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행복한 부부
본문
혹시 5월 21일이 무슨 날인지 혹시 아십니까 부부의 날입니다. 왜 21일입니까 둘이서 하나 되는 사이가 부부이기 때문이랍니다. 부부 만큼 멀고도 가까운 관계가 없지요.. 그래서 님이란 단어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되는 관계라 하지 않습니까
이 부부 사이에도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하는 거짓말
1위가 ;집에 일찍 들어갈게‘ 랍니다.
2위가 ; ’당신은 하나도 안 늙었어. 옛날 그대로 야‘ 이고
3위가 ’지난 번 회식때 내가 안 쐈어‘ 이고
4위가 ‘다음 달엔 보너스가 안 나온대’ 랍니다.
그러면 아내의 거짓말 1위는 뭘까요 ‘이거 하나도 안 비싼 거야’ 랍니다.
그리고 2위는 ‘당신 없이 못 살아. 당신이 최고야'’이고
3위는 '다 우리 애들을 위한 거야‘이고
4위가 '아버님 어머님께 용돈 드리자' 등이었습니다.
그 말 액면 그대로 믿고 용돈 보내면 반 죽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부부 사이에도 거짓말이 있고 그러다 보니 우리의 가정들이 모두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부부를 비롯한 가족들입니다. 가족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족끼리 싸우고 갈등하고 분노하고 좌절합니다. 원수가 어디있느냐 바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가정이 다 그렇습니다. 저 가정은 정말로 행복한 것 같애... 이런 환상을 버리십시오. 겉은 평온한 것 같지만 모든 가정이 나름대로의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가정들은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선 가정의 원리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을 맺어줄 때, 서로 ‘돕는 배필’의 관계로 주셨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붙들어 세워주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가족의 의미는 서로 서로 격려하고 다독여 주고 세워주는 상대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돕는 배필’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배필'을 찾습니다. 그래서 부부 싸움의 내용 중의 하나가 “당신이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저 바라고 또 바랍니다.
그러니 날마다 싸움이 그칠 리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와 공감하는 상대를 원합니다. 같은 동류를 원합니다. 같은 취미, 같은 학교, 같은 성씨, 같은 생각을 가진 상대에게 호감을 같습니다. 하다 못해 자기가 타고 다니는 차량 동호회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같은 가족인대도 우리는 너무도 다른 점을 갖고 있습니다.
부부만 해도 서로 각기 다른 환경에서 무려 20년 내지 30년을 살아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나와 같이 살아가는 이 사람이 나와는 전혀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나와 같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와 같지 않으면 정죄하고 싸우고 그러지 않습니까
‘나는 안 그런데 당신은 왜 그런거야 이러지 않습니까
여러분, 부부는 똑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습관과 정신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신앙만 해도 틀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을 가족으로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똑 같은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다양성을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똑같이 생긴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얼굴만 그렇습니까 음성, 지문, 머리카락 모든 것이 다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실수라로 똑 같은 사람을 내지 않습니다. 그만큼 서로 다른 다양성을 좋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정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바로 이 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기와 같아지기를 원합니다. 나한테 맞춰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서로 달라도 너무도 다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여러 가지로 비슷한 것이 있는 줄 알고 결혼했는데 이건 도무지 틀려도 너무 많이 틀린 것이 현실입니다.
비누를 쓰는 방식도 틀리고 치약을 짜는 방법도 틀립니다. 자는 시간도 틀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습관과 방식만을 고집합니다. 나하고 다르면 모두 내 방식으로 고치려고 합니다. 이는 나를 기준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이기적입니다. 자기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죄요 또 불화의 원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나를 교정하시기 위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을 가족으로 주신 것입니다. 니 생각만 옳은 것이 아님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결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하고 완전히 다른 상대를 가족으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하고 같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성격도 다르고 믿음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다른 사람들 하고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각자의 부족함을 알게 됩니다. 나의 모자란 점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나와 똑같지 않은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들과 만약 똑 같다면 우리가 살아온 삶을 그대로 살아간다면 그러기를 바라는 사람 있습니까 우리의 운명과 같기를 바라는 분이 계십니까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나를 닮은 삶 그 자체가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 나를 닮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제발 여러분과 다르게 키우시기 바랍니다. 나와 조금만 달라도 성공한 것입니다. (딸에게 너만은 엄마처럼 살지 말거라. 진짜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아내나 남편을 만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전혀 닮은 것이 없는 자녀가 생긴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저 놈은 누굴 닮아서 저럴까 ’ 그게 효도하는 겁니다. 나를 닮지 않은 것이 성공입니다.
그러므로 다르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나와 같게 하려는 욕심 때문에 우리가 힘들게 사는 것입니다. 가족의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가족에 대한 의무요 사랑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을 고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부부는 고치기 위해 만난 사이가 아닙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보충해 주기 위해 만났습니다. 결국 가족에게 있어 모든 문제는 상대방이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 이해를 하며 산다고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오해가 많습니까 서로에 대해 너무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부 즉 남자와 여자를 아주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같지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다릅니까 순서부터 틀립니다.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여자를 나중에 만드셨습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남자가 참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에게 아이를 낳게 했다간 인류의 대가 끊어졋을 겁니다. 산고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요즘 남자들이 여자보다 더 많이 삐친다고 합니다. 참을성이 없습니다. 남자가 강합니까 여자가 강합니까
지난 금요일 시찰회 체육대회 축구 보세요.. 여자 축구..... 기량은 좀 떨어지는데 분위기는 어때요 살벌하지 않아요 죽기 살기로 뛰잖아요... 지독해요. 악착같아요.. 볼을 뺏기거나 먹으면 분해서 막 울어요.. 왜 여자가 이리 강한지 알아요 만든 재료가 달라요.
남자는 뭘로 만들었어요 흙이예요... 여자는요 뼈로 만들었어요. 게임 끝난 겁니다. 여자랑 싸위 이기려는 남자가 바보예요.. 절대로 이길 수가 없어요.. 흙이 뼈를 어떻게 이겨요
옆에 여자들 보고 고백합시다. ‘정말 강하십니다’ 흙으로 만들었으니 갈수록 약해 지는 거예요. 여자는 어때요 뼈로 만들었느니 갈수록 강해 지는 겁니다.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공휴일이라 집에서 남편이 쉬고 있는데 아내가 설거지를 하면서 아이를 보라고 해서 아이를 가만히 쳐다 보고 있으니까 걸레가 날아오더랍니다. 그러면서 ‘’아이도 제대로 못보니 바닥을 걸레로 훔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여보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야’ 했더니 분유통이 날아오더니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잇어’ 하면서 ‘분유 좀 타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분유통을 타고 ‘이랴 이랴’ 했더니 아내가 달려와선 등짝을 한 대 때리면서 ‘도대체 말이 통해야 살든지 말든지 하지 아이고 내 팔자야.. 그러더랍니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남자들이 이래요... 이렇게 남자와 여자 생각이 다릅니다. 정서도 틀리고 취미도 틀립니다. 안 맞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차이가 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무턱대고 결혼합니다. 결혼만 하면 행복하겠지 막연한 생각으로 결혼에 임합니다.
사실 결혼은 그렇게 무턱대고 환상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군대를 가기 전에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나가기 전에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세 번 기도하라 결혼 안에는 전쟁터도 있고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도 있기 때문이다. ’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혼을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누구든 다 하는 결혼... 하고 보자 이러는 것 아닙니까 누구든지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운전 면허를 따야 합니다. 운전 면허 없이 운전을 하면 범죄 행위가 되고 또 그 자동차는 달리는 무서운 흉기가 되어 사람을 해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행복한 결혼을 위한 가족을 위한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남편 면허증이나 아내 면허증 부모 면허증을 소지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결혼하면 잘 살게 될 것 같고 그냥 아이를 낳으면 좋은 부모가 되는 줄로 여깁니다.
한 마디로 자격이 없는 채로 우리는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정들이 문제가 많겠습니까 그러므로 돌이켜 보면 이만큼 살아온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적입니다. 무면허로 사고 나지 않고 여기까지 가정을 지켜온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에 있는 가정 중에서 문제가 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단지 그 양이 많고 적을 뿐입니다. 부부가 평생 금실이 있게 살아도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든 가정 또한 불완전합니다.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가정과 교회가 되기 위해선 가정의 목표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목표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정확하게 나옵니다. 에베소서 5:26-27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교회란 가정을 말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내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정의 목적은 ‘거룩’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족을 주셨습니다, 이 가족과 함께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 가정의 목적입니다. 내가 가정에서 남편의 역할, 아내의 역할을 바르게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내가 지금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 가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면 압니다. 어떻습니까
“가정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까” 이런 질문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행복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행복은 상대적입니다. 추상적입니다. 행복의 조건은 날마다 바뀝니다.
행복 전도사로 불리는 한 여자 교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정 모 교수 있잖아요 ‘행복하세용’....... 이 분이 매일 방송에 나와 행복의 조건을 날마다 가르쳐 주며 자신은 행복에 겨워 사는 것 같이 산 사람입니다. 이 여교수가 스님과 바람을 피우고 가정이 깨졌습니다. 이유가 ‘외로워서 그랬다’는 겁니다. 입으론 행복을 말하고 다니지만 자신 스스론 외로운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어딜 가도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에 있습니다. 그 외에 인간은 무엇으로도 행복해 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어디 우리 기준으로 행복한 가정이 있습니까 베드로의 가정이 행복했습니까 아브라함의 가정이 단란했습니까 부인만 4명입니다. 그러니 알만 하지요. 다윗의 가정이 행복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울은 아예 결혼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목표가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훈련장입니다. 훈련장은 전쟁터와 똑 같이 만듭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습니다. 싸움도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식구들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은 왜 이리 불행할까 이렇게 비관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인격과 믿음 품성이 이 곳에서 훈련을 받습니다. 훈련이 얼마나 고됩니까 광야가 행복한 곳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불행 때문에 우리가 거룩해 져 가고 있습니다. 변화되어 갑니다.
언젠가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짧은 시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린 몇 밤,/ 저 안에 땡볕 한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 한알이 제대로 열매가 되기 위해서도 그 많은 혹독한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문제 많은 인간이 성화되기 위해 거룩해 지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과정이 필요하겠습니까 그 과정을 가정을 통해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은 훈련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않고, 지금의 자식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이렇게 변화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맨날 싸우고 갈등하고 상처를 주고 받고 그래서 우리 가족은 뭐야 우리 집은 맨날 왜 이래 이 가운데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로 몸부림쳐 가는 가정이라면 그런 가족이라면 정말로 괜찮습니다. 날마다 뭔가 달라지고 변화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성장해 가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부부가 서로 돕는 배필이 되고, 가족이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이 바로 가족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돈이 가져다 주는 행복, 건강이 가져다 주는 행복, 소원 성취가 가져다 주는 행복. 이런 것으론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가짜 행복입니다. 진짜 행복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거룩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 교회 가족들을 그 훈련장과 교관으로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고 날마다 흠과 티를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부부 사이에도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하는 거짓말
1위가 ;집에 일찍 들어갈게‘ 랍니다.
2위가 ; ’당신은 하나도 안 늙었어. 옛날 그대로 야‘ 이고
3위가 ’지난 번 회식때 내가 안 쐈어‘ 이고
4위가 ‘다음 달엔 보너스가 안 나온대’ 랍니다.
그러면 아내의 거짓말 1위는 뭘까요 ‘이거 하나도 안 비싼 거야’ 랍니다.
그리고 2위는 ‘당신 없이 못 살아. 당신이 최고야'’이고
3위는 '다 우리 애들을 위한 거야‘이고
4위가 '아버님 어머님께 용돈 드리자' 등이었습니다.
그 말 액면 그대로 믿고 용돈 보내면 반 죽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부부 사이에도 거짓말이 있고 그러다 보니 우리의 가정들이 모두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부부를 비롯한 가족들입니다. 가족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족끼리 싸우고 갈등하고 분노하고 좌절합니다. 원수가 어디있느냐 바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가정이 다 그렇습니다. 저 가정은 정말로 행복한 것 같애... 이런 환상을 버리십시오. 겉은 평온한 것 같지만 모든 가정이 나름대로의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가정들은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선 가정의 원리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을 맺어줄 때, 서로 ‘돕는 배필’의 관계로 주셨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붙들어 세워주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가족의 의미는 서로 서로 격려하고 다독여 주고 세워주는 상대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돕는 배필’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배필'을 찾습니다. 그래서 부부 싸움의 내용 중의 하나가 “당신이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저 바라고 또 바랍니다.
그러니 날마다 싸움이 그칠 리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와 공감하는 상대를 원합니다. 같은 동류를 원합니다. 같은 취미, 같은 학교, 같은 성씨, 같은 생각을 가진 상대에게 호감을 같습니다. 하다 못해 자기가 타고 다니는 차량 동호회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같은 가족인대도 우리는 너무도 다른 점을 갖고 있습니다.
부부만 해도 서로 각기 다른 환경에서 무려 20년 내지 30년을 살아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나와 같이 살아가는 이 사람이 나와는 전혀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나와 같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와 같지 않으면 정죄하고 싸우고 그러지 않습니까
‘나는 안 그런데 당신은 왜 그런거야 이러지 않습니까
여러분, 부부는 똑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습관과 정신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신앙만 해도 틀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을 가족으로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똑 같은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다양성을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똑같이 생긴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얼굴만 그렇습니까 음성, 지문, 머리카락 모든 것이 다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실수라로 똑 같은 사람을 내지 않습니다. 그만큼 서로 다른 다양성을 좋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정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바로 이 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기와 같아지기를 원합니다. 나한테 맞춰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서로 달라도 너무도 다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여러 가지로 비슷한 것이 있는 줄 알고 결혼했는데 이건 도무지 틀려도 너무 많이 틀린 것이 현실입니다.
비누를 쓰는 방식도 틀리고 치약을 짜는 방법도 틀립니다. 자는 시간도 틀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습관과 방식만을 고집합니다. 나하고 다르면 모두 내 방식으로 고치려고 합니다. 이는 나를 기준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이기적입니다. 자기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죄요 또 불화의 원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나를 교정하시기 위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을 가족으로 주신 것입니다. 니 생각만 옳은 것이 아님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결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하고 완전히 다른 상대를 가족으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하고 같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성격도 다르고 믿음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다른 사람들 하고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각자의 부족함을 알게 됩니다. 나의 모자란 점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나와 똑같지 않은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들과 만약 똑 같다면 우리가 살아온 삶을 그대로 살아간다면 그러기를 바라는 사람 있습니까 우리의 운명과 같기를 바라는 분이 계십니까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나를 닮은 삶 그 자체가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 나를 닮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제발 여러분과 다르게 키우시기 바랍니다. 나와 조금만 달라도 성공한 것입니다. (딸에게 너만은 엄마처럼 살지 말거라. 진짜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아내나 남편을 만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전혀 닮은 것이 없는 자녀가 생긴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저 놈은 누굴 닮아서 저럴까 ’ 그게 효도하는 겁니다. 나를 닮지 않은 것이 성공입니다.
그러므로 다르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나와 같게 하려는 욕심 때문에 우리가 힘들게 사는 것입니다. 가족의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가족에 대한 의무요 사랑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을 고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부부는 고치기 위해 만난 사이가 아닙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보충해 주기 위해 만났습니다. 결국 가족에게 있어 모든 문제는 상대방이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 이해를 하며 산다고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오해가 많습니까 서로에 대해 너무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부 즉 남자와 여자를 아주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같지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다릅니까 순서부터 틀립니다.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여자를 나중에 만드셨습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남자가 참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에게 아이를 낳게 했다간 인류의 대가 끊어졋을 겁니다. 산고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요즘 남자들이 여자보다 더 많이 삐친다고 합니다. 참을성이 없습니다. 남자가 강합니까 여자가 강합니까
지난 금요일 시찰회 체육대회 축구 보세요.. 여자 축구..... 기량은 좀 떨어지는데 분위기는 어때요 살벌하지 않아요 죽기 살기로 뛰잖아요... 지독해요. 악착같아요.. 볼을 뺏기거나 먹으면 분해서 막 울어요.. 왜 여자가 이리 강한지 알아요 만든 재료가 달라요.
남자는 뭘로 만들었어요 흙이예요... 여자는요 뼈로 만들었어요. 게임 끝난 겁니다. 여자랑 싸위 이기려는 남자가 바보예요.. 절대로 이길 수가 없어요.. 흙이 뼈를 어떻게 이겨요
옆에 여자들 보고 고백합시다. ‘정말 강하십니다’ 흙으로 만들었으니 갈수록 약해 지는 거예요. 여자는 어때요 뼈로 만들었느니 갈수록 강해 지는 겁니다.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공휴일이라 집에서 남편이 쉬고 있는데 아내가 설거지를 하면서 아이를 보라고 해서 아이를 가만히 쳐다 보고 있으니까 걸레가 날아오더랍니다. 그러면서 ‘’아이도 제대로 못보니 바닥을 걸레로 훔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여보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야’ 했더니 분유통이 날아오더니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잇어’ 하면서 ‘분유 좀 타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분유통을 타고 ‘이랴 이랴’ 했더니 아내가 달려와선 등짝을 한 대 때리면서 ‘도대체 말이 통해야 살든지 말든지 하지 아이고 내 팔자야.. 그러더랍니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남자들이 이래요... 이렇게 남자와 여자 생각이 다릅니다. 정서도 틀리고 취미도 틀립니다. 안 맞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차이가 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무턱대고 결혼합니다. 결혼만 하면 행복하겠지 막연한 생각으로 결혼에 임합니다.
사실 결혼은 그렇게 무턱대고 환상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군대를 가기 전에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나가기 전에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세 번 기도하라 결혼 안에는 전쟁터도 있고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도 있기 때문이다. ’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혼을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누구든 다 하는 결혼... 하고 보자 이러는 것 아닙니까 누구든지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운전 면허를 따야 합니다. 운전 면허 없이 운전을 하면 범죄 행위가 되고 또 그 자동차는 달리는 무서운 흉기가 되어 사람을 해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행복한 결혼을 위한 가족을 위한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남편 면허증이나 아내 면허증 부모 면허증을 소지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결혼하면 잘 살게 될 것 같고 그냥 아이를 낳으면 좋은 부모가 되는 줄로 여깁니다.
한 마디로 자격이 없는 채로 우리는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정들이 문제가 많겠습니까 그러므로 돌이켜 보면 이만큼 살아온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적입니다. 무면허로 사고 나지 않고 여기까지 가정을 지켜온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에 있는 가정 중에서 문제가 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단지 그 양이 많고 적을 뿐입니다. 부부가 평생 금실이 있게 살아도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든 가정 또한 불완전합니다.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가정과 교회가 되기 위해선 가정의 목표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목표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정확하게 나옵니다. 에베소서 5:26-27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교회란 가정을 말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내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정의 목적은 ‘거룩’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족을 주셨습니다, 이 가족과 함께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 가정의 목적입니다. 내가 가정에서 남편의 역할, 아내의 역할을 바르게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내가 지금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 가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면 압니다. 어떻습니까
“가정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까” 이런 질문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행복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행복은 상대적입니다. 추상적입니다. 행복의 조건은 날마다 바뀝니다.
행복 전도사로 불리는 한 여자 교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정 모 교수 있잖아요 ‘행복하세용’....... 이 분이 매일 방송에 나와 행복의 조건을 날마다 가르쳐 주며 자신은 행복에 겨워 사는 것 같이 산 사람입니다. 이 여교수가 스님과 바람을 피우고 가정이 깨졌습니다. 이유가 ‘외로워서 그랬다’는 겁니다. 입으론 행복을 말하고 다니지만 자신 스스론 외로운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어딜 가도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에 있습니다. 그 외에 인간은 무엇으로도 행복해 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어디 우리 기준으로 행복한 가정이 있습니까 베드로의 가정이 행복했습니까 아브라함의 가정이 단란했습니까 부인만 4명입니다. 그러니 알만 하지요. 다윗의 가정이 행복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울은 아예 결혼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목표가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훈련장입니다. 훈련장은 전쟁터와 똑 같이 만듭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습니다. 싸움도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식구들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은 왜 이리 불행할까 이렇게 비관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인격과 믿음 품성이 이 곳에서 훈련을 받습니다. 훈련이 얼마나 고됩니까 광야가 행복한 곳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불행 때문에 우리가 거룩해 져 가고 있습니다. 변화되어 갑니다.
언젠가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짧은 시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린 몇 밤,/ 저 안에 땡볕 한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 한알이 제대로 열매가 되기 위해서도 그 많은 혹독한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문제 많은 인간이 성화되기 위해 거룩해 지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과정이 필요하겠습니까 그 과정을 가정을 통해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은 훈련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않고, 지금의 자식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이렇게 변화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맨날 싸우고 갈등하고 상처를 주고 받고 그래서 우리 가족은 뭐야 우리 집은 맨날 왜 이래 이 가운데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로 몸부림쳐 가는 가정이라면 그런 가족이라면 정말로 괜찮습니다. 날마다 뭔가 달라지고 변화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성장해 가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부부가 서로 돕는 배필이 되고, 가족이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이 바로 가족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돈이 가져다 주는 행복, 건강이 가져다 주는 행복, 소원 성취가 가져다 주는 행복. 이런 것으론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가짜 행복입니다. 진짜 행복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거룩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 교회 가족들을 그 훈련장과 교관으로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고 날마다 흠과 티를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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