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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예수님과 어린 아이들

본문

막9:33과 막10:1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은 그의 본 동네 가버나움을 떠나서 요단 강 건너편 곧 베레아로 가셨습니다. 그 때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하여, 갈릴리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이 베레아를 거쳐서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습니다. 그 날도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예수님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에 하시던 대로, 그 날도 변함없이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그 때 무리 가운데 섞여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이혼 문제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설하신 결혼 제도의 원리를 들어서, 그들에게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 후 막10:10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은 어느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로 온 어린 아이들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며,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며, 어린이들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서, 우리도 어린이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오늘을 어린이 주일로 지킵니다. 아울러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사랑스럽고 귀한 어린이들에게 유아 세례를 베풉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어린이들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과 우리 주변의 어린이들을 더욱 사랑하며, 더욱 귀히 여기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어린 아이들을 물리친 제자들(13절).
막10: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눅18:15을 보면, 이 때 사람들이 자기들의 “어린 아기”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도 예수님은 그들을 그의 무릎에 앉히신 것이 아니라, 그의 품에 안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 때의 어린 아이들은 주로 젖먹이들, 곧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먹고 자라는 갓난아기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때 그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사람들은 요단 강 건너편, 곧 베레아에 살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베레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사실을 알고서, 저마다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여기서 “데리고 오다”라는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형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베레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어린 아이들을 만져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이 바라던 바는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19:13 말씀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아이들에게 안수하시고 기도해 주심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물론 이 때 제자들이 꾸짖은 대상은 어린 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꾸짖음을 이해할 리도, 느낄 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꾸짖은 대상은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어른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문밖에 서서, 어린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자들과 어린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자연히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의 언성도 높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귀찮게 만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만큼 어린이들을 하찮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물론 때때로 예수님은 아주 엄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다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실 때, 예수님은 무서우리만큼 혹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차없이 그들을 정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시면서, 그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여지없이 몰아 부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대하실 때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컨대 마가복음 5장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가버나움에 사는 왕의 신하가 나옵니다. 그의 어린 아들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나아와 그의 아들을 살려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병들어 죽게 되었던 그 어린 아이의 병을 즉시 고쳐주셨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9장을 보면, 한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 들린 그의 아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다시는 그 귀신이 그 아이에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9장 하반부를 보면, 최근에 있었던 한 가지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서로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그의 품에 안으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언제나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시며, 어린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베레아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늘 함께 하면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행여 우리도 예수님의 뜻과는 달리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힘써 알아갑시다. 예수님의 마음을 부지런히 배워나갑시다. 그리해서 예수님이 바라시는 대로 살아가며, 예수님이 뜻하신 대로 행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어린 아이들을 맞이하신 예수님(14~15절).
막10: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라고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의분, 곧 거룩한 분노를 발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노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노하셨습니다.
때때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나무라기는 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서로 다투면서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눅10:55에서 보아너게가 말했던 것처럼, 쓸데없는 혈기를 부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금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고 나무라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향하여 노를 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노하실 만큼,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던 태도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그들을 귀찮은 존재로만 여긴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노하실 것입니다.
곧이어 예수님은 본문 14절의 끝에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19:14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은 같은 말입니다.
이 때 부모들이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온 아이들은 주로 젖먹이들이었습니다. 신1:39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또한 욘4:11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좌우를 분변하지도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분명하게 오늘 본문에서,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6절에서 그 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아이들은 바로 그 날 죽더라도 천국에 갈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가지 못할 아기들을 보시면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실 리는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지옥에 갈 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축복하실 리는 만무합니다. 따라서 이 아이들은 바로 그 날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천국이 “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던 아이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여기에 다 포함이 됩니다.
물론 아이가 자라서 선악과 좌우를 스스로 분별하게 되면, 그 때에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그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전에 어린 아이가 죽으면, 그 어린 아이는 천국에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에게서 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책망하자, 다윗은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다윗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그 아이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금식을 하면서, 그 아이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울면서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일주일만에 죽었습니다. 신하들은 다윗이 상심할 것을 걱정하면서, 다윗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 아이가 죽은 것을 다윗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왕궁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차리게 하여 먹었습니다. 그 때 신하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다윗에게 그처럼 다르게 처신하는 연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삼하12:23에서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선악을 분별하고, 좌우를 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아이가 죽은 후에, 천국에 가있을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 다음에 자기가 그 아이를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반면에 사무엘하 18장을 보면, 다윗의 또 다른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의 광경이 나옵니다. 압살롬은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서 나라를 빼앗고자, 군사를 일으켜 다윗을 반역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의 아들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면서, 계속해서 울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부하들은 싸움에서 이기고서도, 마치 싸움에서 패한 것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와야 했습니다.
자기의 어린 아이가 죽었을 때, 다윗은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천국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죽었을 때, 다윗은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압살롬은 천국으로 가지 못했고, 그 결과 그와는 영영 이별해야 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겔16:20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서 드려 제물로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네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겔16:21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넘겨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자녀를 우상에게 불살라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자녀를 가리켜서, “나의 자녀” 곧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으셨습니다.
따라서 비록 그 아이들의 부모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더라도, 또한 비록 그 아이들이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더라도, 그 아이들은 죽어서 천국으로 갔음이 분명합니다. 그 아이들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어릴 때, 여러분의 곁을 떠나갔습니까 그 아이는 지금 천국에 가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다음에 여러분은 천국에서 그 아이를 다시금 만날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일관되게 증거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위하여 천국에 있을 곳을 예비하신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막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친히 여호와 하나님의 권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종류의 천국 백성이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먼저 본문 14절 말씀과 같이, 어린 아이가 죽으면 천국으로 갑니다.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 아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하심을 받아서 일찍 죽은 것입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 15절 말씀과 같이, 성인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인이 된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받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성인은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받들다”라고 번역된 단어의 본 뜻은 “받아들이다”입니다. 어린 아이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그 어린 아이에게 어떤 공로가 있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그 어린 아이가 그대로 받는 것뿐입니다.
오늘 본문과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이 오늘 본문의 내용 바로 앞에서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른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자기의 의를 내세웠습니다. 자기는 토색도 불의도 간음도 행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자기의 공로를 자랑했습니다. 자기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며, 또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밝히신 대로, 그 바리새인은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바리새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의나 인간의 공로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기도하면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무엇 하나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만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밝히신 대로, 그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그 세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세리에게는 천국이 오로지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그 세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천국을 그대로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리도,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도 사정이 똑같습니다. 그들에게는 내세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천국의 백성으로 합당합니다.
여러분의 어린 아이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야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계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없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 ” 놀랍게도 어린 아이들은 이와 같은 반응을 절대로 보이지를 않습니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어린 아이들은 샛별 같은 두 눈을 반짝이면서 여러분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일러주는 대로, 어린 아이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린 아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해보십시오. “얘야. 예수님은 언제나 너와 함께 하시면서, 예수님은 너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다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나아올 때,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모습으로, 어린 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한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와야 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입시다. 의심하지도 말고 거부하지도 맙시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은혜로 받아, 그 곳에 들어가게 됩니다.
 셋째로,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 예수님(16절).
막10: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본문 13절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보다, 예수님은 더 많은 것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안으셨습니다. 또한 그들 위에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이 때의 장면을 한번 연상해봅니다. 부모는 그들이 데리고 온 아이를 예수님에게 드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아이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으로 그 아이를 품에 안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은 그 아이의 머리에 대십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를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난 후에 예수님은 그 아이를 그의 부모에게 되돌려주십니다. 그러면 또 다른 부모가 그들의 아이를 예수님에게 드립니다. 예수님은 역시 그 아이를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따라서 이 때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축복하다”라는 단어의 형태가 강조형입니다. 말하자면 이 때 예수님은 그 아이들을 뜨겁게, 또한 마음껏 아낌없이 축복하신 것입니다. 자연히 부모들의 마음도 뜨거웠을 것입니다. 그 후에 그들은 살아가면서, 이 때를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아이들을 축복하신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눅2:40을 보면, 예수님이 열두 살 되실 때까지 자라나신 모습을 단 한 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
아울러 눅2:52을 보면, 예수님이 그 이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자라나신 모습을 역시 단 한 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
자라나는 아이에게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잘 자라며,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한 사회 생활에도 충실하여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도록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그 뒤로 부모들은 틈만 있으면, 그들의 자녀에게 이와 같이 일렀을 것입니다. “얘야, 네가 갓난아기 때에, 예수님이 너를 안으시고, 네 머리 위에 손을 대시며, 너를 뜨겁게 축복하셨다. ” 자연히 그 아이는 일생토록 예수님에게서 멀어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먼저 나 자신이 어린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나를 기쁘게 맞아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품에 안으시고, 내게 손을 대시며, 내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내게 풍성한 복을 내리십니다.
또한 베레아 사람들처럼, 나의 자녀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옵시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나의 자녀를 안으시고, 안수하시며,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 나의 자녀는 건강하게 잘 자라며, 지혜롭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아울러 내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서, 나의 자녀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어린이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귀하게 여기도록 합시다. 그것이 바로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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