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애정생활의 선악과 ②
본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경제생활을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우리들의 애정생활을 축복해 주시기를 더 원하십니다. 잠언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7)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서로 사랑하는 것, 화목하는 것은 애정생활의 복입니다.
살진 소를 먹는 것, 제육이 집에 가득한 것은 경제생활의 복입니다.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가난해도 사랑하는 것이 더 큰 복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당위성을 알면서도 사랑의 방법론에서 많이 실패합니다. 롬 12:21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했는데 사랑은 미움과 투기로 얻을 수 없습니다. 왕 짜증을 내고, 천불을 내고, 지겨워 죽겠다고 하면 사랑의 감정이 황폐화 될 뿐입니다. 오직 사랑은 용서와 수용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애정생활이란 단순한 낭만 이상입니다. 실제적인 삶의 연속입니다. 결혼생활에서 낭만만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결혼생활은 의무와 책임으로 점철됩니다. Erich Segal이 쓴 소설 Love Story를 읽어보셨습니까 낭만은 결혼생활의 멍에 속에 멈춥니다. 경제난과 질병과 죽음이 곧장 찾아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낭만의 무덤이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고전 7장 서두에 사도 바울이 한 실제적인 권면을 상기해 봅시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낭만적인 연애감정으로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육체적인 욕정과 생활의 필요로 인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1-5절).
결혼은 기본적으로 자유입니다. 결혼하고 안 하고는 자유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일단 결혼을 선택했다면 시쳇말로 버린 몸이요, 이왕 버린 몸 확실하게 버린 몸이 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적극적으로 결혼을 명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결혼한 현실을 중요시 합니다. 결혼의 실제를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라. 배우자를 사랑한다면 그가 지게 될 의무를 가능한 한 가볍게 해주도록 노력해라” 성도는 사랑과 미움의 세월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세월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해야 사랑할 수 있고, 사함 받는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애정생활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고, 애정이 꽃피는 나무를 잘 건사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애정생활의 선악과란 무서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찾아봅시다.
첫째로, 무엇보다 먼저 영원한 남편과의 신선한 결혼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완벽한 신랑이요, 세월이 가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남편이십니다. 믿을수록, 살아갈수록 새록새록 새롭게 발견되는 친밀감이요 친화력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십자가 위에 죽으심으로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이끌려 그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에(롬 5:5) 그분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잘 말씀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하여 얼마나 아십니까 지적으로 논리적으로 얼마나 그분에 대하여 묘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 중에 아무도 그를 본 일이 없습니다. 만진 적도 없습니다. 또한 그분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기묘하신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압니다. 성령의 빛으로, 성령의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내 영혼의 속성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실상 신비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분석할 수 없고 모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생명의 현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딸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영혼의 운동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간음하지 않는 것은 사실 내 남편, 내 아내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만큼 완전하고 사랑스러워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육정으로 말하면 미울 때가 많습니다. 배우자 간에 너무나 욕심이 많고 요구가 많습니다. 의무가 크고 책임 또한 무겁습니다. 받는데 대한 감사는 없고 불만은 끝이 없습니다.
그저 누리는 복들에 대한 감격은 고사하고, 원망, 혐의, 불만만 토합니다. 바꿀 수 있으면 바꾸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영원한 남편 예수님께서 육체적 간음을 싫어하십니다. 결혼생활이 깨끗하고 정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의 소원과 명령 때문에, 내 하나뿐인 신랑의 존재 그분의 임재 때문에 간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에 아름다운 남편을 감격적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기꺼이 자기의 결혼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간음이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를 따먹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거룩하신 남편을 존경하고 그분의 정결한 아내의 자리를 지키기를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남편을 경애하고 그 신랑의 사랑받는 아내이기를 선택하고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 7:12-14).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사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은 불신 배우자까지도 사랑하고 수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인간애며 폭넓은 애정입니까 주님께 대한 사랑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위대한 아내와 남편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훌륭한 아내와 남편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좋은 배우자가 되라고 야단치는 곳이 아니라 좋은 배우자를 만드는 공장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간음하는 시대에 살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유일하고 강력한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사랑과 인내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여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신을 알고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만 동시에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세상(요일 2:16) 속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간음하려고 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간음이란 선악과는 늘상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음란한 장소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밤 주무시기 전에 잠 7장을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거기 보면 한 어리석은 젊은이가 음녀, 창녀를 따라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은 충격적으로 진술합니다.
“그 모양이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22-23). 바울 사도도 청년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사람들은 누구나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쇠가 자석에 끌려가듯이 환경에 지배받는 별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악한 자의 길에 서성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악한 자의 길에 행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음욕을 품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합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사람의 마음에 음욕이 생기는 것은 어찌할 수 없으나 그 음욕을 마음에서 합리화 시키면 그 음욕은 기회를 엿보아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음의 원천인 마음의 음욕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지키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M. Luther는 음욕이 일어날 때마다 오랫동안 기도했다고 합니다. 마음에 음욕이 생길 때 기도하십시오. 육체의 정욕은 간음에의 문을 여는 사탄의 매복지입니다. 예수님께 사랑과 위로를 구할 때 주의 성령이 역사하사 음욕이 사라집니다.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할 수 있습니다(딤전 5:2). 그러나 정욕이 계속 일어나고 절제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적당한 때에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고전 7:8-9).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우리가 육으로 난 것처럼 또한 영으로 났으니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려면 예수님이 나를 온전히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 교회의 음악과 그 분위기에 젖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속의 음악과 음란한 분위기에 휩싸이면 그 영향을 받습니다.
술 마시고 싶고, 춤추고 싶고, 방탕하고 싶어집니다. 어떤 주일학교 어린이가 방탕하는 아버지의 발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이 발로 방탕한 곳에 가지 않도록 우리 아버지를 붙들어 주옵소서” 그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나 마음속에 성령의 은혜를 받고 돌이켰다고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배우자를 위해 마음에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음욕에 사로 잡히지 말고 하소서. 음란한 분위기에 젖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주님께 맡기고 의지할 때 주께서 배우자의 마음을 지키시고 그 행보를 인도해 주십니다.
셋째로, 결혼한 사람들은 주님 때문에 각기 자기 배우자에게 충실해야 합니다. 고 홍반식 목사님의 주례사에서 잊지 못할 대목을 기억합니다. “신랑은 아내 외에 다른 여자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 외에 다른 남자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아주 실제적으로 권면합니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고전 7:27).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 주를 위해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예수님 때문에 배우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가 나로 인해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그가 나로 인해 실족하지 않게 하소서. 이 덧없이 짧은 인생길에서 나로 인해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게 하소서”
부모를 공경치 않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거짓인 것처럼, 자기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배우자를 속이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배우자를 지키는 자입니다. 그로 회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에게 믿음의 채색옷을 입히고 그의 발을 씻겨주는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간음했다면, 우리도 그의 간음에 간접적이고 연대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에게 너무 무심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배우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이와 같은 계산 없는 부담감과 생각 없는 기대치 때문에 배우자는 실족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간음하게 한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가 혼자 도회지에 살면서 깨끗하게 지낸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Sex는 이미 상품화 되었습니다. 밤의 도시는 성 개방, free sex의 거리입니다. 여기에 부패한 종교도 발맞추어 육체의 정욕 가운데 그들을 유인하고 있습니다.
벧후 2장을 보세요.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1-2절).
딤후 3장에도 보세요.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6-7절).
부패한 종교의 특성은 음란입니다. 영적으로 간음하는 사람은 육적으로 간음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전 10장에서 말씀합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8절).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간음할 때 질투하십니다. 우상숭배로 다른 신을 음란하듯 섬길 때 심판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된 몸으로 창기처럼 음란할 때 징벌하십니다. “누가 여호와 하나님의 질투를 당하겠습니까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입니까”(22절). 우리는 간음할 수 없습니다. 희롱의 말로도 간음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사랑받는 신부들입니다. 나의 영혼도 너의 영혼도 사랑하는 주님의 것이요, 너의 몸도 나의 몸도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정욕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말씀합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2:15). 주님도 한 분이시오 배우자도 하나입니다. 여기에 경건의 비밀이 있고 사랑의 비밀이 있습니다. 음란은 뻥튀기입니다. 거품입니다. 확대해서 속여 보이는 것 뿐입니다.
Free sex와 마약중독은 마귀가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데 쓰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2-14)”
애정생활의 선악과를 따먹지 맙시다. 간음이라 이름하는 선악과를 따먹지 맙시다. 간음이라 이름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아니하면 애정이 꽃피는 나무가 우리의 가정에 무성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달마다 각종 사랑의 열매를 먹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 되신 주님이 오셔서 이 사랑이야말로 나를 향한 숭고하고 신성한 사랑에서 연원한 것이라고 증언해 주실 것입니다.
살진 소를 먹는 것, 제육이 집에 가득한 것은 경제생활의 복입니다.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가난해도 사랑하는 것이 더 큰 복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당위성을 알면서도 사랑의 방법론에서 많이 실패합니다. 롬 12:21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했는데 사랑은 미움과 투기로 얻을 수 없습니다. 왕 짜증을 내고, 천불을 내고, 지겨워 죽겠다고 하면 사랑의 감정이 황폐화 될 뿐입니다. 오직 사랑은 용서와 수용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애정생활이란 단순한 낭만 이상입니다. 실제적인 삶의 연속입니다. 결혼생활에서 낭만만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결혼생활은 의무와 책임으로 점철됩니다. Erich Segal이 쓴 소설 Love Story를 읽어보셨습니까 낭만은 결혼생활의 멍에 속에 멈춥니다. 경제난과 질병과 죽음이 곧장 찾아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낭만의 무덤이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고전 7장 서두에 사도 바울이 한 실제적인 권면을 상기해 봅시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낭만적인 연애감정으로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육체적인 욕정과 생활의 필요로 인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1-5절).
결혼은 기본적으로 자유입니다. 결혼하고 안 하고는 자유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일단 결혼을 선택했다면 시쳇말로 버린 몸이요, 이왕 버린 몸 확실하게 버린 몸이 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적극적으로 결혼을 명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결혼한 현실을 중요시 합니다. 결혼의 실제를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라. 배우자를 사랑한다면 그가 지게 될 의무를 가능한 한 가볍게 해주도록 노력해라” 성도는 사랑과 미움의 세월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세월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해야 사랑할 수 있고, 사함 받는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애정생활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고, 애정이 꽃피는 나무를 잘 건사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애정생활의 선악과란 무서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찾아봅시다.
첫째로, 무엇보다 먼저 영원한 남편과의 신선한 결혼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완벽한 신랑이요, 세월이 가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남편이십니다. 믿을수록, 살아갈수록 새록새록 새롭게 발견되는 친밀감이요 친화력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십자가 위에 죽으심으로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이끌려 그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에(롬 5:5) 그분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잘 말씀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하여 얼마나 아십니까 지적으로 논리적으로 얼마나 그분에 대하여 묘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 중에 아무도 그를 본 일이 없습니다. 만진 적도 없습니다. 또한 그분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기묘하신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압니다. 성령의 빛으로, 성령의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내 영혼의 속성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실상 신비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분석할 수 없고 모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생명의 현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딸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영혼의 운동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간음하지 않는 것은 사실 내 남편, 내 아내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만큼 완전하고 사랑스러워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육정으로 말하면 미울 때가 많습니다. 배우자 간에 너무나 욕심이 많고 요구가 많습니다. 의무가 크고 책임 또한 무겁습니다. 받는데 대한 감사는 없고 불만은 끝이 없습니다.
그저 누리는 복들에 대한 감격은 고사하고, 원망, 혐의, 불만만 토합니다. 바꿀 수 있으면 바꾸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영원한 남편 예수님께서 육체적 간음을 싫어하십니다. 결혼생활이 깨끗하고 정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의 소원과 명령 때문에, 내 하나뿐인 신랑의 존재 그분의 임재 때문에 간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에 아름다운 남편을 감격적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기꺼이 자기의 결혼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간음이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를 따먹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거룩하신 남편을 존경하고 그분의 정결한 아내의 자리를 지키기를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남편을 경애하고 그 신랑의 사랑받는 아내이기를 선택하고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 7:12-14).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사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은 불신 배우자까지도 사랑하고 수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인간애며 폭넓은 애정입니까 주님께 대한 사랑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위대한 아내와 남편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훌륭한 아내와 남편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좋은 배우자가 되라고 야단치는 곳이 아니라 좋은 배우자를 만드는 공장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간음하는 시대에 살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유일하고 강력한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사랑과 인내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여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신을 알고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만 동시에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세상(요일 2:16) 속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간음하려고 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간음이란 선악과는 늘상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음란한 장소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밤 주무시기 전에 잠 7장을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거기 보면 한 어리석은 젊은이가 음녀, 창녀를 따라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은 충격적으로 진술합니다.
“그 모양이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22-23). 바울 사도도 청년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사람들은 누구나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쇠가 자석에 끌려가듯이 환경에 지배받는 별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악한 자의 길에 서성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악한 자의 길에 행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음욕을 품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합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사람의 마음에 음욕이 생기는 것은 어찌할 수 없으나 그 음욕을 마음에서 합리화 시키면 그 음욕은 기회를 엿보아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음의 원천인 마음의 음욕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지키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M. Luther는 음욕이 일어날 때마다 오랫동안 기도했다고 합니다. 마음에 음욕이 생길 때 기도하십시오. 육체의 정욕은 간음에의 문을 여는 사탄의 매복지입니다. 예수님께 사랑과 위로를 구할 때 주의 성령이 역사하사 음욕이 사라집니다.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할 수 있습니다(딤전 5:2). 그러나 정욕이 계속 일어나고 절제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적당한 때에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고전 7:8-9).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우리가 육으로 난 것처럼 또한 영으로 났으니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려면 예수님이 나를 온전히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 교회의 음악과 그 분위기에 젖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속의 음악과 음란한 분위기에 휩싸이면 그 영향을 받습니다.
술 마시고 싶고, 춤추고 싶고, 방탕하고 싶어집니다. 어떤 주일학교 어린이가 방탕하는 아버지의 발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이 발로 방탕한 곳에 가지 않도록 우리 아버지를 붙들어 주옵소서” 그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나 마음속에 성령의 은혜를 받고 돌이켰다고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배우자를 위해 마음에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음욕에 사로 잡히지 말고 하소서. 음란한 분위기에 젖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주님께 맡기고 의지할 때 주께서 배우자의 마음을 지키시고 그 행보를 인도해 주십니다.
셋째로, 결혼한 사람들은 주님 때문에 각기 자기 배우자에게 충실해야 합니다. 고 홍반식 목사님의 주례사에서 잊지 못할 대목을 기억합니다. “신랑은 아내 외에 다른 여자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 외에 다른 남자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아주 실제적으로 권면합니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고전 7:27).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 주를 위해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예수님 때문에 배우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가 나로 인해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그가 나로 인해 실족하지 않게 하소서. 이 덧없이 짧은 인생길에서 나로 인해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게 하소서”
부모를 공경치 않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거짓인 것처럼, 자기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배우자를 속이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배우자를 지키는 자입니다. 그로 회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에게 믿음의 채색옷을 입히고 그의 발을 씻겨주는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간음했다면, 우리도 그의 간음에 간접적이고 연대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에게 너무 무심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배우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이와 같은 계산 없는 부담감과 생각 없는 기대치 때문에 배우자는 실족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간음하게 한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가 혼자 도회지에 살면서 깨끗하게 지낸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Sex는 이미 상품화 되었습니다. 밤의 도시는 성 개방, free sex의 거리입니다. 여기에 부패한 종교도 발맞추어 육체의 정욕 가운데 그들을 유인하고 있습니다.
벧후 2장을 보세요.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1-2절).
딤후 3장에도 보세요.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6-7절).
부패한 종교의 특성은 음란입니다. 영적으로 간음하는 사람은 육적으로 간음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전 10장에서 말씀합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8절).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간음할 때 질투하십니다. 우상숭배로 다른 신을 음란하듯 섬길 때 심판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된 몸으로 창기처럼 음란할 때 징벌하십니다. “누가 여호와 하나님의 질투를 당하겠습니까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입니까”(22절). 우리는 간음할 수 없습니다. 희롱의 말로도 간음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사랑받는 신부들입니다. 나의 영혼도 너의 영혼도 사랑하는 주님의 것이요, 너의 몸도 나의 몸도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정욕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말씀합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2:15). 주님도 한 분이시오 배우자도 하나입니다. 여기에 경건의 비밀이 있고 사랑의 비밀이 있습니다. 음란은 뻥튀기입니다. 거품입니다. 확대해서 속여 보이는 것 뿐입니다.
Free sex와 마약중독은 마귀가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데 쓰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2-14)”
애정생활의 선악과를 따먹지 맙시다. 간음이라 이름하는 선악과를 따먹지 맙시다. 간음이라 이름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아니하면 애정이 꽃피는 나무가 우리의 가정에 무성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달마다 각종 사랑의 열매를 먹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 되신 주님이 오셔서 이 사랑이야말로 나를 향한 숭고하고 신성한 사랑에서 연원한 것이라고 증언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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