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사육이 아닌 양육입니다
본문
가정의 달 5월입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정은 행복의 요람이요 교육의 출발점이요 신앙생활의 훈련장입니다.
오늘날 마귀는 가정을 깨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인격도 신앙도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빠집니다.
그래서 마귀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가정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유리구슬과 같습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 힘은 고무구슬입니다.
땅에 떨어져도 깨지지 않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은 유리구슬이기에 놓치면 깨집니다.
깨진 구슬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많은 가정들이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그 결과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가출과 탈선은 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못함으로 세대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건강한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앞으로 자녀교육에 대하여, 성경적 효에 대하여, 행복한 가정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자녀교육입니다.
우리나라 자녀교육의 현주소를 살펴봅니다.
소위 우리는 강남 8학군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목표는 대학입학처럼 보입니다.
말로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가지고, 인성교육을 외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요즘의 자녀교육은 사육에 가깝습니다.
사육과 양육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짐승은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사육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인격이나 상황을 고려치 않습니다.
오직 인간의 이기심을 위해 맘대로 조작하고, 키우는 것입니다.
소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맞춤교육은 바로 사육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맞춤교육이라기 보다는 맞춤사육이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아이를 Test하여 대학 목표를 정합니다.
엄마가 정해준 프로그램에 의해 초중고 거의 10년 동안을 끌려 다닙니다.
아이의 인격이나 태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창의성이나 개성을 별로 고려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만들어 놓은 계획에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노는 시간도 엄마가 정해 놓고 그룹을 만들어 돈을 내고 놉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 시간이 없습니다.
놀이터에 가도 함께 놀 친구가 없습니다.
학교교육은 뒷전입니다.
단지 내신과 졸업장을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학교 선생님이 때리면 체벌이라고 경찰에 신고합니다.
그러나 학원 선생님이 때리면 정신 좀 차리게 더 때려주라고 한답니다.
학원과 과외를 통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뛰어다닙니다.
최근에는 학원 진도를 따라가지 위한 신종 과외도 생겼답니다.
이제는 국내에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해외 조기유학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들 해외로 밀려가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 유학생들 가운데 한국생이 약 10만명으로 세계 제일입니다.
작년 1년에 해외 어학연수와 유학에 지출한 비용이 약 7조원입니다.
아이들을 혼자 보내는 것이 염려되어 엄마와 함께 보냅니다.
그래서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 가족과 생이별을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러기도 종류가 있답니다.
독수리 아빠입니다.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날아가서 보고 오는 아빠입니다.
기러기 아빠입니다. 중산층으로 자주는 못가도 필요할 때는 다녀올 수 있는 아빠입니다.
그리고 가장 불쌍한 펭귄 아빠입니다.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없어서 몸이 부서져라 일하면서 가보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아빠입니다.
결국 기러기 아빠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알콜중독, 게임중독에 빠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지거나,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유학중인 자녀들은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해 결국 문제아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 뒷바라지를 위해 따라간 엄마는 문화충격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거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모임에 나갔다가 남편을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나친 자녀교육 열기가 빚어낸 사회 병리적 현상입니다.
최고를 만들려는 치열한 경쟁심을 유발하는 교육, 입시위주의 교육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가장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역경 앞에 너무나 쉽게 자신을 포기하는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책임감이 없고, 의존적인 성인아이의 모습입니다.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것 오늘 우리가 직면해 있는 교육의 현주소입니다.
이런 잘못된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비들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6:4)
(Fathers, do not exasperate your children; instead, bring them upin the training and instruction of the Lord. )
우리들이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자녀교육의 소극적인 측면을 말합니다.
자녀를 화나게 하는 요소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과잉보호입니다.
아이들을 제일 짜증나게 하는 것이 과잉보호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녀는 항상 위험해 보입니다.
그래서 8순 노모가 60 넘은 아들이 외출 할 때 “애야, 차조심 하거라”
이것이 바로 부모의 노파심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과잉보호는 자녀를 의존적으로 만듭니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게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지 못하게 만듭니다.
제가 쓴 칼럼에 보면 ‘헬리콥터 부모가 뜨고 있다’ 가 있습니다.
다른 비행기는 이착륙을 위해서 반드시 활주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헬리콥터는 제 자리에서 뜨고 내립니다.
항상 자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도는 부모를 말합니다.
심지어 대학교에 다니는 자녀의 리포트를 부모가 대신 내줍니다.
학사 일정까지 부모가 챙겨주고, 대행합니다.
미국에서는 자녀의 직장 연봉협상도 부모가 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헬리콥터 부모는 자녀에 대한 과잉보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자녀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떠나보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결혼을 시켜도 보내지 않습니다.
성경적 결혼의 원리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독립한다, 홀로서기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심지어 영적으로도 홀로서기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과잉보호 속에서 자라나서 자녀들은 부모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욱 문제는 부모들이 자녀를 계속 치마 자락에 품고 있으려고 합니다.
지금부터 떠나보내는 훈련을 하십시오.
자녀의 인생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걸지 마십시오.
아무리 희생하고 모든 것 다 주어도 자녀는 자녀일 뿐입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자녀들을 풀어 주십시오.
자기 인생을 책임질 줄 아는 독립적인 자녀로 키우십시오.
둘째는, 편애입니다.
요즘은 자녀가 하나인 가정이 많아서 편애를 하고 싶어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가족상담을 해보면 역기능 가정의 특징 중의 하나가 편애입니다.
자녀가 하나라도 아빠 엄마 자녀 세 사람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흐름이 있습니다.
엄마가 남편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면 아빠가 외톨이가 됩니다.
그러면 남편에게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족구성원 간에 짝짓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한 쪽으로 지나치게 쏠리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특별히 자녀가 둘 이상인 경우에 편애는 자아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성경에도 보면 에서와 야곱의 경우, 문제의 본질은 편애에서 출발합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편애해서 결국은 에서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편애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차남이나 차녀들인 경우에 피해의식이 많습니다.
유교문화에서는 장남이나 장녀에 대한 위계질서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음식이나 옷을 사도 항상 첫째가 먼저입니다.
형이나 누나가 입던 옷을 물려 입고 자란 자녀들은 자존감이 낮습니다.
피해의식이 강합니다.
모든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입니다.
그 창조의 손길 아래서 다양성을 부여받았습니다.
모양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재능과 능력도 다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편애할 때 상처를 받고, 문제아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과천에 있을 때 아들이 부모를 토막살인 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편애였습니다.
형은 항상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항상 형과 비교되어 책망을 받았습니다.
결국 자포자기하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일기장에 이런 기록이 있었습니다.
“나는 항상 형과 비교되었다. 나는 부모로부터 칭찬 받은 적이 없다. ”
누가 이 아들을 끔찍한 살인자로 만들었습니까
가족간의 편애가 부른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로 편애하지 마십시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시고 격려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로,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자존감을 가장 떨어뜨리는 것이 비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되는데 말입니다.
큰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부모교육에 참가했는데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적표를 보내고 난 후에 학생들을 면담하면서 물어본답니다.
‘부모님이 성적표를 보고 뭐라고 하든’
그러면 대부분의 부모가 이렇게 말한답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했든 못했든 ‘니네 반 철수는 몇 점 맞았니’
꼭 다른 아이의 성적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묻는다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저 역시도 그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의 자식 몇 점 맞았는가가 뭐 중요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남의 자녀와 비교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옆 집 아이와 같은 반 친구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좀 성적이 떨어졌으면 격려해 주십시오.
성적이 올랐으면 더 잘할 수 있도록 칭찬해 주십시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면 좀 더 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자녀교육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입니다.
여기서 ‘양육한다(bring up)’는 말 속에는 ‘칭찬하고 격려한다’는 의미와 ‘잘못하는 것을 질책하고 시정하게 해주며 훈련 한다’ 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이 권면은 부모는 자녀 교육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책임을 지는 교육일까요
첫째로, 주님을 닮아가는 자녀로 키우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라는 말은 모든 교육의 핵심은 주님을 닮은 아이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녀교육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은 아이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교육의 가장 중요한 교재는 ‘성경’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인 지식을 많이 쌓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가 없으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9:10)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릴 줄 아는 자녀로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이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드리기를 기뻐하는 자녀가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지 못하면 그 지식이, 그 재물이, 그 힘이 자신과 가정을, 심지어 한 민족의 운명을 불행으로 몰고 갑니다.
공산주의 창시자인 칼 막스를 보십시오.
그는 신학을 공부했지만 공산주의를 만들고, 유물론을 만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인하고 물질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겼습니다.
유태인을 6백만명이나 살해한 히틀러를 보십시오.
자기 어머니가 유태인 우유 배달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히틀러의 마음 속에 유태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품었습니다.
그 결과 잘못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대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결국 부모들이 신앙교육의 본을 보이지 못하고,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결과 엄청난 인류의 재앙을 초래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학입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교육입니다.
먼저 우리 성지가족들이 이 사실을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주일을 성수하는 믿음을 심어 주십시오.
아무리 시험이 중요해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신앙인 부모들마져도 세상 교육을 더 중시합니다.
대학교 진학 후에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되지…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일 뿐입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여호와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회 진출했을 때 어떤 어려움이 와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설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로서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어렵고 힘들 때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최고의 신앙교육은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보의 한 면을 할애해서 작년부터 가정예배 순서지를 실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활용하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몇 분이 말씀하셨어요.
“목사님! 절대로 가정예배 순서지를 빼시면 안됩니다. ”
가정예배를 통해서 자녀들과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답니다.
자녀들의 신앙이 자라고, 부부간에 사랑이 깊어졌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자녀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 사철의 봄 바람이 불어오고, 놀라운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자녀를 말씀 앞에 세우고, 진리의 말씀 앞에 책임질 줄 아는 자녀로 키울 때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지가족 자녀들이 주님을 닮아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리더들이 나올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창의성을 지닌 자녀로 키우라.
이 시대는 문화의 시대요 감성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주입식 교육을 통해서는 창의성이 말살됩니다.
개성이 없는 붕어빵을 찍어내는 교육은 사라져야 합니다.
원래 교육이라는 말은 라틴어 ‘educare'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은 ‘끌어내다’‘경작한다, 재배한다’는 의미입니다.
교육이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재능을 끌어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기르는 것이 교육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의 개성은 모두 무시하고 부모가 만들어 놓은 틀, 입시제도가 만들어 놓은 틀에 우리 자녀들을 사육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중요합니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위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창의성을 키우려면 자연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책을 많이 읽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행을 많이 하면 좋습니다.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꿈을 키우도록 도전해야 합니다.
셋째로, 책임감을 가진 자녀로 키우라.
이 시대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교육이 문제입니다.
지나친 경쟁의식만을 부추긴 결과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항상 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자는 조직에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그런데 진짜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그 일의 결과까지 생각하는 자입니다.
예를 들어 페인트를 칠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정해 진 양의 페인트를 다 칠하면 책임을 다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을 다했다기 보다는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진짜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페인트를 칠한 후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남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에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학교 잔디밭 앞 벤치에 앉았는데 무언가 제 엉덩이를 붙잡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페인트를 칠했는데 마르기 전에 앉은 것이죠.
이런 경우 황당하지 않습니까
페인트를 칠한 사람이 자기 임무는 완수했을지 모르지만 책임감을 지닌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앉지 마시오’ 라고 써붙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타인을 향해, 공동체를 향해 책임감을 가진 자녀로 키우십시오.
남을 배려하고, 사랑할 줄 아는 자가 진정한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출세를 해도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면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끝까지 책임질 줄 아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빌 모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 시민 중 25세 미만의 사람들의 사고에 달려있다. ”
우리교회의 장래는 교회학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나라의 장래도 역시 청소년들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참으로 어둡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좌절하고 한숨 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는 무너지는 학교교육, 가정교육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은 교회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회복하는 신앙교육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의 부모들이 바로서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들을 사육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책임질 줄 아는 자녀로 키운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녀들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부모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했다면 이 시간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새롭게 결단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에드가 게스트(Edgar Guest)가 쓴 ‘다음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라는 시를 읽어드립니다.
나는 설교를 귀로 듣기보다는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이 단순히 방향을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와 함께 걸어주기를 바랍니다.
눈은 귀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학생입니다.
좋은 충고는 머리를 아프게 하지만, 삶의 모범은 언제나 명쾌합니다.
최고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행동하는 선을 보는 것이 우리 모두에겐 필요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 주면 나도 어떻게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이 직접 행동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는데, 당신은 항상 말이 앞서 나갑니다.
당신의 강의는 지혜롭고 옳은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당신의 행동에서 뭔가를 배우고 싶습니다.
당신의 유창한 충고만 가지고는 당신을 오해하기 쉬울 것 같군요.
그러나 당신의 행동과 삶을 보면 결코 오해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나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한풀이 식의 자녀교육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성껏 삶의 발자국을 찍고 다음세대에게 그대로 따라오도록 해야 합니다.
실은 뒤에서 밀면 절대로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앞에서 끌어야 바르게 따라옵니다.
자녀교육은 실을 앞에서 끄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부모 된 우리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말씀을 좇아서 정성껏 삶의 발자국을 찍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을 닮아가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책임 있는 자들이 되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일군들이 나올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가정은 행복의 요람이요 교육의 출발점이요 신앙생활의 훈련장입니다.
오늘날 마귀는 가정을 깨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인격도 신앙도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빠집니다.
그래서 마귀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가정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유리구슬과 같습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 힘은 고무구슬입니다.
땅에 떨어져도 깨지지 않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은 유리구슬이기에 놓치면 깨집니다.
깨진 구슬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많은 가정들이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그 결과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가출과 탈선은 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못함으로 세대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건강한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앞으로 자녀교육에 대하여, 성경적 효에 대하여, 행복한 가정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자녀교육입니다.
우리나라 자녀교육의 현주소를 살펴봅니다.
소위 우리는 강남 8학군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목표는 대학입학처럼 보입니다.
말로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가지고, 인성교육을 외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요즘의 자녀교육은 사육에 가깝습니다.
사육과 양육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짐승은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사육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인격이나 상황을 고려치 않습니다.
오직 인간의 이기심을 위해 맘대로 조작하고, 키우는 것입니다.
소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맞춤교육은 바로 사육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맞춤교육이라기 보다는 맞춤사육이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아이를 Test하여 대학 목표를 정합니다.
엄마가 정해준 프로그램에 의해 초중고 거의 10년 동안을 끌려 다닙니다.
아이의 인격이나 태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창의성이나 개성을 별로 고려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만들어 놓은 계획에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노는 시간도 엄마가 정해 놓고 그룹을 만들어 돈을 내고 놉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 시간이 없습니다.
놀이터에 가도 함께 놀 친구가 없습니다.
학교교육은 뒷전입니다.
단지 내신과 졸업장을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학교 선생님이 때리면 체벌이라고 경찰에 신고합니다.
그러나 학원 선생님이 때리면 정신 좀 차리게 더 때려주라고 한답니다.
학원과 과외를 통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뛰어다닙니다.
최근에는 학원 진도를 따라가지 위한 신종 과외도 생겼답니다.
이제는 국내에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해외 조기유학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들 해외로 밀려가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 유학생들 가운데 한국생이 약 10만명으로 세계 제일입니다.
작년 1년에 해외 어학연수와 유학에 지출한 비용이 약 7조원입니다.
아이들을 혼자 보내는 것이 염려되어 엄마와 함께 보냅니다.
그래서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 가족과 생이별을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러기도 종류가 있답니다.
독수리 아빠입니다.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날아가서 보고 오는 아빠입니다.
기러기 아빠입니다. 중산층으로 자주는 못가도 필요할 때는 다녀올 수 있는 아빠입니다.
그리고 가장 불쌍한 펭귄 아빠입니다.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없어서 몸이 부서져라 일하면서 가보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아빠입니다.
결국 기러기 아빠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알콜중독, 게임중독에 빠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지거나,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유학중인 자녀들은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해 결국 문제아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 뒷바라지를 위해 따라간 엄마는 문화충격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거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모임에 나갔다가 남편을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나친 자녀교육 열기가 빚어낸 사회 병리적 현상입니다.
최고를 만들려는 치열한 경쟁심을 유발하는 교육, 입시위주의 교육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가장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역경 앞에 너무나 쉽게 자신을 포기하는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책임감이 없고, 의존적인 성인아이의 모습입니다.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것 오늘 우리가 직면해 있는 교육의 현주소입니다.
이런 잘못된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비들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6:4)
(Fathers, do not exasperate your children; instead, bring them upin the training and instruction of the Lord. )
우리들이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자녀교육의 소극적인 측면을 말합니다.
자녀를 화나게 하는 요소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과잉보호입니다.
아이들을 제일 짜증나게 하는 것이 과잉보호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녀는 항상 위험해 보입니다.
그래서 8순 노모가 60 넘은 아들이 외출 할 때 “애야, 차조심 하거라”
이것이 바로 부모의 노파심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과잉보호는 자녀를 의존적으로 만듭니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게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지 못하게 만듭니다.
제가 쓴 칼럼에 보면 ‘헬리콥터 부모가 뜨고 있다’ 가 있습니다.
다른 비행기는 이착륙을 위해서 반드시 활주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헬리콥터는 제 자리에서 뜨고 내립니다.
항상 자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도는 부모를 말합니다.
심지어 대학교에 다니는 자녀의 리포트를 부모가 대신 내줍니다.
학사 일정까지 부모가 챙겨주고, 대행합니다.
미국에서는 자녀의 직장 연봉협상도 부모가 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헬리콥터 부모는 자녀에 대한 과잉보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자녀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떠나보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결혼을 시켜도 보내지 않습니다.
성경적 결혼의 원리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독립한다, 홀로서기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심지어 영적으로도 홀로서기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과잉보호 속에서 자라나서 자녀들은 부모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욱 문제는 부모들이 자녀를 계속 치마 자락에 품고 있으려고 합니다.
지금부터 떠나보내는 훈련을 하십시오.
자녀의 인생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걸지 마십시오.
아무리 희생하고 모든 것 다 주어도 자녀는 자녀일 뿐입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자녀들을 풀어 주십시오.
자기 인생을 책임질 줄 아는 독립적인 자녀로 키우십시오.
둘째는, 편애입니다.
요즘은 자녀가 하나인 가정이 많아서 편애를 하고 싶어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가족상담을 해보면 역기능 가정의 특징 중의 하나가 편애입니다.
자녀가 하나라도 아빠 엄마 자녀 세 사람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흐름이 있습니다.
엄마가 남편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면 아빠가 외톨이가 됩니다.
그러면 남편에게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족구성원 간에 짝짓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한 쪽으로 지나치게 쏠리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특별히 자녀가 둘 이상인 경우에 편애는 자아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성경에도 보면 에서와 야곱의 경우, 문제의 본질은 편애에서 출발합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편애해서 결국은 에서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편애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차남이나 차녀들인 경우에 피해의식이 많습니다.
유교문화에서는 장남이나 장녀에 대한 위계질서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음식이나 옷을 사도 항상 첫째가 먼저입니다.
형이나 누나가 입던 옷을 물려 입고 자란 자녀들은 자존감이 낮습니다.
피해의식이 강합니다.
모든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입니다.
그 창조의 손길 아래서 다양성을 부여받았습니다.
모양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재능과 능력도 다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편애할 때 상처를 받고, 문제아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과천에 있을 때 아들이 부모를 토막살인 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편애였습니다.
형은 항상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항상 형과 비교되어 책망을 받았습니다.
결국 자포자기하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일기장에 이런 기록이 있었습니다.
“나는 항상 형과 비교되었다. 나는 부모로부터 칭찬 받은 적이 없다. ”
누가 이 아들을 끔찍한 살인자로 만들었습니까
가족간의 편애가 부른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로 편애하지 마십시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시고 격려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로,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자존감을 가장 떨어뜨리는 것이 비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되는데 말입니다.
큰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부모교육에 참가했는데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적표를 보내고 난 후에 학생들을 면담하면서 물어본답니다.
‘부모님이 성적표를 보고 뭐라고 하든’
그러면 대부분의 부모가 이렇게 말한답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했든 못했든 ‘니네 반 철수는 몇 점 맞았니’
꼭 다른 아이의 성적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묻는다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저 역시도 그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의 자식 몇 점 맞았는가가 뭐 중요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남의 자녀와 비교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옆 집 아이와 같은 반 친구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좀 성적이 떨어졌으면 격려해 주십시오.
성적이 올랐으면 더 잘할 수 있도록 칭찬해 주십시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면 좀 더 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자녀교육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입니다.
여기서 ‘양육한다(bring up)’는 말 속에는 ‘칭찬하고 격려한다’는 의미와 ‘잘못하는 것을 질책하고 시정하게 해주며 훈련 한다’ 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이 권면은 부모는 자녀 교육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책임을 지는 교육일까요
첫째로, 주님을 닮아가는 자녀로 키우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라는 말은 모든 교육의 핵심은 주님을 닮은 아이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녀교육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은 아이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교육의 가장 중요한 교재는 ‘성경’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인 지식을 많이 쌓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가 없으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9:10)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릴 줄 아는 자녀로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이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드리기를 기뻐하는 자녀가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지 못하면 그 지식이, 그 재물이, 그 힘이 자신과 가정을, 심지어 한 민족의 운명을 불행으로 몰고 갑니다.
공산주의 창시자인 칼 막스를 보십시오.
그는 신학을 공부했지만 공산주의를 만들고, 유물론을 만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인하고 물질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겼습니다.
유태인을 6백만명이나 살해한 히틀러를 보십시오.
자기 어머니가 유태인 우유 배달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히틀러의 마음 속에 유태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품었습니다.
그 결과 잘못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대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결국 부모들이 신앙교육의 본을 보이지 못하고,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결과 엄청난 인류의 재앙을 초래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학입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교육입니다.
먼저 우리 성지가족들이 이 사실을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주일을 성수하는 믿음을 심어 주십시오.
아무리 시험이 중요해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신앙인 부모들마져도 세상 교육을 더 중시합니다.
대학교 진학 후에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되지…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일 뿐입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여호와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회 진출했을 때 어떤 어려움이 와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설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로서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어렵고 힘들 때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최고의 신앙교육은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보의 한 면을 할애해서 작년부터 가정예배 순서지를 실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활용하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몇 분이 말씀하셨어요.
“목사님! 절대로 가정예배 순서지를 빼시면 안됩니다. ”
가정예배를 통해서 자녀들과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답니다.
자녀들의 신앙이 자라고, 부부간에 사랑이 깊어졌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자녀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 사철의 봄 바람이 불어오고, 놀라운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자녀를 말씀 앞에 세우고, 진리의 말씀 앞에 책임질 줄 아는 자녀로 키울 때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지가족 자녀들이 주님을 닮아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리더들이 나올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창의성을 지닌 자녀로 키우라.
이 시대는 문화의 시대요 감성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주입식 교육을 통해서는 창의성이 말살됩니다.
개성이 없는 붕어빵을 찍어내는 교육은 사라져야 합니다.
원래 교육이라는 말은 라틴어 ‘educare'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은 ‘끌어내다’‘경작한다, 재배한다’는 의미입니다.
교육이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재능을 끌어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기르는 것이 교육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의 개성은 모두 무시하고 부모가 만들어 놓은 틀, 입시제도가 만들어 놓은 틀에 우리 자녀들을 사육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중요합니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위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창의성을 키우려면 자연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책을 많이 읽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행을 많이 하면 좋습니다.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꿈을 키우도록 도전해야 합니다.
셋째로, 책임감을 가진 자녀로 키우라.
이 시대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교육이 문제입니다.
지나친 경쟁의식만을 부추긴 결과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항상 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자는 조직에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그런데 진짜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그 일의 결과까지 생각하는 자입니다.
예를 들어 페인트를 칠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정해 진 양의 페인트를 다 칠하면 책임을 다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을 다했다기 보다는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진짜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페인트를 칠한 후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남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에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학교 잔디밭 앞 벤치에 앉았는데 무언가 제 엉덩이를 붙잡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페인트를 칠했는데 마르기 전에 앉은 것이죠.
이런 경우 황당하지 않습니까
페인트를 칠한 사람이 자기 임무는 완수했을지 모르지만 책임감을 지닌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앉지 마시오’ 라고 써붙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타인을 향해, 공동체를 향해 책임감을 가진 자녀로 키우십시오.
남을 배려하고, 사랑할 줄 아는 자가 진정한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출세를 해도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면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끝까지 책임질 줄 아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빌 모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 시민 중 25세 미만의 사람들의 사고에 달려있다. ”
우리교회의 장래는 교회학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나라의 장래도 역시 청소년들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참으로 어둡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좌절하고 한숨 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는 무너지는 학교교육, 가정교육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은 교회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회복하는 신앙교육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의 부모들이 바로서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들을 사육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책임질 줄 아는 자녀로 키운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녀들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부모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했다면 이 시간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새롭게 결단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에드가 게스트(Edgar Guest)가 쓴 ‘다음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라는 시를 읽어드립니다.
나는 설교를 귀로 듣기보다는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이 단순히 방향을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와 함께 걸어주기를 바랍니다.
눈은 귀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학생입니다.
좋은 충고는 머리를 아프게 하지만, 삶의 모범은 언제나 명쾌합니다.
최고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행동하는 선을 보는 것이 우리 모두에겐 필요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 주면 나도 어떻게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이 직접 행동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는데, 당신은 항상 말이 앞서 나갑니다.
당신의 강의는 지혜롭고 옳은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당신의 행동에서 뭔가를 배우고 싶습니다.
당신의 유창한 충고만 가지고는 당신을 오해하기 쉬울 것 같군요.
그러나 당신의 행동과 삶을 보면 결코 오해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나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한풀이 식의 자녀교육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성껏 삶의 발자국을 찍고 다음세대에게 그대로 따라오도록 해야 합니다.
실은 뒤에서 밀면 절대로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앞에서 끌어야 바르게 따라옵니다.
자녀교육은 실을 앞에서 끄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부모 된 우리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말씀을 좇아서 정성껏 삶의 발자국을 찍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을 닮아가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책임 있는 자들이 되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일군들이 나올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