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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국가관

본문

13장도 12장의 연속입니다. 도를 다 배웠으면 이제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합니다. 기독교는 도를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되 섞이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에 동화되지 아니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12장에서 쭉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삶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3장에서는 국가에 대한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13장부터는 여러분들이 잘못 생각할 수 있는 기독교의 원리 중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장 1절부터 7절까지의 가르침은 잘 기억해야 합니다. 나름대로 생각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많고 또 한편으로는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13장을 보면서 기독교가 이런 것도 가르치는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3장에서 가르치는 말씀은 그 당시의 상황, 기독교인들이 아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자칫 잘못하면 로마 정권에게 큰 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시대적 상황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우선 기독교인들이 죽지 않고 안전해야 합니다. 무조건 순교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순교할 때에 순교하고 터질 때 터지고 깨어질 때 깨어져야 하고 돈도 쓸 때 써야합니다. 함부로 죽고 난 뒤에 순교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13장의 이 말씀은 기독교의 일반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전체적인 주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는 너무 정권에 유착되어 갈 것도 아니지만 너무 반대해서도 안 됩니다. 꿋꿋하게 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그냥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 로마 정권이 어떻게 했는지 보면 로마 정권은 사도 바울을 억울하게 대하지 않고 상당히 공정하게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역사에 있어서 로마 정권이 기독교를 무조건적으로 어렵게 하거나 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네로 황제나 도미치안 황제와 같은 특별한 사람들이 기독교를 어렵게 했을 뿐 모든 로마 정권이 기독교를 어렵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상당히 많은 정권이 기독교에 대해서 정당하게 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콘스탄틴 대제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공인되고 난 뒤에는 바뀌었지만 그 전에는 로마가 그렇게 불공정하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요한계시록이나 베드로서에 나오는 로마는 한 시대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역사 밖 일반 세계 역사에서 많은 기독교의 위인들이 로마 정부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발언한 기록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원론적으로 무조건 적이고 무조건 아군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적이 어느 날 아군이 되고 아군이 적이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다 내 적일 수 없고 모두가 아군일 수 없습니다. 이는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만 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기본적으로 흐르는 사상은 마지막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아닙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로 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13장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여기에 뼈가 많습니다. 무조건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주라는 말씀입니다. 세금도 바치고 관세도 바치고 두려워하고 존경도 하라는 것입니다. 단, 줄 사람에게 주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줄 것을 주고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되 아무나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전체의 흐름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전체의 흐름, 국가에 대한 흐름은 어디에 있을까요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디도서 3장 1절에서는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라고 교인들을 가르치는 목사들에게 목회서신을 주었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과 순종을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3~15절에서도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는 로마 정권 하에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제 그 배경을 간단하게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난 후 마지막 결론을 내려야겠습니다.
하나, 이런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은 유대인들은 지독한 반골 기질이 있기 때문에 반대를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반골기질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하지만 너무 많으면 안 됩니다. 말마다 끝마다 토를 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사랑받지 못합니다. 이런 남자는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과 존경을 받지 못하고 아내들은 좋은 친구가 없고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유대의 열심당은 유대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왕을 허락하셨는데도 왕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조공을 받쳐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닙니다. 수동적인 반항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유대 열심당원이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폭력적인 행위가 있어야 여호와 하나님께서 활동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으로 싸워야지만 그때서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서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열심당원들은 칼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여러분, 칼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그냥 자기 자리에 서 있을 뿐 칼을 품고 있으면 안 됩니다. 자꾸 다른 사람을 찌르면 안 됩니다. 유대의 열심당원들은 살인과 암살을 직업적으로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정부도 용납하지 않았던 광신적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광신적인 사람이 마치 여호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당원들은 로마 정부에 폭력적으로 저항했고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집을 부수고 그 가족들을 죽이고 암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각이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 되어 버린 사실입니다. 그래서 로마 당국은 이것을 대단히 걱정했습니다. 특별히 갈릴리 지역은 늘 폭동이 일어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폭력들은 기독교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 하지 않습니다. 이런 폭력은 비기독교적인 것을 넘어서 반 기독교적입니다. 이런 폭력적인 모습은 기독교에서 어떻게 하든 제거되어져야 합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신자들을 선량한 시민으로 지도하는 종교입니다.
또 하나의 배경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사회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생각해 보면 세상 사람들과 똑 같습니다. 우리라고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여성주의자에 대해서 걱정스러운 것이 좀 있습니다. 그동안 눌려져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를 찾는 것은 좋습니다. 흑인들의 경우도 흑백의 발란스를 위해서 그동안 워낙 눌러져 있었기 때문에 백인과 똑같이 해서는 자기들의 권리를 찾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워낙 처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백인들보다 더 우위로 올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더 평등을 찾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간접적인 경험만을 통하고 흑인들에 대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제가 걱정스러운 것은 그렇기 때문에 흑인들의 정당한 권리 찾기가 오히려 더 늦추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게 되면 여성의 권리를 찾는 것을 더 저해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권리를 주장하려면 내 의무를 같이 해나가면서 해야 되는데 그동안 많이 당했으니까 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순환만 계속됩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들이란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사회는 권리만 누리고 의무를 거절하는 이기주의는 어떤 경우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회사의 신우회의 예를 들면 근무시간을 빼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좀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의무를 거절하고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사람을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이 사회에 존재하는 종교이며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이런 의무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하나 더 나가서 기독교인들은 이타주의를 지향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국가에 권리를 덜 주장하고 의무는 더 담당하는 종교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더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고용하면 한 푼이라도 월급을 더 주어야 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회사를 경영하게 되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국가를 보겠습니다. 국가는 어떤 단체입니까 어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 법을 준수해야 하고 우리는 법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강하고 힘 있는 사람들만의 세상이 될 것이므로 소위 정글의 법칙만 존재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든 모든 국가의 시민들은 국가로부터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국방을 지켜주고 악한 사람들로부터 보호받는 치안을 해주는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런 혜택을 다 받고 있습니다. 나라라는 큰 권력으로부터 이런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는 우리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입고 있는 옷은 다른 사람들이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도나 전기, 하수도나 재해방지 시설같은 것은 서로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서로서로 돕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국가입니다. 그런데 이 국가라는 구심점을 통해서 서로 돕고 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일에 가담하지 않으면 아무도 이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마을에서 마을회관에 단지를 갖다놓고는 모두 포도주를 한 사발씩 가져와서 잔치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포도주를 한 사발씩 가져와서 단지에 부었는데 마지막에 모두 모여서 퍼 마셔봤더니 완전한 맹물이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 하나쯤이야 괜찮겠지 하면서 맹물을 가져와서 완전한 맹물이 되었다고 하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는 국가라는 것이 존재하지 못하고 우리는 맹물만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더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 사발 가져오면 기독교인들은 두 사발 가져와야 합니다.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계는 항상 약육강식이 가득합니다. 뉴스에 의하면 미국과 일본이 완전한 군사동맹을 한다고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본 사람이 들으면 좀 섭섭하겠지만 독일보다 반성을 덜 하는 민족들이기 때문에 언젠가 악한 것이 살아날지 모릅니다.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덜 계시지 않습니까 증보기도하시는 분이 이것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전체적인 영적인 것을 봐야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선합니다. 그러나 사회악, 국가악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섭습니다. 언제 되살아날지 모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렇게 착합니다. 미안할 정도로 인사도 잘합니다. 그런데 언제 무슨 사회악으로 나올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평회를 누릴 수 있는가 작은 사회나 큰 사회나 모두 세계적인 평화를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아프리카에 에이즈를 팔아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빈곤을 팔아먹는 나라나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계에 전쟁을 팔아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무섭습니다. 계속해서 빈곤을 만들어 내고 계속해서 전쟁을 만들어 내고 계속해서 병을 만들어 냅니다.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이 정말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만들고 안정을 만드십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만드는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상당히 많은 경우 여호와 하나님께서 국가라는 도구를 쓰십니다. 한국이나 미국뿐만 아니라 로마라는 도구도 쓴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악한 일을 많이 하지만 선한 일도 많이 합니다. 이 도구로 쓰시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국가의 위정자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시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로마 시대에는 로마를, 그리고 네로나 도미치안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기독교가 로마 때문에 얼마나 번창해 나갔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의 도로가 기독교가 번창해 나가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주었습니까 참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국가가 하는 일을, 기독교 교회는 나라가 하는 이를 방해해서는 안 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국가관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국가에 대한 기독교의 복종과 순종, 그리고 국가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무조건적이거나 무비판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을 때, 신앙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봐야 합니다.
다시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무조건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빼앗아 가는 것은 못준다는 것입니다. 당하고만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이유가 있을 때는 두려워해야겠지만 이유없이 두려움을 줄 때에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의 마지막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하는데 아무나 존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황제라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가 존경받을만할 때 존경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라고 무조건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받을만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존경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해서 이것을 더 넓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어떤 지도자든 가치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의 가치, 장로는 장로의 가치, 권사나 안수집사가 나름대로의 가치를 만들어 갈 때에 우리는 존경받을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당사자로서 두려움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국가에 대해서 기독교인과 교회는 일반적인 것에 대해서는 협조를 하고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야 할 마땅할 이유가 있을 때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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