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말씀을 읽고 들을 때
본문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치있는 값진 선물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미국의 한 골동품수집가가 프랑스 여행을 하다가 이름도 없는 골동품상을 들러 시꺼멓게 녹슨 목걸이 하나 손에 집어들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목걸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1796년 3월 9일… 보나파트르 나폴레옹이 사랑하는 조세핀에게... ” 골동품수집가는 “이 목걸이 얼마에요” 했더니 주인은 “300프랑만 주세요. ” 그는 바로 300프랑을주고는목걸이를사서는미국으로 돌아와서 진품인가를 전문가에게 의뢰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목걸이는 나폴레옹이 그의 사랑하는 조세핀에 주었던 진품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 목걸이의 값어치는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그 가치가 수백만 달러가 되었습니다.
선물의 가치는 그 선물을 준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선물을 하나주셨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에 빛이고 내 발에 등이 되는 진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위대한 문학과 음악, 예술 등을 인류역사에 남겼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세상의 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가치를 알기에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하며,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계1:3).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찬의 계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기록된 책을 성경이라 부릅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말씀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함이요, 성경책을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많은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기회를 삼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하며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설교는 왜 필요한가 설교란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성경의 해석을 설교를 통해서 하게 되고 성도들은 그 설교를 듣고 말씀의 깊이와 넓이를 깨달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는 듣는 것만으로 은혜의 늪에 빠져 몽롱한 꿈에 취했다가 깨어나는 약물이 아니라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벗어버리지 못하고 지니고 있는 죄악의 뿌리를 뽑아내는, 죄악 된 마음을 찔러 쪼개는 성령의 검의 역할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권면과 훈계와 경책과 징계를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디모데후서 4:2절 말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성경은 결단코 우리가 듣고 기분 좋아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3:16-17절 말씀에 보면,
“모든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책망이 있습니다. 바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따라서 설교는 포퓰리즘(Populism)적인 강연이나 웅변이 아니라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찔러 ‘어찌할꼬’를 외치게 하는 성령의 검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귀와 싸우는 영적전쟁을 치러야 하는 자들로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전신갑주 중의 한 가지가 말씀입니다. 에베소서6:17절 말씀, “ 성령의 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검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성경을 읽어서 깨달아 그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여서 생활 속에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는 목회자의 설교를 들어서 깨달아 그것을 마음에 간직한 후에 생활 속에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릴 때 말씀을 읽는 시간과 설교 듣는 시간이 제일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들을 때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 어떤 자세로 받아들일 때 내게 유익이 되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도행전2장의 내용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회중들의 반응과 나타난 현상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7장의 내용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중 한 사람인 스데반집사가 설교한 내용을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과 나타난 현상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 있습니다. “성경이 어렵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읽어야 하는가 성경을 꼭 읽어야 하는가 ” 설교를 들은 성도들의 평가는 ‘잘한다, 못한다’ ‘은혜가 된다. 은혜가 안된다’ ‘너무 길다, 너무 짧다’ ‘너무 딱딱하다, 너무 가볍다’ ‘너무 어렵다. 너무 쉽다’
그러면 좋은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요 우선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닫혀 있는 것을 보이도록 열고, 불분명한 것을 명백히 하며 매듭지어 있는 것을 풀고, 단단히 포장되어 있는 것을 펼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가장 훌륭한 설교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① 그리스도 앞으로 사람을 초청하는 것. ② 그리스도를 확신시키는 것. ③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 ④ 그를 그리스도께로 개종시키는 것.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가장 훌륭한 설교와 훌륭한 성도의 자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훌륭한 설교는 어떤 설교인가 듣는 자들의 마음이 찔림을 받는 설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베드로의 설교나 스데반의 설교는 명설교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회중들의 반응을 3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회중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기록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도 보면 7장54절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설교를 들을 때 마음에 감동이 와야 합니다. 그 감동이란 단순히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몰랐던 사실을 깨닫고, 절망적인 삶에서 소망의 삶으로 바꾸어놓을 때 은혜스런 설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좋은 설교는 마음에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찔림을 받는다는 것은 그 말씀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신에게 허물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회개할 것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성도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2장과 7장의 말씀을 보면 두 곳의 성도들이 다 찔림을 받았습니다. 이것까지는 좋았습니다. 두 사람의 설교가 다 훌륭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물론 설교자가 다릅니다. 설교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내용입니다.
2장의 내용을 봅시다. 핵심 메시지 내용은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에 대한 것입니다. 베드로 설교내용을 보면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수와 허물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23절 하반절에 보면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니 그들의 마음이 찔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7장의 스데반 집사의 설교 내용을 봅시다. 2장의 내용보다는 다소 더 강한 메시지입니다. 중심 주제는 유대교의 그릇된 신앙을 지적하면서, 족장시대를 열거하면서 그동안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요셉의 교훈, 모세의 이야기 까지 거론하면서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지적했습니다. 51-53절 말씀에 보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 설교를 듣고 있던 대제사장을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역시 마음에 찔렸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옳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은 2장과 7장의 내용이 같으나 그 후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2장의 회중들의 고백이 “우리가 어찌할꼬”7장은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설교를 들은 자들의 반응이 이렇게 다릅니다. 여러분은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혹시라도 말씀을 듣고서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묻습니까 아니면, 설교자를 향하여 이를 갑니까
‘메시야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라는 지적을 받고서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할 때, 베드로가 대시 처방전을 내렸습니다. 2장 38절 말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그리고 40절에서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을 듣고 있던 회중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할렐루야! 여기서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이란 결국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회개한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죄를 회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무려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기에 성령이 임재 하셨습니다. 회개했을 때 성령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의 임함을 보고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3천명이나 되었으니 당시 그 사회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겠습니까 그 당시의 상황을 42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현상이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입니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은 성도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은혜 받은 성도들은 가르침 받은 대로, 즉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운 대로 순종합니다. 그들이 배운 대로 행한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사도들로 하여금 이적과 표적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교제하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기도 하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변화가 되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왕성하게 부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이와 유사한 예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21:27절 말씀에 보면 아합 왕이 엘리야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를 들은 후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여기서 베옷을 입고 옷을 찢었다는 것은 회개를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대하 34장에 보면 요시아가 왕이 된 후에 다윗이 살아온 길로 걸으며 우상을 철폐했습니다. 요시야가 무너진 여호와 하나님의 전을 수리하고 성전을 리모델링했습니다. 그때에 힐기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했습니다. 힐기야는 그 책을 서기관 사반에게 주었고, 사반은 그 책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자초지종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반이 왕 앞에서 그것을 읽었습니다. 왕은 사반이 읽는 말씀을 듣고서 ‘자기 옷을 찢었다’고 19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8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을 재건하고 난 다음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였습니다.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읽으려고 단상에 올라서서 성경을 펼칠 때 모든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
에스라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할 때 그것을 듣고 있던 백성들이 다 울었더라고 9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울고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에스라가 거룩한 성일에 슬퍼하지 말고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마음껏 먹고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감동하면 그것이 힘이 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아서 회개하고 돌아서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다윗왕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의 악한 행동, 즉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동침하고 그의 남편을 전장에서 죽게 만든 권력형 간강과 살인죄를 지적했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이렇게 나단 선지자를 통해 허물을 지적했을 때, 다윗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노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 이렇게 죄를 고백하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회개하면 사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7장에서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들었던 지도자들의 반응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서 나타난 반응이 5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 구절을 읽으면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어떤 일이 발생할 것 같습니까 죽일 듯이 달려들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58-59절에 보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설교자를 죽였습니다. 스데반은 순교했습니다. 설교하다가 순교당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멋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가운데 스데반집사가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면서 하는 고백이 이렇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고 하니까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 집사에게 달려들어 성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57-58절). 이때 스데반 집사는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무릎을 꿇고서 주님을 크게 부르며 간구하기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죽었다고 하지 않고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조금도 안타까워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흔쾌히 가겠다는 자세입니다. 결국은 스데반이 죽었습니다. 아직도 살날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사명 감당하다가, 복음 증거하다가 설교하다가 짧은 생애지만 스데반은 천국 갔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을 순교자로 만들었던 지도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8장에 보면 이때 사울이란 청년은 스데반집사가 그렇게 죽은 것이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때부터 신앙에 박해가 더 심해져서 많은 성도들이 각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인간이 망할 때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습니다. 노아시대에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120년간이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홍수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선지자들 시대에는 선지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백성들이 순순히 듣지 않았습니다. 전하는 자들은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이 많으니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눈물의 선지자라 일컫는 예레미야의 경우를 봅시다. 예레미야18장부터 백성들을 향하여 전하는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장14-15절에 보면,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이렇게 예레미야 전하는 말씀을 듣고 있던 제사장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나무고랑으로 목에 채워두었습니다. 18장에 보면 예레미야를 묻어버리려고 구덩이까지 팠습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이런 일을 두려워하면 말씀을 제대로 대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들을만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할 일을 더 많이 하기 때문에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책망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하면 사는 길이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이를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사도행전2장의 회중들처럼 말씀을 읽고 들은 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물음을 던지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회개하고 성령받아 구원을 받고 복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니면 7장의 지도자들처럼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나 이를 갈면서 말씀전하는 자를 죽이렵니까 순교자로 만드는 주인공이 되겠습니까 성서 주일을 맞아 말씀이 담긴 성경을 가까이 하시고, 그 속에 기록된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귀가 열려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을 때마다 회개하고 성령충만 받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한 골동품수집가가 프랑스 여행을 하다가 이름도 없는 골동품상을 들러 시꺼멓게 녹슨 목걸이 하나 손에 집어들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목걸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1796년 3월 9일… 보나파트르 나폴레옹이 사랑하는 조세핀에게... ” 골동품수집가는 “이 목걸이 얼마에요” 했더니 주인은 “300프랑만 주세요. ” 그는 바로 300프랑을주고는목걸이를사서는미국으로 돌아와서 진품인가를 전문가에게 의뢰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목걸이는 나폴레옹이 그의 사랑하는 조세핀에 주었던 진품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 목걸이의 값어치는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그 가치가 수백만 달러가 되었습니다.
선물의 가치는 그 선물을 준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선물을 하나주셨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에 빛이고 내 발에 등이 되는 진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위대한 문학과 음악, 예술 등을 인류역사에 남겼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세상의 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가치를 알기에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하며,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계1:3).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찬의 계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기록된 책을 성경이라 부릅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말씀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함이요, 성경책을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많은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기회를 삼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하며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설교는 왜 필요한가 설교란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성경의 해석을 설교를 통해서 하게 되고 성도들은 그 설교를 듣고 말씀의 깊이와 넓이를 깨달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는 듣는 것만으로 은혜의 늪에 빠져 몽롱한 꿈에 취했다가 깨어나는 약물이 아니라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벗어버리지 못하고 지니고 있는 죄악의 뿌리를 뽑아내는, 죄악 된 마음을 찔러 쪼개는 성령의 검의 역할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권면과 훈계와 경책과 징계를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디모데후서 4:2절 말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성경은 결단코 우리가 듣고 기분 좋아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3:16-17절 말씀에 보면,
“모든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책망이 있습니다. 바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따라서 설교는 포퓰리즘(Populism)적인 강연이나 웅변이 아니라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찔러 ‘어찌할꼬’를 외치게 하는 성령의 검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귀와 싸우는 영적전쟁을 치러야 하는 자들로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전신갑주 중의 한 가지가 말씀입니다. 에베소서6:17절 말씀, “ 성령의 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검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성경을 읽어서 깨달아 그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여서 생활 속에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는 목회자의 설교를 들어서 깨달아 그것을 마음에 간직한 후에 생활 속에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릴 때 말씀을 읽는 시간과 설교 듣는 시간이 제일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들을 때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 어떤 자세로 받아들일 때 내게 유익이 되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도행전2장의 내용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회중들의 반응과 나타난 현상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7장의 내용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중 한 사람인 스데반집사가 설교한 내용을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과 나타난 현상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 있습니다. “성경이 어렵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읽어야 하는가 성경을 꼭 읽어야 하는가 ” 설교를 들은 성도들의 평가는 ‘잘한다, 못한다’ ‘은혜가 된다. 은혜가 안된다’ ‘너무 길다, 너무 짧다’ ‘너무 딱딱하다, 너무 가볍다’ ‘너무 어렵다. 너무 쉽다’
그러면 좋은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요 우선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닫혀 있는 것을 보이도록 열고, 불분명한 것을 명백히 하며 매듭지어 있는 것을 풀고, 단단히 포장되어 있는 것을 펼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가장 훌륭한 설교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① 그리스도 앞으로 사람을 초청하는 것. ② 그리스도를 확신시키는 것. ③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 ④ 그를 그리스도께로 개종시키는 것.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가장 훌륭한 설교와 훌륭한 성도의 자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훌륭한 설교는 어떤 설교인가 듣는 자들의 마음이 찔림을 받는 설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베드로의 설교나 스데반의 설교는 명설교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회중들의 반응을 3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회중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기록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도 보면 7장54절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설교를 들을 때 마음에 감동이 와야 합니다. 그 감동이란 단순히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몰랐던 사실을 깨닫고, 절망적인 삶에서 소망의 삶으로 바꾸어놓을 때 은혜스런 설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좋은 설교는 마음에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찔림을 받는다는 것은 그 말씀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신에게 허물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회개할 것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성도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2장과 7장의 말씀을 보면 두 곳의 성도들이 다 찔림을 받았습니다. 이것까지는 좋았습니다. 두 사람의 설교가 다 훌륭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물론 설교자가 다릅니다. 설교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내용입니다.
2장의 내용을 봅시다. 핵심 메시지 내용은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에 대한 것입니다. 베드로 설교내용을 보면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수와 허물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23절 하반절에 보면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니 그들의 마음이 찔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7장의 스데반 집사의 설교 내용을 봅시다. 2장의 내용보다는 다소 더 강한 메시지입니다. 중심 주제는 유대교의 그릇된 신앙을 지적하면서, 족장시대를 열거하면서 그동안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요셉의 교훈, 모세의 이야기 까지 거론하면서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지적했습니다. 51-53절 말씀에 보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 설교를 듣고 있던 대제사장을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역시 마음에 찔렸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옳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은 2장과 7장의 내용이 같으나 그 후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2장의 회중들의 고백이 “우리가 어찌할꼬”7장은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설교를 들은 자들의 반응이 이렇게 다릅니다. 여러분은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혹시라도 말씀을 듣고서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묻습니까 아니면, 설교자를 향하여 이를 갑니까
‘메시야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라는 지적을 받고서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할 때, 베드로가 대시 처방전을 내렸습니다. 2장 38절 말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그리고 40절에서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을 듣고 있던 회중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할렐루야! 여기서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이란 결국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회개한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죄를 회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무려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기에 성령이 임재 하셨습니다. 회개했을 때 성령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의 임함을 보고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3천명이나 되었으니 당시 그 사회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겠습니까 그 당시의 상황을 42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현상이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입니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은 성도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은혜 받은 성도들은 가르침 받은 대로, 즉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운 대로 순종합니다. 그들이 배운 대로 행한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사도들로 하여금 이적과 표적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교제하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기도 하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변화가 되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왕성하게 부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이와 유사한 예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21:27절 말씀에 보면 아합 왕이 엘리야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를 들은 후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여기서 베옷을 입고 옷을 찢었다는 것은 회개를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대하 34장에 보면 요시아가 왕이 된 후에 다윗이 살아온 길로 걸으며 우상을 철폐했습니다. 요시야가 무너진 여호와 하나님의 전을 수리하고 성전을 리모델링했습니다. 그때에 힐기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했습니다. 힐기야는 그 책을 서기관 사반에게 주었고, 사반은 그 책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자초지종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반이 왕 앞에서 그것을 읽었습니다. 왕은 사반이 읽는 말씀을 듣고서 ‘자기 옷을 찢었다’고 19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8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을 재건하고 난 다음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였습니다.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읽으려고 단상에 올라서서 성경을 펼칠 때 모든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
에스라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할 때 그것을 듣고 있던 백성들이 다 울었더라고 9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울고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에스라가 거룩한 성일에 슬퍼하지 말고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마음껏 먹고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감동하면 그것이 힘이 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아서 회개하고 돌아서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다윗왕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의 악한 행동, 즉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동침하고 그의 남편을 전장에서 죽게 만든 권력형 간강과 살인죄를 지적했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이렇게 나단 선지자를 통해 허물을 지적했을 때, 다윗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노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 이렇게 죄를 고백하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회개하면 사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7장에서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들었던 지도자들의 반응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서 나타난 반응이 5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 구절을 읽으면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어떤 일이 발생할 것 같습니까 죽일 듯이 달려들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58-59절에 보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설교자를 죽였습니다. 스데반은 순교했습니다. 설교하다가 순교당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멋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가운데 스데반집사가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면서 하는 고백이 이렇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고 하니까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 집사에게 달려들어 성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57-58절). 이때 스데반 집사는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무릎을 꿇고서 주님을 크게 부르며 간구하기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죽었다고 하지 않고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조금도 안타까워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흔쾌히 가겠다는 자세입니다. 결국은 스데반이 죽었습니다. 아직도 살날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사명 감당하다가, 복음 증거하다가 설교하다가 짧은 생애지만 스데반은 천국 갔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을 순교자로 만들었던 지도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8장에 보면 이때 사울이란 청년은 스데반집사가 그렇게 죽은 것이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때부터 신앙에 박해가 더 심해져서 많은 성도들이 각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인간이 망할 때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습니다. 노아시대에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120년간이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홍수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선지자들 시대에는 선지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백성들이 순순히 듣지 않았습니다. 전하는 자들은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이 많으니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눈물의 선지자라 일컫는 예레미야의 경우를 봅시다. 예레미야18장부터 백성들을 향하여 전하는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장14-15절에 보면,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이렇게 예레미야 전하는 말씀을 듣고 있던 제사장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나무고랑으로 목에 채워두었습니다. 18장에 보면 예레미야를 묻어버리려고 구덩이까지 팠습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이런 일을 두려워하면 말씀을 제대로 대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들을만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할 일을 더 많이 하기 때문에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책망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하면 사는 길이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이를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사도행전2장의 회중들처럼 말씀을 읽고 들은 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물음을 던지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회개하고 성령받아 구원을 받고 복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니면 7장의 지도자들처럼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나 이를 갈면서 말씀전하는 자를 죽이렵니까 순교자로 만드는 주인공이 되겠습니까 성서 주일을 맞아 말씀이 담긴 성경을 가까이 하시고, 그 속에 기록된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귀가 열려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을 때마다 회개하고 성령충만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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