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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민족을 하나로, 화해와 협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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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에 여신도주일이 제정되었으며 금년이 64번 째 맞는 여신도주일입니다. 저희 교회는 오늘 여신도 주일을 지키지만 8만 명의 기장 여신도회원들은 지난 주일에 '민족을 하나로'란 주제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특별한 주일에 제가 오늘 설교를 하게 된 것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전하게 된 사정이 있습니다. 홍목사님이 설교를 부탁을 하실 때 저는 1월 7일 주일 우리교회의 신년 하례회가 떠올랐습니다. 돌아가면서 새해 덕담을 하는데, 초청회원들의 차례가 되었지요. 우리교회 초청회원이신 김성환 목사님이 "우리가 초청회원인데 교회에서 초청을 받지 못하였으니 새해에는 초청을 해 주시라"는 덕담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부탁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신도들께서는 그래도 사양을 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말하실 지 모르지만 새해 처음 목사님의 부탁이라 사양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주일 목사님에게서 받은 여신도전국연합회의 설교문 복사본에서 이번 여신도 주일의 주제가 '민족을 하나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곱 쪽 분량이 내용을 읽으니까 향린 강단에서 많이 들어왔던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 '화해와 협력으로'를 말씀하기 전에 그 설교문의 요지만이라도 전하는 것이 팔만 기장 여신도와의 유대를 위해서 바람직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설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한국교회는 분단민족을 하나되게 하는 일에 화해 자로서 나서기 위해 자기성찰과 회개운동을 해야 합니다. 에스더가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죽이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가기 전 모든 유대인의 회개를 촉구하였듯이 한국교회가 자기를 성찰하고 회개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한국교회가 교회일치를 위해 일하는 것이 통일을 위한 준비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람들이 출신지역은 달랐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하였듯이 교회는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이 통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셋째 한국교회가 지역적 분열을 극복하도록 일하는 것이 평화의 통일을 위한 준비입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 상종을 하지 않았지만 예수는 사마리아여인을 상종합니다. 허물 많은 이 여인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 사이의 담이 허물어졌듯이 우리사회의 지역적 분열을 극복하는데 교회가 기여해야 합니다. 넷째 한국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일에 대한 꿈과 열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팔만 기장 여신도들이 특별히 마음에 새기고 신앙생활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화해와 협력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화해와 협력은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화해가 있는 곳에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협력하면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집니다. 협력하면 하나됩니다. 화해는 분열과 적대와 증오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 신약본문에서 바울로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시고 그리스도는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견고하고 절대적인 담을 허물어 그 둘을 하나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희생을 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옥의 불을 지피기 위해서 이방인을 창조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만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 여인이 해산의 고통이 극심할 때에 유대인이 그 해산에 도움을 주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도와주면 이방인 한 명이 추가되니까 그랬습니다. 유대인 남녀가 이방인 남녀와 결혼하면 그 날이 그들의 제삿날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 자신을 오염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그리고 지성소로 구획되었습니다. 이방인이 여인의 뜰로 넘어들어 가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견고한 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담을 깨뜨렸습니다. 동독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다 무참히 살해당한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기에, 십여년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질 때 세계인은 감격하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철거가 동서독이 하나되는 순간이었지요. 베를린 장벽의 철거는 우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갈라놓은 담을 허무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되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었습니다. 그가 지신 수난의 십자가 사건이 있어서였습니다. 그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던 이방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에게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그 둘 사이에 담만이 있었고 통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그 담이 사라지고 새로운 일치의 역사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드셔서 여호와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본문 14절) 여기서 새 민족이란 말에서 '새롭다'라는 헬라어는 시간적으로 최신의 것이란 의미에서 새로운(neos)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에 없었고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것(kainos)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방인과 유대인은 여전히 유대인이고 이방인일지라도 이제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새로워진 민족을 뜻합니다. 그들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한 가족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 그렇게 허물어졌을지라도 여전히 여러 형태의 담이 사람들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사회도 그렇고 민족들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종교들 사이는 물론 동일 기독교 안에도 무수한 담이 있습니다. 한 공동체 안에도 보이지 않은 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희생하셔서 뚫어놓은 것을 다시 막고 서로 적대하는 슬픈 역사가 계속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설 연휴에 가톨릭 평화방송에서 영화 한 대목을 보았습니다. 넌 픽션인지 픽션인지 모릅니다. 각하로 불리는 고위 사제가 재판하는 장면부터 보았습니다. 스페인이 진출한 인도의 원주민도 영혼을 가진 인간과 이웃으로 본다고 주장하는 사제와, 이에 맞서 그들은 영혼이 없는 자들임으로 노예로서 노역을 시킬 수 있다는 주장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열기 뜨거운 논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각하 한 말씀드려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하고 발언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사업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만일 이들에게 노임을 지불한다면 스페인의 국고와 교황청의 재정이 바닥날 것이라고 거들고 나선 것입니다. 고위 사제는 최종 판결을 다음날로 미루고 십자가 상 앞에서 홀로 고뇌하고 명상을 거듭합니다. 그 이튿날 고위 사제는 원주민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영혼을 가진 이웃이라고 말하고 신대륙에서의 철수를 제의까지 합니다. 여기까지 그의 판결이 옳았습니다. 그런데 고위 사제는 아프리카인은 짐승과 다를 바 없고 영혼이 없음으로 그들을 노예로 사용하면 재정손실을 막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결국 이 고위사제에게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인간을 차별하였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한 시민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만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분단민족의 하나됨을 위해서, 통일을 위해서 새벽제단을 쌓고 뜨겁게 기도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반공과 멸공의 최전선에 있었고 북한동포를 사랑해야 하는 이웃으로 여기는데 인색하였습니다. 에제키엘 선지자가 본 환상에서 야훼 여호와 하나님은 두 개의 막대기를 하나로 묶어 하나되게 하듯이 남. 북으로 갈라진 두 이스라엘이 하나 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으면서도, 둘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민족통일의 실천을 등한했습니다. 한국교회는 문익환 목사님이 김주석과 만난 것을 맹 비난했습니다. 1989년 8월 평양축전에 임수경양이 참석했고, 문규현 신부님은 정의 사제단의 파송을 받아 평양에 갔습니다. 문규현 신부님은 목자가 양을 위한 심정으로 임수경을 데리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한으로 왔습니다. 분단 후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국은 그들을 체포하였고, 한국 가톨릭 주교단은 임양과 문 신부의 행동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1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변화가 교회 안에 일어났습니다. 분단의 책임을 통감하는 소리가 교회 일각에서 일기 시작하였고, 분단의 고착화를 방치한 죄를 회개하자는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북한도 교회가 사랑해야하는 이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으며, 경제사정이 어려운 북한을 돕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는 교회와 교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교회 전체의 모습이 아닌 것도 사실입니다. 여전히 통일에 대한 한국교회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있으며 화해자의 구실을 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들은 여전히 분열을 일삼고 개 교회주의로 치닫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의 50개 대형교회 중에 26개를 차지할 만큼 교세가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정신적 영적 지도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화해와 협력으로 나갈 수 있는가 것입니까 분열된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협력을 도모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제 생각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을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바로 기억하고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본문에서 예수님은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율법만큼 중요시했습니다. 수많은 세법을 준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온갖 규정을 지켜야 했고, 정결예법에 수많은 세칙이 추가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였습니다. 바울로의 말로 하면 '예수는 율법의 끝'이었습니다. 폐지한 저 조문과 규정을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집약하였습니다. 그것을 율법의 대강령이라 하였습니다.
리타 스노덴(Rita Snowden)은 이런 일화를 남겼습니다. 불란서 병사들이 전장에서 숨진 동료 병사시신을 안장하기 위해서 묘지를 찾아왔습니다. 사제가 친절하게 말하기를, "여기는 천주교 묘소인데 죽은 병사는 영세를 받았는지"를 물었습니다. 동료병사들은 모른다고 하자, 신부는 미안하지만 이 병사를 이 묘지에 안장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병사들은 할 수 없이 교회묘지 울타리에서 좀 떨어진 곳에 동료를 안장을 하였습니다. 이튿날 병사들이 무덤의 안전을 확인하려고 찾아갔지만 무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흙을 판 흔적도 발견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어제의 신부가 다시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어제 저녁 성서를 읽고 밤새 고뇌를 하다 아침 일찍 교회 울타리를 옮겼다는 것이었습니다. 불란서를 위해서 전사한 병사의 무덤은 이제 교회 묘지 안에 있도록 울타리를 옮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규정과 조문을 무력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말을 아무리 많이 들어서 그 말에 우리가 식상했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예수의 삶과 교훈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화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갈라질 수 없습니다. 분쟁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진 것으로 그를 대하지 않고 다만 사람이기에 그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김포공항에서 택시에 흑인 두 사람이 승차했습니다. 걸려 온 휴대전화를 받은 기사는 상대의 물음에 답을 하는 듯, '연탄 두 장을 실었다'고 말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을 때, 승객은 두 장의 연탄 값만을 요금으로 지불하였다는 것입니다. 저 개인의 고백이 됩니다만, 흑인에 대한 저의 선입견이 있습니다. 멸시까지는 아니지만 무언가 있습니다. 그것이 옛날에 비하면 없다고 할 정도의 감정의 변화는 있지만 완전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국내에 불법으로 체류하는 노동자들이 20만 명이라 합니다. 이들은 불법체류자라는 약점 때문에 악덕기업주들의 체불임금이나 욕설을 듣는데 그것은 견딜 수 있으나, 견딜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절규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전체가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르다 하여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짐승이나 노예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한계레신문 사설/1월 27일). 최근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크레파스에서 '살색'을 없애달라라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피부 빛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는 살색이라는 표현을 원망하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사회에도 살색이나 생김새 그리고 못 사는 나라 사람들, 약자들을 멸시하는 풍조, 타민족에 대한 근거 없는 배타성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는 엘리트주의, 타인에 대한 우월감, 지역차별, 신분차별 등의 악습이 널려 있습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에 경멸까지 더하는 풍조가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사회현상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 정도는 아닐지 모르나 은연중에 깔려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흑인의 지위가 향상된 것은 파월 국무장관이 흑인이라는 점에서 입증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고 그것이 교회에서도 통용되는 지역도 있습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작품 뿌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흑인노예를 매매하고 그들을 재산으로 간주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노예흑인이 재산이듯이 그들이 낳은 아이도 소유재산이었습니다. 노예의 아이가 태어나면 그 이름을 재산명목으로 성서에 기입하는 것은 아이러니의 극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와 복음에 역행하는 행위였지만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은 장공 김재준 목사님 14주기 추모예배가 있었습니다. 금년은 장공 선생님 탄신 100주년입니다. 추모사의 말씀에서 그 분의 좌우명 10개가 소개되었습니다. 모두 존경스럽고 감동적인 좌우명이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 쓸모 없다는 사람에게서 쓸모 있는 것을 찾아내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저생활비로 살자는 성빈의 삶이었습니다. 추모예배 후 식사 중에 강원용 목사님에 의하면 김 목사님은 70원 생활비 중에서 26원만을 생활비로 쓰시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감당하지 못하는 삶이라 감동적이면서 제 자신이 초라해졌습니다. 오늘 설교한다는 것이 새삼 힘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여신도들에게 거는 큰 기대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신도들은 그 풍부한 사랑의 정서를 토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인간을 다만 인간으로 대하는 삶의 풍조를 조성할 수 있다는 기대 말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 아직은 대체로 남자들이 밖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가정에서 인간을 살색이나 외적인 소유와 신분과 지위로 대하는 것을 지양하는 삶의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중심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엘리트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람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평등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서 인간을 볼 때만 인간은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땅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면, 사회에서 뒤떨어질지 모릅니다. 왕따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엄청나게 손해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희생이 없이 평등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고 그러한 값 치르지 않고서 분열과 적대의 인간관계 속에서 화해를 이룩할 수 없습니다. 협력과 일치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는 이데올로기의 대결과 냉전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경제불럭의 지역화로 극한 대립에 진입하였습니다. 부유한 북쪽의 나라와 남쪽의 가난한 나라 사이에 점점 더 높은 벽이 쌓아 올라갑니다. 마약, 폭력. 에이즈 등으로 지구촌이 썩어갑니다. 실로 심각한 오늘의 문제는 지구촌 전체가 병들고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학자 한스 큉(H. Kueng) 박사는 1993년 세계 각 종교지도자들 5. 6천명이 운집한 대회에서 '지구윤리의 선언'을 발표했는데, 만장일치로 채택이 되었습니다. 큉박사에 의하면 2093년이면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생물전체가 공멸한 폐허가 될 것이기에 모든 종파가 협력하여 이 죽어 가는 지구촌을 살리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자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모든 참석자들은 종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의 없이 공감하였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언젠가 말한 적이 있지만 내 이웃을 사랑한다는 주님의 명령은 이제 모든 생명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확대 해석해야 할 때에 이르렀습니다. 생명의 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고 지금도 이를 감당하는 사람들은 여성들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생명환경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은 자기희생, 손해보는 일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해 낼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을 바쳐 원수 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민족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만드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였습니다, 교회의 사명 또한 그렇습니다. 반세기 이상 나뉘어 사는 민족을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 화해와 협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좁은 길이지요. 희생과 오해와 왕따를 당하는 길이지만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그 길로 나서도록 오늘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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