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성도의 국가윤리
본문
이 구절은 성도가 국가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라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바울의 조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듯보면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구절입니다. 실지로 군사정부 시절에 혁명주체 중의 한 사람이었던 고위층 인사가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목사님들에게 직접 이 구절을 인용하여 많은 저항에 부딪혀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수많은 논란들이 있어왔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한 실예 두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첫째-정,교일치론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중세시대와 현재의 독일교회입니다. 교황은 태양이요, 황제는 달이라는 표현 속에서 중세 시대가 어떤 시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교황은 절대권력자로서 세속적인 권세까지 마음대로 요리했습니다. 지금의 독일교회는 국가교회에 가깝습니다. 종교세가 있어서 국가에서 교회를 보호해주고 목사의 생활비까지도 국가에서 공무원처럼 다 대 줍니다. 그 결과,
1나태하게 만들었습니다. 잡아 놓은 고기 먹이 안 주듯이 통제 속에 들어온 교회의 말에 국가는 더 이상 귀기울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인생의 위기는 목표의식이 없어질 때입니다. 사람이 성공하기까지는 근검절약 하다가 일단 성공하고 나면 허랑 방탕하게 됩니다. 정권을 잡기보다 유지하기가 어렵고 성을 정복하기 보다는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교훈입니다. 정관정요에 創業은 易하나 守成은 亂하니라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 해석이 창업할 때는 긴장하여 최선을 다하나 수성할 때는 긴장이 풀어지고 태만해지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2생명력이 없어졌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다가 콘스탄틴 황제때 기독교를 공인하고 오래지 않아 국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불이익의 대명사였는데 이제는 이익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다못해 동네 이장이라도 되려면 예수 믿지 않고는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카타콤에서 드릴 때의 예배는 목숨을 건 뜨거운 예배가 몇 시간씩 계속 되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예배는 형식적이 되었고 신앙에는 활기와 생명력이 현저히 감소되었습니다. 많은 뜻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콘스탄틴 대제의 국가종교선포는 기독교의 또 다른 위기였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둘째-정,교분리(구분)론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주장 자들은 예수님, 사도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칼 바르트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이 의견에 찬성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세금문제에 있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게라는 구절로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표명했습니다. 바울의 견해는 국가 우선 주의를 말한 것 같으나 실상은 최종적인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유명한 저서 신의 도성, The City of God에서 두 왕국설을 주장했고,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도 어거스틴의 입장에 서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역사 가운데에서 정교 일치는 잘못된 것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하기 때문에 둘은 견제를 통해서 긴장을 유지해야 둘다 건강해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개의 용도도 다양해졌습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애완견이 있고, 식용용으로 개를 사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의 일반적인 용도는 도둑을 지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개는 도둑이 오면 짖는 것이 정상적인데 짖지못한다면 이미 개의 효용은 끝난 것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애완견이나 식용용으로 키우는 개들은 아예 난지 며칠 안에 고막을 터지게 해서 듣지 못하게 하고 성대수술을 해서 짖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요즈음 짖지못하는 강단과 듣지 못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이제 정교분리가 대세라는 것은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교분리와 정교구분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리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완전히 별개라는 의미이고 구분은 서로를 간섭하되 서로간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정치를 떠나서 존재가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나는 정치적으로 완전 중립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중립을 지키는 자체가 이미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 것입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무관심하다든지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 둘 다 문제가 있습니다. 서로의 영역을 넘지 않으면서 국가는 교회를 보호해주고 교회는 국가의 정책을 가감 없이 비판해 주어야 합니다. 둘이 사이가 좋으면 다 좋을 것 같지만 둘 다 망하고 맙니다. 정부는 싫더라도 교회의 정당한 비판에 겸허이 귀기울이고, 교회는 정부의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바울이 국가 권력을 인정한데에는 배경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그 당시 열심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반항과 폭력을 최대의 가치로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달칼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매국노를 처단한다는 미명하에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무법자였습니다. 이런 실질적인 폭력의 악순환을 보아왔던 바울이기에 국가의 권력이 완전하지는 못하다고 할지라도 무정부 보다야 낫다는 현실론에서 나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무질서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혼돈(chaos)을 질서(cosmos)로 바꾸셨습니다. 그러기에 무질서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질서를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과 교회의 질서 또한 원한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바울이 깨달은 것은 국가를 통해 얻는 유익이 너무 많다는 현실 인식 때문입니다. 각자가 수도, 전기, 통신, 교통, 안전을 책임질 수가 있습니까 법은 약자를 보호합니다. 하루에도 살인의 충동을 수없이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성이나 도덕적 힘보다는 법 때문에 자제하게 됩니다. 구가의 힘이나 법은 결국 약자를 돕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국가에 대한 바울의 충고,
첫째-권위에 굴복하라.
그 이유는 권위의 출처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에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부당하게 보이는 제국의 권력자들을 사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파사, 헬라제국, 로마제국 등을 들어 사용했습니다. 일단은 국가 권력을 잡은 자들을 위해서 대안 없는 비판보다는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둘째-정직해야합니다.
정직과 진실보다 강한 것은 없습니다. 파출소 앞을 지날 때도, 검찰청에 들어가도, 교도소를 들어가도 잘못이 없으면 겁낼 것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신은 모두가 정직하지 못한데서 옵니다. 적당한 것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모두를 죽이는 것입니다. L. A폭동때 한국인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미국정부에서 세금낸대로 보상해 주었는데 실지로 한국민들은 많은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소득신고를 엉터리없이 줄여했기 때문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높은 산에 소풍을 갔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돌 하나씩을 주워 올라가라고 했더니 우직한 베드로는 큰 바위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갔으나 약은 가룟유다는 공기돌만한 돌을 주머니에 넣고 올라갔다고 합니다. 정상에 올라가서 점심때가 되었을 때 주어온 돌들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기도를 하셨는데 그것들이 모두 빵이 되었습니다. 가룟유다가 배를 곯았을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셋째-자리파악 바로 하라.
7절에 줄 것 주고, 두려워할 자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도는 이 땅위에 발을 딛고사는 대한민국 국민임과 동시에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이중시민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국가에 대한 바른 이해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언듯보면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구절입니다. 실지로 군사정부 시절에 혁명주체 중의 한 사람이었던 고위층 인사가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목사님들에게 직접 이 구절을 인용하여 많은 저항에 부딪혀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수많은 논란들이 있어왔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한 실예 두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첫째-정,교일치론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중세시대와 현재의 독일교회입니다. 교황은 태양이요, 황제는 달이라는 표현 속에서 중세 시대가 어떤 시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교황은 절대권력자로서 세속적인 권세까지 마음대로 요리했습니다. 지금의 독일교회는 국가교회에 가깝습니다. 종교세가 있어서 국가에서 교회를 보호해주고 목사의 생활비까지도 국가에서 공무원처럼 다 대 줍니다. 그 결과,
1나태하게 만들었습니다. 잡아 놓은 고기 먹이 안 주듯이 통제 속에 들어온 교회의 말에 국가는 더 이상 귀기울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인생의 위기는 목표의식이 없어질 때입니다. 사람이 성공하기까지는 근검절약 하다가 일단 성공하고 나면 허랑 방탕하게 됩니다. 정권을 잡기보다 유지하기가 어렵고 성을 정복하기 보다는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교훈입니다. 정관정요에 創業은 易하나 守成은 亂하니라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 해석이 창업할 때는 긴장하여 최선을 다하나 수성할 때는 긴장이 풀어지고 태만해지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2생명력이 없어졌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다가 콘스탄틴 황제때 기독교를 공인하고 오래지 않아 국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불이익의 대명사였는데 이제는 이익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다못해 동네 이장이라도 되려면 예수 믿지 않고는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카타콤에서 드릴 때의 예배는 목숨을 건 뜨거운 예배가 몇 시간씩 계속 되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예배는 형식적이 되었고 신앙에는 활기와 생명력이 현저히 감소되었습니다. 많은 뜻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콘스탄틴 대제의 국가종교선포는 기독교의 또 다른 위기였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둘째-정,교분리(구분)론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주장 자들은 예수님, 사도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칼 바르트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이 의견에 찬성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세금문제에 있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게라는 구절로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표명했습니다. 바울의 견해는 국가 우선 주의를 말한 것 같으나 실상은 최종적인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유명한 저서 신의 도성, The City of God에서 두 왕국설을 주장했고,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도 어거스틴의 입장에 서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역사 가운데에서 정교 일치는 잘못된 것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하기 때문에 둘은 견제를 통해서 긴장을 유지해야 둘다 건강해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개의 용도도 다양해졌습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애완견이 있고, 식용용으로 개를 사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의 일반적인 용도는 도둑을 지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개는 도둑이 오면 짖는 것이 정상적인데 짖지못한다면 이미 개의 효용은 끝난 것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애완견이나 식용용으로 키우는 개들은 아예 난지 며칠 안에 고막을 터지게 해서 듣지 못하게 하고 성대수술을 해서 짖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요즈음 짖지못하는 강단과 듣지 못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이제 정교분리가 대세라는 것은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교분리와 정교구분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리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완전히 별개라는 의미이고 구분은 서로를 간섭하되 서로간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정치를 떠나서 존재가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나는 정치적으로 완전 중립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중립을 지키는 자체가 이미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 것입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무관심하다든지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 둘 다 문제가 있습니다. 서로의 영역을 넘지 않으면서 국가는 교회를 보호해주고 교회는 국가의 정책을 가감 없이 비판해 주어야 합니다. 둘이 사이가 좋으면 다 좋을 것 같지만 둘 다 망하고 맙니다. 정부는 싫더라도 교회의 정당한 비판에 겸허이 귀기울이고, 교회는 정부의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바울이 국가 권력을 인정한데에는 배경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그 당시 열심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반항과 폭력을 최대의 가치로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달칼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매국노를 처단한다는 미명하에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무법자였습니다. 이런 실질적인 폭력의 악순환을 보아왔던 바울이기에 국가의 권력이 완전하지는 못하다고 할지라도 무정부 보다야 낫다는 현실론에서 나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무질서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혼돈(chaos)을 질서(cosmos)로 바꾸셨습니다. 그러기에 무질서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질서를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과 교회의 질서 또한 원한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바울이 깨달은 것은 국가를 통해 얻는 유익이 너무 많다는 현실 인식 때문입니다. 각자가 수도, 전기, 통신, 교통, 안전을 책임질 수가 있습니까 법은 약자를 보호합니다. 하루에도 살인의 충동을 수없이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성이나 도덕적 힘보다는 법 때문에 자제하게 됩니다. 구가의 힘이나 법은 결국 약자를 돕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국가에 대한 바울의 충고,
첫째-권위에 굴복하라.
그 이유는 권위의 출처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에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부당하게 보이는 제국의 권력자들을 사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파사, 헬라제국, 로마제국 등을 들어 사용했습니다. 일단은 국가 권력을 잡은 자들을 위해서 대안 없는 비판보다는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둘째-정직해야합니다.
정직과 진실보다 강한 것은 없습니다. 파출소 앞을 지날 때도, 검찰청에 들어가도, 교도소를 들어가도 잘못이 없으면 겁낼 것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신은 모두가 정직하지 못한데서 옵니다. 적당한 것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모두를 죽이는 것입니다. L. A폭동때 한국인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미국정부에서 세금낸대로 보상해 주었는데 실지로 한국민들은 많은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소득신고를 엉터리없이 줄여했기 때문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높은 산에 소풍을 갔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돌 하나씩을 주워 올라가라고 했더니 우직한 베드로는 큰 바위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갔으나 약은 가룟유다는 공기돌만한 돌을 주머니에 넣고 올라갔다고 합니다. 정상에 올라가서 점심때가 되었을 때 주어온 돌들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기도를 하셨는데 그것들이 모두 빵이 되었습니다. 가룟유다가 배를 곯았을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셋째-자리파악 바로 하라.
7절에 줄 것 주고, 두려워할 자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도는 이 땅위에 발을 딛고사는 대한민국 국민임과 동시에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이중시민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국가에 대한 바른 이해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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