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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자녀를 어떤 사람으로 키우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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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자연파 계관시인 Wordsworth(1770-1850)는 무지개란 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어렸을 적에도 그러했고 어른인 지금도 그러하네/ 나이가 들어도 그러하길 아니면 죽어도 좋으리/ 어린이는 어른의 어버지/ 내 생활이 자연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이어지기를” 어른의 어버지는 어린이입니다.
 우리 성인들의 어제는 어린이입니다. 어제의 어린이가 오늘의 어른이 된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들은 내일 어떠한 어른들을 맞이해야 할찌 우리들의 아버지 어린이를 주목해 봅시다.
한국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고, 잠 22:6에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오늘 본문에서 열두 아들과 열두 지파의 장래를 예언합니다. 열두 아들의 생애와 독특한 성품들이 이미 그 후손의 내일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예언을 통해서 그 당연한 결과를 진술한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heaven helps those who helf themselves”는 자조론을 쓴 영국의 저술가 Samuel Smiles(1812-1904)가 말했지요.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낳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낳고, 습관을 심으면 성격을 낳고, 성격을 심으면 운명을 낳는다” 오늘 아침에는 야곱의 열두 아들에 대한 예언과 열두 지파의 장래에서 여러 형태의 인간상을 만나봅시다. 맏아들은 르우벤입니다.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르우벤은 성질이 좀 우쭐대고 절제가 없었습니다. 버릇없이 자란 맏아들로서 장자다운 책임감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교만함과 망령됨이 그 아비의 침상에 오르게 했습니다. 작은 어머니 빌하와 간통하는 죄를 범하므로 적은 물이 곧 끓고 말라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장자의 상속권을 빼앗기고 맙니다. “보라 아들이로다” 신앙이 없었던 르우벤은 장자의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인격자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둘째아들 시므온과 셋째아들 레위에 대해서 야곱은 불쾌한 뜻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이들은 칼만 잡으면 모질고 사나와집니다.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화가 나면 혈기대로 잔인하게 행동했습니다.
 창 34:25-31에 나오는 디나와 하몰 사건 때 세겜 성을 침략한 행위와 피의 보복을 보세요. 야곱은 이들의 노염과 분노에 대하여 저주합니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야곱은 이유없이 잔인하게 살육하는 거침없는 행위에 대하여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같이 있다간 또 어떤 살육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분산시킵니다. 시몬 지파는 맨 남쪽 땅을 차지했고, 숫자도 가장 적어 미약한 지파로 전락합니다. 레위 지파는 제사장을 돕는 일로 흩어집니다. 그래서 충돌할 기회를 없애버립니다.
넷째아들 유다는 대단히 합리적이고 성질이 신중합니다. 그래서 넷째아들이지만 장자권을 받습니다. 왕권을 유다가 계승합니다. 요셉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 대상에게 팔 것도 유다가 제의합니다. 또 요셉 총리 앞에서 베냐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겠다고 호소한 것도 유다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의 웅크림이 마치 수사자와 같다고 해서 생각이 깊은 유다를 “배를 깔고 엎드린 수사자”라고 묘사합니다.
 암사자는 쉽게 으르릉대지만 수사자는 좀처럼 으르릉대지 않습니다. 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언제나 적극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적극적인 믿음으로 형제간에 평화와 우의를 도모합니다.
자기 재산을 가지고 이웃에게 나누어줍니다. 다섯째아들 단은 길가에 숨어있는 뱀처럼 용감하고 잘 싸웁니다. 단 지파는 맨 북쪽 땅을 차지했고, 국가를 보호하는 책임을 지고 국경을 지키는 용사가 됩니다. 단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잘 풀지 못하는 기질이라 반역적이고 잔인한 성품을 보였기 때문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하고 단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깁니다.
여섯째아들 납달리는 굉장히 성질이 간사했던 모양입니다. 풀어놓은 암사슴처럼 숫사슴을 찾아다니며 교태를 부리며 아양 떠는 인간상으로 그렸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소리는 웅변과 노래에 독특한 재능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일곱째아들 갓은 말 없이 책임을 다하는 성품이면서 또 경쟁에서 지지 않는 성질을 가졌으므로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는 끈질긴 승부욕을 보입니다.
여덟째아들 아셀은 돈에 관심이 많고 실제로 돈을 잘 모았던 모양입니다. 왕에게 진수를 공양하리만큼 식물이 기름지고 유복한 삶을 삽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 22:29). 아홉째아들 잇사갈은 꾀가 많고, 숨어 쉬는 나귀처럼 일을 시키면 혼자 보리단 사이로 도망가서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에게 나귀처럼 짐이나 잔뜩 지고 고생하라고 합니다. 젊을 때 게으름을 배우면 늙어서 고생합니다.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24:33-34).
열째아들 스블론은 해변에 거하며 바닷가 배가 쉬는 항구에서 게으름뱅이로 낮잠이나 자며 현실에 안주하므로 발전이 없습니다. 낭비하고 사치합니다. 열한째아들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습니다.
팔레스틴 같은 곳에서는 우물이 재산목록 제1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레위 지파처럼 이스라엘 전체에 흩어지는 대신에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의 몫을 차지합니다.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언제나 긍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18-19).
 적극적인 믿음으로 시련과 역경 가운데서 온유한 자가 되고 연단받은 자가 되어 그 선조의 축복보다 나은 복을 받습니다. 막내아들 베냐민은 물어 뜯는 이리라, 막내였기 때문에 약탈하는 늑대처럼 성질이 거칠고 사납습니다. 나중에는 베냐민 지파 때문에 삿 19장에 기록된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하마트면 베냐민 지파가 망해버릴 뻔합니다. 부모의 편애와 익애는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자녀에 대한 애정의 표현에도 절제와 금도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그 조상들은 이렇게 한 아버지에게서 났지만 그 성품과 역사가 여러 갈래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는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어린 것들, 미래의 주인공들, 우리의 장래인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은혜의 여호와 하나님께 쉬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구원의 은혜에 의지하여 미래를 맡기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부족한 것을 온전케 해 주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말씀하시고 지도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마음을 단련하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오 나와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 모든 은혜의 여호와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그렇습니다. 기도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기도 가운데 있는 자식은 결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키워야 합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영적 분별력입니다. 열두 아들들의 운명이 달라진 근원적 요소는 믿음입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요소는 도덕적 완전성이나 인간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유다에게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줄도 알고,
요셉이 자신보다 나은 것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형제 중 가장 큰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공동체적 인간, 사회성이 있는 믿음의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요셉에게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생애 전체가 그가 신앙의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쇠붙이가 그의 혼 속에 들어갔다, 고난은 우리 핏 속에 쇠붙이, 커다란 힘을 찔러넣는다; F. B. Meyer)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7-19).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했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했고, 형제들을 사랑했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미래를 내다보는 영안이 열렸습니다. 히 11:22에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제 중 가장 복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믿음만이 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믿음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만대에 전달하는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합니다.
 셋째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열두 아들은 그 아버지 야곱의 역사와 성품의 반영들입니다. 열두 지파의 미래는 그 조상들의 운명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진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본대로 느낀대로 살아갑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경건한 예배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빛에 대해서 말만 하지 말고 내 자신이 빛이 됨으로써 내 속에 있는 빛을 증거해야 합니다. 봉사와 희생과 헌신을 내 삶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사랑의 생명을 전달해야 합니다. 자녀교육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경험주의 철학이 말하는 것처럼 자녀들의 마음의 백지에 어떤 신령한 그림을 그려주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롬 1:11). 마지막으로, 입술의 말로써 자녀들에게 축복을 예언해야 합니다. “유다처럼 책임성을 가진 지도자가 되어라.
요셉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이 되어라. 내가 기도하였으므로 그렇게 될 줄 믿노라” 자녀들의 귀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도록 꿈과 믿음의 영성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믿음의 긍정적인 요소가 부정적인 성품의 요소들을 극복하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영성을 개발시켜 주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신앙,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 가운데 살도록 끊임없이 격려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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