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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이 민족이 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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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이 쓴 로마제국 멸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거대한 로마제국이 멸망을 하게 된 원인을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의 풍요와 향락문화라고 말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사람들은 안일과 쾌락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사치와 향락에 빠집니다. 로마의 전성기에는 물질의 풍요가 극에 달했습니다. 귀족들은 거의 매일 밤 잔치를 벌였습니다. 얼마나 음식을 많이 있었던지 음식을 토해내고 들어와서 계속 먹었습니다.
향락문화가 가운데 목욕문화 발달했습니다. 당시에 사우나 시설에 수세식 화장실까지 설치되었습니다.
사치와 향락의 결과는 가정의 파괴를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비오 날 흙담이 무너지듯 멸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퇴폐, 향락 산업이 극에 달했습니다. 전국 어느 곳에서나 러브호텔을 볼 수 있습니다. 급기야 성매매 금지법을 만들어서 단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성매매 업자는 물론 매춘여성들이 성매매를 직업으로 인정해 달라며 데모를 벌이는 해프닝을 벌이고 있습니다.
향락산업의 발달은 결국 가정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미국에 이어 세계2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가정의 파괴는 결국 자녀문제로 이어지고 이것은 사회문제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둘째로, 로마의 멸망원인은 젊은 인재들이 부족했다고 말합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내일을 이끌어 갈 인재들이 없었습니다. 다음세대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결국 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젊은 이공계 인재들이 줄줄이 해외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국가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귀족 계급이 너무 많았다는 말합니다.
일을 하는 생산자보다 소비하는 소비자가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보다 놀고먹는 사람이 많으면 그 나라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로마는 전쟁을 통해 많은 노예들을 데리고 왔지만 반대로 너무 많은 귀족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로마는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보면 땀 흘려 일하려고 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편하게 놀고 먹으려는 사람은 늘고 있습니다. 청년실업이 급증하고 있고, 실업자는 넘치는데 3D 업종이나 중소기업은 구직난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주일날이면 저희 교회에도 줄을 서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 아니고 돈을 얻으러 옵니다. 대부분은 3-40대의 건장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봉독한 아모스서는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했던 로마시대와 비슷한 상황임을 보여줍니다. 아니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와 사회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남 왕국 출신으로 BC 8세기 경에 북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드고아 라는 지역의 출신입니다. 그의 직업은 양을 치며 뽕나무를 기르는 농부였습니다.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BC 789-747년 경)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제2의 솔로몬 시대라고 할만큼 국가적으로 번성하고 평화를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가장 피폐하고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부자들은 대 저택과 여름집과 겨울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집 없는 자들의 궁핍함을 외면했습니다. (3:15)
여인들은 탐욕을 부리며, 술에 취했습니다. 힘있는 자들은 뇌물과 협박으로 공의를 저버리고 가난한 자들을 괴롭혔습니다. (4:1, 6:12-14, 5:10, 12)
가난한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데 가진 자들은 극심한 사치와 향락에 빠졌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6:1-6 , 5:11-12)
장사하는 자들은 저울추를 속이며 거짓을 일삼고,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지 않고 장사를 하였습니다. ((8:5)
사람을 물건 취급을 하여 신발 한 켤레 값으로 사람을 사고 팔았습니다. (8:6)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타락시켰습니다. (5:5, 8:14)
이러한 국가적인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모스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아모스의 뜻은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는 자”입니다. 그는 당시의 무거운 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힘있게 선포했습니다. 그는 불의로 가득한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를 온 몸으로 선포한 정의의 선지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이 시대의 모습은 당시 여로보암 2세의 시대상황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물질적으로는 너무나 풍성해졌지만 영적으로는 점점 고갈되어 가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간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거짓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섬기지 못하고 예배는 하나의 형식으로 치우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민족을 살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여로보암 2세 때,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풍요로움의 극치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춥고 배고플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립니다. 그러나 삶이 순탄하고 배가 부르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는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확성기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은 무지해서 평안할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고난이라는 방법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성기처럼 큰 소리로 들려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화려하고 풍요로웠지만 내적으로 영적 기갈 속에 허덕이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기근이라는 확성기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갈을 느끼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육신적인 풍요로움에 있어도 영적인 만족이 없으면 사람들은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가 바로 영적 기갈의 시대입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말씀의 홍수 속에서 들어야 할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세상의 소음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따르지 못하고 세상적인 논리와 이기심의 잣대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영적인 기갈 속에서 패역한 길로 걸어 갔을까요 아모서의 배경이 되는 북왕국의 상황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20년간 유지되었던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이 죽은 후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난 후에 그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
세겜에 모인 이스라엘의 연로한 대표들이 왕에게 탄원을 했습니다.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과중한 짐을 지워서 살기가 어려우니 그 짐을 좀 덜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교만한 르호보암 왕은 어른들의 충고를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철없는 젊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오히려 폭언을 했습니다.
“소년의 가르침을 좇아 저희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왕상 12:14)
어른들의 진심어린 충고와 백성들의 고통의 소리를 무시한 결과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여로보암이 이끄는 열지파가 반란을 일으켜 찬란했던 이스라엘 왕국이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민족의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주로 사용하는 젊은 세대의 바람을 통해 참여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참여정부는 기존의 질서와 체제를 거부하고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표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난맥상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코드인사라는 명목아래 기존의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젊은 386세대를 전방에 포진했습니다. 젊은 피만이 이 나라를 개혁할 수 있다는 강력한 의지에 지금까지 나라와 경제를 이끌어 왔던 5공 6공 세대는 하루아침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수구세력으로 척결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장보다는 분배에 경제정책의 중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빵이 커야 나누어 먹지, 자기 먹기도 바쁜데 어떻게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는 수출중심의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엊그제 2천억불 수출이라는 금자탑을 세웠습니다. 그 중심에는 대기업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기업재벌이라는 도식이 있습니다. 재벌은 타도의 대상이요 해체의 대상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물론 재벌기업이 잘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몰아 붙이면 결국은 경제가 수렁으로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재벌의 공과를 따져서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고쳐야 할 것은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재벌은 타도의 대상처럼 인식해서는 어렵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경쟁력을 가진 대기업을 육성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경기는 갈수록 악화되고, 실업자는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념적으로 보안법 철폐를 통해 인권유린을 막아야 한다며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저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핵무기를 빌미로 미국을 상대로 위험한 도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북한 동포들은 생사를 건 탈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인권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보안법을 수정 보완하자는 제안을 거부하고 폐지하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역사 바로잡기를 한다면 정치적 논리로 재단을 하고 있습니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제출하여 사학의 근본 정신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습니다. 기독교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한다면 기독교학교를 세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택의 자유라는 이유를 들어서 개혁을 하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몇몇 사학재단의 비리를 척결하겠다고 사학전체를 파괴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입니다.
수도이전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무리하게 추진했습니다. 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일을 대선 3개월 전에 만들어 놓고, 국회의원이 많이 당선되었으니 그것이 백성들의 민심이라고 밀어 붙였습니다. 여론조사 결과 수도이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60%가 넘는데도 수도권 과밀화와 지방분권을 강조하며 계속 추진했습니다. 이것을 반대하는 자들을 향하여 정권을 뒤흔드는 적대세력이라며 정권을 걸고 추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판결 결과는 압도적인 반대였습니다. 그럼에도 국가 최고기관의 결정을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지난번 탄핵기각 때는 헌재의 결정을 존중한다면 ‘현명한 선택’ 이라고 기뻐하더니 이번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겸허히 수용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무리 젊은 피라 할지라도 더러운 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정직과 진실, 열정과 용기의 깨끗한 피가 흐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칫하면 개혁(改革)이 아닌 개악(改惡)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선동이나 편가르기가 아니라 합리적인 논리와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백성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지도자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르호보암처럼 끝까지 민심을 깨닫지 못하고, 원로들의 의견을 계속 묵살하면 그것이야말로 더 큰 국가적 위기와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엄연한 역사적 진리라면 위기에 처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전부 뒤집어 엎는 혁명이 아니라 기본중의 기본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위기의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의 지도자들은 항상 말씀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고, 회개하고 결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논리나 태도는 매우 위험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면 적이라고 생각하는 흑백논리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방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다메섹,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의 6개 나라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먼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시고 궁궐을 불사르며 백성을 끊으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그 이유는 요단 동편 길르앗에 거하던 갓, 루우벤, 므나세 지파를 철 타작기로 타작을 하듯 압박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예후가 북 왕국을 다스릴 때 아람 나라의 임금인 하사엘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악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왕하10:32, 13:7) 즉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자들에게는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보응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는 블레셋에 관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다가 에돔에 노예로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블레셋을 징계하시는데 수도인 가사를 불로 잿더미로 만들고 블레셋의 모든 나머지 지역을 멸망시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나라가 두로인데 그 두로는 솔로몬왕과 약속하기를 형제의 의를 감당하기로 하였는데 그것을 파기하고 또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서 노예로 팔아 넘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불로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나라는 에돔인데 이 에돔이 칼로 형제를 쫓으며 긍휼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이 에돔과 이스라엘은 형제관계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배신하고 긍휼은 커녕 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에돔을 불로 징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나라가 암몬인데 이 암몬은 지경을 넓히려고 길르앗의 아이 벤 여자의 배를 칼로 갈랐다는 것입니다. 잔인하고 탐욕스런 것이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암몬을 심판하시는데 궁궐을 불사르고 회리바람 폭풍으로 그들을 징계하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나라가 모압입니다. 이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저지른 죄는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회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모압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때 에돔의 임금이 이스라엘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분노한 모압이 도와준 에돔의 임금 무덤을 파서 그 뼈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왕하23:16)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것도 미워하시고 가증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이방 6나라의 심판의 원인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로잡힌 자를 철타작기로 타작하듯 무자비하게 다루거나, 사로잡은 자를 팔아먹었습니다. 아이밴 여자의 배를 칼로 가르거나, 죽은 자의 뼈를 불살라 회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무자비하고 극단적 행동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 아니면 도 식의 극단은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메섹이나 블레셋과 같은 극단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만이 선이고 다른 사람의 주장은 악이라는 논리는 매우 위험합니다. 선악의 판단 기준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심판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잣대로 함부로 역사를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또 다른 역사의 왜곡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극단주의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교만입니다. 우리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가 필요합니다.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하루는 성 프랜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하며 수행중이었다고 합니다. 길을 걸어 가는데 죽을 파는 장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한 제자가 죽을 정신없이 먹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이 수근거리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으려 했습니다. 그때 프랜시스가 앞에 있는 죽을 얼른 먹으면서 말했습니다. “야 맛있다. 너희들도 빨리 먹어라. ”
이것이 바로 스승의 사랑이요 지도자의 덕입니다.
이제는 배타적이고 극단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서로의 부족과 허물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을 줄 아는 사랑과 관용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적으로 몰아 붙이는 편협함과 극단적 논리에서 벗어나 상생(相生)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극단적인 편협함을 벗어나 사랑과 관용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모스와 동시대에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던 호세아 선지자는 패역한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6:1)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회복과 치유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자가 울부짖듯이 말씀을 외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음성을 들으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
이것이 바로 아모서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바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위기를 극복하는 비결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를 말씀을 통해서 진단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표준 앞에서 겸허하게 순종할 때 우리는 고난의 확성기를 통해 새롭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 나라의 정의를 세우는 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국가를 이룰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의인이 되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움이 우리 가운데 심겨질 때 비로소 정의가 구현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없는 정의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정의는 또 다른 부패의 온상이 될 수 있습니다.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서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안에 흘러 더러운 죄악의 피를 걸러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이 먼저 정직과 성실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강같이 흘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탐욕의 배에서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그 진리의 강물이 이 사회를 적시고, 이 나라에 흐를 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새 나라 새 땅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기에 처한 민족을 살리는 길이요 방법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이 나라의 위기를 직시하면서 말씀 앞에 새롭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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