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애정생활의 선악과 ①
본문
창 1, 2, 3장은 모든 계시의 시작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든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곳에서 무궁무진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이란 낙원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곳을 무법천지로 버려두지 아니하고 가장 간단한 법으로 다스리는 법치동산으로 세우셨습니다. 법률이 복잡하고 많으면 그 나라는 살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서울의 모 경찰간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가 법대로 하면 서울시민의 1/3은 유치장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거리에서 전투경찰, 교통경찰관 등 보기만 해도 가슴이 덜컹하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마약을 쓰는 사람,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사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 침을 길바닥에 뱉는 비위생적인 일을 예사로 하는 사람,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 새치기 하는 사람, 야밤에 고성을 지르는 사람 등등 각종 경범죄에 안 걸리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중국의 태평성대에는 約法章, 세 가지 간단한 법으로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다스리는 에덴 동산에는 오직 하나의 법만 있었습니다. 기화요초 만발하여 창조의 솜씨를 마음껏 뽐내고, 사시장철 넘쳐흐르는 강가에 생명 과실 가득한 그곳은 과연 태평성대였습니다.
그곳에 사는 우리 조상들은 관대한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법이 엄해도 무법한 무정부 상태보다 낫다는 것은 정치학설의 고전입니다. 법이 없으면 못 사니까 법은 있어야 하겠고, 법이 있으면 하나 밖에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에덴 동산에는 법이 있으되 하나 밖에 없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제일 좋은 군주가 다스리고, 제일 좋은 백성이 사는 제일 좋은 낙원임에 틀림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가장 간단한 하나의 법으로 사람을 시험하셨습니다. “이 법을 지키면 생명 나무를 주어 영원히 낙원의 주인공이 될 것이요, 지키지 아니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라” 아름다운 낙원에서 추방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이 종말론적인 하나의 법을 어겼습니다. 금단의 실과, 선악과를 따먹음과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과의 복스럽고 영광스런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그로부터 죽음의 여러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고독과 슬픔, 질고와 싸움, 생노병사의 인간고 등 우리 모두는 처음 낙원 에덴에서 쫓겨난 처량한 신세의 저주받은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마다 오늘이 고생스럽지만 그래도 내일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람들마다 그 가슴속에 그려진 낙원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향수를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을 벌면, 내가 결혼을 하면, 내가 출세를 하면 낙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본능적으로 낙원을 동경하고 추구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후로부터 모든 인류의 마음은 선악과의 성질을 타고 납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과 악의 판단주체가 자신이 되고 자기 본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신 것이 선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신 것이 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부터는 자기에게 선한 것이 선이요, 자기에게 악한 것이 악한 것이 된 것입니다.
자기에게 좋으면 불효도, 살인도, 간음도 좋은 것이요, 자기에게 나쁘면 여호와 하나님도, 결혼생활도 귀찮다 이겁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이처럼, 선과 악, good and evil의 판단기준을 자기가 설정함으로 무서운 이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의 인본주의, 그 추악한 역사를 기록하여 온 것입니다. 인간의 성숙은 그의 성품과 삶이 얼마나 공동체적인가, 이웃을 어떻게 배려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재능만큼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본문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깜짝 놀랄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추악한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청산하시고 예수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를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진실인 것을 그의 부활의 영이신 성령으로 확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의 영만이 확정해 줍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시사 여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 구원의 보증자일 뿐 아니라 우리 구원의 중보자로서 그의 성령을 우리의 마음속에 보냈습니다.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딸로 중생시키시고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선악과는 꺾여지고 생명 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내 중심의 본성이 꺽여지고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본성으로 거듭 태어납니다. 성령의 본성이 제이의 천성이 되고, 새 성품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고, 지키고,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사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선악과는 더 이상 시험과 정죄의 원리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은혜와 축복의 원리로 존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제적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었는데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란 경제생활의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계속적으로 온전한 십일조와 봉헌물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리면 어떤 복을 주십니까
물질과 여호와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않는 우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경제생활의 번영과 안정을 주십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것을 시험해 보라고 까지 했습니다(말 3:10).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일견 불의해 보이는 세상 재물에 진실하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십일조는 수학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수학에 진실하시면 여호와 하나님의 수학이 하늘 문을 열고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수학이 열매의 숫자를 헤아립니다. 30배, 60배, 100배의 현저한 복을 받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애정생활의 선과 악을 시험하는 나무를 심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살았던 아담과 하와를 인간성으로 구태여 구분해 봅시다. 하와는 감성부분 즉 사랑을 표상한다면 아담은 지성과 의지를 표상합니다. 그런데 어느 부분이 먼저 부패했습니까 하와가 먼저 범죄했다는 것은 사랑이 먼저 부패한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이 부패하면 의지와 지성도 힘없이 함께 부패하고 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하와가 선악과를 보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만 여호와 하나님보다 선악과가 더 좋아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고 선악과에 대한 사랑, 그 정욕이 그녀를 사로잡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영적 간음이라고 말합니다. 약 4:4에 말씀합니다. “간음한 여자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선악과를 사랑하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정욕을 더 좋아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더욱 눈이 밝아져서 여호와 하나님처럼 될 줄 알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아름다운 낙원보다 더 믿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해주는, 한 마디로 끝내주는 더 행복한 세계가 열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였습니다.
허상이며 신기루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세계,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이상의 세계는 없습니다. 그 세계보다 귀하고 아름답고 밝은 세계는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경제생활을 에덴 동산처럼 축복해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우리의 애정생활을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십계명을 보십시오. 부모에게 효도하라, 살인하지 말라, 그 다음에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의 복락이신 예수님께서도 혼인잔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으로 결혼생활의 신성을 옹호해 주셨습니다. 가정생활의 행복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후일의 역사가가 간음하는 시대라고 명명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멸망한 것처럼 이 시대도 음란과 간음으로 멸망할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유 1:7). 오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육신적인 사랑의 부패와 변질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있습니다.
오랜 기독교 문화권 안에 살던 사람들의 이혼율이 50%를 향하여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구라파의 독신 남녀들에게는 자유로운 향락을 위하여 결혼을 회피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간음하는 시대의 이상풍조에 대하여 날카롭게 해부합니다. 3:1-5을 보십시오.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렵혔도다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렘 13:25-27도 보십시오.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애정생활에 두신 가장 간단한 하나의 선악과는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 간음에 대해서는 고후 11:1-3에 말씀합니다.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청심유복이라 우리의 가난한 마음은 더욱 깨끗해져야 하겠습니다. 청결한 믿음, 청결한 사랑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 행한 것 죄 뿐이니” 찬 274장(통 332장)을 찬송합시다. 심령이 깨끗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간음에 대해서는 고전 7:1-5에 말씀합니다.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영과 육에는 모두 뱀과 사탄이 시험하는 선악과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간음이란 애정생활의 선악과를 먹으면 애정생활은 근본적으로 파괴되어 버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사랑이 깨어지면 부부간의 사랑도 깨어집니다. 결혼생활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간음은 우리가 보기에 대단히 자유롭고, 멋지고, 재미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공허한 것입니다. 쓴 뿌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가정이 성적 부정 때문에 깨어지고 있습니다. 부정과 간음은 상대방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계약관계를 행동으로 유린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지적합니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말 2:14-16). 세상은 사랑과 미움의 세월을 살지만 성도는 용서와 사랑의 세월을 삽니다.
너는 내 앞에 완전할지라는 율법적 요구에서 돌이켜 너는 내 품에서 쉬어라는 복음적 받아들임으로 변해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 애정생활을 파괴시키려고 오늘도 간음이란 선악과를 먹으라고 보챕니다. 세상이 더 좋다고 말하고, 다른 이성이 더 매력적이라고 유혹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이런 공격은 계속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도발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요일 2:16). 우리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지속될 이같은 사단의 공격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다음 주일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의 모 경찰간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가 법대로 하면 서울시민의 1/3은 유치장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거리에서 전투경찰, 교통경찰관 등 보기만 해도 가슴이 덜컹하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마약을 쓰는 사람,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사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 침을 길바닥에 뱉는 비위생적인 일을 예사로 하는 사람,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 새치기 하는 사람, 야밤에 고성을 지르는 사람 등등 각종 경범죄에 안 걸리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중국의 태평성대에는 約法章, 세 가지 간단한 법으로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다스리는 에덴 동산에는 오직 하나의 법만 있었습니다. 기화요초 만발하여 창조의 솜씨를 마음껏 뽐내고, 사시장철 넘쳐흐르는 강가에 생명 과실 가득한 그곳은 과연 태평성대였습니다.
그곳에 사는 우리 조상들은 관대한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법이 엄해도 무법한 무정부 상태보다 낫다는 것은 정치학설의 고전입니다. 법이 없으면 못 사니까 법은 있어야 하겠고, 법이 있으면 하나 밖에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에덴 동산에는 법이 있으되 하나 밖에 없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제일 좋은 군주가 다스리고, 제일 좋은 백성이 사는 제일 좋은 낙원임에 틀림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가장 간단한 하나의 법으로 사람을 시험하셨습니다. “이 법을 지키면 생명 나무를 주어 영원히 낙원의 주인공이 될 것이요, 지키지 아니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라” 아름다운 낙원에서 추방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이 종말론적인 하나의 법을 어겼습니다. 금단의 실과, 선악과를 따먹음과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과의 복스럽고 영광스런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그로부터 죽음의 여러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고독과 슬픔, 질고와 싸움, 생노병사의 인간고 등 우리 모두는 처음 낙원 에덴에서 쫓겨난 처량한 신세의 저주받은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마다 오늘이 고생스럽지만 그래도 내일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람들마다 그 가슴속에 그려진 낙원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향수를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을 벌면, 내가 결혼을 하면, 내가 출세를 하면 낙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본능적으로 낙원을 동경하고 추구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후로부터 모든 인류의 마음은 선악과의 성질을 타고 납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과 악의 판단주체가 자신이 되고 자기 본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신 것이 선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신 것이 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부터는 자기에게 선한 것이 선이요, 자기에게 악한 것이 악한 것이 된 것입니다.
자기에게 좋으면 불효도, 살인도, 간음도 좋은 것이요, 자기에게 나쁘면 여호와 하나님도, 결혼생활도 귀찮다 이겁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이처럼, 선과 악, good and evil의 판단기준을 자기가 설정함으로 무서운 이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의 인본주의, 그 추악한 역사를 기록하여 온 것입니다. 인간의 성숙은 그의 성품과 삶이 얼마나 공동체적인가, 이웃을 어떻게 배려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재능만큼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본문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깜짝 놀랄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추악한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청산하시고 예수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를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진실인 것을 그의 부활의 영이신 성령으로 확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의 영만이 확정해 줍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시사 여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 구원의 보증자일 뿐 아니라 우리 구원의 중보자로서 그의 성령을 우리의 마음속에 보냈습니다.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딸로 중생시키시고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선악과는 꺾여지고 생명 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내 중심의 본성이 꺽여지고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본성으로 거듭 태어납니다. 성령의 본성이 제이의 천성이 되고, 새 성품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고, 지키고,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사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선악과는 더 이상 시험과 정죄의 원리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은혜와 축복의 원리로 존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제적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었는데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란 경제생활의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계속적으로 온전한 십일조와 봉헌물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리면 어떤 복을 주십니까
물질과 여호와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않는 우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경제생활의 번영과 안정을 주십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것을 시험해 보라고 까지 했습니다(말 3:10).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일견 불의해 보이는 세상 재물에 진실하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십일조는 수학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수학에 진실하시면 여호와 하나님의 수학이 하늘 문을 열고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수학이 열매의 숫자를 헤아립니다. 30배, 60배, 100배의 현저한 복을 받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애정생활의 선과 악을 시험하는 나무를 심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살았던 아담과 하와를 인간성으로 구태여 구분해 봅시다. 하와는 감성부분 즉 사랑을 표상한다면 아담은 지성과 의지를 표상합니다. 그런데 어느 부분이 먼저 부패했습니까 하와가 먼저 범죄했다는 것은 사랑이 먼저 부패한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이 부패하면 의지와 지성도 힘없이 함께 부패하고 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하와가 선악과를 보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만 여호와 하나님보다 선악과가 더 좋아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고 선악과에 대한 사랑, 그 정욕이 그녀를 사로잡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영적 간음이라고 말합니다. 약 4:4에 말씀합니다. “간음한 여자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선악과를 사랑하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정욕을 더 좋아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더욱 눈이 밝아져서 여호와 하나님처럼 될 줄 알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아름다운 낙원보다 더 믿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해주는, 한 마디로 끝내주는 더 행복한 세계가 열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였습니다.
허상이며 신기루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세계,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이상의 세계는 없습니다. 그 세계보다 귀하고 아름답고 밝은 세계는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경제생활을 에덴 동산처럼 축복해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우리의 애정생활을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십계명을 보십시오. 부모에게 효도하라, 살인하지 말라, 그 다음에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의 복락이신 예수님께서도 혼인잔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으로 결혼생활의 신성을 옹호해 주셨습니다. 가정생활의 행복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후일의 역사가가 간음하는 시대라고 명명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멸망한 것처럼 이 시대도 음란과 간음으로 멸망할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유 1:7). 오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육신적인 사랑의 부패와 변질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있습니다.
오랜 기독교 문화권 안에 살던 사람들의 이혼율이 50%를 향하여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구라파의 독신 남녀들에게는 자유로운 향락을 위하여 결혼을 회피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간음하는 시대의 이상풍조에 대하여 날카롭게 해부합니다. 3:1-5을 보십시오.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렵혔도다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렘 13:25-27도 보십시오.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애정생활에 두신 가장 간단한 하나의 선악과는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 간음에 대해서는 고후 11:1-3에 말씀합니다.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청심유복이라 우리의 가난한 마음은 더욱 깨끗해져야 하겠습니다. 청결한 믿음, 청결한 사랑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 행한 것 죄 뿐이니” 찬 274장(통 332장)을 찬송합시다. 심령이 깨끗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간음에 대해서는 고전 7:1-5에 말씀합니다.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영과 육에는 모두 뱀과 사탄이 시험하는 선악과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간음이란 애정생활의 선악과를 먹으면 애정생활은 근본적으로 파괴되어 버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사랑이 깨어지면 부부간의 사랑도 깨어집니다. 결혼생활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간음은 우리가 보기에 대단히 자유롭고, 멋지고, 재미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공허한 것입니다. 쓴 뿌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가정이 성적 부정 때문에 깨어지고 있습니다. 부정과 간음은 상대방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계약관계를 행동으로 유린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지적합니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말 2:14-16). 세상은 사랑과 미움의 세월을 살지만 성도는 용서와 사랑의 세월을 삽니다.
너는 내 앞에 완전할지라는 율법적 요구에서 돌이켜 너는 내 품에서 쉬어라는 복음적 받아들임으로 변해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 애정생활을 파괴시키려고 오늘도 간음이란 선악과를 먹으라고 보챕니다. 세상이 더 좋다고 말하고, 다른 이성이 더 매력적이라고 유혹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이런 공격은 계속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도발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요일 2:16). 우리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지속될 이같은 사단의 공격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다음 주일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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