때문입니다. 기복주의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대개 정서가 불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영혼의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정서적으로 건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를 잘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축복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인간관계를 인정관계로 보지 않고 언약관계로 봅니다. 그래서 사회생활이 순탄하고, 정서적인 문제가 별로 없고, 여유가 있고, 공격적이지 않고, 민감하지 않고, 상처를 잘 받지 않습니다.
셋째, 열린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인정과 축복을 많이 받고 자라면 여호와 하나님도 자신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믿음과 열린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삶의 중심과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도 인정을 받으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기 때문에 율법주의, 신비주의, 비판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한 부모의 인정과 축복을 받고 자란 사람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좋은 친구도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오해가 생겨도 금방 풀고, 오해가 상처로 발전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의 인정을 지나치게 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억지로 특별하게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부모의 축복을 넉넉히 받고 자란 경험은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 되기 때문에 자녀에게 축복을 많이 해주는 것은 부모가 남겨주어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입니다.
축복받는 자녀 만들기
부모가 자녀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 3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헌신하는 삶을 가르치십시오
본문 앞부분에 있는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게 전에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 이삭은 자녀를 무작정 축복하지 않고 먼저 자녀의 별미를 받은 후 축복했습니다. 그처럼 자녀가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면 먼저 자녀에게 헌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를 우상처럼 키워서 받기만 하고 드리고 헌신할 줄 모르는 자녀로 키우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멀어집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당부합니다. “얘야! 장애가 있거나 남들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아이들을 특별히 잘 보살펴주고, 그의 친구가 되어주라. ” 그렇게 교육 받고 자란 자녀가 어떻게 잘못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장애인을 왕따 시키는 사람을 가장 저주할 것이고, 장애인을 잘 돌보는 사람을 가장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삶과 헌신하는 삶을 최선을 다해 가르쳐야 합니다.
요새는 선천적인 장애인보다 사고로 인한 후천적인 장애인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예비 장애인들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며 항상 장애인을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장애인을 ‘장애우’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이 억지로 친구가 되어주는 느낌을 주면서 오히려 장애인을 더 2류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요새는 저도 ‘장애우’란 어휘보다는 그냥 ‘장애인’이란 보통명사를 씁니다. 표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선진국은 돈이 많아서 선진국이 아닙니다. 장애인들을 위해 시설과 배려, 그리고 편견 없는 시선이 바로 선진국의 지표입니다. 교육열이 높다고 하면서 장애인과의 통합교육을 반대하고, 장애인 시설을 혐오 시설로 생각하고 반대하는 지지리도 복이 없는 어른들이 있다면 아직 선진국 자격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연약하고 소외된 이웃을 배려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시선을 전수하고, 받기보다는 베푸는 자녀로 사려 깊게 키우십시오. 그래야 자녀들이 누구보다 복된 자녀로 자라납니다. 드릴 줄 모르고, 베풀 줄 모르는 인색한 삶은 축복된 삶을 방해하는 제일 대적이 됩니다.
2. 자녀와의 깊은 만남을 가지십시오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 자녀와 입맞춤하고, 자녀를 꼭 안아주고, 자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과 같은 접촉은 부모의 축복을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그런 축복의 터치는 자녀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용납한다는 뜻도 있고, 그 축복의 터치를 통해서 자녀와 인격적인 깊은 만남과 교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의 말에 의하면 몸에 있는 약 5백만 개의 촉각 중 3분의 1 정도가 손에 집중되어 있어서, 손의 터치는 의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손의 터치가 많으면 헤모글로빈 수치가 증가하고, 머리가 맑게 되고, 노인들의 치매 예방 효과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손 한번 잡아주는 것은 그런 의학적 효과보다 훨씬 더 큰 효과와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손도 많이 잡아주고, 자녀들에게 축복의 터치를 많이 해주십시오.
왜 사람들이 이단에 잘 빠집니까 이단에는 그런 터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사랑의 터치를 많이 해주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그때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 제자들이 꾸짖었지만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자녀들에게도 그런 축복의 터치를 해주십시오.
어렸을 때 축복의 터치를 해주면 다 좋아하지만 커가면서 자녀들은 그런 터치에 부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면 안 되기 때문에 축복의 터치를 위한 기회 포착을 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놀이나 스포츠, 그리고 여행 등을 통해서 자연스런 터치 시간을 만들려고 하고, 무엇보다 자녀와의 만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자녀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주는 가장 소중한 요인이 됩니다.
3.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침묵은 금이라고 말하지만 가정에서는 금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침묵은 나머지 식구들에게 상처를 주고 불안하게 만드는 일종의 폭력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는 침묵보다는 사랑과 인정과 격려의 말이 넘쳐야 합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입을 열면 “무엇을 하라!”고 하지만 그런 말 열 마디보다 축복의 말 한 마디가 훨씬 자녀의 앞날에 복을 불러옵니다. 어떤 축복의 말을 해주어야 합니까
1) 자녀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말
본문 27절 하반부 말씀을 보면 이삭은 아들 야곱을 축복할 때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발의 향취로다. ”라고 축복합니다. 그 말은 “너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존재다. ”라는 말입니다. 축복한다는 말의 뜻은 “당신은 잘됩니다. ”는 말이 아니라 “당신은 귀한 사람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한다. ”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영어로 “Bless the Lord. ”라고 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축복한다. ”는 말입니다. 만약 축복한다는 말이 잘된다는 말이라면 어떻게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께 “여호와 하나님은 잘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한다(축복한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 당신은 귀한 분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자녀들을 축복하는 것도 똑 같습니다. “너는 성공할 것이다. 돈을 많이 벌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기복주의 조장이지 축복이 아닙니다. 진정 축복의 말은 이런 말입니다. “너는 내게 참으로 귀한 존재이다!” 그런 축복의 말을 통해서 자녀들의 가치를 인정해 주십시오. 실제로 자녀의 가치는 무한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 자녀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키울 때 좋지 않은 교육 유형들이 있습니다. 첫째, ‘위협형’이 있습니다. “너! 한 번 만 더 하면 끝날 줄 알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나열형이 있습니다. 잘못한 것을 줄줄이 모았다가 일이 생겼을 때 나열합니다. 셋째, 조소형이 있습니다. “잘 논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비웃습니다. 넷째, 변덕형이 있습니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는데 언제는 야단치고 언제는 그냥 넘어가서 아이들을 갈팡질팡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나쁜 것은 ‘비교형’입니다. “걔는 안 그러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합니다. 그런 말은 듣는 사람들의 가능성과 기를 꺾습니다. 그러므로 남과 잘못된 비교를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녀들을 망치는 길이 됩니다.
아인슈타인이 고등학교 때, 공부를 못했던지 성적표에 이런 평가가 기록되었습니다. “이 학생은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 가능성이 없음. ” 자녀가 이런 성적표를 받아왔다면 부모들은 대개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낙심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얘야! 걱정할 것 없어. 남과 같아지려면 남보다 나아질 수 없지.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훌륭해 질 거야. ”
현재 모습은 부족해도 자녀들의 가치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그것을 일깨우는 것이 바로 참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그들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자녀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서 자녀가 감정의 희생양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그처럼 자녀의 인격과 가치를 존중해줄 때 자녀가 복된 자녀로 자라나게 됩니다.
2) 자녀의 가능성을 격려하는 말
본문 28-29절에서 이삭은 계속해서 아들 야곱을 축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가 굴복하며 네가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 이 이삭의 축복을 한 마디로 말하면 “너는 앞으로 크게 될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감춰진 잠재능력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보기 싫은 애벌레도 그 안에는 아름다운 나비가 들어 있습니다. 자녀들도 지금은 연약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놀라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가능성을 격려해주고, 잠재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물리 법칙에 의하면 물은 위로 흐르지 못합니다. 그처럼 부모가 아이들을 낮게 평가하면 아이들은 그 부모의 평가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녀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격려해주면 자녀는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자녀로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키울 때 격려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남아프리카 정글의 바벰바족은 가끔 누가 범죄하면 그를 마을 광장에 세우고 모든 마을 사람들은 그 주위에 큰 원을 이루어 섭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그 죄인의 장점이나 그가 과거에 했던 선행을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때 과장이나 농담은 일체 금지되고, 비난이나 욕이나 책망은 한마디도 하지 말아야 하고, 진지하게 칭찬만 해주어야 하는데, 칭찬이 바닥날 때까지 며칠이라도 하다가 칭찬이 다 끝나면 그때부터 그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로 축제를 벌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정말 새 사람이 되고, 그래서 그 부족 사회에서는 범죄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사람의 진정한 변화와 발전은 비판과 지탄보다는 칭찬과 격려에서 더 많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힘써 격려해주십시오.
3) 자녀의 영혼에 믿음을 주는 말
가끔 부모들은 자녀 앞에서 남의 흉을 보고,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자녀의 마음과 영혼에는 상처가 생기고, 어른을 우습게 알고, 똑같이 뒤에서 흉보는 자녀로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도 자제하고, 자녀 앞에서 남 흉보는 것도 극히 자제하십시오. 심지어는 정치인 나쁘다고 욕하는 것이나 “일본이 나쁘다! 북한이 나쁘다!”고 욕하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어느 날 황희 정승은 길을 가다가 농부가 두 마리 소로 밭을 가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여보게, 둘 중 어느 소가 밭을 잘 가나” 그때 농부가 쟁기를 놓고 다가와 조용히 말했습니다. “대감님! 조용히 말씀하세요.
왼쪽 편 소가 더 잘 갑니다. ” 그러자 황희 정승이 뭐가 무서워 그렇게 조용히 말하느냐고 했더니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대감님! 아무리 소가 미물이라도 자기가 밭을 못 간다고 말하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황희 정승이 깨닫는 바가 있어서 더욱 언행을 조심해서 훌륭한 정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녀가 기대에 미치는 것 같지 않아도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십시오.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주십시오. 누가 내 자녀보다 앞선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일찍 핀 꽃이 먼저 시듭니다. 사람은 항상 앞서는 법도 없고, 항상 뒤쳐지는 법도 없습니다. 앞선 날이 있으면 뒤쳐지는 날도 생기고, 뒤쳐지는 날이 있으면 앞서는 날도 생깁니다. 그 상황에서 믿음 잃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자녀를 믿고 격려해주는 것이 부모의 할 일입니다.
자녀에게 힘써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아이들은 잘 이끄는 대로 잘 자랄 것이고, 축복하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각박하고 상처가 많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축복을 받고 자란 너그럽고 넉넉한 사람이 더욱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최대한 축복해주어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잘 양육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축복
부모의 축복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과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부모의 축복을 받을 기회가 없게 되었다면 다 끝난 인생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한 상황을 지혜롭게 잘 극복하면 일찍부터 성숙해지고, 책임감이 큰 사람이 될 수 있고, 또한 과거의 아픔이 성취동기와 종교심을 자극해 더욱 복된 존재가 될 수 있고, 자신의 아픔이 불운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과 이웃사랑으로 승화될 수도 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부모의 돌봄과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훌륭한 사람들이 된 예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과거의 종교적 분위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부모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과거의 유교는 주로 힘 있는 자의 편에 섰습니다.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는 왕의 편에 섰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는 부모의 편에 섰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는 남편의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자녀를 이해하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부모의 축복을 잘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닙니다.
부모의 축복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부모님의 축복을 크게 받지 못했어도 어느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존재가 된다면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한 상황이나 과거의 상처도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축복을 많이 받고 자라지 못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고, 그때 더욱 겸손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붙들면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의 모습이 부족해도 상관없습니다. 차라리 부족한 것이 나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사람이 세상에서도 성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에서도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들이 있을 때 천국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높아서 서로 헐뜯으면 그게 지옥입니다. 어떤 부모는 말합니다. “너희들이 잘 커주니 항상 고맙다. ” 그런 가정은 행복합니다. 반면에 어떤 부모는 말합니다. “뉘 집 자식인지 알 수가 없다. 누굴 닮아서 저 꼴인가” 마치 자신은 흠잡을 데가 없는데 자식은 돌연변이로 태어났다는 식입니다. 그런 태도의 차이가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만듭니다.
사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모의 축복을 받으면 좋지만 받지 못하고 자랐을지라도 겸손히 여호와 하나님을 붙들고 나가면 길이 생깁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과거의 어떤 상처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 붙들고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축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래서 각박하고 상처가 많은 세상에 축복을 많이 받고 축복을 많이 전해주는 너그럽고 넉넉한 사람이 되십시오.
지금도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음성은 생생하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자들은 옛날에 받지 못한 축복의 말을 지금도 넘치게 받는 셈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더 많이 축복받고, 가족과 이웃에게 축복의 말을 많이 해줌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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