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이 민족에 희망이 있는가?
본문
지난 이틀 동안 지겹도록 들었던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고, 그 일로 인해서 온 나라 안과 밖에서 엄청난 회오리가 불어오고 있습니다.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정치 문외한인 저에게도 이번 사태만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의 자잘못을 따지기 앞서, 왜 우리나라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나 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할 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한 경제적인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갈수록 심화되어가는 국민들의 고통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데,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이 결국 우리나라를 더 어렵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사태를 바라보면서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의 현실을 개탄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뭔가 이 민족에 희망이 되는 것이 없는지를 우리는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국민들의 아우성치는 호소소리를 듣던 중에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읽어야 했습니다. 해외에 살고 있다는 그는 이제 정말 조국인 한국이 싫어졌다고 하소연하면서 다시는 조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자랑스러워야 할 조국에 대해서 얼마나 실망했으면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마치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버리겠다는 심정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에스겔서의 말씀은 오늘 이토록 혼란과 어려움에 빠져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대변해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활동을 시작하던 때는 주전 597년 경이었습니다. 당시 남 유다는 세계 최강대국인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역사상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을 맞고 있었습니다. 이미 8년 전인 주전 605년에도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해서 유다의 항복을 받아내고는 수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어갔습니다. 그런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금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해 온 것입니다. 물론 두 번째 침공 앞에서도 유다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습니다. 강대국 바벨론을 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번의 패배를 맛보고, 수많은 젊은이들과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은 열왕기하 24:10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그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그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유다 왕 여호야긴이 그 모친과 신복들과 방백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 왕 팔년이라. 저가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 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 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저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또 용사 칠천과 공장과 대장장이 일천 곧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로 하였더라. ”(왕하 24:10-17)
유다는 지금 멸망의 위기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희망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없습니다. 유다왕 여호야긴은 어머니인 왕후와 신하들을 데리고 나가서 바벨론 왕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완전히 항복한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좀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모조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아 있는 자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 땅은 수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왕과 왕의 어머니와 왕비들까지 모조리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이 자기 마음대로 유다에 새로운 왕을 세웠는데, 그 왕의 이름도 맛다니야에서 시드기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 얼마나 굴욕적인 일입니까
이 때 바벨론으로 끌려온 에스겔 선지자는 작금의 비참하고 통탄한 현실보다 더 가슴 아프게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유다의 멸망입니다. 아직 유다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는 초토화되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예루살렘에는 ‘시드기야’라고 하는 왕이 왕좌에 앉아 있습니다. 초라하지만 주권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여전히 국제정세를 읽어내지 못하고 다시금 바벨론에 반대하는 쪽에 서서 나라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등 선지자들이 ‘야굽과 손잡지 말고 바벨론 편에 서야 한다고, 그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외쳐도 시드기야 왕은 여전히 애굽과 손잡고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랑하는 조국 유다가 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조국이 망하게 되었다는 데 가슴 아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 내린 심판의 채찍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오래 전부터 ‘너희가 범죄의 자리에서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를 바벨론의 손에 팔아버리실 것’이라고 외쳐왔습니다. 그런데도 유다 백성들과 지도자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백성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이 민족이 살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의 이런 정치적인 혼란이 무엇에서 연유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분명 죄악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죄는 감추기에 바쁘고, 죄를 들춰내면 ‘우리만 그랬느냐’고 오히려 당당하게 큰 소리 쳤던 게 우리의 정치 현실 아니었습니까 자기들의 잘못과 죄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도둑놈들이 큰 소리 치는 현실이 오늘의 사태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죄를 죄로 인정하고 자기들의 잘못을 사죄할 줄 아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오히려 큰소리치고, 큰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나라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주실 수 있겠습니까
에스겔 선지자는 그런 자기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그발강 가에 앉아서 나라를 걱정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할 뿐입니다. 왕을 비롯해서 정치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왜 이 민족이 이렇게 큰 어려움을 맞아야 했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할 뿐입니다.
조국을 바라보면서 답답한 심정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던 에스겔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첫 번째 환상이 오늘 우리가 읽은 4-14절의 말씀입니다. 네 생물에 대한 환상인데, 이것은 유다 민족의 미래를 보여주는 여호와 하나님의 암시였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을 통해서 본 네 생물은 천사였습니다. 이 환상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천사의 모양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의 등장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것과는 달리 엄청난 위엄과 거룩함을 보여준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역자로 삼아 부리시는 천사들이 오늘도 끊임없이 역사를 관통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해 있는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해서 유다는 폭풍을 만난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큰 구름이 유다 전체를 덮을 것입니다. 암울한 유다의 운명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불길한 분위기 가운데서 한줄기 희망이 빛이 비춰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췄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서 보이는 희망의 빛입니다. 멸망의 징조로 인해서 암울한 현실 속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희망의 빛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의 사역자인 천사들을 통해서 유다를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 천사의 모습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말씀이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라는 말씀입니다. 9절 마지막에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라는 말씀이 있고, 12절에서도 같은 말씀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천사가 가는 방향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12절입니다.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흘러갑니다. 역사의 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잡고 계십니다. 분열과 갈등의 역사를 풀어 가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십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탄식하며 울어야할 그런 역사에 희망을 주실 수 있는 분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들이 비록 죄악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유다 백성들은 비참한 자신들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혹 우리를 잊으신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더 깊은 절망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이사야서 49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사 49:14)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렸다고, 자기들을 잊으셨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자를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 ”(사 49:15-16) 어미가 젖 먹는 자식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끈끈한 사랑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기억하시고 돌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합니다. 절대로 잊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아버지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계십니다. 잊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 할지라도,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 하더라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돌아서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무리 많은 것들을 예비해 놓으셨다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주시기를 미루어 놓으십니다. 우리를 위한 위대한 계획까지도 미루실 뿐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조국의 현실 앞에 걱정하며 절망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번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서 우리나라의 앞길이 어떻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무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절망감만이 밀려올지도 모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정치 현실 앞에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의 밥그릇 싸움만을 계속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정치에 신물이 날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국회를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차량에 신나를 싣고 국회의사당으로 돌진해서 불태우는 사람들의 행동이 오히려 속 시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희망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배신을 당하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다시금 불법을 자행하는 그들을 또다시 국회로 보내주는 국민에게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희망은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유일한 희망입니다.
아무리 나라가 불법으로 판을 친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정치인들이 희망 없는 짓거리들만 일삼고 있다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서 오늘도 당신의 사역자인 천사들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신앙인인 우리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과 교회를 통해서 희망 없는 세상에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이 민족에게 희망을 주지 않으면 우리 민족에게는 정말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어려운 현실 앞에서 민족의 희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조국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했고, 죄악이 만연되고 죄악이 이런 사태를 불러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까지 이런 현실에 대해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민족을 대신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민족을 끌어안고 회개해야 합니다.
에스겔은 민족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맞자 먼 이억 만리 이국땅으로 포로로 잡혀간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회개하고 기도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주실 때에 우리 민족에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은 누군가를 탓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우리 신앙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조국 이스라엘의 미래가 절망임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지금은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하고, 조국의 아픔과 절망을 안고 기도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민족의 내일을 꿈꾸며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절망을 극복하려면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꿈꾸는 자만이 미래를 볼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도미시안 황제에게 체포되어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삶을 억압당한 채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아야 할 운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도미시안 황제를 상징하는 짐승의 수 666이 일시 동안은 활동을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겠지만, 언젠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임하셔서 그 악한 무리들을 심판하실 환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악의 세력이 반드시 멸망당하고 의의 세력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란 꿈(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스겔도 절망적인 조국의 상황 때문에 낙담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민족에 희망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의 눈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높이 들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을 통해서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불안한 우리의 마음에 환상을 통해 꿈을 주실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 ”(욜 2:28)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한 순간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가 없습니다.
정치와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우리를 절망시킨다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희망을 빛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현실보다 더 크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민족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오직 희망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교회가 이 시대에 마지막 희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이 시대에 희망이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는 우리가 있기에 이 시대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며, 우리 민족이 다시 한번 영광을 회복하는 축복이 우리와 우리 민족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다같이 우리 민족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민족을 향한 꿈을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죄악에 물들어 있는 이 민족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이 어려움 속에서도 온 국민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정치 문외한인 저에게도 이번 사태만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의 자잘못을 따지기 앞서, 왜 우리나라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나 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할 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한 경제적인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갈수록 심화되어가는 국민들의 고통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데,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이 결국 우리나라를 더 어렵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사태를 바라보면서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의 현실을 개탄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뭔가 이 민족에 희망이 되는 것이 없는지를 우리는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국민들의 아우성치는 호소소리를 듣던 중에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읽어야 했습니다. 해외에 살고 있다는 그는 이제 정말 조국인 한국이 싫어졌다고 하소연하면서 다시는 조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자랑스러워야 할 조국에 대해서 얼마나 실망했으면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마치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버리겠다는 심정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에스겔서의 말씀은 오늘 이토록 혼란과 어려움에 빠져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대변해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활동을 시작하던 때는 주전 597년 경이었습니다. 당시 남 유다는 세계 최강대국인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역사상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을 맞고 있었습니다. 이미 8년 전인 주전 605년에도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해서 유다의 항복을 받아내고는 수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어갔습니다. 그런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금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해 온 것입니다. 물론 두 번째 침공 앞에서도 유다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습니다. 강대국 바벨론을 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번의 패배를 맛보고, 수많은 젊은이들과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은 열왕기하 24:10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그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그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유다 왕 여호야긴이 그 모친과 신복들과 방백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 왕 팔년이라. 저가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 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 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저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또 용사 칠천과 공장과 대장장이 일천 곧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로 하였더라. ”(왕하 24:10-17)
유다는 지금 멸망의 위기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희망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없습니다. 유다왕 여호야긴은 어머니인 왕후와 신하들을 데리고 나가서 바벨론 왕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완전히 항복한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좀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모조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아 있는 자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 땅은 수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왕과 왕의 어머니와 왕비들까지 모조리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이 자기 마음대로 유다에 새로운 왕을 세웠는데, 그 왕의 이름도 맛다니야에서 시드기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 얼마나 굴욕적인 일입니까
이 때 바벨론으로 끌려온 에스겔 선지자는 작금의 비참하고 통탄한 현실보다 더 가슴 아프게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유다의 멸망입니다. 아직 유다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는 초토화되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예루살렘에는 ‘시드기야’라고 하는 왕이 왕좌에 앉아 있습니다. 초라하지만 주권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여전히 국제정세를 읽어내지 못하고 다시금 바벨론에 반대하는 쪽에 서서 나라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등 선지자들이 ‘야굽과 손잡지 말고 바벨론 편에 서야 한다고, 그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외쳐도 시드기야 왕은 여전히 애굽과 손잡고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랑하는 조국 유다가 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조국이 망하게 되었다는 데 가슴 아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 내린 심판의 채찍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오래 전부터 ‘너희가 범죄의 자리에서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를 바벨론의 손에 팔아버리실 것’이라고 외쳐왔습니다. 그런데도 유다 백성들과 지도자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백성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이 민족이 살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의 이런 정치적인 혼란이 무엇에서 연유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분명 죄악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죄는 감추기에 바쁘고, 죄를 들춰내면 ‘우리만 그랬느냐’고 오히려 당당하게 큰 소리 쳤던 게 우리의 정치 현실 아니었습니까 자기들의 잘못과 죄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도둑놈들이 큰 소리 치는 현실이 오늘의 사태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죄를 죄로 인정하고 자기들의 잘못을 사죄할 줄 아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오히려 큰소리치고, 큰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나라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주실 수 있겠습니까
에스겔 선지자는 그런 자기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그발강 가에 앉아서 나라를 걱정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할 뿐입니다. 왕을 비롯해서 정치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왜 이 민족이 이렇게 큰 어려움을 맞아야 했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할 뿐입니다.
조국을 바라보면서 답답한 심정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던 에스겔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첫 번째 환상이 오늘 우리가 읽은 4-14절의 말씀입니다. 네 생물에 대한 환상인데, 이것은 유다 민족의 미래를 보여주는 여호와 하나님의 암시였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을 통해서 본 네 생물은 천사였습니다. 이 환상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천사의 모양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의 등장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것과는 달리 엄청난 위엄과 거룩함을 보여준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역자로 삼아 부리시는 천사들이 오늘도 끊임없이 역사를 관통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해 있는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해서 유다는 폭풍을 만난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큰 구름이 유다 전체를 덮을 것입니다. 암울한 유다의 운명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불길한 분위기 가운데서 한줄기 희망이 빛이 비춰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췄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서 보이는 희망의 빛입니다. 멸망의 징조로 인해서 암울한 현실 속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희망의 빛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의 사역자인 천사들을 통해서 유다를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 천사의 모습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말씀이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라는 말씀입니다. 9절 마지막에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라는 말씀이 있고, 12절에서도 같은 말씀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천사가 가는 방향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12절입니다.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흘러갑니다. 역사의 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잡고 계십니다. 분열과 갈등의 역사를 풀어 가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십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탄식하며 울어야할 그런 역사에 희망을 주실 수 있는 분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들이 비록 죄악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유다 백성들은 비참한 자신들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혹 우리를 잊으신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더 깊은 절망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이사야서 49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사 49:14)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렸다고, 자기들을 잊으셨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자를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 ”(사 49:15-16) 어미가 젖 먹는 자식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끈끈한 사랑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기억하시고 돌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합니다. 절대로 잊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아버지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계십니다. 잊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 할지라도,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 하더라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돌아서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무리 많은 것들을 예비해 놓으셨다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주시기를 미루어 놓으십니다. 우리를 위한 위대한 계획까지도 미루실 뿐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조국의 현실 앞에 걱정하며 절망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번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서 우리나라의 앞길이 어떻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무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절망감만이 밀려올지도 모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정치 현실 앞에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의 밥그릇 싸움만을 계속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정치에 신물이 날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국회를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차량에 신나를 싣고 국회의사당으로 돌진해서 불태우는 사람들의 행동이 오히려 속 시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희망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배신을 당하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다시금 불법을 자행하는 그들을 또다시 국회로 보내주는 국민에게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희망은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유일한 희망입니다.
아무리 나라가 불법으로 판을 친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정치인들이 희망 없는 짓거리들만 일삼고 있다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서 오늘도 당신의 사역자인 천사들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신앙인인 우리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과 교회를 통해서 희망 없는 세상에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이 민족에게 희망을 주지 않으면 우리 민족에게는 정말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어려운 현실 앞에서 민족의 희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조국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했고, 죄악이 만연되고 죄악이 이런 사태를 불러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까지 이런 현실에 대해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민족을 대신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민족을 끌어안고 회개해야 합니다.
에스겔은 민족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맞자 먼 이억 만리 이국땅으로 포로로 잡혀간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회개하고 기도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주실 때에 우리 민족에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은 누군가를 탓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우리 신앙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조국 이스라엘의 미래가 절망임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지금은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하고, 조국의 아픔과 절망을 안고 기도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민족의 내일을 꿈꾸며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절망을 극복하려면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꿈꾸는 자만이 미래를 볼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도미시안 황제에게 체포되어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삶을 억압당한 채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아야 할 운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도미시안 황제를 상징하는 짐승의 수 666이 일시 동안은 활동을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겠지만, 언젠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임하셔서 그 악한 무리들을 심판하실 환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악의 세력이 반드시 멸망당하고 의의 세력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란 꿈(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스겔도 절망적인 조국의 상황 때문에 낙담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민족에 희망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의 눈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높이 들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을 통해서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불안한 우리의 마음에 환상을 통해 꿈을 주실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 ”(욜 2:28)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한 순간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가 없습니다.
정치와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우리를 절망시킨다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희망을 빛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현실보다 더 크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민족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오직 희망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교회가 이 시대에 마지막 희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이 시대에 희망이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는 우리가 있기에 이 시대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며, 우리 민족이 다시 한번 영광을 회복하는 축복이 우리와 우리 민족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다같이 우리 민족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민족을 향한 꿈을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죄악에 물들어 있는 이 민족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이 어려움 속에서도 온 국민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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