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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순종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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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나 현대나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멀리하고 사욕을 따라갑니다. 19세기 조선은 유교와 미신에 빠져 기독교를 배척했고 권력과 왕권을 사수하기 위해 외국과 국교 맺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쇄국 정책을 폈습니다.
요즘도 바른 교훈을 받아드리지 않고 사욕을 좇아 자기머리를 믿고, 권력을 믿고, 돈을 믿고 사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워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철학하는 사람에게 찾아가 점을 보고 사주를 보고 손금을 보고 관상을 봅니다. 사회와 경제가 불안하니까 알 수 없는 미신 행위가 21세기에 들어서 부쩍 많아졌다고 합니다.
더욱이 점쟁이의 이야기, 허탄한 이야기 - 사주팔자의 허풍선이 이야기, 결코 비결이 아닌 비결도 없는 토정비결이야기를 듣고 따라갑니다.
그저 좋은 얘기 듣자는 것이라고 보는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엄한 명령-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1,2 절, 그리스도 예수님의 재림과 주의 나라를 두고 맹세하는데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 항상 전도에 힘쓰라고 명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 그 명령의 중대성과 엄숙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로 말했습니다. - 이는 살았을 때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리스도의 재림 시 영광스럽게 변화되어서 그리스도를 맞이할 사람과 죽었다가 부활하게 될 사람을 가리킵니다 (Lenski). 이는 초대 교회 당시 세례 받을 때 고백한 신조였습니다. (Lock).
엄히 명하노니 - 꼭 순종하고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전도 명령을 순종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영광과 그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전 4:13-18).
이는 어느 나라의 왕의 명령이 아니라 천상천하 최고의 왕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직무입니다.
1866년 8월 9일. 천진을 떠난 제너럴 셔먼 호(General Sherman)는 대동강에서 조선 관군들의 공격으로 1866. 9.2. 전소되고 선원들과 토마스 선교사 등 24명은 전원 몰살당하였습니다.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8천 여명이 순교했다는 3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보고를 듣고 1866년 9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와서 천주교의 탄압에 대한 사죄와 아울러 문호개방을 강요하며 대포로 공격하여 강화성을 점령한 후 한강 하구를 봉쇄한 다음 서울까지 침공하려고 정족산성을 공격하다가 그 유명한 강계포수 8명에게 패배하고 철수하였습니다. 다시 불란서 함대는 침략하여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화진에서 격퇴 당했습니다.
미국은 조선에 간다고 중국을 떠난 제너럴 셔먼호가 실종되자 배를 찾으려고 1867년 워츠(Wachusett) 호를, 5월에는 쉐난도아(Shenandoah)호를 조선의 서해안에 각각 파견하여 배의 행방을 탐색했지만 조선 관군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접근도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고종 8년(1871) 미국 함대는 강화도를 침공하여 광성진(廣城鎭)을 점령하고 조선 수비군 4백 여명을 살상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화수병의 맹습으로 그들은 강화도에서 퇴각하였습니다.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의 충돌의 결과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더 고무되었습니다.
대원군은양이침범(洋夷侵氾)에 비전즉화(非戰則和)니 주화자(主和者)는 매국(賣國)이라. 고 하는 척화(斥和)구호를 비석에 새겨 전국 주요 거리에 세우게 하였습니다.
1873년 고종 10년 민비와 대원군의 권력싸움에서 쇄국 정책을 쓰던 대원군이 실각하였습니다.
조선의 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왕비 명성황후(민비)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입니다. 두 사람은 안으로는 정치 권력다툼, 밖으로는 외세와 맛서는 쇄국정책과 개방정책의 대결을 펼쳤습니다. 대원군은 내적으로는 왕권을 되찾고 개혁을 추진하였고 외적으로는 쇄국 정책을 펴다가 최익현의 상소와 민비의 세력에 밀려 청나라의 간섭으로 실각하고 말았습니다.
조. 미 조약 체결
미국은 조선해안에서 난파되는 자국의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과 수교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이 미국과 수교하여 일본의 세력을 견제케 하려고 조선을 설득하여 조선과 미국은 제물포 해안에 설치된 텐트안에서 1882. 5. 22. 조선측 대표 김홍집과 미국측 대표 슈펠트(Robert W. Shufeldt) 제독간에 역사적인 조, 미 수호 통상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후 조선은 연이어 1882. 6. 6 조. 영 조약 체결 -1882. 6. 30 조. 독 조약 체결 - 제물포에서 각기 조미 조약과 같은 내용으로 조약을 맺었습니다.
초대 공사 내한
미국의 조선에 대한 선교도 조미조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을 구원코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조. 미 조약은 조선이 늘 중국의 재가를 얻어야만 하는 불명예를 씻어 버리고, 세계 만방에 조선은 독립된 국가로 나서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조약이 체결되자, 초대 미국공사 후트 Sucius H. Foote 가 서울에 도착해서 업무를 시작하였습니다.
견미 사절단 파견
조선 정부도 답례로 사절단을 미국에 파송하게 되었는데, 민영익을 특명 전권공사로, 홍영식을 대리공사로, 수행원에 서광범, 유길준 등을 임명하였습니다.
이들은 1883년 7월 미국의 해군함정을 이용하여 제물포를 출발하여 2달 후 9월에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고, 다시 기차편으로 대륙을 횡단하여 3일만에 워싱톤에 도착하여, 미국 대통령을 접견하고 12월에 귀국하였습니다.
미국 사절단 가우쳐 목사 만남
미국에 간 사절된 일행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차를 타고 위싱톤으로 갈 때 한국 선교에 획을 그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우쳐 대학 설립자이며, 감리교회의 목사인 가우쳐 였습니다. 3일 동안 가우쳐 목사는 갓쓴 조선 사신들과 여행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얘기를 듣고 선교사를 보내야 한다는 뜨거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1883년 11월 감리교 외지 선교본부에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편지와 함께 선교헌금 2천 달라를 송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감리교회는 아직 조선선교 계획이 없었음으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가우쳐 목사는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는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 에게 편지를 써 보내 "조선에 가서 그 나라를 실지 답사한 후 선교사업에 착수하였으면 좋겠다고"하였습니다.
맥클레이 고종 황제에게 선교 허락 받음
맥크레이는 1884년 6월에 2주간 예정으로 조선을 방문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김옥균이 일본에 있을 때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인연이 있었으므로 김옥균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김옥균이 당시 정부의 고위 관직에 있었으므로 그에게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하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전달하여, 국왕의 허가를 부탁하였습니다.
며칠 후 김옥균은 맥클레이에게 국왕으로부터 회신이 왔는데 "임금께서 나의 요청대로 선교회가 한국에서 이러한 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닫혔던 선교의 문이 열리는 역사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때가 1884년 6월이었습니다
맥클레이는 주한 미국공사 푸트에게 공사관 가까운 곳에 선교사역을 시작할 대지를 하나 구매해 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일본에 돌아온 후 그는 "우선 교육 사업과 의료사업부터 시작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전도에 있다. 학교사업은 대환영을 받을 것이며, 병원사업은 시급한 요구이다"고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북감리교회는 1884년 말 목사이며 의사인 스크랜튼, 그의 모친, 메리 스크랜튼, 아펜젤러 목사를 조선 선교사로 선임하였습니다.
이렇게 조선선교가 이루어지려고 조. 미 조약이 체결되었고, 민영익과 그 일행이 가우쳐 목사를 기차안에서 만났으며, 일본선교사 맥클레이가 고종황제에게 학교, 병원 사역을 허락 받게되었는데 이는 조선민족을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입니다.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
한편 미국 북장로교회 역시 한국의 선교사업에 대한 작업을 조용히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 알렌은 1883년 봄에 미국 북장로교회의 의료선교사로 중국 상해에 파송 받았습니다. 그해 10월에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일거리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있었는데 그의 친구 의사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였습니다.
이에 알렌은 곧 뉴욕의 선교본부에 조선에는 의사가 한 사람도 없어서 외국공관들과 세관에서는 의사를 몹시 필요로 하므로 본부가 허락한다면 조선에 가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알렌에게 조선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가 중국을 떠나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4년 9월 20일이었습니다. 이로써 알렌은 4천년의 한국역사에 처음으로 개신교 선교사 자격으로 한국에 도착하여 의료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알렌Horace Newton Allen,
미국 오하이오 델라웨어에서 1858년 출생. 웨스레이언 신학부 졸업, 1883년 마이애미 의대 졸업,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중국 상해 파송받았다가 조선 의료 선교사로 입국 했습니다. 그는 미국 공사관의 의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공개적으로 선교활동은 어려웠기 때문에 그에게는 가장 적합한 일자리였고, 합법적으로 한국에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푸트 공사와 함께 고종을 알현했을 때도 푸트는 그를 공사관의 의사로 소개하였습니다.
"의료 선교사들이야 말로 성직 복음전도자들의 대업을 가능케 한 예비적 사역의 개척자들이었습니다.
갑신정변 때 큰 활약을 한 알렌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우정국사건 때 민영익이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알렌은 탁월한 서양 의술로 그를 완전히 치료함으로서 조선에서의 복음 전파에 탄탄 대로를 놓았습니다. 알렌은 왕실, 상류층,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알렌의 의료 선교로 기독교가 조선에 정착할 수 있었고 그후 조선은 목사 선교사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병원 안에서는 의료만 수행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소식이 전파되어 영혼의 치료가 더불어 수행되었고 결국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수확되었습니다. 의료 선교사가 하는 일은 제일 먼저 영광스러운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었다. 고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는 기록하였습니다.
황제의 의사가 된 알렌
갑신정변 때 알렌이 민영익을 깨끗이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알렌은 고종과 민비, 궁전의 대신들에게 총애를 받았습니다. 민영익의 추천으로 알렌은 왕실부 시의관 고종황제 주치 의사, 왕의 정치 고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조선에 복음이 증거 되는 절호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알렌의 복음 사역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국을 복음화 시키기 위한 전주곡이었고 한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1885.4. 10 알렌은 병원, 광해원-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 설립하여 한국 복음화와 의학 발전에 큰 기여 하였습니다.
알렌은 1886년 제중원내에 의학교를 설립,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교육을 시작했습니다.당시 정부는 전국적으로 의학에 소질이 있는 똑똑한 사람들을 올려보내라고 전국 각도에 공문을 보내 16명을 선발했습니다.3개월 교육 후 4명이 탈락하고 최종악씨 등 12명이 선발되었습니다. 최종악씨는 고종의 시의로 활동했으며 그의 손자 최용묵씨가 현재 경희의료원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후에 알렌은 외교관이 되어 미국으로 떠났고 헤론이 혼자 남아 제중원에서 활동하며 사람들의 질병양상,치료법,통계 등을 서양식으로 분류하는 등 의학발달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1890년 이질에 걸려 사망했을 때 고종은 양화진에 외국인묘를 쓰라며 땅을 하사했고 그는 양화진에 뭍힌 최초의 선교사가 됐습니다.
결론
여호와 하나님의 엄한 명령-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1,2 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 우리는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우쳐, 매크레이, 알렌이 수고하며 전해준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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