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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교회와 국가

본문

그때 저는 군중 틈에 밀려, 함께 나온 후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서울역에 있었던 제 몸은 어느 틈엔가 시청 앞을 지나,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앞의 큰 도로에 다달았습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앞에 나서더니, 그곳에 모인 수많은 군중을 리드했습니다. 우선 모두들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 등을 두드렸습니다. ”강훈아, 니가 여긴 왠 일이니” 정현이였습니다. ”응, 그냥 구경나왔어. 그런데 너 참 오랜만이다. ” ”그래, 오랜만이다. 너 누구하고 같이 왔어” ”응, 그런데 잃어버렸어. ” 그래서 정현이는 제 옆에 앉게 되었습니다.
한참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뭔가 무거운 공기가 흘렀습니다. 데모 진압 차량이 점점 모여들더니, 갑자기 데모 군중을 향해 체류탄을 마구 쏘아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체류탄을 데모 군중 깊숙한 곳에 먼저 쏘는 것이었습니다. 정현이는 제 팔을 잡더니, ”강훈아, 빨리 뛰어! 이건 데모 군중을 해산시키자는 게 아니라, 다 잡자는 거야. ” 오랜 데모 경력을 갖고 있는 정현이의 말이 옳았습니다. 청바지에 청자킷을 입은 사복조는 몽둥이를 들고 달려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내리치고, 쓰러진 사람은 모조리, ”닭장”이라 불리우는 경찰차로 끌고 갔습니다. 체류탄을 얼마나 쏘아대는지, 체류탄 연기에 가려, 앞을 분간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넘어진 사람, 깔린 사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그 박달나무 방망이에 머리를 얻어맞아 죽지 않으려고, 죽어라고 내뺐습니다.
”강훈아, 내 신발... ” 정현이가 외쳤습니다. 하지만 사람과 연기 틈에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고, 쫓아오는 사복조를 피해 달아나자면 시간이 없었습니다. ”우선 여길 빠져나간 뒤에, 다시 오자. ” 큰 길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걸음이 너무 느렸습니다. 그래서 호텔 골목으로 빠졌습니다. 그 골목은 앞이 막혀 있었고, 오른쪽과 왼쪽으로 길이 나 있었습니다. ”어딜로 가야지” 망설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거긴 막다른 골목이야. 이쪽으로 와!” 그쪽으로 달려가보니, 그리 높지 않은 담이 있었습니다. 담을 넘으면서 고개를 들어보니, 반대편 골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은, 모두 몽둥이로 얻어맞고, 개처럼 끌려갔습니다. 담을 넘은 우리들은 주택가 골목으로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정현이는 한쪽 신발만 신고 걸을 수가 없어, 아예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습니다. 한참 후에 신발을 찾으러 그때 그 장소로 가보았습니다. 거리 미화원 아저씨가 주인 잃은 신발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한 리어카도 더 되어 보였습니다. ”정현아, 무슨 색깔이니” ”응, 빨간색. ” 나와 정현이는 그 많은 신발을 다 뒤져보았지만, 끝내 잃어버린 빨간색 하이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6월 한달 동안, 저는 거의 매일 데모 군중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 같이 데모 한 번 해보지 않은 학생들도, 교수님들도, 아저씨도, 아줌마도, 거리로 뛰쳐나와, 더 이상 전두환씨가 헌법을 바꿔가면서까지 재집권할 수 없다 외치며 항거했습니다. 결국 6-29선언이 나오고, 독재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울 때에도, 많은 교회들은 침묵했습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조찬기도회를 찾아가, 불의한 집권자를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겐, ”대통령도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정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크리스천은 이 세상의 어떤 죄인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니까, 전두환씨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왜 교회는 불의에 저항하고 항거해야 할 것은 가르치지 않는 것일까” 젊은 저로서는, 그것이 용기 없는 행위로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성서해석의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였습니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성서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 믿고,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서를 오늘날 현대인의 눈으로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서가 본래 말하려는 취지에서 벗어나기 쉽습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해설
1-2절에서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1그대는 신도들을 일깨워서 통치자들과 집권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며, 2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을 베풀며,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온유함으로 대하게 하십시오.
이 본문을 정당하게 취급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꼭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첫째로, 로마는 고대세계에 질서와 평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로마가 세계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육로에서는 산적이 들끓었고, 바다에서는 해적이 들끓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이 혼란한 세계에 로마는 도로와 법과 치안과 질서를 가져왔습니다. 바울이 수많은 곳을 여행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로마의 태평성대 (Pax Romana)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세계에서 권력자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군단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아 몰살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둘째로, 신약성서 시대의 교회는 복음전파를 최우선의 과제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제도나 질서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저항하거나 대항하기보다는,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주에 읽은 디도서 2장을 보면, 크리스천 아내한테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고, 그 이유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딛 2:5). 또 종들한테는 ”주인에게 복종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의 교훈을 빛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딛 2:10). 오늘 읽은 3:1-2절의 말씀도 이런 구절들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즉, 권력자들에게 복종하여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어려움을 초래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통치자들과 집권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 크레타 사람들에게 특별히 내린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크레타 사람들은 돈을 최고의 가치관으로 여기고, 탐욕적으로 사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거짓이나 사기나 폭력이나 온갖 나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란스럽고, 싸우기 좋아하고, 권력자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레타 크리스천들에게 좋은 시민이 되라고 권고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는 고대 세계에 질서와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신약성서 시대의 교회는 복음 전파를 최우선의 과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권력자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크레타 크리스천에게 특별히 내려진 명령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은, 고대의 크리스천들이 당면한 적 (敵)이, 1987년도 6월의 서울과는 달랐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정치적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기보다는, 먼저 무질서한 세상 문화와, 헐뜯으려는 교회 밖의 무리들과, 아직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의 증언을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해서, ”권력자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성서의 본뜻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저항과 대항을 통해서 로마제국을 정복하는 방법보다, 복종과 자기 개혁을 통해서 로마제국을 굴복시키는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로마가 제국의 힘이 너무 강했고, 그 방법이 옳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여건에서 살기 때문에, 좋은 시민이 되는 전략은 필요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나태한 정신 때문에, 자유 세계에서는 복음이 환영을 받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좋은 시민이 되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시민의 도리를 다섯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로,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병 가운데 하나가 권태입니다. 인간은 왜 지루하다고 느낄까
한샘이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반면에 하늘이는 게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시간이 되면, 하늘이가 ”아구, 지루해 (I’m boring)”하고 말합니다. 또 하늘이가 게임을 하고 있으면, 한샘이가 ”아구, 지루해 (I’m boring)”하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왜 저마다 지루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권태는 이기심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남을 즐겁게 해 주고, 편안하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은 권태를 모릅니다.
 둘째로, 말조심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고, 다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방한다는 말은 남을 헐뜯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악마”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남을 헐뜯는 것은 마귀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남 얘기하는 것처럼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 LA를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친구 목사님 두 분과 함께 셋이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A 목사님이 B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K 목사 만나면, CPA하는 C권사님에게 돈 갚으라고 그래!” 그러자 A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그 친구, 폐가 나빠져서, 지금 아주 어려워. 권사님 만나면, 잘 좀 말씀드려. ”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이보게 B, 그런 일은 당사자끼리 처리하게 하고, 자네는 빠지는 게 좋겠네. 혹시 C 권사님과 친한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건 자네가 개입할 권리는 없지. 목사는 그런 악역을 맡아서는 안 돼. ”
그 이후로도 B 목사님이 입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이 더 나왔습니다. 물론 그 이야기들이 틀린 것도 아니고, 근거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듣기에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크리스천은 내가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관용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희랍어로 ”아마쵸”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싸움꾼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공격적이지 (aggressive)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원칙 없이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꼭 수호할 필요가 없는 것을 고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인지 무엇이 양보해야 할 일인지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관용을 베푸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식견을 넓히고, 공정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넷째로, 친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에는 이 표현이 빠져 있지만, 희랍어 성경과 영어 성경에는 있습니다. 이 말은 희랍어로 ”에피에이케스”입니다. 이것은 법이 명한 것 이상으로 행하려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친절이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넘어설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달라스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휴식 시간에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제가 모르는 낯선 얼굴이 눈에 띄였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제게 찾아와 인사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이도 많으시고, 은퇴를 하신, 아주 오랜 선배 목사님이셨습니다. 제가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분이 먼저 와 인사를 하신 것입니다.
다섯째로, 온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유는 희랍어로 ”프라우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말을, ”마땅히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낼 줄 알고, 마땅히 참아야 할 때 참을 줄 아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온유란, 바보처럼 항상 헤헤거리는 것도, 무조건 화 안내는 것도 아닙니다. 온유란, 자신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다섯가지가 있어야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서, 복음이 방해를 받지 않고 잘 전해지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가지 덕목을 소유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마음 안에서 다스리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3-8a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3우리도 전에는 어리석고, 순종하지 않고, 미혹을 당하고, 온갖 정욕과 향락에 종노릇 하고, 악의와 시기심을 가지고 살고, 남에게 미움을 받고, 서로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4그러나 우리의 구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인류를 사랑하심이 나타났을 때에, 5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 주심과 성령으로 새롭게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6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7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8a이 말은 참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과정을 네 단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죄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살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겸손해집니다. 자기의 의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의롭게 되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비방하고, 공격하는 것은, 자기가 뭔가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 가운데 머무는 것은, 자기 의를 바탕으로 서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았음을 아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 위에 서기 때문에,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을 용서하시고, 죄인을 의롭게 봐주시는 은혜의 배후에는 바로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6절에서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다”고 쓰고 있습니다.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쓰면 쓸수록 더욱 채워지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참된 것을 소망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와지고,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네 개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받으면,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자기 의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의 위에 서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지면, 성령의 능력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게 되고, 아무리 써도 고갈되지 않는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게 되면, 참된 것을 소망하는 존재가 되어서, 하늘 나라를 온통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이 걸어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권력자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한 뒤에, 왜 이처럼 길게 크리스천이 걸어야 할 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당시의 현실을 볼 때, 지상의 나라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자기를 변화시키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가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 판단은 그 당시 상황으로선 옳았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이 언제나 권력자에게 복종해야 하고, 그 명령에 고분고분 따라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권력이 부패하고 사회가 불의할 때, 크리스천은 그 부당함에 항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지만, 그러지 말라고 한 적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의 정신이 무엇인지 추론해야 하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흔적을 가지고 예수님의 정신을 재건해야 합니다.
성서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평등을 언급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사람들, 세리, 창녀, 문둥병자, 여인, 어린이를 받아들이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낮고 천한 사람, 억눌리고 대접 못 받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더 아름답게 입히고 존귀히 대접하는 것, 이것이 곧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사람을 구조적으로 차별하는 사회는 악한 사회입니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을 개인적 영역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그분께서 이 세상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수직적 신분질서를 바탕으로 한 평등치 못한 사회 현실 속에서,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한 분파 (sect)였던 그리스도교가, 복음 전파를 제일의 사명으로 내세우고 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대에 크리스천 노예더러, 좋은 노예가 되라 그러고, 크리스천 아내더러, 좋은 아내가 되라고 한 것은, 적절한 가르침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바울이 오늘 우리 시대에 다시 온다면, 아마 다르게 말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 같은 분이, Martin Luther King Jr. 목사님이셨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사사로운 삶 속에서나 거대한 국가 조직 안에서나,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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