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국가와 국민의 의무
본문
지난주간은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일어난 동시다발적인 대 참사를 지켜보았습니다.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응징을 위한 전쟁인데, 감정이 격해지다보면 응징의 수준을 훌쩍 넘어 테러를 발본색원한다는 미명 아래 보복 전쟁으로 확대될 것이 뻔한 일입니다. 전쟁이 장기화된다고 하면 여러 나라들의 반발이 거세질 것이고, 세계의 경제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 눈에 보입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21세기 첫 번째 전쟁을 선포하고 수일 내에 군사적 보복조치를 취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발표되기는 미국은 사전 경고 없는 군사작전에 돌입하겠다고 했습니다. 미국은 전쟁 준비를 마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보복전쟁의 원칙은 "테러리스트의 피난처를 없애고 테러를 보호하는 체제를 종식시킨다"는 것입니다. "군사작전도 1회용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군사행동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미사일이 발사되고 비행기가 몇 번 출격하여 공격하고 돌아오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기간 전쟁을 수행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담한 비극을 접하고 분노에 치를 떨고 있는 미국 정부와 미국국민들에게 냉정하게 판단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아직은 이르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만큼 인명의 피해를 당하였고, 경제적으로 천문학적인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요, 미국민들과 특히 유가족들에게 너무나 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테러에 대한 마땅한 응징의 정도는 범죄자들과 지원자들과 비호세력까지도 색출하여 단죄하고 시설물도 무력화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성목사가 마음이 약하고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다고 하실 지 모르나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번에 예상되는 전쟁이 응징의 한계를 넘어서 보복으로 이어진다면 반인륜적인 테러와 보복 전쟁은 결과적으로 비슷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테러에 대한 강력한 응징이 되려면 그들의 동족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섬어 주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에 대한 응징은 국제 사회가 공감하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보복은 또 다시 보복의 악순환만 거듭되기 때문입니다. 아랍진영은 무너질 건물도 값나가는 시설도 없습니다. 미국이 계속하여 괴로움을 당하면 세계가 편치 않습니다. "성급한 공격은 오히려 악영향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성급하지 않으며 수긍이 가는 조치를 기대해봅니다.
이번 전쟁이 어느 정도가 정리가 되면 전세계 모든 나라를 포함하여 테러를 반대하는 국제기구를 만들어 서로 감시하고 자기 나라에 대하여 책임져야 합니다. 성급하지 않으면서 보복의 수준이 아닌 진정한 응징이 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국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운명은 국가의 운명과 매우 직결되어 있습니다. 국가라는 것은 우리의 울타리와 같아서 울타리가 약하면 언제든지 그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수요일에 마가복음을 강해하고 있는데, 우리 주님에게 유대교 교권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이러치도 못하고 저러치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퇴양난이라는 말은 딜레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질문을 받고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유대교권자들인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질문하였습니다. 이들이 처음에는 미사여구를 다 동원하여 아첨하는 듯이 예수님을 추켜올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다" 참으로 그들의 입에 참기름을 바른 듯 합니다. 손바닥에는 비수를 감추고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옳다, 아니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옳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라"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이 비웃고, 열심당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의 배신자요, 매국노라고 칭할 것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제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겁한 자요, 위선자라고 부를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헤롯 당원들이 당장에 로마 총독에게 고발하여 잡혀가게 할 것입니다. 로마의 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혁명을 일으키고, 독립을 꾀하는 이들이라고 보고 즉각적으로 처단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데나리온에 누구의 초상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초상은 당시에 로마 제국을 다스리고 있던 디벨리우스의 초상이었습니다.
이 때에 우리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두고두고 명언이요, 교회와 국가를 정의할 때 모든 사람이 인용하는 하나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정교 분리의 대원칙을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의무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의무에 충실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속하면서 국가에 대한 의무는 등한히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의무만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국가도 인정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도 인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살면서 또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하는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면 언제나 그 뜻을 따르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하는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국민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하면 단호하게 일어나서 국가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국가와 국민의 의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로마서 강해 시간을 제하고 로마서 13:1-7을 가지고 설교해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면서도 가장 기분 나쁘게 여기고 그렇게 자세히 읽어보지 않은 성경이 오늘의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렇게 은혜 받지도 못하는 말씀을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하였느냐고 하는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번 미국에서 일어난 가공할 테러를 보면서 그래도 국가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국민의 의무를 강조하는 설교도 해야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선정하게 된 것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롬13:1)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전에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굴복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개정판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굴복하라, 복종하라는 말은 참으로 듣기 거북한 말씀이었습니다. 더욱이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 모든 권세는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하기도 거북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 성경은 군주시대이기에 일시적으로 허용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심한 독재자라고 하여도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대로, 무능한 사람은 무능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좋은 지도자라고 하면 순종하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 충성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독재를 일삼고 권위주의에 사로잡히고 붕당정치나 일삼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천부인권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예전부터 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은 천부인권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 천부인권설이란 무엇입니까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간단히 설명하면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유 평등하여 그의 권리는 다른 이가 침범할 수도 없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유명한 키케로나 프랑스의 룻소가 주장한 사상입니다. 이것은 18세기 이후에 들어오면서 자유사상과 함께 모든 자연법의 중심사상으로 자리잡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말씀은 수많은 독재자들에게 오용되기도 했던 말씀입니다. 정치인들이 교회는 나오지 않으면서도 왕권신수설, 또는 군주 신권설을 주장하며 성경을 인용하는데 바로 로마서 13:1 이하의 말씀을 들고나옵니다.
왕권신수설이 무엇입니까 국왕의 권력이란 신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세기로 들어오면서 신학적인 국가론을 수립하면서 출발한 사상인데, 이것이 발전되면서 중세 말기에는 절대 왕권만을 옹호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주장자는 영국의 제임스1세, 프랑스의 루이14세, 독일의 많은 황제들이 주장하였습니다. 자기가 왕이 된 것은 백성들을 섬기고 돌보는 목자가 되라고 선택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직 백성들을 억압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리고 죽여도 된다고 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세우고 보내셨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최근까지 우리 한국에서조차 독재자들이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군사혁명을 일으킨 대통령을 합법화하려고 영원한 2인자라는 사람이 인용한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잘 알아야 하는 성경이요, 그렇게 간단한 사상이 아닙니다. 아주 무궁무진한 진리가 들어있는 성경입니다.
베드로 전서 2:18에 보면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하셨습니다. 노예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에 베드로나 바울은 사회적인 관습이나 전통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 이상 진실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노예제도라는 엄청난 장벽을 허물어버리면서 선교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처음부터 노예제도를 무시하면서 선교하였다고 하면 전혀 복음을 전파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베드로나 바울이 그러한 노예 제도를 좋아서 허용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전인적으로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정신은 노예제도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회가 자리잡고 그 수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후세들에게 선택을 맡겨놓으신 것이었습니다. 이 노예제도를 고치기 위하여 미국은 남북전쟁을 불사해야 했습니다.
종들은 좋은 주인에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 같지 아니한 주인에게도 당시의 제도이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는 말씀하시기를 "싫은 사람도 섬기고 까다로운 사람도 섬겨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가 당시의 국가 제도 그 자체를 허물어 버리고, 왕권을 무시하고 대항하라고 하면서 선교하였다고 하면 기독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000년 전 당시에는 어느 나라든지 왕들이 있었고, 그것이 당연한 제도였고, 국민들은 왕에게 순종하고 헌신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회가 자리잡고, 성경을 통하여 민주정신이 자라나는 날에는 전제군주제와 같은 제도는 개선될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좋은 제도의 선택권은 후세들에게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성경에 노예제도를 인정했다고 해서 지금도 노예제도를 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적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국가제도도 그렇습니다. 차츰 더 좋은 제도,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는 정부제도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후세들에게 남겨놓은 몫이라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위에 있는 권위와 질서를 인정해야 합니다. (1)
1절 말씀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하셨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권위요, 질서의 문제입니다. 우리 국가와 사회가 건실하게 자라고 유지하라는 뜻으로 권세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 나라에는 왕이나 대통령이나 수상, 또는 수반이 있습니다. 나라를 대표하기 위하여 누군가는 한 사람이 위에 앉아있어야 합니다. 그것까지 부인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 사회에 권위와 질서가 무너진다면 어찌될 것입니까 아마도 하루아침에 엉망이 될 것이 뻔합니다. 교통질서를 지키는 것은 민주시민으로 기본입니다. 길거리에다 침을 뱉지 말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은 이것 기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러한 기본이 안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사회는 권위와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한 가정을 놓고 생각해보세요.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하면 그 가정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교수님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하면 학교는 무너진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하면 그 교회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미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해버린다고 우리나라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국민 모두가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미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참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더 참아야 합니다. 우리의 권리를 행사할 때까지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민합니다. 믿고 따르고 신뢰할만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 국민은 그래도 믿고 따르고 신뢰할 지도자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말 바꾸는 사람들,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 하나도 감당하지 않는 사람, 철따라 옮겨다니는 사람들은 이제는 국민이 알아서 뽑지 말아야 합니다. 나중에 뽑아놓고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처럼 인맥을 형성하지 못하고, 학연이나 지연에 취약하고, 지역 기반이 약하고 권모술수가 없어도 정직한 사람, 그래도 성실한 사람을 올려놓으면 됩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고 나가야 국가를 살릴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조금만 있으면 떠나고 바뀝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갈 우리나라 내 조국 대한민국은 영원해야 합니다. 이 한반도는 우리들 다음에 태어날 우리의 자자손손 대대로 살아갈 땅이요, 국가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영적인 권위를 세워야하고,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 우리 주님의 권위는 절대권위입니다. 성경의 권위,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유일한 법칙입니다.
성경을 난도질하고 권위를 무시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조가 만연될 때에 세계는 엄청난 대전을 치러야 했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도덕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높여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그의 영적인 생활은 물어보지 않아도 세속적이요, 미숙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나 지식 그리고 나의 의지를 가지고는 성숙하고 영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가정에 있어 가장은 남성들입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한 가정의 머리입니다. 남편이 사랑할만하고, 좋은 성품을 가졌다고 하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모자라고, 신뢰성이 약하고, 나쁜 성품을 지녔다고 하면 걱정이 안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좋은 남편이 되고, 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게 하려고 헌신하고 노력하고 수고해야지, 좋은 사람만 찾아다닌다고 하면 그는 평생에 걸쳐 찾아도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남편으로 하여금 교회에 잘 다니게 하고, 먼저 성경을 읽게 하고, 남편에게 물어보고, 남편으로 하여금 우리 가정에 제사장이 되게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남편을 격려하고 칭찬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내세워주어야 합니다. 아내에게 무시당하고, 형편없다는 정신을 가지고 일하면 40대에 가서 스트레스 받아서 남자 구실도 못하고 일찍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남자들 일찍 죽지말고 왕성하게 살려고 하면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고 가정에 존경받는 남편, 존경받은 아버지가 되면 그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이 됩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국가의 권세도 인정해야 합니다. (2)
2절 말씀에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좀 심할 정도로 기록하였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를 무너뜨리고 거스르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 여호와 하나님의 원하는 뜻은 거스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귀론, 사탄론을 연구합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권위를 부정하게 하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권위만 무너뜨리면 마귀의 세상이 됩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 자세한 설명을 못하지만, 참아주고 기다려주지 못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무시하고 끌어내리는 나라나 사회, 그리고 가정이나 교회도 다 평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권위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마귀가 가져다 주는 미움과 시기와 저주와 같은 무서운 것들이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무서운 결과만 반복하면서 성공적인 인생에서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그 말씀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3. 우리는 선과 양심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3-5)
(롬13:3-5)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니라"
우리는 이 시대에 가장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끼어있으면 악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들어 있는 단체에서는 선을 행하고 공명정대하게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누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윗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나는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은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권위는 다릅니다. 한 사람이 미워지다 보면 권위에 대하여 냉소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위에 있는 권력자들에 대하여 철저한 검증과 감시장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신 차리고 국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철저하게 감시체제가 세워져야 합니다. 언론이 각성해야 합니다. 언론기관이 바로 서야 합니다. 대학교수들이 정신 차려서 사회를 바로 진단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살아야 사회가 살아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가 무엇이라 하기 전에 선을 행하고, 양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4. 국민은 의무를 감당하고 권세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이어야 합니다. (6-7)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면 존경할 존경하라" 이 말씀은 세금을 잘 내라, 납세의 의무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더 나아가서 우리는 마땅한 의무를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시대에 나라의 최고 대통령에서부터 많은 정치가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힘써 일하여야 합니다.
미국의 지미카터 전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이끌다가 가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힘써 일하고 토요일에는 자기 주일학교에 가서 공과공부 인도하려고 돌아갔습니다. 화려한 과거만 자랑하면 무엇입니까 지금 봉사의 손을 놓고 있다고 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든 국민은 국가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앞장서서 의무를 감당하시고, 지도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정신으로 감당하여 우리나라가 세계 일류국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21세기 첫 번째 전쟁을 선포하고 수일 내에 군사적 보복조치를 취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발표되기는 미국은 사전 경고 없는 군사작전에 돌입하겠다고 했습니다. 미국은 전쟁 준비를 마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보복전쟁의 원칙은 "테러리스트의 피난처를 없애고 테러를 보호하는 체제를 종식시킨다"는 것입니다. "군사작전도 1회용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군사행동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미사일이 발사되고 비행기가 몇 번 출격하여 공격하고 돌아오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기간 전쟁을 수행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담한 비극을 접하고 분노에 치를 떨고 있는 미국 정부와 미국국민들에게 냉정하게 판단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아직은 이르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만큼 인명의 피해를 당하였고, 경제적으로 천문학적인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요, 미국민들과 특히 유가족들에게 너무나 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테러에 대한 마땅한 응징의 정도는 범죄자들과 지원자들과 비호세력까지도 색출하여 단죄하고 시설물도 무력화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성목사가 마음이 약하고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다고 하실 지 모르나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번에 예상되는 전쟁이 응징의 한계를 넘어서 보복으로 이어진다면 반인륜적인 테러와 보복 전쟁은 결과적으로 비슷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테러에 대한 강력한 응징이 되려면 그들의 동족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섬어 주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에 대한 응징은 국제 사회가 공감하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보복은 또 다시 보복의 악순환만 거듭되기 때문입니다. 아랍진영은 무너질 건물도 값나가는 시설도 없습니다. 미국이 계속하여 괴로움을 당하면 세계가 편치 않습니다. "성급한 공격은 오히려 악영향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성급하지 않으며 수긍이 가는 조치를 기대해봅니다.
이번 전쟁이 어느 정도가 정리가 되면 전세계 모든 나라를 포함하여 테러를 반대하는 국제기구를 만들어 서로 감시하고 자기 나라에 대하여 책임져야 합니다. 성급하지 않으면서 보복의 수준이 아닌 진정한 응징이 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국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운명은 국가의 운명과 매우 직결되어 있습니다. 국가라는 것은 우리의 울타리와 같아서 울타리가 약하면 언제든지 그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수요일에 마가복음을 강해하고 있는데, 우리 주님에게 유대교 교권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이러치도 못하고 저러치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퇴양난이라는 말은 딜레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질문을 받고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유대교권자들인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질문하였습니다. 이들이 처음에는 미사여구를 다 동원하여 아첨하는 듯이 예수님을 추켜올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다" 참으로 그들의 입에 참기름을 바른 듯 합니다. 손바닥에는 비수를 감추고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옳다, 아니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옳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라"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이 비웃고, 열심당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의 배신자요, 매국노라고 칭할 것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제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겁한 자요, 위선자라고 부를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헤롯 당원들이 당장에 로마 총독에게 고발하여 잡혀가게 할 것입니다. 로마의 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혁명을 일으키고, 독립을 꾀하는 이들이라고 보고 즉각적으로 처단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데나리온에 누구의 초상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초상은 당시에 로마 제국을 다스리고 있던 디벨리우스의 초상이었습니다.
이 때에 우리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두고두고 명언이요, 교회와 국가를 정의할 때 모든 사람이 인용하는 하나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정교 분리의 대원칙을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의무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의무에 충실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속하면서 국가에 대한 의무는 등한히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의무만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국가도 인정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도 인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살면서 또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하는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면 언제나 그 뜻을 따르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하는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국민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하면 단호하게 일어나서 국가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국가와 국민의 의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로마서 강해 시간을 제하고 로마서 13:1-7을 가지고 설교해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면서도 가장 기분 나쁘게 여기고 그렇게 자세히 읽어보지 않은 성경이 오늘의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렇게 은혜 받지도 못하는 말씀을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하였느냐고 하는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번 미국에서 일어난 가공할 테러를 보면서 그래도 국가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국민의 의무를 강조하는 설교도 해야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선정하게 된 것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롬13:1)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전에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굴복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개정판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굴복하라, 복종하라는 말은 참으로 듣기 거북한 말씀이었습니다. 더욱이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 모든 권세는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하기도 거북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 성경은 군주시대이기에 일시적으로 허용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심한 독재자라고 하여도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대로, 무능한 사람은 무능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좋은 지도자라고 하면 순종하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 충성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독재를 일삼고 권위주의에 사로잡히고 붕당정치나 일삼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천부인권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예전부터 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은 천부인권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 천부인권설이란 무엇입니까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간단히 설명하면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유 평등하여 그의 권리는 다른 이가 침범할 수도 없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유명한 키케로나 프랑스의 룻소가 주장한 사상입니다. 이것은 18세기 이후에 들어오면서 자유사상과 함께 모든 자연법의 중심사상으로 자리잡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말씀은 수많은 독재자들에게 오용되기도 했던 말씀입니다. 정치인들이 교회는 나오지 않으면서도 왕권신수설, 또는 군주 신권설을 주장하며 성경을 인용하는데 바로 로마서 13:1 이하의 말씀을 들고나옵니다.
왕권신수설이 무엇입니까 국왕의 권력이란 신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세기로 들어오면서 신학적인 국가론을 수립하면서 출발한 사상인데, 이것이 발전되면서 중세 말기에는 절대 왕권만을 옹호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주장자는 영국의 제임스1세, 프랑스의 루이14세, 독일의 많은 황제들이 주장하였습니다. 자기가 왕이 된 것은 백성들을 섬기고 돌보는 목자가 되라고 선택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직 백성들을 억압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리고 죽여도 된다고 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세우고 보내셨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최근까지 우리 한국에서조차 독재자들이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군사혁명을 일으킨 대통령을 합법화하려고 영원한 2인자라는 사람이 인용한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잘 알아야 하는 성경이요, 그렇게 간단한 사상이 아닙니다. 아주 무궁무진한 진리가 들어있는 성경입니다.
베드로 전서 2:18에 보면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하셨습니다. 노예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에 베드로나 바울은 사회적인 관습이나 전통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 이상 진실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노예제도라는 엄청난 장벽을 허물어버리면서 선교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처음부터 노예제도를 무시하면서 선교하였다고 하면 전혀 복음을 전파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베드로나 바울이 그러한 노예 제도를 좋아서 허용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전인적으로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정신은 노예제도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회가 자리잡고 그 수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후세들에게 선택을 맡겨놓으신 것이었습니다. 이 노예제도를 고치기 위하여 미국은 남북전쟁을 불사해야 했습니다.
종들은 좋은 주인에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 같지 아니한 주인에게도 당시의 제도이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는 말씀하시기를 "싫은 사람도 섬기고 까다로운 사람도 섬겨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가 당시의 국가 제도 그 자체를 허물어 버리고, 왕권을 무시하고 대항하라고 하면서 선교하였다고 하면 기독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000년 전 당시에는 어느 나라든지 왕들이 있었고, 그것이 당연한 제도였고, 국민들은 왕에게 순종하고 헌신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회가 자리잡고, 성경을 통하여 민주정신이 자라나는 날에는 전제군주제와 같은 제도는 개선될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좋은 제도의 선택권은 후세들에게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성경에 노예제도를 인정했다고 해서 지금도 노예제도를 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적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국가제도도 그렇습니다. 차츰 더 좋은 제도,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는 정부제도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후세들에게 남겨놓은 몫이라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위에 있는 권위와 질서를 인정해야 합니다. (1)
1절 말씀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하셨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권위요, 질서의 문제입니다. 우리 국가와 사회가 건실하게 자라고 유지하라는 뜻으로 권세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 나라에는 왕이나 대통령이나 수상, 또는 수반이 있습니다. 나라를 대표하기 위하여 누군가는 한 사람이 위에 앉아있어야 합니다. 그것까지 부인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 사회에 권위와 질서가 무너진다면 어찌될 것입니까 아마도 하루아침에 엉망이 될 것이 뻔합니다. 교통질서를 지키는 것은 민주시민으로 기본입니다. 길거리에다 침을 뱉지 말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은 이것 기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러한 기본이 안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사회는 권위와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한 가정을 놓고 생각해보세요.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하면 그 가정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교수님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하면 학교는 무너진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하면 그 교회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미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해버린다고 우리나라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국민 모두가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미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참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더 참아야 합니다. 우리의 권리를 행사할 때까지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민합니다. 믿고 따르고 신뢰할만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 국민은 그래도 믿고 따르고 신뢰할 지도자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말 바꾸는 사람들,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 하나도 감당하지 않는 사람, 철따라 옮겨다니는 사람들은 이제는 국민이 알아서 뽑지 말아야 합니다. 나중에 뽑아놓고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처럼 인맥을 형성하지 못하고, 학연이나 지연에 취약하고, 지역 기반이 약하고 권모술수가 없어도 정직한 사람, 그래도 성실한 사람을 올려놓으면 됩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고 나가야 국가를 살릴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조금만 있으면 떠나고 바뀝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갈 우리나라 내 조국 대한민국은 영원해야 합니다. 이 한반도는 우리들 다음에 태어날 우리의 자자손손 대대로 살아갈 땅이요, 국가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영적인 권위를 세워야하고,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 우리 주님의 권위는 절대권위입니다. 성경의 권위,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유일한 법칙입니다.
성경을 난도질하고 권위를 무시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조가 만연될 때에 세계는 엄청난 대전을 치러야 했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도덕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높여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그의 영적인 생활은 물어보지 않아도 세속적이요, 미숙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나 지식 그리고 나의 의지를 가지고는 성숙하고 영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가정에 있어 가장은 남성들입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한 가정의 머리입니다. 남편이 사랑할만하고, 좋은 성품을 가졌다고 하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모자라고, 신뢰성이 약하고, 나쁜 성품을 지녔다고 하면 걱정이 안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좋은 남편이 되고, 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게 하려고 헌신하고 노력하고 수고해야지, 좋은 사람만 찾아다닌다고 하면 그는 평생에 걸쳐 찾아도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남편으로 하여금 교회에 잘 다니게 하고, 먼저 성경을 읽게 하고, 남편에게 물어보고, 남편으로 하여금 우리 가정에 제사장이 되게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남편을 격려하고 칭찬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내세워주어야 합니다. 아내에게 무시당하고, 형편없다는 정신을 가지고 일하면 40대에 가서 스트레스 받아서 남자 구실도 못하고 일찍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남자들 일찍 죽지말고 왕성하게 살려고 하면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고 가정에 존경받는 남편, 존경받은 아버지가 되면 그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이 됩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국가의 권세도 인정해야 합니다. (2)
2절 말씀에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좀 심할 정도로 기록하였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를 무너뜨리고 거스르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 여호와 하나님의 원하는 뜻은 거스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귀론, 사탄론을 연구합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권위를 부정하게 하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권위만 무너뜨리면 마귀의 세상이 됩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 자세한 설명을 못하지만, 참아주고 기다려주지 못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무시하고 끌어내리는 나라나 사회, 그리고 가정이나 교회도 다 평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권위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마귀가 가져다 주는 미움과 시기와 저주와 같은 무서운 것들이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무서운 결과만 반복하면서 성공적인 인생에서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그 말씀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3. 우리는 선과 양심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3-5)
(롬13:3-5)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니라"
우리는 이 시대에 가장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끼어있으면 악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들어 있는 단체에서는 선을 행하고 공명정대하게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누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윗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나는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은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권위는 다릅니다. 한 사람이 미워지다 보면 권위에 대하여 냉소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위에 있는 권력자들에 대하여 철저한 검증과 감시장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신 차리고 국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철저하게 감시체제가 세워져야 합니다. 언론이 각성해야 합니다. 언론기관이 바로 서야 합니다. 대학교수들이 정신 차려서 사회를 바로 진단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살아야 사회가 살아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가 무엇이라 하기 전에 선을 행하고, 양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4. 국민은 의무를 감당하고 권세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이어야 합니다. (6-7)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면 존경할 존경하라" 이 말씀은 세금을 잘 내라, 납세의 의무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더 나아가서 우리는 마땅한 의무를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시대에 나라의 최고 대통령에서부터 많은 정치가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힘써 일하여야 합니다.
미국의 지미카터 전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이끌다가 가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힘써 일하고 토요일에는 자기 주일학교에 가서 공과공부 인도하려고 돌아갔습니다. 화려한 과거만 자랑하면 무엇입니까 지금 봉사의 손을 놓고 있다고 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든 국민은 국가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앞장서서 의무를 감당하시고, 지도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정신으로 감당하여 우리나라가 세계 일류국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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